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챕터13. 도착하다 (3)
“캬... 볼 때마다 멋지단 말이지.”
“이게 뭐라고.”
“흥. 중국에는 벽돌건물이 많다지만, 그래도 산이 많은 조선은 자고로 석재건물 최고 아니겠나? 보게. 얼마나 멋진가.”
“조선에 통짜로 된 석재건물이 이거 하나밖에 없는 걸 모르나?”
“흐흐. 자네도 멋지다는 걸 인정하는 군?”
청년 관리는 “걸렸군?”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최만리는 괜히 또 한방 맞은 것 같아 눈을 흘겼다.
하여간 잠시라도 장난을 치지 않으면 입안에 혓바늘이 돋는 모양이다.
배봉연구소는 송계천 너머, 용마산 위쪽 한적한 곳에 실험목장과 작은 가축농장을 몇 개 만들었다.
용마산, 아차산 일대. 21세기로 치면 면목동, 장한평 지역은 이 시대에 목장과 전마훈련장으로 쓰고 있었다.
배봉목장은 은근슬쩍 그 틈에 끼어 묻어간 거지.
조정이나 이곳을 관리하는 이들은 “저 자식들은 뭔데, 감히 여길 와?”라고 눈치를 줬지만.
배봉연구소에서 일하는 수의와 목자들이 달라붙기 시작하자 눈길이 바뀌었다.
말을 관리하던 사복시에선 “뭐야. 재들 실력이 좋잖아?”라고 인정하고 교류했고.
전마훈련장에서 훈련하던 무관들 또한 “음. 쟤들이 공짜로 관리해주니까 은근히 편한데?”라는 분위기로 바뀌게 된 것.
배봉목장의 연구원들이 마냥 손해 본 건 아니다.
이들은 돈 주고도 하기 힘든 실전경험과 실험을, 오히려 생색내면서 할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이렇게 은근슬쩍 인정받고 용마산 인근을 파고들어 목장을 만들었는데...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유역을 놓고 싸워댈 때 만든 성곽이 우르르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물론 관리 따위는 전혀 하지 않은, 땅에 반쯤 파묻힌 상태였지만, 어찌됐건 반듯하게 잘 마감된 돌이란 말이지.
해서 성벽재료로 쓰였던 석재를 가져와서, 이렇게 멋들어진 도서관을 완성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일부 석재는 수차를 만들 때. 지반을 다지는 데 사용했고.
둘은 또 다시 티격태격 거리면서, 옆에 나 있는 쪽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벽처럼 보이는 벽면의 윗부분에는 나무창문이 빼곡하게 달려 있었는데, 전부 열어놔서 빛줄기가 사방에서 쏟아졌다.
특이한 구조인 만큼, 건물 안에 들어와 있는데도 밖에 있는 것처럼 밝고 환했다.
그 빛줄기가 쏟아지는 곳마다 탁자와 의자가 줄줄이 놓여 있었는데, 그 자리마다 사람들이 앉아서 열심히 붓을 놀리고 있었다.
이 거대한 건물의 정중앙에는 책장이 빼곡하게 서있었고, 책장에는 조정에서도 보기 힘든 온갖 서적이 가득했다.
유학경전 뿐만 아니라, 시문, 잡설, 어학서, 의학서, 병법서, 농법서, 등등.
오히려 유학서적보다 잡학서적이 몇 배는 많았고, 특히나 조정의 관심이 덜한 고려와 삼한시대의 역사서까지 있었다.
이들이 알까 모르겠다만, 이중 태반이 몰락해서 보관능력을 상실한 전국의 사찰에서 뜯어온 것들이다.
비공인 사찰 승려들은 씹어 먹지도 못할 고서들을, 면포나 쌀로 바꾸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이러니 몇몇 부분에 있어서는 집현전의 장서각藏書閣보다 낫지.
운석핵꿀밤 이후. 중국이 개판이 되면서, 이전과 달리 서적을 구하는 게 오히려 더 쉬워졌다.
원래라면, 명이든 조선이든 관의 핑계와 관리를 받으면서, “이건 유통이 금지된 서적인데?” “이건 외국에 나가면 안 돼.” “이거 뭐에 쓰려고 사는 거냐?”이러면서 꼼꼼하게 따졌을 거다.
또한 중국이 혼란스럽지 않았으면, 서적이 싼값에 마구 풀일 일도 없었을 거고.
허나 지금은 의주에 드나드는 중국, 요동 상인에게 돈만 주면, 언제든 어떻게든 구해서 가져다 줬다.
