71. 챕터13. 도착하다 (2)
원래 역사에선, 세종 중기에 농사직설이 완성된다. 물론 태종대부터 계속 진행됐지.
기존의 농법은 중국에서 넘어온 게 많았는데, 한반도의 풍토, 주류작물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고려 때부터 꾸준히 보수가 이어져왔다.
여기에 전국 농사꾼의 경험을 지방관리들이 취합하고 엮어서 완성한 게 농사직설이다.
하지만 운석핵꿀밤으로 자주화가 일어나면서, 농사직설의 완성 또한 더욱 빨라졌다.
뭐랄까. “무조건 중국 게 최고다!”라는 인식에서 벗어나다보니, 보다 실험적인 시도를 마구하고, 은근히 후순위로 밀리던 고려, 조선의 농법에 더욱 관심을 가진 거지.
여기에 연오랑이 끼어들면서 더욱 빨라졌다.
배봉마을에선 아예 전국의 우수한 농사꾼을 직접 데려와, 서로 지식을 교류하면서 어설프지만 체계적인 농업연구를 시작했으니까.
인분을 이용한 시비법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했다.
원래 역사에서도 15세기초엔 우마의 배설물, 썩힌 초목을 이용한 시비법은 널리 퍼졌는데, 인분을 이용한 시비법은 아직 발달되지 않았다.
조선 중후기에 가서야 인분뇨人糞尿가 중심이 되어 발전하고, 그때가면 도성의 오물을 수거해 농부들에게 파는 똥장수가 등장한다.
연오랑은 몇 세기를 앞서서, 아예 체계적인 오물수거기업이자 비료기업. 일업마을을 만들어서 한성의 오물을 싹 쓸어왔지.
일이 이렇게 되면, 당연히 조정에서도 관심을 갖기 마련.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배봉마을은 “기다렸습니다. 어서 오시죠! 저희 성과를 한번 보시겠습니까?!”라면서, 신나게 맞이하는 게 아닌가.
이 인분법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이 시대에 인분은 말 그대로 끝도 없이 생산되는 쓰레기였다.
한성의 미관, 위생상태, 전염병, 악취를 일으키는 원인이었으니, 이걸 해결해 주는 건 조정입장에선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지.
또한 만들어진 인분거름이 기존 거름보다 효과가 더 좋은데, 이걸 무한으로 생산할 수 있다니?
농사직설을 연구하던 관리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자세하고 명확한 연구결과물을 보고선 눈이 뒤집혔지.
배봉마을 청년들이 “이게 바로 이용후생, 경세치용, 실사구시입니다!”라고 궁시렁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지만, 유의미한 결과물을 내놨는데 뭐라고 하겠냐.
조정에선 매일매일 관리를 파견해서 함께 연구 중이다.
“음... 이번 건 확실히 효과가 좋군?”
“아무래도 습도가 중요한 모양입니다.”
“음음...”
셋은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중얼거렸으나, 관리 한명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했다.
“만리 나리.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아닐세. 그냥 읽기가 불편해서...”
“불편하긴 무슨. 자네도 세로쓰기로 적은 표를 봐놓고, 아직도 그 소리인가?”
“끄응...”
최만리는 타박을 듣기 무섭게, 자기도 모르게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이 괴상한 배봉마을. 마을 청년들은 이곳을 연구소라 불렀는데, 특이한 이름만큼이나 특이한 게 무척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평범한 게 더 드물 지경이다.
최만리를 처음 기겁하게 만들었던 건, 이들이 쓰는 아라비아 숫자와 산술기호다.
생전 처음 보는 것들이지만, 이건 쓰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솔직히 편하잖아.
나아가 배봉마을의 숙소에서 기거하는 하급관리들도 알음알음 배워서, 어느덧 하급관리들 사이에선 아라비아 숫자가 유행 아닌 유행이 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기겁한 건, 이들이 세로쓰기가 아니라 가로쓰기를 한다는 점이다.
당장 한소리를 퍼부어대며 “이게 뭐하는 짓이냐!”라고 소리쳐봤지만...
연구소 청년들은 “뭐 어쩔 건데? 뭐가 문제야? 누가 이걸 조정에서 쓰라고 했어? 뒤진 중국놈들을 따라 해서 뭐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뜬금없이 두들겨 맞은 최만리는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근본성리학 유학ver4.0계열의 역린이자 약점이 바로 “뒤진 중국놈. 망한 명나라.”아닌가.
그걸 꼬집고 들어오면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나아가 이들은 새로운 표기 방법. 21세기의 그래프와 도식. 표를 이용해서 서류와 보고서를 작성해 보여주곤 했다.
