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84화 (84/538)

84. 챕터15. 논의하다 (4)

세종과 태종은 하동현감에게 보고받았고, 녀석이 장연현에서 떨어져 나온 용연현으로 이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용연현은 온갖 소문이 무성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불모지 같은 곳.

더군다나 용연, 장연현은 한반도 서쪽 끝, 최서반에 위치한 곳 아닌가.

예로부터 중국과 교류하는 창구인 동시에, 왜구가 시도 때도 없이 들락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당장. 대마도에서 출정했다가 낙오한 왜구가, 장연현으로 표류해서 털어먹고 가지 않았나.

연오랑에게 맡기면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다.

허나 세종은 그걸 넘어서, 산동과 요동 앞바다를 장악하겠다는 거다.

거기에 있을 산동, 북평부, 요동군을 다 밟아버리고, 무역거래선을 안정화 시키겠다는 뜻.

‘포부가 큰 걸 좋아해야할지, 나빠해야 할지 모르겠군.’

태종은 세종을 보며, ‘이게 시대의 흐름인건가?’ ‘자주화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튀어나오는 건가?’라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명나라에 사대하던 기억이 있는 태종에겐, 세종의 이런 모습은 익히 알고 있음에도 이따금씩 놀라게 했다.

기특하면서도 낯선 느낌이지.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더냐?”

“의주를 지켜보다보니, 지금 상태로 그냥 놔뒀다가는 손해를 너무 많이 볼 것 같습니다. 당장은 힘들지 모르나, 멀리 보면 개입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겠습니까.”

“음...”

태종도 의주 상황을 알고 있는 터라,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의주의 상황은 단순히 무역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 북방의 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니까.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는 가깝고, 당연히 조선과도 가깝다.

운석핵꿀밤 이후 조선과 가장 거래를 많이 하는 곳이 산동이고, 이제 서서히 강남 상인이 요동과 조선으로 진출하려 하고 있었다.

다만 이놈들은 더 큰 이득을 노리고, 여진족과 직접 거래를 하려고 한다는 게 문제다.

괘씸한 놈들이 감히 어딜 여진족에게 손을 대? 조선 입장에선 통제 범위 밖에서 여진족이 날뛰는 걸 절대 바라지 않았다.

“강남 상인을 핑계 삼아, 산동 상인이 폭리를 취한 세월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차라리 강남 상인을 조선으로 더 끌어들여서 여진족에게 관심을 갖지 않게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또한 서해를 정리한 후에, 우리가 직접 중국으로 가서 무역하는 게 더 이득이 되지 않겠습니까?”

산동과 요동은 안중에도 없는, 어쩌면 오만하고 건방질지도 모를 세종의 발언이다.

태종은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리의 배로 서해 먼 바다까지 나가는 게 가능하겠느냐? 나아가 그 녀석이 배를 만들고 기선군을 이끄는 일에도 능력이 있겠느냐.”

“조선기업에서 만든 배를 봐도 특별함이 있고, 장연현의 기선군과 황해도의 영진군을 동원하면 방책이 있고, 장연현과 산동, 요동은 먼 바다라고 하기엔 애매할 정도로 가깝지 않습니까.”

“...”

해상무역을 했던 고려에는 첨저선 형태의 배와 평저선 형태, 둘이 결합한 형태 등의 여러 가지의 배가 있었다.

허나 명과 조선의 해금정책이 시행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운선 위주의 배만 필요하게 됐고, 한반도 해안에 적합한 평저선 형태의 맹선으로 도배된 거지.

하지만 연오랑은 조선기업을 만들면서, 당연히 배를 만들 줄 아는 장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옛 기술을 복원하고.

자신이 아는 어설픈 21세기 기억을 뿌려 새로운 형태의 어선을 만들어냈다.

세종은 이런 상황을 다 알고 있기에, 나름 자신이 있었다.

연오랑의 기술은 분명 새롭고 놀라운 게 많긴 하나, 그 연구과정을 지켜보면 조정이 못 따라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조정이 연오랑의 방식을 따라하면, 더욱 본격적으로 대규모 연구를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태종의 시험적인 생각과 마찬가지로, 세종 또한 기업과 연구소의 운영방식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접목시키려고 한 거지.

“틀린 말은 아니나... 우린 아직 공부가 더 필요하다. 애초에 중국으로 가지 못한 이유를 너도 알지 않느냐.”

“...”

태종의 부정적인 대답에, 세종은 살짝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선 꿈도 꾸지 못할 상황이지만. 세종과 태종은 유학자답지 않게, 상거래와 이문계산에 생각 외로 밝았다.

정확히 말하면,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의주를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한성에서 멀리 떨어진 국경지역인 의주에서, 상인세력이 성장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나.

당연히 조정에선 통제하려 했고, 기왕이면 공무역으로 진행되길 바랐는데...

조선은 상,하 관계가 뚜렷한 조공무역만 해봤지, 동등한 관계에서 공무역을 꾸준히 해본 적이 없다는 거다. 티끌만한 이윤까지 따져가며 사무역을 해본 적도 없고.

어쩌겠는가. 맨땅에 헤딩하듯 하나하나 배워가는 수밖에.

조정은 민간시장에 대해 공부하고, 민간상업의 개념과 기초에 대해서 익히고, 이걸 통제하고 제어할 방법을 배워나갔다.

이건 상업에 기겁하는 조정대신들, 노신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대응을 안 하면, 조선만 손해를 잔뜩 보고 호구가 될 테니까.

헌데 좌충우돌하며 열심히 배우다보니 “아무리 봐도 우리가 눈탱이만 맞는 것 같은데... 우리가 직접 가서 거래하면 손해를 덜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됐다.

