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챕터13. 도착하다 (4)
이에 질수 있나. 관리인 걸 떠나서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인 만큼, 눈에 불을 켜고 손을 놀려댔지.
“자네들도? 땅은 잘 팠나?”
정분은 변씨 형제를 침몰시킨 후에, 옆에 있던 다른 관리를 건드렸다.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아직도 손이 벌벌 떨리네.”
“나도 마찬가지일세.”
질문을 받은 두 관리는 발끈하긴 커녕,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손에 흙이 잔뜩 묻어 있는 게 아닌가.
이계주와 박중림. 두 사람은 이앙법을 담당했는데, 지금은 수로 파는 방법과 수로를 잇는 방법을 연구 중이었다.
하루 종일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과 싸워댔으니, 지칠 수밖에.
처음에는 뒤에서 구경만하고 붓만 놀려댔는데...
상관들에게 “니들 지금 장난 하냐? 완성하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대로야?”라고 혼이 나고서야,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몸을 쓰고 있는 중이다.
“그나저나 듣다보니 연오랑? 그 자가 온다던데... 맞나?”
“그렇다던데?”
“그 자가 여길 왜 오나?”
“난들 아나?”
“여긴 신기한 게 많잖나? 구경하러 오는 거 아니겠는가?”
“말이 되나. 이 사람아.”
관리들은 서로 농담 따먹기를 하며, 저기 먼지구름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등장.
새하얀 호피를 장포처럼 감싸고 있는 거한과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 쓴 거한들이 앞장서서 오는 게 아닌가.
누가 봐도. “와. 저놈들 한가닥 하겠구나.”하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니, 다들 저 인간이 소문만 무성한 연오랑이라고 확신했다.
“설마...?”
“왜 그런가?”
“뒤집어 쓴 저 백호피 말일세. 저거 경상도의 그 식인 백호 아닌가?”
“아...!?”
“맞네. 저렇게 큰 백호피가 또 어디 있겠나!”
다들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연오랑이야 연조운 때문에 잡았지만, 백호사건은 생각보다 여파가 컸다.
까닭인 즉. 연오랑이 백호를 잡기 전부터, 가야산 인근 현에서 “호환 때문에 못 살겠습니다!”라고 일제히 보고가 올라왔기 때문.
조정에선 당장 두둑한 포상금을 내걸고, 중앙군을 파견하네 마네 할 정도로 심각했었다.
백호가 일으킨 패악질은, 그간 조선이 당해보지 못한 엄청난 호환이니까.
그 후. 합천에서 백호를 잡았다는 보고와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자, 이번엔 그간 백호가 이동한 경로에 껴있던 현들에서 보고가 올라왔다.
“저희 현에도 호환이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그거 백호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라고, 그간 미제사건이었던 호환사건을 끄집어냈던 것.
조정에선 “또 연오랑이야? 이 자식은 왜 가는 곳마다 시끄럽게 만드는 거야? 잠깐. 그럼 포상은 어쩌지?”라며, 칭찬과 욕을 함께 해댔던 거지.
“이야... 정말 크긴 크군?”
“그러게 말일세.”
호피 한 장으로 몸을 다 가릴 장포를 만들었다니... 원래는 얼마나 컸을까?
저렇게 큰 백호를 뭔 수로 잡았는지 모르겠다.
원래 역사에서 한 획을 그었던 인물들이, 자신을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오랑은 무두질이 덜 된 백호피를 주물러댔다. 항상 달고 다니던 장도가 없어서 왠지 허전했기 때문.
한성 인근에 왔는데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닐 수야 있나.
당연한 말이지만, 오는 길에도 필요할 때가 아니면 꼭꼭 숨겨 놨다.
아무튼. 쇼와 이미지 메이킹을 좋아하는 연오랑 아니냐.
아직 완성도 안 된 백호피를 걸치곤, “봐라. 형이 이런 사람이다. 어때?”라고 하급관리들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먹여주는 거지.
연오랑은 선거 위세를 하듯 손을 번쩍 들어올려 흔들었고, 그걸 보던 하급관리들은 “저건 뭐하는 짓이야?”하고 어리둥절했다.
그런 연오랑을 향해, 관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관리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헌데 잘 뛰어오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가 싶더니, 빙글. 앞텀블링을 하고서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닌가.
‘쟤는 볼 때마다 매치가 안 되네...’
연오랑은 베시시 웃는 청년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꼭...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마냥, 덤벙거리는 천재 속성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인물.
바로 정인지다.
