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챕터14. 만나다 (1)
“예? 저희 목장에 계십니다만...?”
“뭐?”
연오랑은 어이가 없어서, 갑자기 뻐근해진 목을 주물렀다.
‘이 양반이 진짜. 왜 남의 집을 마음대로 끼고 앉아 있어?’
“어떻게 된 거야?”
“우연입니다. 어르신.”
성강은 빠르게 입을 놀려 해명했다.
어째 연오랑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별로 기분이 안 좋아 보였으니까.
원래 역사에서도.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넘기고, 띵까띵까 잘 놀다가 세상을 떴다.
자기 입으로 “나만큼 잘 놀다가 간 왕이 없다.”고 할 정도니, 속편하게 지냈겠지.
지금은 어떨까? 운석핵꿀밤의 여파를 수습하느라 힘들었겠지만, 원래 역사에서 명나라가 지랄했던 것만큼 힘들었겠는가.
더불어 조선 내부는 시끄러웠을지 몰라도, 외부의 위협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명나라도 없으니, 까부는 여진족들을 눈치 안보고 두들겨 팰 수 있었고.
이래서일까?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뒷수습조차 세종에게 떠넘기고, 자기는 간단히 경과보고만 받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연오랑은 이야기를 들으며,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쳤다.
‘자기가 사자도 아니고...’
1년차 세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린 것 마냥 강하게 키우겠다는 건가? 아니면 이 또한 신료들을 떠보기 위한 수작일까?
하여간 태종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냥을 맘껏 하면서 놀러 다녔는데, 이번엔 용마산 인근을 순시하다가 배봉목장에 놀러왔다고 했다.
그리곤 아예 눌러 앉아서 지내고 있다고 하네?
“거기서 놀게 뭐가 있다고?”
“전에 북방에 지을 실험가옥을 짓지 않았습니까? 그게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아...”
연오랑은 자기 발등을 찍은 것 같아, 자기도 모르게 한탄이 흘러나왔다.
그는 언젠가 여진족을 다 집어삼키고, 만주를 조선땅으로 만들 생각 아니냐.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지.
지금 조선의 가옥은 북방, 특히나 연해주 일대나 만주에서 쓰기에는 보온이 너무 안 된다.
원래 역사에서도, 데일 정도로 온돌바닥을 뜨겁게 만들어도, 외풍이 심하게 들어와 물이 언다고 하지 않았나.
당연히 외풍을 막을 방법을 연구했지.
그리곤 “여기서 가까운 곳 중에서 어디가 북방만큼 추울까?”하고 고민하다가, 그냥 용마산 깊숙한 곳, 으슥한 곳에다가 집을 지었다.
재료? 배봉산 자락을 깎아 만든 초거대가마에서, 벽돌과 보온재 비슷한 물건을 만들었다.
관리가 거주할 신식숙소에 쓸, 대형 기왓장도 여기서 만들었으니까.
그걸 이용해 벽재료를 통나무,흙,벽돌,평기와 등을 써보고, 벽을 2중구조로 만들어 보고, 지붕을 낮춘 2층 구조로도 만들어보고, 지붕의 경사도 바꿔봤다.
내부 또한 일반 바닥온돌뿐만 아니라, 침대식 온돌, 벽난로, 방 한가운데에 놓는 난로. 등등.
하여간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만들어 봤다.
이 중 하나만 성공해도 대박이고, 성공한 걸 다 결합해도 대박일 테니까.
실제로도 큰 문제없이 성공했다. 단순하게 말하면 벽을 이중, 삼중으로 꼼꼼하고 두텁게 만든 거니까.
이걸 “얼마나 더 싸게, 더 빠르게 짓나.”가 문제다. 그 최적의 방법을 찾아내는 게 어려운거고.
아무튼 생경한 형태의 온갖 건물이 널려 있으니, 태종은 이집, 저집을 다 놀러 다닌 모양이다.
“그리고 목욕탕과 한증막이 정말 마음에 드셨는지, 궁궐에도 짓는다고 연구원들을 데려갔습니다.”
“흠.”
‘하여간...’
제멋대로 구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상왕인 태종에게 개길 순 없지. 속으로 욕 한번 하고 넘어간다.
한증막도 “어떻게 하면 북방에서 덜 추울 수 있을까?”하는 의문에서 만들어졌다.
21세기식 습식사우나 정도 되려나?
한증막의 개념과 구조는 어려운 게 아니고, 뒤지고 보니 이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한증소 같은 게 있었다.
얼어 죽을 것 같은 북방에서, 사우나는 그야말로 사랑받을 물건이 되지 않을까?
거긴 물을 구하는 게 더 어려울 테니, 목욕탕보다 사우나가 더 빠르게 퍼져나가지 않을까 싶다.
한증막과 세트로 이어지는 게 목욕탕 아니냐.
