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77화 (77/538)

77. 챕터14. 만나다 (2)

이들은 궁궐에서 지내는 이들인 만큼, 식인 백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그렇다면 이 덩치 큰 인물이 바로, 소문만 무성한 그 연오랑 아닌가.

‘역시 잘 먹히는구만.’

연오랑은 시원하게 웃으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니들 생각이 맞아.’라고 몸으로 표현해준다.

“혹시...?”

“맞네. 하동의 연오랑일세. 상왕전하를 뵙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음...”

“여긴 잡인이 올 곳이 아니다. 꺼져.”라고 단칼에 거부했을 이들조차, 연오랑의 명성을 생각하며 머뭇거렸다.

“물어보고 오지 그러나? 혹시 아나? 상왕전하께서 반기실지?”

그가 다시금 히죽 웃으며 말하자,

다들 ‘뭐야? 뭔가 약속이 되어 있는 건가? 우린 왜 몰랐지?’라고 눈빛을 교환하더니... 결국 누군가 냉큼 말을 몰고 되돌아갔다.

여기서 괜히 막았다가, 나중에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아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냉큼 불러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역시. 그 양반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군.’

연오랑은 속으로 머리를 연신 굴려댔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정에서 배봉마을에 대해서 조사를 안했겠는가.

일반 관리들이야 사정을 잘 모를지 몰라도, 왕이나 대신들 쯤 되면, 이젠 이면의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거다.

지금까지야 긴가민가하면서 혹시나 싶었겠지만,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확실해졌겠지.

이 배봉마을의 배후에 연오랑이 있다고 말이다.

그러니 태종 입장에선 더욱 궁금하지 않겠나.

착착. 호위를 따라 사냥개를 데리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호위들은 ‘겁도 없는 건가?’ ‘여기가 신기하지도 않나?’ 싶겠지만, 여긴 원래 연오랑 거다.

자기 집에 왔는데 놀랄 게 뭔가.

목줄에 묶인 사냥개들조차 얌전하게 연오랑의 발을 따라왔다. 과연 신경 써서 골라온 보람이 있다.

밥 먹고 있었던 모양인지, 여기저기에서 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호위들은 서늘한 기운이 가득한 집 한편으로 그를 안내했다.

북방과 비슷한 곳을 찾다보니, 산 깊숙한 곳은 밖과 다르게 꽤 쌀쌀할 수밖에.

이윽고 간단히 몸수색을 마치고, 목줄도 호위에게 건네주고, 두툼한 서책들도 호위에게 넘겨주고, 몸만 달랑 이끌고 태종에게 향했다.

저기. 벽 없이 확 트인 건물 2층에서 태종의 모습이 잠깐 보였다 사라졌다.

연오랑은 힐끔 살피고선, 호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계단 옆에 도착하자, 내시처럼 보이는 이가 주의할 점을 빠르게 일러줬다.

물론 백호피를 보고서, 살짝 겁먹은 표정을 숨기진 못했지만.

“다 아셨습니까? 여긴 어전이 아니라서 복잡할 것도 없고, 상왕전하께선 예식을 크게 따지지 않으시니까...”

“걱정 말라고.”

그는 시건방지게 내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주고선, 얼른 가서 알리라고 채근했다.

“전前 하동부원군의 자제. 연오랑이옵니다.”

“들라하라.”

계단 옆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자, 두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목소리 좋고?’

연오랑은 속으로 히죽 웃으면서도, 겉으론 조신한 모습을 보였다.

평상시와 다른 모습이지만 어쩌겠어. 왕 앞에서도 안하무인처럼 굴 순 없지.

휘적휘적. 호위들과 함께 걸음을 옮겨, 간단한 수라상을 앞에 둔 태종이 보이기 무섭게 넙죽 엎드렸다.

“연오랑이라 하옵니다. 상왕전하.”

“과연... 그게 그 소문난 식인 백호로구나.”

역시나 백호피는 너무 눈에 띄는 지라, 바로 알아본다. 첫인상은 좋게 먹고 들어간 것 같다.

“예. 맞사옵니다.”

“그래. 거기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다른 이라면 모를까. 연씨라면 겸상할 수 있지.”

“...?”

“...!”

연오랑은 물론이거니와, 옆에서 시중들던 내시들. 기둥 옆에서 시위하던 호위들.

모두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뜨억!”한 표정을 지었다.

왕 앞만 아니었으면, 다들 입에 파리가 들어갈 정도로 크게 벌렸을 거다.

예법을 날려버려도 너무 날려버렸다.

‘이 양반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이렇게 친한 척이야?’

연오랑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연신 곁눈질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별 도움이 안 된다.

‘어어!? 그러면 예법에 어긋나는데? 근데 왕께서 오라고 했으니 가긴 가는 게 맞는데...’ 라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다들 충격에 빠진 걸 보고선,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태종 근처로 다가갔다.

‘음...’

21세기에 인터넷으로 사진과 그림을 보긴 했지만, 그게 언제적이냐. 이젠 기억도 안 난다.

