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83화 (83/538)

83. 챕터15. 논의하다 (3)

“기업의 공인公認을 조정대신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쉽진 않겠지만 완강하게 반대하지도 않을 거다. 하급관리들 사이에선 녀석이 외치는 잡학근본에 흔들리고 있지 않느냐.”

“배봉마을... 때문이군요.”

잡학근본의 핵심은 세상의 모든 일, 심지어 천하다고 생각하는 일도 돈이 되며 학문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실제로 보여줬다.

이들은 고작 땅 파는 일마저도. 앞으로는 농사학, 농업학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완성도 높은 방법과 체계를 만들었으니까.

“거창하게 기업이라는 생경한 말을 끌어와서 그렇지, 까놓고 보면 양반사대부 집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

“예...”

“천한 일이라 생각하는 자들이 있을지 모르나..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역풍을 맞을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 쉽게 꺼내진 못할 거다.”

“...”

태종과 세종은 기업이 고작 그 정도 수준이 아닌 걸 알고 있다.

허나 오히려 별 것 아닌 것 취급하며, 명분을 세울 거라는 뜻.

‘확실히 명분은 우리가 앞서니, 조정대신들도 마냥 반대할 순 없을 터...’

지금 조정은 분열되어, 심지어 상업과 공업을 증진시키자는 의견을 표방하는 계열도 존재한다.

이들을 앞세우면 크게 잡음이 일지 않을 거다.

당장 무제한적으로 푸는 것도 아니고, 수산기업에 대해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걸 테니까. 나중에는 달라지겠지만.

“...”

세종은 말없이 연신 머리를 굴리며, 앞으로 펼쳐질 상황을 이어나가봤다.

그리고 불연 듯. 다른 결론에 다다랐다.

먼 미래를 그려본다.

‘지주 대신, 양반신분제 대신, 자본을 품고 성장한 기업가문. 그들의 자본을 감당할 수 있나?’

세종은 그걸 물었고, 태종은 히죽.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따라오고 있다. 태종 또한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허나... 녀석의 대답은 맹랑했지.’

태종은 연오랑이 했던 대답을 세종에게 들려줬다.

“왕실과 조정이 조선 제일의 부자가 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돈과 땅. 무엇이 더 부담스럽습니까?” 라고.

자기가 돌팔매꾼도 아니고, 어려운 선택지를 또 던졌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땅이로군요.”

“그렇지.”

세종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연오랑이 파놓은 함정을 찾아냈다.

“녀석이 기업내규를 통해, 기업이 사노비를 해방하고 사원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구속하려는 건...”

“그래. 맞다. 땅은 물론이고, 돈 마저도 사람과 떨어뜨리려는 거다.”

“음...”

기업가문이 돈은 벌 수 있지만, 사람을 끌어 모아 세력화하는 걸 태생부터 막아버린 것.

다만 이 조건의 전제는 사원이 일을 때려 치고 다른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다수의 기업이 존재해야 한다.

“그럼...?”

왕실과 조정이 제일의 부자가 된다고? 어떻게?

세종의 그런 의문을 읽어냈는지, 태종은 옆에 놓여 있던 서적들을 줄줄이 밀어 넣었다.

더불어 웬 비단주머니를 꺼내 하얀 눈송이를 풀어놨다.

“...?”

“먹어보아라.”

세종이 냉큼 손가락을 찍어 맛을 보자, 눈이 찌릿할 정도로 짠맛이 올라왔다.

“맛이 조금 씁쓸하긴 한데... 소금입니까?”

“천일염이라 하더구나.”

세종은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서적들을 조심스럽게 뒤적이며 살피기 시작했다.

더불어 눈썹이 파도치듯 꿈틀거리고, 미간은 내천처럼 깊어지고, 눈동자는 밤하늘처럼 깊어진다.

천일염제조법. 광산개발법. 역참을 이용한 운송계획안. 노비제한법. 토지제한법. 기업감사법. 등등.

하나같이 본적도 없고,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긴 적도 없는 정책과 제안들이다.

태종 대에는 다 할 수도 없고, 세종이 일생을 바쳐야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들.

이 모든 걸 실행하고 장악하면. 제아무리 기업이 성장해서 돈을 얼마나 벌든, 왕실과 조정이 다 찍어 누를 수 있다.

문제는 역시나. 백척간두진일보를 할 수 있냐는 것. 그럴 용기가 있냐는 것.

“골치 아픈 걸, 잔뜩 던져두고 가더구나.”

“... 결국 선택하라는 거군요. 이대로 어중간하게 갈 건지, 아니면 틀을 깨고 새로운 체제로 나아가 완벽한 왕권과 중앙집권을 이룩하든지.”

“그래. 하루아침에 결정할 일이 아니지.”

“예...”

‘음...’

