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74화 (74/538)

74. 챕터13. 도착하다 (5)

어쩌면 자갈도로를 까는 일에, 이 녀석들이 밑작업을 했을지도 모른다.

녀석들도 출퇴근 할 때마다, 똥길을 지나 다니면서 고생했으니까.

하여 연오랑은 보다 많은 하급관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신문물을 선사했다.

조선에선 보기 힘든 수송마차다. 양옆에 좌석을 만들고 지붕에 차양을 두른 특이한 형상.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유행했던 역마차 비슷한 형태다.

이 수송마차를 여러대 만들어서, 출퇴근 때마다 녀석들을 동대문까지 태워준 거지.

처음에는 다들 “이게 뭔가?” 싶었는데, 자갈도로가 깔리고 나자 솔직히 편했다.

눈치가 조금 보이지만 어떠냐.

매일 같이 과로에 치여 죽겠는데, 이렇게 졸면서 집에 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 아니겠나.

조정에선 또 “저거 저래도 되나?”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다행이 넘어갔다.

특이한 마차는 맞지만 마차가 문제될 건 아니다.

사치스럽기는커녕, “그래도 관리가 타는 물건인데, 저렇게 허름해서 되나?”하는 의견이 나올 정도다.

또한 대신들이 하급관리 시절의 고충을 모르는 것도 아니지. 지금은 임시직까지 끌어올 정도로 정신없이 바쁘고.

더욱이! 왕과 조정대신들은, 하급관리들이 괜히 양반집에 머물면서 인맥과 혼맥으로 엮이는 게 더 싫었다.

이렇게 조정이 호의적인, 적어도 무시하는 수준의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자. 일반 백성들의 눈길도 조금씩 바뀌었다.

처음에는 “저게 뭐시여? 나랏님들이 죄를 졌나? 어디 팔려가나?”하고 보던 이들도.

“음... 저거 타고가면 동대문에서 송계천까지 바로 갈 수 있다던데?” “신기하구만. 우린 못 타보나?”라는 긍정적인 반응이 나오게 된 것.

극강의 슬로우 라이프를 추구하는 조선에서, 이런 신기한 이벤트가 생기면 다들 관심을 갖기 마련이니까.

“운송마차는?”

“조정에선 아직 두고 보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굳이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해? 일단 지켜봐.’라는 눈치랄까요.”

“민간에 퍼지는 건, 시기상조군.”

“예.”

“도성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직은요. 사실 급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연오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 땅은 돌이 너무 많다. 달리 말하면 관리하지 않은 길에, 돌부리가 넘쳐난다는 뜻.

마차를 타고 다니면, 엉덩이가 헐고 정수리가 멍들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수송마차에 관심을 가지는 건, 유행이자 신기하니까 그런 거지. 당장 필요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만약 도성에 자갈도로가 깔리거나, 지금처럼 야금야금 먹혀든 대로를 정비한다면?

당연히 마차 또한 실용성을 가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연오랑은 자갈도로를 깔아 놓고서, 조정이 “어떻게 반응하나?”하고 지켜보는 중인데... 아직 미끼를 물진 않았다.

지금 당장은 다른 할 일이 넘쳐나니까.

“관리들은 요즘 어때? 다들 잘 지내냐? 배우는 사람도 있고?”

“흐흐. 예. 요즘은 분위기가 좋습니다. 아무래도 서로 부딪치며 생활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호오.”

“게다가 어르신 덕분에 조정이 난장판이 되면서, 더욱 그렇게 됐죠.”

“...”

연오랑은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는 정인지와 성강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녀석들은 연오랑의 계획을 아는 터라, 대마도 정벌이 무슨 여파를 일으킬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연오랑은 자신들의 우려 섞인 기대보다 훨씬 완벽하게 대마도 정벌을 끝냈고, 그 여파를 그대로 조선에 집어던졌다.

정인지 또한 하급관리로서 날밤을 새며 과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기분은 좋은 모양이다.

이곳에 사는 하급관리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배봉마을을 지켜보고, 이곳 구성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점점 생각이 트여갔다.

배봉마을은 어찌됐건 유의미한 효과. 그것도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이득이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계파가 어떻든, 개인의 신념이 어떻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거지.

하급관리들은 여기서 살짝 의문이 생기고, 기가 죽고, 고민이 생겼다.

문과 과거시험은 더럽게 어렵다.

