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81화 (81/538)

81. 챕터15. 논의하다 (1)

사정이 이러하니, 태종이 연오랑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한 건 당연하다.

당장은 지방세력을 조정에 흡수시키는 일도 벅차 죽겠는데, 수백년 후의 미래까지 생각하는 건 시기상조지.

“고작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았으나... 많지는 않지만 양반 사대부들 중에서 특권을 세습화하려는 시도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만약 이 상황이 계속 진행된다면, 지금의 양반관료체계가 변질되어 전조의 귀족마냥 변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십니까? 그게 왕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

왕에게 하는 말치고는 무례한 이야기지만... 태종은 닫힌 마음을 열고, 일단 들어보기로 각오하지 않았나.

잠시 심호흡을 하며 침묵을 지키자, 속에서 쓴물이 올라온다.

그다지 목도하고 싶지 않았던 현실을 끄집어내어, 태양빛에 바싹 말리는 기분이 들어서다.

지방세력을 양반관료체제로 흡수하려면, 양반관료가 되어야 하는 이유와, 관리가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점과 이득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관리를 모든 신분 위에 올려놓았고, 관리들을 위해 과전법을 시행해 먹고살 길을 만들었다.

역과 세금을 면해주는 혜택을 줬다.

하지만 이건 조정의 생각이고, 관리 개인의 생각은 어떨까?

입신양명을 바라는 건 나라의 일꾼이 되려는 뜻도 있지만, 자신의 이득과 집안의 이득을 보존하고 번성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지금도 양반 사대부는 지방호족을 죽이려 들고, 지방호족은 빼앗기기 싫어서 발버둥 친다.

“모두가 공명정대하고, 사심 없이 나라에 충성할 거라고 믿으십니까? 자신의 이득을 나라의 이득 위에 올리지 않을 거라고 믿으십니까?”

“...!”

연오랑의 시건방진 말에, 태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폈다가를 반복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사람을 믿는다고? 외척과 공신들을 때려잡은 태종 앞에서 그게 할 소리인가.

태종에겐 “아니. 사람을 못 믿어서 죄다 때려잡은 인간이, 양반관료라고 해서 그놈들이 다를 거라고 믿는 겁니까? 지금?” 이라고, 돌려 까는 것처럼 들렸다.

연오랑은 지금의 방식으로는, 결국 양반관료체제가 양반신분제로 바뀌고 말거라고 말하는 건데...

‘허나...’

태종은 단박에 반박하고 싶지만, 이 녀석의 성향을 아는지라 생각을 가다듬었다.

녀석은 지금. 냉혹할 정도로 현실을 놓고 말하고 있으니, 태종 또한 현실로 내려와 답을 이어가야 한다.

유학의 이치를 들먹이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가는, 이 대화 자체를 이어갈 수가 없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서면 대꾸할 말이 없어진다.

누군 몰라서, 싫어서 안했나? 현실이 받쳐주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거다.

농본주의를 밀어붙인 조선의 재정은, 결국 땅에서 나오는 소출로 결정된다.

그리고 양반관료체제를 유지하려면, 관리들에게 녹봉을 줘야 한다.

허나 현실적으론 나라에서 직접 녹봉을 주기는 힘들어서, 수조권을 주는 형태를 취했다.

작은 정부 비스므리한 걸 추구하며, 관리를 적게 뽑는 이유에는 이것도 있을 거다.

조선은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의 사찰, 대농장을 다 때려잡고 자영농의 비율을 급격히 늘렸다.

노비종부법을 시행해 양민을 늘렸고, 서얼금고령을 시행해 관리가 마구 늘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럼에도 땅은 여전히 부족했고, 지방세력을 더욱 압박하고 뜯어내어 땅을 계속 확보하는 거다.

결국은 땅이라는 한정된 파이를 놓고, 양반관료와 지방세력, 조정에 세금 내는 양민이 서로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형국이지.

그런데 만약 지방세력이 전부 양반관료로 변모하고, 특권을 가진 체 세습화된다면... 조정이 가질 수 있는 파이는 얼마나 남을까?

세금을 극단적으로 줄인, 세습화된 토지를 가진 세력. 이게 고려의 귀족과 뭐가 다르지?

‘크게 다를 게 없다.’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태종 아닌가.

그의 입장에서, 연오랑이 말한 미래는 상상조차 싫을 정도로 끔찍하다.

“땅에 묶여 있는 한, 영원히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겁니다. 지금의 제도 하에서 양반관료의 특권세습화를 막을 방도가 있으십니까?”

이건 성산부원군 이직과 대화를 나누면서 했던 말 아닌가.