태종은 어린 세종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넘긴 것 같아, 입 안이 썼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첫째가 흠결이 있더라도 밀어붙였겠지.

허나 지금은 격동의 시대. 변혁의 시대다.

자신이 만들었으나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이 조선을, 평범한 이에게 넘겨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안 좋은 선례를 만드는 걸 감당해서라도, 세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안쓰러운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앞으로는 지금보다도 더 어려워질 테니까.

‘녀석...’

태종은 생각에 잠겨 있는 세종을 대신해, 널려있던 서적을 싹 정리했다.

당장 이 모든 걸 결정할 수 없는데, 이것만 붙잡고 있어봐야 답도 안 나온다.

여기서 종두법과 불교개혁안, 여진흡수계획, 군제개편안 등을 꺼냈다가는... 세종의 눈이 핑핑 돌아가며 헤롱헤롱 할 거다.

항상 자신만만한 아들내미가 놀라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밌겠지만, 더 먹였다가는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는 일.

이젠 보다 가벼운 이야기를 나눠야 할 시간이다.

태종은 세종 앞을 깨끗하게 정리하고선, 서로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몸을 풀고 분위기를 이완시켰다.

“연오랑. 그 맹랑한 녀석을 어떻게 부릴 생각이었더냐?”

“아! 음... 두 가지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제주목사로 보낼까 했습니다.”

“제주라...”

“예.”

태종은 일리가 있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종은 칼보다 책을 좋아하는 녀석 답게, 연오랑의 내정능력을 우선으로 쳤나 보다.

탐라국이라 불리던 남쪽 섬은 고려 때 제주가 되었고, 원이 등장하면서 목장으로 제대로 써먹었다.

이후 목호의 난이 일어나면서, 여말선초 때 한번 개박살이 났지.

그 이후 태종이 집권하면서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제주를 완전히 중앙에 귀속시켰고, 꾸준히 제주목사를 보내 관리했다.

그럼에도 이쪽은 변방 중에서 변방인터라, 북방보다 더 신경을 안 쓰던 곳이었다.

오죽했으면, 여길 그냥 유배지로만 써먹었을까.

헌데 제주에서만 나는 토산물이 많은 터라, 공물은 꽤 많이 거둬들였다.

그래서 원래 역사에서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제주는 살기 힘든 곳이 되어갔고. 유배지나 다름없는 곳이니 은근히 본토사람들에게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꽤 살만한 곳이다.

여말선초 시대가 지나서 왜구의 침입도 많지 않고, 명이 없어지면서 말을 조공으로 바치는 일도 없어졌다.

조정에서 직접 관리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예전처럼 수탈을 심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섬이라는 특성상, 본토만큼 살기 좋은 곳은 아니지.

“일리가 있구나.”

“예. 제주백성들은 왜구의 침탈을 많이 받아 거친 편이고, 본토에 비해 낙후된 곳도 많으니, 녀석을 보낸다면 잘 정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음...”

대마도에서 왜구들을 다 썰어버렸는데, 제주백성들 중에서 어느 누가 연오랑을 싫어하고 개길 수 있을까.

거기다가 제주는 섬이고 목장 또한 많으니, 축산, 수산기업에 일가견이 있는 녀석을 보내는 건 나쁘지 않다.

“게다가 얼마 전에 한라산에서 질 좋은 석류황이 발견되었습니다. 헌데 그 양이 엄청날 거라고 장계가 올라왔습니다.”

“허...”

태종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세종은 “잘됐죠?”라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유황은 약재로도 쓰이지만, 화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필수재료 아닌가.

태종과 세종이 반색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허나 광산일이 오죽 험한가.

고생할게 뻔하니, 이런 장계는 축소해서 보고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에 발견된 유황광산은 그 크기가 엄청나서 숨길 수도 없었다.

원래라면 한라산에서 유황은 안 나온다.

21세기 그가 자원수정모드를 건들면서, “흐흐. 유황은 화산 근처에 있어야 밸런스가 맞지 않겠어?”라며 백두산과 한라산에 박아 넣었지.

오히려 17년 전에 발견됐어야 하는데 이제야 올라온 걸 보면, 제주목사들이 그간 일을 제대로 안 한 걸지도?

아무튼. 유황은 조선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아니꼬운 대마도 놈들에게 손을 벌려서 구했던 물건 아닌가.

이젠 대마도가 없어져서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중국에게 사면 손해가 막심한데...’라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반가운 소식이 찾아왔다.

“하여 제주를 개발하면서, 왜관을 제주에 여는 걸 생각해봤습니다.”

“흐음. 왜관이라...”

태종은 세종의 깜찍한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름 고민을 많이 한 모양새다.

지금 시대엔, 조일무역의 불균형이 심각하다.

일본은 거의 모든 게 다 필요하지만, 조선이 필요한 건 3가지 밖에 없다.