인성이 어떻든, 사상이 어떻든, 일단 과거에 합격했으면 똑똑하다. 적어도 암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여기에 조선은 적은 관리로 나라를 꾸려가기 위해서, 이 똑똑한 녀석들이 만능일꾼이 되길 원했다.

그래서 온갖 보직을 겸직하고, 순환근무를 시키면서 업무능력을 끌어올리지.

이렇듯 스스로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녀석들이, “과거도 합격 못한 놈들.”이라며 은근히 깔보던 마을청년들에게 밀리는 경우가 발생했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분야. 전공 분야에서는 택도 없이 발려버린 거지.

물론 농사꾼이 다른 건 못하고 농사일을 잘하는 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거하고 학문적인 논리와 체계를 가지고 대하는 건... 차이가 있지 않나.

헌데 하급관리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발려버린 거지.

조정은 “모든 걸 다 잘하지만, 특히 잘하는 분야.”가 있는 인물을 전문가로 취급한다.

헌데 이곳은 “다른 건 다 못해도, 이것만 잘하면 돼.”라는 걸, 전문가라고 내세웠기 때문.

여기서 괴리감이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보다 무식한 저 녀석들도 한우물만 깊게 파서 우리를 뛰어넘었다. 그럼 우리가 만약 한우물만 파면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 이들은.

“농부 패시브 직업에 투잡, 쓰리잡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1인1직업을 가지고 전문화 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만약 모든 백성들이 한우물만 파는 전문가가 된다면 어떻게 되지? 나라 전체의 수준이 올라가는 건가?”라고 생각의 폭이 확장된 사람도 있었던 것.

물론 이게 현실적으로 당장 가능하진 않지만... 아무튼 전문화, 전공화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급관리들의 선입견과 편견을 깨부순 거지.

저 의문의 시작이 바로, 기업설립의 정당성을 부여해 줄 테니까.

“연구소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어때? 달라진 게 있나?”

“글쎄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껄끄러워 하는 사람도 있고, 지켜보는 사람도 있고. 애매모호 합니다.”

정인지는 몇몇 노신들을 떠올리며, 살짝 얼굴을 구겼다가 얼른 폈다.

“그래도... 적어도, 전보다는 나아졌습니다.”

“그건 다행이군.”

연오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하급관리들을 구워삼느라, 성강과 정인지가 부단히 노력했을 거다.

한 번의 성공은 우연이라 치지만, 연이은 성공은 필연이다.

그것도 조정은 생각지도 않은 방향과, 생각지도 못했던 해결책이 연이어 나왔으니 기겁할 노릇.

조정에선 바로 코앞에 있는 배봉마을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쟤들을 어떻게 해야 되나? 내버려 둬? 아니면 날려버려?”라는 논의가 시작된 것.

이 시대엔 있을 수가 없는 “민간연구소”의 등장에, 혼란에 빠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21세기에도 그렇지만, 이 시대에도 정책, 법률, 국가대사에 있어서는 무수한 이해관계가 교차한다.

사상과 이념적인 문제에, 현실적인 문제도 엮인다.

왕의 이득. 나라의 이득. 나, 개인의 이득. 우리 계파의 이득. 우리 집안, 우리 고향지방의 이득. 등등.

이 모든 게 얽히고설켜 들어간다.

이렇다 보니. 될 일도 안 되고, 안 되는 일이 되는... 엉뚱하고 요상한 결과가 도출되는 것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지.

연오랑은 그런 꼴을 보기 싫어서, 일부러 밖을 돌아다니며 민간연구소와 민간기업을 세워 일을 진행했던 거고.

헌데 이 복잡한 과정. 어쩌면 논의만 하면서 질질 끌다가 시행조차 되지 않았을 일이, 떡하니 상상 이상의 결과물로 튀어나왔다.

이제 조정신료들에게 남은 건, 머리 아프고 가슴 아픈 선택 뿐.

보다 나은 이 결과물을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할 것인가.

선택지는 둘 밖에 없으니, 결과적으론 납득하긴 싫더라도 인정해야 했다.

누가 보더라도 유의미한 결과가 나왔는데, 여기다 대고 “이건 고래에 없던 일이다. 이건 예법에 어긋난다. 이건 나라를 혼란케 할 시도다.”

“당장 없던 일로 해라!”라고 핑계와 모함을 할 수도 없다.