그래도 조선사람 치고는 꽤 풍채가 좋긴 좋다.

이성계 핏줄이 다들 한가닥 한다더니, 태종도 그 피를 이어받긴 받은 모양이다.

병약하다는 소문도 있더만, 다 구라였나보네.

흰머리도 많이 없고, 눈빛도 꽤 맑고, 생각보다 동안이다.

태종 나이를 생각하면 한참 괄괄해 보이는 게... ‘명나라가 없어져서, 스트레스를 덜 받은 건가?’ 싶을 정도다.

'원래 역사보다 더 오래사는 거 아냐?'

연오랑이 그렇게 태종을 품평하고 있을 때.

태종 또한 연오랑을 품평, 아니 감상했다.

“과연... 연씨가 맞구나.”

태종은 천천히 다가오는 연오랑을 보며, 왠지 모를 감탄을 하며 유심히 그를 살폈다.

더 정확히는 연오랑 뒤에 아른거리는 옛 기억을 더듬어갔다.

“연씨는 그래도 된다.”라고 했던 말. 그건 빈말이 아니다.

태종과 연씨의 인연은 정말로 깊고, 또 깊었다.

꼬마 태종은 아버지. 태조와 쌍벽을 이루던 고려의 영웅. 연오랑의 증조부. 연군강을 봤다.

고려 말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명장을 꼽으면 이성계, 최영. 그리고 원래 역사에 없던 연군강이다.

그 연군강이 이성계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싸운 건, 한두번이 아니다.

청년 태종은 태조를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함께 해줬던 연천후를 봤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연천후가 그들을 막았다면, 최영을 만나기도 전에 피투성이가 되었을 거다.

중년 태종은 자신을 가로막지 않고, 오히려 함께 해준 연오진을 봤다.

왕자의 난 때. 연오진이 그를 막았다면, 이 또한 대업이 쉽지 않았을 거다.

그리고 지금. 태종은 대마도 정벌의 주역인 연오랑을 보고 있다.

무려 4대에 걸친 기나긴 인연의 끝자락을 만났으니, 태종의 감흥은 남다를 수밖에.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태종만 느낄 수 있는 오묘한 감정이다.

그리고 판에 박힐 정도로 똑같이 거대한 덩치를 보며, ‘과연 연씨 핏줄이 어디가지 않는구나.’라고 감탄했고.

“앉아라.”

“예...”

연오랑은 태종을 보면서 ‘과연! 예상보다 훨씬 과한데? 내 계획이 제대로 먹히겠구나.’라며 속으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물론 겉으론 연신 표정관리를 하며 어설픈 연기를 했지.

태종은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이어갔고, 연오랑은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조금씩 집어먹었다.

"대마도주는 어땠느냐." "식인백호는 어떻게 잡았느냐." "대마도에서 돌아와서 뭐했느냐." 등등. 평범한 일상이야기를 물어보다가.

“이게 청어절임이라고?” “예.” “괜찮구나.” “예.” “이건 뭐라고?” “그건 표고버섯하고...” “이건 기름장이라고 하는 건데...” 등등.

역시나 태종은 배봉목장이 연오랑의 손이 닿아 있는 걸 아는 듯, 이것저것 은근히 캐물었다.

연오랑은 당연히 발뺌하지 않고 열심히 말상대를 해줬지.

이제 숨길 시간은 지났다.

승부를 봐야하니, 오히려 그간 업적을 더욱 크게 부풀여도 부족하다.

하지만 그런 속내는 둘째치고라도, 태종은 이 별거 없어 보이는 식사를 진심으로 흡족해 했다.

21세기의 그가 15세기조선에 떨어졌는데, 음식이 입에 맞을 리가 있나.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편의점 도시락이 궁중 수랏상보다 더 맛있을 정도다.

당연히 잘 알지도 못하는 요리기술, 식재료를 떠올리며, 끌어온 숙수들을 달달 볶았지.

다시마를 비롯한 해초와 건버섯류, 건채소류, 견과류 등. 하여간 숙수란 숙수는 다 긁어모아서 연구소마냥 음식을 개량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거니, 태종의 입맛에 안 맞을 리가 있나.

식재료의 한계는 어쩔 수 없지만, 다시마와 건버섯류를 이용한 유사msg만큼은 15세기 사람조차 휘어잡을 물건이지.

이윽고 식사가 모두 끝났다.

상을 치우고 호위마저 물리자, 태종은 알쏭달쏭한 눈빛으로 연오랑에게 폭탄을 집어던졌다.

언제가 됐든, 한번 만나게 되면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을 드디어 던져본다.

“대체... 넌 무엇을 원하는 것이냐?”

태종의 물음에 연오랑은 잠시 멈칫했고, 태종은 더욱더 스스로에게 빠져들며 침잠해 들어갔다.

연오랑에 대한 태종의 한줄평은 ‘이 자식은 대체 뭔 생각이지?’ 라는 거다.