딱 봐도 철저하게 과정과 결과. 그 자체만 보여주는 무미건조한 보고서 아닌가.
일반 유학자들이 보고 써왔던 문서. 고래의 비유와 경전의 은유가 가득한 문서하고는, 궤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예법이 있는데 이걸 왜 이렇게 썼냐?”라고 타박하니,
“아니. 비싼 종이도 아까운 판국에, 이것보다 더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적는 방법이 있어? 이게 무슨 왕에게 올리는 공식조서냐? 우리끼리 보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야?”라고 반문만 날아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표를 적을 때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가로쓰기. 좌횡서가 압도적으로 편했다.
세로로 표를 적으면 읽기가 불편하고, 한 장에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이 얼마 안됐으니까.
안 그래도 여기저기 빨빨거리며 돌아다녀야 하는데, 세로로 길쭉한 문서를 둘둘 말았다가, 그때그때 풀어서 적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이 둘은 농사집설 항목 중에서 시비법을 담당하고 있지 않나.
안 그래도 위에선 “빨리빨리 완성해라!”라고 독촉 중인데, 배봉마을에서 알아서 다 조사하고 실험해서 결과물만 떠먹여주고 있네?
이 판국에, 고작 가로쓰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땡깡을 부려?
다른 계열의 신료들에게 “꽉 막힌 중국 따라쟁이 놈들. 나랏일 안할 거면 관복 벗고 꺼져. 안 그래도 관직자리도 없는데, 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야?”라고 공격당할 게 뻔하다.
이러니 아무리 최만리가 조정관리라고 해도, 눈치를 볼 수밖에.
그의 속사정이 그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걸음을 옮겨 다음 창고로 향했다.
연오랑이 21세기 농축산중소기업의 후계자라지만, 천연비료에 대해서 완벽하게 아는 건 아니다.
비료를 잘 쓰는 방법은 알지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은 몰랐다.
비싼 천연비료를 누가 쓰나. 그냥 화학비료를 사다가 쓰고 말지. 그저 완성품이 어떤 상태인지 아는 정도에 그쳤다.
별 수 있나. 공돌이+자본+시간을 갈아 넣어야지.
한 곳엔 똥오줌에 보릿대와 재를 섞고, 다른 곳엔 짚을, 다른 곳엔 잡풀을, 다른 곳엔 갈대나 나무껍질 등등.
하루, 삼일, 일주일, 10일. 시간차를 두고 뒤집고, 재료의 투입양을 달리하며 무한반복.
수십개의 비교대조군을 왕창 만든 후에, 하나하나 전부 확인하는 노가다 반복 작업을 진행한 거다.
그 결과. 배봉연구소는 벌써 인근 마을에서 쓰는 인분거름을 완성했지만, 더욱 간단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계속 개량 중이다.
이 과정에서, 연오랑의 숨겨진 꼼수가 먹혀들어갔다.
그가 과학자나 화학자도 아닌데, 뭐 얼마나 획기적인 이론,방법을 고안했겠는가. 이 시대의 기술개발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 다 멘땅에 헤딩하듯, 노가다 무한 반복 작업이지.
다만 이것도 “잘” 해야 한다. 한번 박을 걸, 두번 세번 엉뚱한 곳에 박아서는 효과가 없다.
특히나 조정 입장에선 "왜 이렇게 결과가 안 나와? 니들 잘못하는 거 아냐?"이러면서, 재촉만 하다가 날려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실험범위를 확장시켜, 유학적 논리와 관계없는 실증과학적인 방법론을 내세웠다.
파견된 관리는 그간 없었던 실험방법을 축적해서 조정에 알린 건 당연한 수순.
조정에선 “분명히 효과가 있긴 있는데, 이거 이렇게 막 해도 되는 건가? 여기에 써먹어도 되는 거야?”라며 고민을 하면서도, 또 은근슬쩍 써 먹었다.
“이 방법을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하고서, 이것저것 건들며 간을 보고 있는 거지.
은근슬쩍, 자신들도 모르게 유학의 범주를 슬쩍 넘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참동안 거름산을 돌아다니면서, 보고자료를 취합하는 일을 끝마치자.
연구소 청년이 둥그런 단환을 몇 개 건넸다.
“이건 나중에 드시죠. 이번에 새로 만들었습니다.”
“오...! 또 만들었나?”
“예. 이번 건 빈랑檳榔을 첨가해서 효과가 더 좋을 겁니다. 대신 하루에 한 알. 최소한 보름 후에 다시 섭취해야 합니다. 독한 거라서 많이 먹었다간, 오히려 탈이 날 겁니다.”
“그럼. 그럼.”
청년 관리는 소매가 좁은 청년이 건넨 작은 단환을 냉큼 받아 챘다.