어쩌면 북방으로 치고 올라가, 땅을 더 늘리면 될지도 모른다.

허나 그건 미봉책에 불과하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체제의 모순이 발생한다.

지금은 양반사대부라 하나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고려 때의 향리와 하급귀족계층의 지주들이 대다수다.

이렇게 먹고 살만한 이들만 열심히 공부해서 고려과거시험에 합격해 고려의 문무반 관료체제를 이룩했고, 여기에 세습화된 고려귀족이 결합해 고려조정을 이끌어갔다.

조선은 여기서 고려귀족을 날려버렸고, 문무반. 양반관료체제만 남겨뒀다.

그럼 이놈들의 정체성은 새나라 조선이 추구하는 관료체제와 온전히 일치하는가?

태종이 바라는 이상론. 오로지 왕실과 나라만 바라보며 일하는 일꾼의 이미지와 일치하는가?

그럴 리가 있나. 그게 됐으면 이상론적인 정도전 계열이 주장하던 토지개혁이 왜 실패했겠나.

껍질이 바뀐 거지, 그 속 내용물까지 모조리 바뀐 건 아닌 거지.

훗날 시간이 흘러 껍질이 약해지면, 속 내용물이 껍질을 뚫고 나오지 않을까?

연오랑은 태종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의심과 불안을 끄집어냈다.

“결국 네가 말한 기업이라는 건, 지주계층을 무너뜨리는 방도이며, 왕권을 위협할 도전자를 없애고, 한정된 땅에서 벗어나 나라의 재정을 다른 곳에서 찾는 방책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그러나... 농사는 나라의 근본이다.”

“물론이옵니다. 그러니 농법을 끊임없이 개량하고, 백성들의 땅을 보호할 방책을 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양반관료들에게 모두 빼앗길 순 없지 않습니까?”

“...”

태종은 작게 혀를 차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국 자본이라는 개념을 인정하고, 땅이라는 파이 이외에, 전에 없던 파이를 만들어내자는 말이니까.

태종은 연오랑과의 대화를 풀어놨고, 세종은 말없이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찌 생각하느냐?”

“음...”

왕인 세종 입장에서도, 연오랑이 말한 미래는 끔찍하다.

‘너무 먼 미래긴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선은 지방세력을 흡수하고 찍어 누르기 위해 양반사대부를 밀어줬고, 그들은 열심히 땅을 뜯어먹었다.

대다수는 조정으로 회수되고 일반 양민에게 넘어갔겠지만, 일부는 그들에게도 조금씩 넘어갔을 거다.

그러나 이들에게 쪼잔하고 박하게 굴 순 없다.

그랬다간 지방세력에 이어서, 양반관료마저 적이 될 수 있으니까.

'결국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겠구나.'

과전은 퇴직한 관리가 죽을 때까지 인정되니, 신입관리가 들어올 때마다 조정의 부담은 늘어간다.

근데 관리가 죽고 나면, 회수되는 땅보다 세습되는 땅이 더 많다.

이래서 원래 역사에서는, 경기도에 한정되어 있던 과전을 삼남까지 확장시켰다가 다시 회수하기도 했다.

지금 역사에선, 연천후 때문에 공신전과 별사전別賜田을 분급하는 일이 적었기에, 원래 역사보다 관리를 더 많이 뽑았음에도 경기도만으로 버틸 수 있는 거고.

“그렇다면... 결국 과전科田을 회수하고 수조권을 폐지하여 관리들에게 직접 녹봉을 주고, 한편으론 그들의 보존을 위한 방도를 찾는 것이... 세습화를 막을 수 있는 최선이겠지요? 양반관리라는 신분이 당대에만 머물 수 있게 말입니다.”

“그렇다. 허나... 그들이 땅에 욕심을 내지 않도록 충분하게, 또한 제재를 받아도 모두가 납득할 정도의 녹봉을 줘야 할 것이다. 특권을 회수하는 건 그 다음 수순이지.”

“하지만...”

다시 또 돌아온다. 그게 불가능해서 지금 이 상황 아닌가.

“의창義倉과 군자창軍資倉은 어떠하느냐?”

“한동안은 괜찮을 겁니다.”

“음...”

“...”

의창은 고려 때부터 이어온 구휼기관. 군자창은 군량미를 보관하는 기관이다.

태종은 집권 이후로 꾸준히 비축미를 쌓아왔는데, 지금은 이 비축미를 다른 용도로 써먹고 있었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조정은 왜인포로를 처리하기 위해서 임시직 관리를 잔뜩 늘리지 않았나.