도로의 효용성, 만드는 데 드는 비용. 만드는 수고. 이걸 빌미로 반대하던 이들은, 도로가 완성되자 융단폭격을 얻어맞았다.

수차를 반대하던 이도, 농사직설를 편찬하는 데 도움 받는 걸 반대하던 이도, 생경한 건축물을 반대하던 이도, 새로운 의학서, 약학서를 반대하던 이들도.

계파와 계열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두들겨 맞고 말았다.

원래 역사에선 이런 일이 없겠지만, 지금은 계열별로 주장하는 바가 각기 다르니까.

배봉마을의 결과물을 가지고, 다른 계열을 공격하는 명분으로 써먹은 거다.

연오랑이 지금의 유학자들을 십선비라 부르며 깔아뭉개지만, 그건 자본유학을 밀어 넣기 위한 음해이자 매도, 흑색선전이자 네거티브 유세와 다르지 않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 시절의 유학자들은 관학파라 불린다.

21세기 사람이 막연히 “조선유학자” 하면 떠오르는 편견에서, 살짝 벗어나 있지.

사상과 이념보다는 실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방향으로 연구하는 학자, 실무관료라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

물론 관료들 중에서도 근본성리학 유학ver4.0을 추종하는 부류가 있지만, 조정관료만 놓고 보면 오히려 이들이 소수다.

여기에 운석핵꿀밤의 여파까지 있었으니, 원래 역사보다도 더 쪼그라들었지.

하여 연오랑이 보기엔, 뭔가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정책의 목표와 결과를 정할 때는 이념과 이득이 충돌한다.

하지만 절차와 과정에 있어서는 은근히 널널했던 것.

조정관료들이 유학적 논리구조를 따라 정책을 만들고 결과를 도출하는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쓰일 도구는 딱히 가리지 않는 거다.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더욱 가성비 좋은 도구가 있다면, 써먹으면 되는 일 아닌가?

유학을 제외한 나머지 잡학에 대한 취급이 이러했던 거지.

원래 역사에선. 반대로 이런 취급 때문에, 사림파가 집권한 이후에 잡학의 발전이 더딘 것도 있었다.

“뭐 하러 그것까지 나라가 신경 써서 관리해야 하나? 그냥 있는 거 쓰면 그만 아냐?”

이런 느낌으로 도구를 발전시키는 일에, 나라가 직접 관심을 갖지 않은 거지.

더불어 도구마저도 유학적 색채를 입히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도구가 도구가 아닌 상태가 되어버린 경우도 있었고.

아무튼. 자본유학은 이 도구의 역할에 아주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이젠 도구의 역할에서 벗어나 손, 발이 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로 인해 조정신료들조차 자본유학에 대한 판단이, 조금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기도 했고.

이렇게 배봉마을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인정하고, 그 결과물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넘어갔다.

이제 다음 문제가 튀어나온다.

“그럼. 쟤들을 어떻게 써먹어야 하지?”라는 문제다.

“저놈들을 조정에 흡수하자.” “일단 그냥 놔두고 뽑아먹자.”

“우리가 주도해서 써먹어야 한다.” “일 잘하잖아? 저런 거 다른 지방에도 만드는 건 어때?” “저 시건방진 놈들을 해산시키자.” 라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연오랑이 하는 짓에, 함정카드와 지뢰가 없을 리가 만무.

조정을 더욱 골치 아프게 하는 건, 배봉마을의 청년들 대다수가 서얼이라는 점이다.

서얼. 참 애매한 존재다.

태종은 서얼금고령을 실시해, 서얼이 관직에 진출하는 걸 제한했다.

훗날 경국대전의 서얼금고법처럼 견고하고 살벌한 법은 아니지만, 약한 시행령 비슷하게 적용되고 있지.

하여 서얼은 잡과나 잡직에만 진출할 수 있고, 고위관직으로 오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태종이 이걸 밀어붙인 건, 왕자의 난 때의 명분도 있었겠지만 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왕과 조정 입장에선, 고려 때 귀족집안이 다 해먹는 걸 봤는데, 한 집안 출신의 관리가 늘어나서 독점하는 걸 놔뒀겠는가.

또한 서얼에게 양반관료의 길을 열어두면, 기득권층이 너무 많아져서 감당할 수가 없다.

양반사대부. 관리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경쟁자가 사라지는 일이니 당연히 환영.

각 집안 입장에선, 적서차별을 확고히 해서 상속권 문제나 집안싸움을 해결할 수 있으니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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