중국은 중앙조정이랄 게 없으니 상인들 마음대로였고, 조선조정은 암묵적으로 민간거래를 봐주는 상황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조선 유학자가 서적을 수입하는 걸 금지하겠는가. 오히려 장려해도 부족하지.
서적성애자인 세종이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사정이 이러하니... 연오랑만 이러는 게 아니라 조정에서도 직접 나섰고, 일반 양반 사대부나 지방호족 중에서도 중국서적을 구입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지금의 태종과 세종은 원래 역사에서보다 더욱 크고 빠르게 집현전을 강화했고, 계속 강화하고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 원래 역사에선 세종10년에 만들어질 장서각이 이미 만들어졌지 않나.
조정대신들이 “아무리 학문연구기관이라지만, 너무 커지는 거 아냐?”라고 우려할 정도였다.
원래 역사에선, 최대 인원이 고작 32명 정도밖에 안됐지만, 세종1년차인 지금. 벌써 백여명에 가까웠으니까.
이들 대부분이 저작著作, 정자正字. 정8,9품이라서 참고 넘어간 거지, 품계마저 높았으면 난리가 났을 거다.
물론 태종과 세종은 “그럼 니들이 일을 잘하든가! 지금 상황이 엉망인데, 니들 이거 다 감당할 수 있어?”라고 밀어붙였지.
사상계의 분열로 조정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는데, 할 일은 많아도 너무 많다.
이따금씩 “명나라가 있던 시절이 더 나을지도?”라는 헛소리가 나올 정도다.
뭐 하나 할 때마다 지지부진한 조정은, 이 거센 흐름을 따라잡고 선도하기가 힘들었다.
육조에서 제대로 하려면, 관리들을 엄청 늘려야 하는데... 그건 현실적으로 힘들잖아.
태종과 세종은 “야. 그냥 집현전 통해서 사전정리작업을 해서 보내 줄 테니까, 니들은 결정하고 시행만 해.”라고 방향을 튼 것이다.
원래 역사에서, 집현전은 유학적 의례·제도·문화의 정리 사업이라 할 수 있는 고제연구古制硏究와 편찬 사업에 집중했다.
세종후기에 이르면 언관화言官化되었고, 국가 시책의 논의에 참여하는 등. 정치 활동도 활발해져서 정치기관화 되었지.
허나 지금은 오히려 정반대로, 철저하게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한 싱크탱크로서 역할만 하기에도 벅찼다.
원래 역사에서, 세종이 바랐던 유학적 정리 사업은 꿈도 못 꾼다.
갈기갈기 찢어진 사상계를 어떻게든 봉합해서, 어설픈 기준이라도 세워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불길에 기름을 끼얹듯, 배봉연구소라는 “민간연구소”의 등장에, 집현전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다.
연오랑은 다시금 꼼수가 먹혀든 걸 보며, 남몰래 음흉한 미소를 지었고.
이렇게 덩치가 커져버리면, 집현전의 정치세력화는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왕권이 너무나도 강력해질 테니, 조정대신들이 일치단결하여 죽기살기로 반대할 거니까.
그런데 “관영연구소” 비슷하게 변해버린 집현전이, “민간연구소”에게 밀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얘들은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배봉마을을 점점 닮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자본유학을 흡수하게 될 것이고.
둘이 도서관으로 들어오자. 뻐근한 목을 비틀고, 얼얼한 손을 주무르고 있던 다른 청년 관리들이 눈인사를 건넸다.
‘니들도 고생하러 왔구나?’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배봉마을에 집현전 장서각에도 없는 서적이 있다고? 니들 뭐하는 거냐! 당장 가져와!”라는 태종과 세종의 명이 떨어졌기 때문.
별 수 있나. 하급 관리들은 인간복사기가 되어 열심히 손을 놀리는 중이다.
대마도 정벌 후폭풍이 조정을 흔들고 있지 않나.
조정은 어사 김숙자 때처럼. 그간 손가락만 빨고 있던 예비관리, 성균관학유들을 임시직으로 대거 임용한 상태다.
세종은 그들 중 일부를 빼서 이곳으로 배속시킨 것.
해서 이곳 도서관엔 관복을 입은 이들이 꽤 많았지만, 둘이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에휴.”
“끄응.”
둘은 앓는 소리를 가볍게 내뱉고선, 항상 앉던 자리에 앉아 필사 준비를 시작했다.
말단 관리가 무슨 힘이 있겠냐.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후...’
청년 관리는 힘없이 먹을 쥔 손을 놀리기 시작했고, 최만리는 책을 펼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망할 놈의 배봉마을 청년들은, 원본 복사품인 필사본마저 가로쓰기로 적어놨기 때문.
