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79화 (79/538)

79. 챕터14. 만나다 (4)

“헌데...”

허나 무관은 세종이 입은 옷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왕이 입은 옷이니 만큼 이런저런 자수가 박혀 있어서, 화려하고 멋진 건 분명한데... 그 형태가 요상하다.

그간 질리도록 본 생경한 옷차림 아닌가. 이곳 궁궐에서 볼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세종은 자랑하듯, 팔을 활짝 펴고 입을 열었다.

“아. 이거 말인가? 확실히 편하긴 편하더군. 정인지 녀석이 운동복이라고 하도 자랑을 해서, 한 벌 맞춰 봤는데... 괜찮더군. 무관들은 복제를 바꾸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단 말이지.”

“...!?”

세종이 연오랑에게 붙여놓은 스파이. 양원경은 자기도 모르게 슬쩍 입이 벌어졌다.

‘저게 지금 왕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라고 놀라는 모습이 역력했다.

조선의 관복은 당연히 품이 넓고 치렁치렁했다.

이건 예전부터 이래왔던 거라서, 조금 잘 산다 싶은 집안은 다 이런 비슷한 옷을 입었다.

이 시대엔, 유행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거니까.

물론 이 관복을 놓고서도.

“아니! 망한 명나라의 복제服制를 우리가 왜 따라야 하는가!” “명나라 복제가 아니라 원나라, 고려 때부터 쓰던 거라고.” “그 또한 뒤진 중국놈들의 복제 아니냐? 당장 고치자!”

라고 열심히 싸워대던 때가 있었지.

허나 태종은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냐? 옷 입는 게 뭐가 중요해. 이 자식들아! 관복을 바꾸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 줄 알아? 나중에 고치고, 지금은 그냥 입던 거 그대로 입어!”라고 일갈을 날려줬지.

그렇게 유야무야 대충 넘어갔는데, 대마도 정벌이 끝나고 무관들이 귀환하자 분위기가 슬쩍 바뀌었다.

그들은 연오랑이 “연오랑 하계군복.”이라는, 반팔티셔츠만 입고 다니는 걸 봐왔지 않나.

은근슬쩍 따라해 보니, ‘눈치가 보이긴 한데, 편하고 좋잖아?’라는 걸 느낀 거지.

더군다나 배봉마을 청년들은 일찍이 비슷한 옷을 입고 다녔다.

지금까진 눈치만 보던 하급관리들은 “뭐야. 무관들도 입는데, 나도 입으면 안 되나?” 이러면서, 야금야금 입기 시작했던 것.

관복을 마음대로 수정하면 혼나지만, 평상복을 자기 마음대로 입는 걸 누가 뭐라고 하겠나.

특히나 연오랑에게 물든 정인지는 조선판 긴팔티셔츠를 아무렇지 않게 입고 다녔지.

누군가 “쯧쯧. 관리라는 놈이 천것들이나 입는 옷을 입고 다니냐?”라고 핀잔을 주자.

정인지는 “천 것? 너 지금 상왕전하를 욕했냐? 이 꽉 막힌 전조의 망령 같은 놈을 보게? 이게 예를 갖춰야할 관복이냐?”

“쯧쯧. 그게 다 백성들의 고혈인 걸 모르나? 사치가 뭐 다른 거냐? 그렇게 치렁치렁한 옷 한 벌이면, 이 소매 폭이 좁은 옷을 두벌이나 만들 수 있는 걸 알기나 하냐? 관리라는 놈이 백성들과 함께 하지 못할망정, 사치나 하고 다니고.”

라고 일갈을 날려줬지.

묘하게 말이 되는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궤변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솔직히 편하잖아.

소매 끝에 ‘혹시 뭐 묻었나?’ 걱정 안 해도 되고, 붓을 잡을 때마다 소매를 둘둘 말아서 고정시키지 않아도 되고, 바쁘게 돌아다닐 때마다 거슬리지도 않고.

이렇다 보니 하급관리들도 알음알음 소매 품이 좁은 옷을 입기 시작한 거지.

무관들도 할 말은 있었다. 소매를 펄럭거리면서 어떻게 싸우겠나.

당연히 완대, 습拾이라 불리는 소매를 고정하는 팔찌나 끈 같은걸 이용했는데, 활쏘기를 할 때는 물론이고, 칼질할 때도 썼다.

그런데 이렇게 두 번 일을 할 바엔, 그냥 옷자락이 팔에 딱 달라붙는 형태의 옷을 입는 게 더 편하지 않나?

전통을 고수하는 부류와 관복에는 적용할 수 없지만, 평상시에 운동할 땐 이 생경한 복장. 연오랑 동계군복이라 불리는 복장이 유행하게 된 거지.

이게 세종에게까지 닿아서, 그도 운동복을 한 벌 장만하게 됐다.

반대의견? 세종의 말빨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지.