연오랑은 역사 속 위인을 억지로 끌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세종이 정확히 뭘 어떻게 얼마나 했는지도 모르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세웠는지도 모른다. 당연히 세종을 대체할 수 없지.
그가 아는 유명인사는 게임 미디블워에 등장한 “장수, 내정캐릭터.”뿐이잖아?
그 위인들이 세종과 함께 황금기를 이끌어 갈 텐데... 괜히 조정에 있어야 할 인물을 빼왔다가, 세종의 업적 중에서 뭔가가 구멍 나면 곤란하지.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굳이 그럴 필요도 못 느꼈다. 대체불가능한 전설장수 애들만 챙기면 됐지. 뭐.
헌데 정인지의 경우에는 우연이 겹쳤다.
운석핵꿀밤의 여파인지 모르겠다만... 대체 얘가 왜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함께 하동에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가 여섯,일곱살쯤 됐을 때였나? 이미 그때도 연오랑의 비범함은 날리고 있었지.
그런데 자기 말고 천재, 신동이 따로 있다고 하네? 누군가 싶어서 향교로 불러서 봤더니, 그게 정인지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못 알아 봤다.
그가 아는 건 “게임캐릭터 정인지. 중년 정인지”였지, 이런 꼬마가 아니었으니까.
그 후로는 뭐... 정인지는 기업가 청년들처럼 연오랑의 마수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별거 없던 녀석의 집안을 화끈하게 지원해주고, 똑똑한 녀석에게 자본유학을 쑤셔 넣었다.
자본유학의 뼈대와 틀을 연오랑이 만들었다면, 정인지가 거의 대부분의 살을 붙여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 인해, 녀석의 인생은 원래 역사와 완전히 달라졌다.
스승으로 권우를 만나지도 못했고, 정몽주의 학통을 이어받은 성리학자가 되지도 못했다.
일찍이 천재성을 드러내,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 입학할 일도 없었다.
그 시절. 녀석은 연오랑에게 두들겨 맞으며, 칼질을 익히고 자본유학을 만들었으니까.
훨씬 이른 시기에 관리가 됐어야 하지만, 자본유학, 기업내규, 배봉마을을 만드는 일을 맡으면서 뒤늦게야 과거에 합격했다.
해서 원래라면 이미 관직을 두루 거쳤어야 했는데, 지금은 이제 고작 2년차 신입관리였다.
허나 중요한 건. 연오랑이 조정에 박아놓은 끄나풀 역할을 제대로 하면서, 온갖 소식을 전해줬다는 것.
성산부원군. 이직에 대해서 알았던 것도, 정인지가 알려줬던 거지.
“오셨습니까!? 와. 이게 그 식인 백호군요?”
“오냐.”
정인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버티지 못하고, 연오랑은 백호피를 벗어서 건네줬다.
녀석은 백호피를 뒤집어쓰고 이리저리 몸을 흔들더니, 자기처럼 눈을 반짝이고 있는 꼬마를 냉큼 데려왔다.
“전에 말했던 아이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순지라 합니다.”
“오냐.”
이순지는 다가와 연오랑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인사했다.
꼬마 입장에선 놀랍겠지. 소문으로만 듣던 그 유명한 연오랑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까.
이순지의 눈동자에 호기심이 가득한 걸 보며, 연오랑은 피식 웃어줬다.
‘얘도 매치가 안 되네.’
이 녀석이 대체 왜 여기 있는지... 웃기긴 하다만, 어찌됐건 이순지 또한 인간계산기라는 별명과 함께 “게임캐릭터”로 나올 만큼 유명한 인물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다만 마찬가지로 “게임캐릭터, 중년 이순지.”가 강렬한 탓에, 이 꼬마가 이순지라는 게 영... 어울리지가 않는다.
이순지가 배봉마을에 온 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배봉마을은 하급관리들이 사는 숙소를 여럿 지었고, 당연히 이곳 연구소청년들과 교류하며 이것저것 익혔다.
그러는 와중에 아라비아 숫자와 산술기호가 은근슬쩍 퍼져나가기 시작.
그 소문을 용케 들었는지 이순지와 형제들이 찾아왔다.
녀석의 아버지도 관리였으니까, 하급관리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을 들었던 거지.
꼬마 이순지가 수에 밝고 영특하다는 건, 부모인 그가 더 잘 알았고.
연오랑은 정인지의 보고를 받고서 “이놈들이 단체로 뭘 잘못 먹었나? 멀쩡한 현직관리가 왜 자본유학에 빠졌어?”라고 잔뜩 의심했지만... 별거 없었다.