21세기 동네 목욕탕을 떠올리며, 석재와 목재, 재미삼아 만들었던 21세기형 타일을 이용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봤지.
물론 물을 끓여 와서, 탕에 옮겨 담아야 하지만... 이게 어디냐.
태종도 이렇게 잘 꾸며진 목욕탕은 처음 봤을 테니... 신나서 이용했을 거고, 그게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연오랑도 이 시대에 떨어지고 나서야 알았는데, 사람들이 생각보다 자주 씻었다.
또한 오래된 사찰에는 신라나 고려 때 만들어진 목욕탕도 있었다.
위생관념이라기 보다는 뭐랄까. 그냥 의식이나 불교식 관습이라고 할까? 시간이 흘러 그냥 문화가 됐고.
그래서 목욕탕을 만들 때, 연구원들도 별 거부감이 없었다. 물론 한증막은 굉장히 신선해 했지.
더불어 은근슬쩍 원룸숙소에 끼워 넣은 목욕탕과 한증막도, 하급관리들이 큰 거부감 없이 사용하곤 했다.
그들 입장에선 그간 봐 왔던 목욕탕과 달리, 사방이 꽉 막히고 말끔하게 마감된 타일, 석재 목욕탕은 처음 써봤을 테니까.
다만 자신의 몸을 남에게 보여주는 건 탐탁지 않은 터라, 수십명이 들어가는 공용목욕탕 대신 대여섯명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탕을 여러개 만들었다.
혹시나 골수 유학자들이 딴지를 걸까봐, 남녀를 구분해서 목욕탕을 만들고, 그 거리도 최대한 떨어져서 만들어 놨지.
이러면 최소한 무턱대고 욕을 하진 않을 테니까.
‘아닌가? 차라리 잘된 건가?’
연오랑은 반대로 생각해봤다.
자고로 유행을 선도하는 건 유명인이고, 이 시대에 제일 유명한 사람은 왕 아닌가.
태종이 목욕탕과 한증막에 관심을 가지고, 하급관리들 사이에서 이 소형 목욕탕이 유행하면... 이게 민간으로 퍼지는 것도 순식간 아닐까?
목욕은 지금도 하는 일이고, 소형목욕탕은 그걸 보다 간편하고, 깔끔하게 만든 거니까.
‘사치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유학자들이 또 난리를 피울 테니까... 그것만 조심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군.’
더불어 소형목욕탕이 유행하면, 자기기업에서 만드는 타일도 잘 팔리지 않을까?
사람들의 위생상태가 나아지는 건 당연할 거고.
'흐흐. 조정아. 이거 해보겠다고 한성에 목욕탕 짓는 순간. 지금처럼 안일하게 상하수도를 관리하다가는 피똥 쌀거다. 고생 좀 하고 생각을 바꿔봐라.'
연오랑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갈 때.
“그래서 말인데...?”
“...?”
성강의 이야기가 끝나자, 정인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삼정승 어른을 뵙는 것보다, 차라리 상왕전하를 뵙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음...?”
‘태종이라?’
원래 계획은 삼정승을 만나서, 그의 계획을 풀고 종두법을 지렛대 삼아 거래할 작정이었다.
종두법을 어느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게 진실이라고 판명만 되면, 역사에 길이 남을 명신名臣이 되는 건 자명한 일이지.
하지만... 왕에게는 “여기 있습니다.”하고 냉큼 바쳐야 하지, “이거 드릴 텐데, 대가로 뭐 주실래요?”라고 했다가는 목이 날아간다.
은근히 알아서 챙겨주고 받는 게 있을지언정, 대놓고 뭘 요구할 수 없는 거지.
“... 손해 볼 거 같은데?”
“어르신이 특전대를 굴리면서, 훈련법을 마구 풀었잖습니까. 상왕전하께서 관심이 지대하십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차라리 중간과정을 건너뛰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음.”
정인지는 ‘그러게. 너무 많이 푼 거 아닙니까?’라고 슬쩍 타박하는 눈빛을 뿌렸다.
녀석은 특전대가 뭔 훈련을 받았는지, 훤히 알고 있기 때문.
이 비실이 책벌레조차 칼잡이로 만들어 놨는데, 태종이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었겠는가.
거기에 연오랑이 세종의 아이돌 그룹 멤버에게 풀어댄 썰도 있으니, 더욱더 관심이 증폭됐겠지.
“그런데 왜 일찍 안 불렀지?”
“그야. 전하께 뒤처리를 넘겨줬는데, 어르신을 건드리면 모양새가 나쁘지 않습니까.”
“흐응.”
연오랑을 따로 부르면, 그게 곧. 조정의 논란을 종식시키는 일 아니냐.
세종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뒷짐 쥐고 물러나 있는데, 태종이 나서면... 못 마땅해서 끼어든 꼴이 되겠지.
“안 그래? 그런데 이젠 받아들일까?”