“그나저나 정인지 녀석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줘야 하는데... 가능하겠나?”

“...”

양원경은 세종의 기대감 섞인 물음에, 차마 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정인지는 양원경을 몰랐지만, 양원경은 정인지를 알았으니까.

녀석이 알까 모르겠다만, 그는 집현전에서도 별종으로 유명하고 내금위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은 원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래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지금 역사에서도 삽질을 연거푸 했고, 자식 사랑이 가득했던 태종조차 더 이상 용인할 수 없을 정도로 막나갔다.

그리하여 세종은 원래 역사처럼 벼락치기로 세자가 되었고, 또 벼락치기로 왕이 되었다.

원래 역사와 달라진 점은 그 후의 행보다.

태종은 세자 세종을 곧장 집현전에 박아 넣었다.

세종이 머리 좋은 건, 태종은 물론이고 조정대신들 모두가 아는 사실 아닌가.

그에게 필요한 건, 이론이 아니라 실무경험이다.

벼락치기로 조선의 사정을 익히고 실무에 대해 배우려면, 집현전에 박아 넣는 게 최고지.

거긴 온갖 사건사고와 논쟁이 모이는, 조정 최고의 난장판인 곳이니까.

게다가 집현전 학사들은 죄다 하급, 신입관리인터라, 세종과 나이도 엇비슷하지 않나.

은근슬쩍 서로 친해지게 됐다.

그리고 여기서 운명의 상대, 정인지를 만나게 됐다.

원래 역사에서도 정인지와 세종은 군주와 신하관계를 넘어서 각별히 지냈는데, 지금 역사에서도 벌써 그런 낌새가 살짝 났다.

‘음... 죽었다 깨나도 못 이길 텐데... 앞으로도 영원히.’

양원경은 차마 이렇게 말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는 연오랑과 함께 다니면서, 정체불명의 별종 정인지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기업가청년들과 열심히 칼부림을 부렸지 않나.

대련을 할수록 뭔가 기시감을 느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인지의 칼질과 똑같았다.

왜도를 닮은 장도로 펼치는 쌍수도법. 이 생경한 도법을 조선땅 어디에서 배울 수 있겠는가. 항왜에게서도 이런 건 못 배울 거다.

알고 보니, 정인지도 연오랑의 제자였던 거지.

그런데 입문한지 고작 1년차인 세종이, 연오랑 밑에서 구른 정인지를 뭔 수로 이기겠나.

‘하긴 겉모습만 보면 정인지가 만만해 보이긴 하다만...’

양원경은 정인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신입관리 정인지는 집현전에 속해 있었는데, 얘는 아무리 운동해도 근육이 안 붙는 멸치체질이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봐도 멸치 비실이 책벌레처럼 보였지.

허나 다들 과로로 쓰러져 가는 와중에도 혼자 멀쩡하고, 한쪽 구석에서 쉐도우복싱을 하며 허우적거리는 걸 매일같이 목격했다.

다음 수순은 뻔하다.

정인지는 집현전 동료들에게 “이게 요즘 유행하는 양생법인데 말이지...”라며 스트레칭과 맨손운동, 도수체조를 열심히 가르쳤다.

집현전 고위관리들은 알면서도 대충 넘겼다. 서류노예들이 알아서 건강을 챙기는데, 뭐라고 하겠나.

쟤들이 정신 못 차리고 허우적거릴수록, 윗사람인 자신이 더 힘들어진다.

그런 암묵적인 묵인 하에 있었는데, 결국 세종의 눈에도 걸리고 만다.

하라는 일은 안하고, 집현전 구석에 모여서 팔다리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호기심 많은 세종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그는 “지금 뭐하는 거냐?”고 물었고 정인지가 재깍 튀어나왔다.

자기가 칼질을 좀 하는데, 비전의 양생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네?

세종은 ‘뭔 개소리야? 허당끼 가득한 책벌레인 네가?’ 라는 의문이 절로 떠올랐지.

아무리 봐도 못 믿겠다 싶어서, 장난삼아 혹은 내기 삼아 호위를 불러 한판 붙여봤는데... 이게 웬일? 정인지가 막상막하로 내금위사와 겨루는 게 아닌가.

‘나보고 쟤랑 싸우라고?’라며, 깔보던 눈빛을 숨기지 않던 내금위사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였다.

비실이 책벌레가 알고 보니, 힘을 숨긴 비실이였던 거지.

세종은 그걸 보고 남자의 자존심이 불타올랐다.

한창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태조대왕님의 환생이다.”라고 칭찬받으며, 타고난 몸만 믿고 살던 세종 아니냐.

그런 강골强骨 세종이 비실이 책벌레 정인지에게 몸으로 밀리는 건, 자존심이 왕창 상하는 일이지.

해서 정인지는 동료들과 함께 세종에게도 은근슬쩍 맨손운동을 가르쳤고, 그게 시간이 지나다보니 이젠 몸에 익은 경지에 이르렀다.