이들에게 과전을 주는 건 불가능하니,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잔뜩 쌓아뒀던 비축미와 군량미를 꺼내 써먹고 있었지.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세종은 태종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먼저 답을 했다.

어쩌다보니, 지금 조정은 부분적으로나마 직접 녹봉을 주고 있지 않나.

태종은 “이걸 확대하면 어떨까?”하고 잠시 떠올렸는데, 역시나 아직은 시기상조인 모양이다.

“만약 진행하려면, 지금 있는 군자전軍資田을 비롯한 국가수조지國家收租地를 정리하는 작업이 먼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아가 팔도의 전체 소출이 늘어나야 가능할 겁니다.”

“양전사업을 진행하는 건 쉽지 않을 테니...”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고, 그에 대한 폐단도 몇몇 발견되었습니다.”

“음...”

“... 하.”

세종과 태종은 다시금 침음을 흘리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병 주고 약 주는 꼴도 아니고... 이거야 원.

연오랑이라는 미꾸라지에 두 사람이 휘둘리는 꼴 아닌가.

임시직 관리를 늘린 건, 연오랑이 대마도에서 난장판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 임시직 관리가 전국으로 퍼져 지방을 조사했고, 그런 와중에 온갖 것들이 걸려들었다.

이 조사과정은 양전사업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게 했는데... 이런 논의가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온 건, 연오랑이 말한 끔찍한 미래 때문 아닌가.

나아가 조정이 보다 많은 관리를 굴리게 만들어서, “어느 정도까지 버틸 수 있을까?”라는 한계를 시험한 것 또한 대마도 정벌 때문이다.

“녀석이 여기까지 노렸을까요?”

“글쎄다.”

세종과 태종은 둘 다 말을 삼갔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니까.

자본유학. 기업. 대마도 정벌. 왜인포로. 관리충원. 제도개혁...

녀석이 움직임을 멀리서 지켜보면... 별개의 움직임처럼 보이던 게,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문제라면... 유학자 세종, 태종의 입장에선 이게 껄끄러울지 모르지만, 통치자. 왕의 입장에선 나쁘지 않다는 거지.

“양전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의도를 숨기려면, 기업을 내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교묘한 물타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기업이라는 것 자체가 생경하고, 기존 기조와 비슷하면서도 어긋나니까.

그 속에서 관료체제를 정비하겠다는, 속내를 읽어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거다.

“그렇긴 하다. 다른 건 몰라도, 수산, 축산기업은 당장 효과를 볼 수 있으니... 신료들의 저항을 줄일 수 있을 거다.”

“예.”

둘은 기업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 수산기업이 엄청난 양의 절인생선, 생물을 쓸어오는 걸 알고 있다.

그간 고려나 조선의 어업과는 아예 차원이 다를 정도로 막대한 양이다.

공도정책과 해금정책을 취했던 지난날에는, 제대로 된 어업이라는 게 없을 정도니까.

아마 수확물을 옮기고, 뿌리는 게 더 어려울꺼다.

축산기업은 거창한 우마에 시선이 쏠리지만, 진짜 알짜배기는 양계장과 오리,토끼,사슴,염소 등의 농장이다.

생육기간과 생존주기가 짧은 이 가축들은, 빠르게 키워 빠르게 처리할 수 있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관리에게 수조권을 주든, 녹봉으로 비축미를 쓰든, 뭐가 됐든 쌀이 중심이 되고 소모될 수밖에 없다.

수산, 축산기업은 이 부분에 있어서, 백성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하루 두 끼를 밥만 먹던 이들에게, 적어도 한 끼는 생선이나 고기를 준다면... 한 끼만큼의 쌀이 남을 테니까.

“하지만 기업을 다루고, 물산을 제대로 옮기기 위해선... 관리가 또 추가로 필요하겠군요.”

“그러하다.”

‘후...’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끊임없는 시험이다.

뭐 하나할 때마다 관리는 계속 필요하니, 이 관리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라도 뭐든 할 수밖에 없다.

특히나 기업은 그간 조선에 없던 형태의 조직? 집단? 아닌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심지어 이놈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지, 어느 부서에 속해 관리해야할지, 세금을 어떻게 걷어야 할지조차 모른다.

담당관리는 기업 관리라고 불러야 하나?

헌데 이런 상황은 또 양면의 효과가 있다.

관리가 늘어나면 지방호족 또한 양반관료체제로 편입하는 일이 쉬워지니, 그간 조정에서 하던 일의 연장선 아닌가.

이걸 선순환이라고 해야할지, 악순환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집현전 소속 관리를 더 추가해야할지도 모르겠구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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