자본유학이 목적이 아니라, 배봉마을에 하급관리가 왕창 살고 있어서였다.
그냥 거기서 눈도장도 좀 찍고, 조금이라도 뭘 배우라고 보냈던 거다.
녀석들 말고도, 이런 이유로 이곳을 들락거리는 양반집안 자제들이 몇 있었으니까.
다만 이순지는 더욱더 숫자에 흠뻑 빠져서는, 연구소 청년들과 이것저것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건설연구소의 일원이 됐다.
자기가 좋아하는 숫자를 열심히 놀려서, 온갖 신식건물을 설계하면서 말이다.
원래 역사에선 이 녀석이 천문과 역법의 전문가가 된다고 했는데, 앞으로도 그렇게 될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끝으로 흡사 신병마냥 각을 바짝 세운, 풍채 좋은 청년이 연오랑에게 꾸벅 인사했다.
“대공을 세운 걸 축하드립니다. 그간 여로는 무탈하셨습니까. 어르신.”
“오냐.”
연오랑은 드디어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인사를 받았다.
이 덩치 큰 녀석은 전임 하동현감의 아들인 성강이다.
전임현감은 아무리 봐도, 자기 자식이 과거에 합격할 머리가 아닌 걸 인정했다.
해서 무과라도 합격하라고 연오랑 밑에 붙여놨더니, 칼질은 끝내주게 익혀놓고서 무과에는 별 관심을 안 보였다.
오히려 돈놀이에만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어쩌겠나. 전임현감은 연오랑이 하는 짓을 보면서 깨달은 게 있는 터라, 그냥 자식이 하고 싶은 일 하라고 내버려뒀다.
그리하여 녀석은 이곳 배봉마을의 촌장이자 연구소장이 되어, 전체적인 관리를 맡고 있었다.
신입 서얼들은 어리둥절한, 하지만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다른 연구소 청년들에 이끌려 해산했고, 구경나왔던 하급관리들 또한 해산했다.
연오랑과 일행들 모두 깨끗하게 씻고, 저녁밥도 푸짐하게 먹고서야 배봉마을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일찍 잠에 들고, 누군가는 수다를 떨고, 누군가는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안부와 소개를 나눌 때.
연오랑은 정인지와 성강을 앞에 두고,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히 풀어댔다.
녀석들도 기업이 어떻게 퍼지고 있는지 알아야 했고, 연오랑 또한 조정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신 숙소를 짓는 일에, 이번엔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는 거지?”
“예. 분위기는 나쁘지 않더군요. 하급관리들은 내심 좋아하는 눈치였구요.”
“좋군.”
연오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봉마을은 연오랑의 대계가 담긴, 조정을 밑에서부터 자본유학으로 물들이기 위해 만든 전초기지 아니냐.
괜히 이 먼 곳에, 하급관리들이 머무는 숙소를 만든 게 아니지.
조정관리들은 전국에서 올라왔고, 돈이 있는 이들은 한성에 집을 구해 살았다.
돈이 없는 이들은 민가에 월세 비슷한 걸 내고 살거나, 아니면 친척집, 양반집에 얹혀살았다.
전부 문제가 있지.
민가는 너무 허술하고 지저분하다. 체면도 조금 상하고.
친척집에서 살아도 양심껏 녹봉의 일부는 생활비 명목으로 줘야했고, 나중에 갚아야할 마음 빚이 차곡차곡 쌓인다.
양반집에 얹혀사는 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이 불편하다.
이 또한 언젠가 갚아야할 빚 아닌가. 은근한 청탁이라도 들어오면 골치 아파지지.
연오랑은 이들을 위해, 싼값에 빌릴 수 있는 조선판 원룸을 만들었다.
이순지가 설계하고 감독하던 괴상한 건물이 바로 이거다.
건물 바닥 전체를 도는 큰 아궁이는 물론이고, 작은 아궁이도 각 방마다 설치했다. 무려 개별난방까지 할 수 있지.
생경하지만 어지간한 양반집보다 낫고, 따지고 보면 성균관 기숙사인 동재, 서재와 크게 다를 것도 없다.
거기에 추가금을 내면, 밥도 잘 나오고, 빨래도 해준다.
눈치 볼 사람도 없고, 다 같은 처지의 하급관리들만 가득해서 수다 떨기도 좋고, 놀기도 좋다.
한성과 조금 먼 것만 빼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