이미 일전에도 한번 먹어보고 효과를 본 구충제 아닌가.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했는데... 똥에서 지렁이마냥 회충이 나왔을 때, 엉덩이에 똥을 잔뜩 묻히며 기겁하고 말았다.
그 후로는 꼬박꼬박 챙겨 먹는 중이지.
“나도...”
불퉁한 표정을 짓던 최만리도, 은근슬쩍 손을 내밀었다.
“크큭. 자네도 뱃속에서 지렁이가 나왔나 보지?”
“크흠.”
최만리는 생전 처음 보는 약재를 믿지 못해서, 한동안 안 먹다가 한번 먹어보고 나서야 똑같이 기겁하고 말았다.
염치 불구하고 챙길 수 있을 때 챙겨야지.
연구소 청년이 이걸 줄 때마다, “잡학근본입니다. 잡학근본!”이러면서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꼽긴 하지만... 어쩌겠나.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 하는 법이다.
인분거름은 다 좋은데, 역시 기생충이 문제였다.
정말 제대로 발효시켜야 고온이 발생하고, 그래야 미생물과 충란이 제거된다. 하지만 이게 쉽지가 않다.
이건 당장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고, 연오랑은 약초꾼, 의원, 수의 등을 굴려서 구충제를 만들었다.
21세기의 구충제와 딱 들어맞는 물건은 없었지만, 이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개념과 약재는 있었으니까.
이 또한 노가다 무한반복 작업을 통해서, 보다 효과적인 조합법을 찾아낸 거지.
이게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게, 약제사나 의원도 자기만의 비기, 비방이 있지 않나.
자존심을 굽히고, 자기 기술을 막 풀고, 서로 다른 개념과 방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
물론 연오랑은 칼과 돈을 휘두르며 닥치고 시켰다.
오히려 연오랑과 연구소 청년들이, 의학에 무지해서 더 나은 부분도 있었다.
전문가라면 절대 조합하지 않을 재료와 과정조차, 실험과 시험을 명목으로 마구 섞으면서 이것저것 만들었던 것.
물론 대부분 실패했지만, 몇몇은 기존에 없던 배합법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 구충제고, 이렇게 먹기 쉬운 한알로 된 환을 완성했다.
인분거름이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이 구충제도 함께 팔아재낄 생각이지.
당연한 말이지만, 제생원 소속 관리들 또한 배봉의학연구소에 달라붙었다.
안 그래도 “향약집성방”을 완성시키기 위해 구르고 있지 않나.
이곳엔 조선팔도에서 긁어모은 의학서가 가득하다.
고려나, 조선조정에서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민간의서나, 사찰에 박혀 있던 고의서古醫書. 고구려,백제,신라 시절 의서의 필사본까지 있다.
추가로 실력 좋은 의원과 약제사들이 가득하니,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
일을 끝마친 최만리와 청년 관리는 다시 걸음을 옮겨 마을로 돌아왔다.
“어디가나. 안 그래도 오늘 할당량이 한 가득인데.”
“끄응...”
청년 관리는 숙소 공사판에 자기도 모르게 발길이 이끌렸지만, 최만리는 청년의 뒷덜미를 잡고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흐흐...”
“크흠.”
둘은 마을 정중앙에 위치한 큼지막한 석재건물을 앞에서, 잠시 감상의 시간을 가졌다.
매일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
흡사 성벽마냥 견고하고 매끈하게 만들어진 이 석재건물은 조선팔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도 웅장한 건물이니까.
비록 2층밖에 되지 않지만, 너비는 궁궐의 전각만큼이나 거대하다.
또 이렇게 벽면 전체가 석재로 마감된 건물이 어디겠는가. 왕궁에도 이런 건물은 없다.
작은 성채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지.
이 건물. 도서관을 지을 때도 조정에서 말이 많았다.
허나 이 특이한 놈들은 기존에 없던 온갖 건설기구를 총동원해서, 석재건물을 올리는 게 아닌가?
“석재건물? 성벽 아냐? 저 자식들은 왜 맨땅에 성벽을 쌓는 거지?”라고 의심했던 조정관리들.
그들은 공사가 진행되자 의심의 눈초리를 풀고, 당장 달라붙어 이것저것 기술을 배워갔다.
뭐가 어찌됐건, 시대를 뛰어넘는 거중기와 녹로, 생경한 건축기술. 이건 전부 성곽을 축조할 때 도움이 되는 기술 아닌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을 신기술을 알아서 시험해주니, 조정관리들은 그냥 지켜보면서 진행과정만 뽑아내면 이득인 거지.
이놈들이 다시금 “실사구시, 개화자강, 잡학근본!”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