처음에는 최만리뿐만 아니라 모든 관리가 기겁해서 한소리씩 했다.
하지만. “보기 싫으면 보지 말든가. 우리가 가로로 쓰든 세로로 쓰든 무슨 상관인데? 일단 한번 써봐. 그럼 편할걸?”이라는 반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두고 보자.”라며 씩씩거리면서 실제로 써보니... 이들의 말이 맞았다.
기존 글자에 먹물이 튈 일도 없고, 소매 자락에 쓸려 글자가 번질 일도 없고, 손 아프게 소매 자락을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다.
공식조서를 쓸 때라면 모를까. 빠르고 많이 적어야할 필사작업에 있어서는 가로쓰기가 훨씬 편했던 것.
하지만 최만리는 자기도 모르게 위화감, 위기감이 느껴졌다.
자본유학이 말하는 개화자강, 조선유학. 그리고 자주화.
이 모든 게, 알게 모르게 밑에서부터 잠식해 들어오는 걸 느낀 것이다.
이들은 우종서(세로쓰기)는 중국의 법이고, 좌횡서(가로쓰기)는 조선의 법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 양자택일 무논리에, 어느 누가 총대를 메고 “이건 옳지 않소! 고래부터 내려오는 예법을 무시하는 것이오!”라고 외칠 수 있을까.
“닥쳐! 옛날에는 죽간에다가 글씨를 썼으니까 우종서를 할 수밖에 없었잖아! 이젠 더 나은 방법이 있는데, 왜 망한 명나라 방식을 따라야 되는 거냐?”라고 말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그리고 최만리의 예상이 정답이다.
연오랑은 그걸 노리고서 가로쓰기를 밀어붙이고 있으니까.
이렇게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중국의 색채를 지우다보면, 조선의 정체성과 자주성이 완성되지 않겠나.
더군다나 한글을 생각하면, 당연히 가로쓰기에 익숙해져야지.
물론 하루아침에 조정의 공식문서가 가로쓰기로 바뀔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한다.
다만 민간에서 가로쓰기가 보편화되면, 언제가 됐든 분명 조정에서도 바뀌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오늘도. 토목건축성애자 정분과 혼란에 빠진 최만리의 평범한 하루는 저물어갔다.
하지만 배봉마을 청년들에게는 평범한 하루가 아니었다.
단기간에 엄청난 명성을 쌓아올린 연오랑이 왔고, 그와 함께 신입들이 왕창 몰려왔으니까.
해가 어스름하게 반쯤 얼굴만 내밀고, 뺨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때.
저 멀리. 사람 떼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뭔 일 있나? 왜 저렇게 다 나와 있어?”
한 관리가 마을 어귀에 죄다 몰려있는 청년들을 가리키자.
“누가 온다더군?”
옷을 털던, 다른 관리가 말을 받았다.
“누구?”
“연오랑이라던가? 그 대마도에서 살풀이를 한 소년장수 말일세.”
최만리와 정분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박혀 있다가 퇴근하던 신입관리들.
한성조정에서 퇴청했지만, 아직 관복을 입고 있는 관리들.
이곳 배봉마을의 숙소에서 기거하는 하급관리들은 서로 아는 체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정분과 최만리는 “지나갑시다.”라고 중얼거리면서, 관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앞자리에 섰다.
헌데 파고들어 옆을 살피니, 아는 인물들이 있는 게 아닌가.
“자네들. 아직도 집에 안 갔나?”
“자네들은?”
정분과 최만리를 보며, 청년 관리들 모두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하급관리 신세가 똑같지 뭐. 다 같이 구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땅 파는 건 잘 되어가고 있나?”
“그냥저냥...”
“흐흐.” “흐음.”
정분과 최만리는 ‘너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안다.’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변효문, 변효경 형제도 농사직설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경지耕地법을 다뤘다.
경작지를 갈아 일구는 방법인데...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게 만만치가 않다.
배봉마을에선 최적의 이랑, 고랑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똑같이 생긴 이랑, 고랑을 손톱만큼의 차이를 두고서 수십개를 파댔는데, 함께 하는 두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독하고 정교했다.
거기에 토질과 기후도 생각해야 된다고 하면서, 한성부 주변의 외진 곳을 돌며 논밭을 만들었고, 나아가 배봉산 꼭대기에 밭까지 만들었다.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해야 되나?’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배봉마을 청년들은 “실사구시. 잡학근본!”이라고 씨불여대는 게 아닌가.
더불어 “아니. 니들은 관리면서, 우리보다 못하면 되냐?”라는 은근히 도발적인 눈빛을 뿌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