유황, 구리, 염료. 추가하자면 물소뿔 정도? 원래 역사에서도 주요수입품이 이거였지.

허나 지금 역사에선, 강력한 해금정책을 취하던, 무로마치막부 이외 영주의 입조를 받아주지도, 사무역을 허락하지도 않던 명나라가 없다.

일본의 영주들에겐 선택지가 늘었다.

기존처럼 조선과 거래하거나, 아니면 따로 놀기 시작한 중국남부 각 지방과 직접 거래하거나.

후자는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운석핵꿀밤이 떨어지기 전, 왜구가 중국남부를 얼마나 괴롭혔던가.

본능적인 부담감과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중국남부에 진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잘게 찢어진 중국남부지방은 결국 하나둘씩, 일본과 거래를 시작했다.

다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중일무역의 불균형은 조선보다 더 심각하니까. 중국은 일본한테서 필요한 게 없다. 이 시기엔 연은분리법도 없어서, 은의 산출량이 많지도 않고.

해서 손해를 보긴 하지만 어찌됐건 무역이 시작되자, 일본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게 됐다.

“중국은 난장판이라며? 지금 가서 털면 예전보다 더 쉽게 털 수 있겠는데?”라며 오히려 대규모 약탈단을 구성하는 경우.

“이젠 해금령도 없는데, 뭐하려 목숨 걸고 약탈하고 다니냐? 그냥 거래하면 되는 거 아냐?” 이러면서 무역에 집중하는 경우.

“음... 뭐야. 힘들게 내륙까지 가서 약탈하지 말고, 그냥 무역선을 터는 게 쉬울 거 같은데?” 라며, 중국-일본을 오가는 무역선을 해적질 하는 부류가 생겨났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불똥이 튄 건 대마도다.

대중무역의 규모가 크진 않지만, 어찌됐건 일본 영주들은 대마도주에게 목줄이 잡힌 채로 끌려 다니지 않아도 됐으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조선과 중국. 어느 쪽 시장이 더 매력적이겠나. 당연히 중국이 훨씬 낫다.

이런 이유가 겹쳐져서, 대마도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요동과 산동으로 약탈을 떠났으나... 연오랑에게 박살난 거지.

사정이 이렇다보니, 원래 역사와 달리 일본은 조선에게 죽어라 매달리는 꼴이 아니었다.

조선이 있으면 물론 좋은데, 없으면 “그냥 중국무역에 집중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거지.

다만 각 영주마다 생각은 제각각이라서, 익숙한 조선을 선호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반대로 이 상황은 조선에도 똑같이 적용됐다.

이젠 일본에 손을 뻗지 않아도, 유황, 구리, 염료 모두를 중국에서 구할 수 있다.

명나라가 "니들 뭐하려고 물소뿔 사는 거냐? 각궁 만들어서 어디에 쓰려고?"라며, 강력하게 통제했던 건 모두 옛말이 되어버렸지.

다만 일본에 후하게 사은품을 내줬던 것과 비교해도, 중국상인들이 꽤 비싼 값을 부르고 있어서 불만이 쌓이고 있었다.

“헌데, 그래도 왜관을 열겠다는 것이냐?”

“예. 필수품의 수급처는 한 곳만 있는 것보다, 여러 곳이 있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대마도가 없어지면서 왜국 사정을 알 방도가 없으니, 통신사를 보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음...”

이 시대엔, 상인에 대한 인식이 사기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무역상인은 여기에 첩자 속성이 추가 된다.

왜관을 설치한 것도, 그 첩자놈들이 본토를 활보하고 다니지 못하게 가둬두려는 거고.

반대로 조선 또한 왜관을 통해 왜국의 소식과 사정을 알아왔는데, 왜관이 없으면 일본 내부의 정세파악이 꽤 힘들어진다.

“녀석을 제주목사로 파견해서 왜관을 감독하게 하면, 왜인들이 감히 경거망동하게 굴진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구나.”

연오랑의 무서움은 왜인들이 더 잘 알 테니... 예전처럼 배짱부리는 일은 없을 거다.

녀석은 배를 째라고 드러누우면, 진짜로 째버릴 놈이니까.

‘허나...’

하지만 태종은 세종이 무역에 관심을 크게 갖는 것에, 왠지 모르게 뿌듯하면서도 낯설었다.

예전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지금은 무려 왕이 꺼내고 있으니까.

“나쁘지 않구나... 다른 방안은 무엇이냐?”

“녀석이 용연현으로 이주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옆 장연현의 군진을 담당케 해서, ‘기선군을 키워 산동과 요동 앞바다를 담당하게 하는 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세종은 태종의 분위기를 읽어내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방안은 첫째보다 더욱 적극적이었으니까.

“흐음...”

아니나 다를까. 태종은 세종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런저런 상념이 모두 섞여, 한숨으로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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