아무리 따지고 또 따져 봐도, 속에 뭘 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하동에 기업이라는 생경한 조직이 생기고, 연오랑이 온갖 기상천외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걸 알고 있었다.

까닭인 즉. 그가 직접 꽂아 넣은 수령. 현감이 보고를 해왔으니까.

전임현감도 그렇고 지금 현감도 그렇고, 수령 대부분은 어떤 방식으로든 태종과 엮여 있는 사람들이다.

중앙집권을 위해 수령의 권한을 강화했는데,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어떻게 일을 맡기겠나.

각각의 성품과 실력은 둘째 치고 말이다.

그것도 원래 역사와 다르게, 지금처럼 혼란한 상황에선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하동현감들은 연오랑이 하는 짓을 지켜보면서, 뭔가 자신의 생각이 트이고 한계와 편견이 깨어지는 걸 느꼈다.

조정신료들이 배봉마을을 보면서 겪은 감정을, 이들은 더욱 직접적으로 느낀 거지.

배봉마을의 연구결과물을 조정이 재이용하는 거라면, 하동 3현은 그 결과물을 곧장 현실에 주입해서 기존세계를 박살내버렸으니까.

그리하여 고민이 시작됐다.

“이걸 막아야 하나?” 아니면, “분명 전과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 이걸 퍼트려야 하나?” 라고 말이다.

더불어 연오랑은 현감을 한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세家勢를 키워줬으니... 마냥 연오랑을 매도하고 공격하기가 애매했던 거지.

하여 연오랑에게 속을 까고 시원하게 말했다.

“이게 옳은 건지, 그른 건지 모르겠지만. 현의 살림이 눈에 띄게 나아진 건 인정하겠다. 그러니 나는 판단을 못하겠고, 이 판단을 조정에 맡기겠다.” 라고 말이다.

허나 연오랑은 그러지 말고... 조정에는 축소해서 알리고, 대신 태종에게 다이렉트로 진실을 알리라고 일렀다.

괜히 조정이 이 일에 관심을 갖게 되면, 분명 딴지가 들어올 테니까.

그리하여 태종은 하동의 발전상황과 기업의 설립과정, 기업이 무슨 일을 벌이고 어떤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지 보고받았다.

물론 태종은 "자주화"라는 이름으로 난장판을 일으킨 놈들을 떠올리며, 당장 때려잡으려고 했지.

헌데 연오랑의 이름 석자를 듣고 멈췄다.

연오진이 낙향하고 사망한 이후. 잠시 기억에서 멀어졌던, 그 연씨 가문이 다시 등장했다.

조선건국에 굵직한 선을 그었음에도, 그걸 아는 백성과 신진신료가 제대로 없을 정도로 존재감을 스스로 지운 연씨.

태종은 적어도 연씨라면, 못된 꿍꿍이 없이 나라에 도움 되는 걸 한다고 믿었다.

막연한 믿음이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가 아는 연씨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고 칩거하면 모를까, 자신에게 해악을 끼칠 집안이 아니니까.

뭔가 하려고 했다면, 수없이 많은 기회를 그냥 놓아버리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가만히 내버려뒀는데... 보면 볼수록 물음표만 늘어간다.

처음엔 “재물을 노리는 건가?”라고 의심했다.

기업을 세워서 온갖 기물을 만들었다. 사업일체라는 건방진 소리를 내뱉으며, 전에 없던 생경한 조직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게 연오랑의 것인가? 아니다. 각 사대부, 지방호족 집안 그 자체다.

연오랑이 뭔가 시키고 지시하긴 하지만, 그게 옳은 길이고 좋은 방법이기 때문에 기업이 따르는 거다.

“권력을 노리는 건가?”라고 의심했다.

마찬가지다. 기업은 언제든 연오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냥 관계를 끊고 자기식대로 열심히 운영하면 되니까.

물론 연오랑의 연씨마을과 배봉연구소의 선진기술을 받지 못하지만, 그건 감수하면 되는 일이다.

나아가 권력을 노리려면 과거를 봐야하고, 태종은 중앙집권을 위해 그걸 밀어붙이고 있다.

기업이 이 정책에 반하는가? 아니다.

기업가출신도 양반이 되려면 과거를 봐야하고, 그 구성원들은 잘만 과거에 응시하고 있다.

물론 합격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지만.

“조정에 반하는 건가?”라고 의심했다.

허나 배봉마을은 오히려 조정에게 “더 가져가! 빨리 가져가!”라고 소리치며 신기술을 쏟아내고 있다.

받는 사람이 더 먹다가 체할 정도로 밀어 넣는다.

기업은 한술 더 뜬다. 이들은 나라에 충성하는 걸 오히려 양반 사대부보다 더욱 강조한다.

양반 사대부라면 죽었다가 깨나도 하지 않을, 국방세라는 있지도 않은 세금을 지들끼리 내세워 고향을 발전시켰다.

이걸 위해 기존 정책을 흔들고 있지만, 왕권강화라는 목표가 있는 태종입장에선 참고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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