“상왕전하께서 부르는 게 아니라, 어르신이 찾아가는 것 아닙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배봉목장을 갔다가 우연히 만난 걸로 하면, 꽤 괜찮지 않습니까? 그리고... 더 올라가려면, 삼정승 어른보다 상왕전하나 전하의 결단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음.”
‘그건 그렇긴 한데...’
연오랑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쳤다고 조정에서 일을 하냐.
관리인 듯 아닌 듯, 어중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고다.
그의 목표는 실직을 받지 않는, 물질적인 보상이 없는 품계의 상승이다.
아버지의 작호를 이어받는 건 당연한 거고, 한 단계 더 높은 “군君”의 작호를 노리고 있다.
그 정도면, 조선팔도의 어느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테니까.
물론 “부원군” 작호를 이어받는 것조차 비상식적인 일이다.
하지만 어쩌겠냐? 비상식적인 공훈에는 비상식적인 대접을 해줄 수밖에.
모든 백성과 모든 무관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정에선 대충 뭉개고 넘어갈 수도 없다.
그는 이런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을 만들려고, 조선팔도에 이름석자가 널리 소문나도록, 거창하게 대마도에서 난장판을 피운 거지.
헌데 “부원군”을 넘어 “군”을 받으려면, 조정대신을 넘어서 왕의 허락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그냥 태종과 시원하게 맞짱을 까라는 거다.
태종이 거부하면 삼정승을 통해 제안이 올라간들, 어차피 허락을 못 받을 테니까.
“나아가 군제개조 계획을 실행하려면, 어차피 상왕전하와 함께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상왕전하와 바로 뜻을 통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말이죠. 지금처럼 관심이 높을 때는요.”
'이 자식아. 태종을 만날 사람은 네가 아니라 나라고. 인마.'
“흐음...”
‘잘될까나...’
그는 태종과의 만남은 아직 상정하지 않았기에, 살짝 고민이 됐다.
왕과 거래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 아니냐.
무조건 바짝 엎드려서, 은근슬쩍 돌려치기를 하면서 진행해야 하는데... 태종에게 그게 통할지 모르겠다.
‘아니지. 그 양반도 분명히 나에 대해서 알긴 알 테니까... 대화가 통할 거 같기도 하고.’
그는 태종이 자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걸 알고 있다.
애초에 태클이 들어왔으면, 조선개조계획은 실행조차 못 했을 테니까.
반대로 몰랐으면, 조선은 답도 없으니 그냥 포기했을 거고.
태종은 분명히 뭐가 이득이 될지 고민하면서, “언제 손을 대볼까.” 생각하면서 지켜봤을 테지.
‘그래. 어차피 태종을 설득하지 못하면, 말짱 꽝이다.’
연오랑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본유학을 아무리 밀어 넣고, 조선개조계획을 아무리 밀어붙여도, 결국은 태종과 세종의 마음에 들어 인정받아야 한다.
차라리 지금. 종두법이라는 대체불가능한 막강한 카드를 쥐고서, 승부를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준비는 해놨냐?”
“흐흐. 물론이죠. 100문 100답까지 전부 준비해 놨습니다.”
역시나 연오랑이 이런 결정을 내릴 걸 짐작했던 걸까?
정인지와 성강은 희희낙락하며, 방 한쪽 서랍에 담아뒀던 종이 뭉치를 왕창 꺼냈다.
태종을 만나기 전에, 예행연습이나 죽도록 해야겠다.
*****
태종을 만나러 가는 길은 단출했다.
선물로 줄 사냥개들과 이런저런 서적들. 몸을 감싼 백호피가 끝.
백호피는 입고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한 번 더 고민하라고 입고 가기로 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달라고 하면 주지 뭐. 주고서 환심 사는 게 더 이득이다.
송계천을 지나 목장과 전마훈련장을 가볍게 뚫고 용마산으로 나아갔다.
일하던 사람들, 훈련하던 무관들은 백호피를 보며 놀라는 모습을 보였고, 언제나 그랬듯이 자랑하듯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해줬지.
인사를 받는 이들은 “저건 뭔 짓이야?”라는 반응을 보여줬고.
이윽고 도착한 배봉목장.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 나아간다.
진짜... 상왕이 됐다고 자기 마음대로 구는 모양인지, 호위들조차 몇 되지도 않았다.
슬쩍 살펴봐도 한 오십명 정도 되려나? 기타 수발드는 인원을 합쳐도 백명도 안 될 것 같다.
그간 사냥을 다녔다고 했는데, ‘이 숫자로 되나?’싶을 정도다.
말에 탄 백호가 등장하자, 목장 근처를 순찰하던 무관들 몇이 재깍 달려왔다.
아마도 왕의 호위다보니 내금위나 겸사복 쯤 되지 않을까?
“...”
“...!”
뭔가 싶어서 후다닥 달려온 이들은 연오랑을 보며 하나같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