물론 이제는 “뭐야. 이게 그 연오랑 훈련법이었어?”라고 알게 됐지만.

세종이 알까 모르겠다만, 정인지는 지속적으로 은근슬쩍 그의 자존심을 자극해 운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저거 다 물살이야. 물살.” “허우대만 좋아서는 쓸모가 없다니까?” “덩치 클수록 고추가 작아진다는 것도 모르냐?”

“어허. 이거하면 밤이 달라져요 밤이. 아침밥상이 달라진다니까?” “이게 바로 실전압축근육이라는 거다.” 등등.

세종에게 들릴 듯 말 듯, 야금야금 얄밉게 자존심을 긁어댄 거지.

당연한 말이지만, 연오랑의 특명을 받은 작전이다.

세종과 문종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나.

세종이 말년에 당뇨로 개고생하는 걸 알고 있으니, 미리미리 체질개선을 시켜야지.

왕실과 조정대신들은 세종이 편식하고 운동을 안 하는 걸 익히 아는 터라, “그래. 그렇게라도 몸을 움직이면 좋지.”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고.

세종이 그렇게 맨손운동을 시작했다면, 반대로 정인지와 맞붙었던 내금위사는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칼질 실력으로 내금위에 들어왔는데, 이런 비실이 붓쟁이에게 밀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날 이후로 은근슬쩍 정인지와 칼부림을 하면서, “이건 어디서 배웠냐.” “이건 뭐냐.”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라면서 캐묻기 시작한 거지.

그리하여 내금위사는 정인지의 대련상대가 되어 칼질을 나눴고, 이게 또 세종을 자극했다.

‘태조대왕님의 피를 이어받은 내가, 아직도! 저 말라깽이 녀석보다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왕이 신하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이건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혈기왕성한 세종. 남자의 자존심이 다시금 불타올랐다.

결국 “음... 이제 손발 움직이는 게 익숙해졌으니까, 나도 칼질을 배워 볼까나?”라는 망측한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내금위사들에게 돌아가면서 칼질을 배웠고, 그 중에 양원경도 껴 있었던 거지.

세종은 세자가 되기 전, 사저에 살던 대군시절부터 의주를 통해서 중국서적을 수입해서 읽곤 했었다.

헌데 알고 보니, 양원경의 양씨집안은 그도 몇 번 이용했던 집안이 아닌가.

해서 양원경을 통해서, 지금까지도 개인적으로 서적을 구입하기도 했고.

이 친분을 이용해서 어사 김숙자의 호위로 양원경을 보냈고, 양원경은 세종의 스파이가 되어 연오랑에 대해 알아온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왕이 칼질을 익히겠다고 하니, 조정대신들은 당연히 기겁했지만... 어쩌겠나.

태종조차 “아무렴. 우리 집안이 원래 무인집안 아니냐? 칼질 익히는 게 뭐 어떠냐? 맨손무술에 칼을 섞으면 그게 곧 칼질이다.”라고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하며 밀어줬다.

물론 시커먼 속내는, 칼질을 익히는 왕을 명분삼아 12사 중앙군을 강화하고, 지방세력들 눈치주고, 여진족을 협박하고, 조정대신을 갈라치기하려는 의도였다.

결국 청년 세종은 조정대신들을 말빨로 다 이겨먹었고, 다들 한풀 꺾여서 “너무 빠지지 마시고, 적당히 하시지요.”라고 잔소리만하고 말았다.

조정대신들도 나름 자기위안을 했다.

일단 세종이 헛짓거리할 인물은 절대 아니지 않나. 알아서 어련히 잘 할거라고 믿었다.

나아가 태종처럼 운동한답시고 사냥 다니면서 난리 피우는 것 보단, 차라리 궁궐에서 혼자 칼질하는 게 더 낫잖아? 돈도 안 들고.

아니나다를까 세종도 냉큼 고개를 끄덕였지.

그는 천성 서적성애자라서, 칼보다는 책이 좋았다. 다만 정인지에게 질 순 없지.

“음... 힘든가 보군?”

“... 일조일석一朝一夕만에 경지에 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건 맞다. 무술이라고 해서 용력이 가장 중요한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학문이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더군.”

“예...”

싸움을 힘으로만 했으면 기술이 왜 생겼겠나.

세종은 한주먹거리도 안될 정인지를 보며, 당연한 이치를 몸과 머리로 다시금 깨달았다.

자기도 몰랐던 학구열이 같이 불타올랐다.

정인지가 알려준 칼질은, 그간 봐왔던 칼질과는 궤가 달랐으니까.

뭔 놈의 칼 한번 휘두르는데, 팔,어깨,허리 근육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수련하나.

이건 세종 입장에선 신세계였고, ‘무술이 아니라 무술학이라고 불러야 하나?’라고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