하지만 공무역은 나라와 나라간의 거래인데, 개판이 된 중국에 제대로 된 나라라는 게 있기나 한가.

괜히 공식조서를 보냈다가 중국 정세에 끼어드는 모양새가 되면, 내정돌리기도 바쁜 조선만 피곤해진다.

그럼 속편하게, 그냥 민간 상단을 중국으로 보낼까?

민간상인세력의 발호를 막으려고, 머리가 깨지도록 상업과 무역까지 배우고 있는 판국인데... 조정이 미쳤다고 상인세력에게 날개를 달아주겠나.

세종은 이 모든 걸 알고 있음에도, 위험을 감수하고 이득을 취하자고 했던 건데... 태종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게다가 직접 거래한다고 해서, 본질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이다. 의주 상황은 네가 더 잘 알터, 그곳에서 들여오고 파는 물건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려구나.”

“...”

의주에서 파는 조선의 특산품은 사냥개, 사냥매, 화문석, 종이, 부채摺扇, 입모笠帽, 문구류(벼루, 붓, 먹), 나전칠기, 말, 모피, 인삼 등이다.

딱 봐도 전부다 대체 가능한 사치품 아닌가.

이외에 거의 모든 품목에 있어서 중국산이 조선산보다 나은데, 그간 조공으로 바쳤던 일반 생필품을 중국 상인이 왜 사겠나.

물론 인삼은 대체불가능한 효도상품이지만, 이 시대 인삼은 사실 산삼이라서 수량을 통제할 수가 없다.

금,은이 있긴 하지만, 이건 거래량이 극히 미미하고.

이렇듯 사치품만 팔다보니, 사는 사람이 갑이 될 수밖에 없다.

중국 상인은 안 사면 그만이지만, 조선은 필수 수입품이 있으니까.

그나마 요동은 모든 생필품과 식량이 부족하니, 조선이 주는 대로 다 사가고 있는데... 이 때는 또 중국 상인이 경쟁자가 되는 꼴 아닌가.

이렇다보니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여진족과의 거래를 확장했다.

여진족에게 얻은 물건을 중국 상인에게 팔아 넘겨야, 손해를 벌충할 수 있으니까.

‘음...’

세종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선, 태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거래를 늘리는 것도, 마냥 좋은 일은 아니겠군요.”

“...”

세종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운석핵꿀밤으로 명이 망한 이후. 억눌려 있던 중국상인들은 지방 권력자들과 결탁해 무섭게 세력을 키워냈다.

그런 이들이 조선으로 달려와 앞다투어 중국산 물품을 풀어대면, 조선산 물품은 경쟁력을 잃고 중국 시장에 종속되고 만다.

여말선초의 혼란기를 기억하는 노신들은, 이래서 상업의 무서움을 계속해서 피력했던 거고.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당장은 조선이 크는 게 우선이구나.’

세종의 표정이 왔다갔다 변하는 걸 보며, 태종은 슬그머니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맞다. 강남 상인이든, 산동 상인이든 상관없다. 우리가 저들과 엇비슷하거나, 보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물품이 필요하지. 그게 사치품이 아니면 더 좋을 테고.”

세종은 ‘그럴 만한 물품이 있나?’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번뜩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그간 미뤄왔던 광산개발을 진심으로 생각해 봐야겠군요.”

“그 또한 하나의 방편이다.”

금,은은 언제 어디서고 경쟁력이 있으니 나쁘진 않으나, 여기에만 몰두하다가는 중국의 배만 불린다.

조선산 물품이 중국산 물품에 밀리지 않을,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하다.

“아! 설마. 그래서 기업을 밀어주시려는 겁니까?”

“...”

태종은 대답대신, 세종에게 히죽 미소를 지어줬다.

‘맞아. 그 녀석은 온갖 기업을 다 세워서, 그간 없던 생경한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내지 않았나. 더불어 조선팔도에 기업을 세우려고 하고 있고.’

세종도 기업이 어떻게 퍼져나가고 있는지 아는 터라, 열심히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갔다.

‘훌테나 풍구와 같은 신식농기구를 팔 순 없지만, 그 외에 차나 자기류, 장신구 등을 생산하는 수공예 전문기업은 충분히 경쟁력이 있겠구나. 더불어 다른 특산품과 일반 생필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생겨나면 상황이 바뀌겠구나.’

세종은 사대의식 따위는 있지도 않을 정도로, 생각이 트이지 않았나.

중국과 요동이 배를 불릴 수 있는 물품은, 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보다 조선이 우위에 서야 하니까.

“더 많은 기업이 만들어지기를 바라야겠군요.”

“일단은 그렇지. 허나 단순히 통제하는 걸 넘어서, 어떻게 활용하고 제어해야할지... 조정은 기업에 대해서 보다 깊이 연구해야 할 거다.”

“...?”

“녀석이 말하더구나. 돈을 향한 욕망은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게 만들 거라고. 앞으로의 기업은 너나 내가 상상하지 못할 온갖 것을 찾고, 만들게 될 거라고 말이다.”

“예...”

“조정이 해야 할 일은, 알아서 뻗어나갈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엇나가는 경우에만 매를 들고 되돌려 보내는 일이 되겠지.”

“음.”

‘민간에게 맡긴다라...’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힐끔 태종을 살폈다.

지금껏 태종이 취해왔던 정책, 나아가 조선이 추구했던 방향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으니까.

조정이 모든 걸 통제하고 휘두르려 하던 것에서 벗어나서, 민간에 보다 자율성을 주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아... 어쩌면 이 또한 사족과 지방세력의 반발을 무르게 하는 방편이 될지도 모르겠군.’

세종은 그리 결론을 내리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허나...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네 말이 맞다. 전부 풀어 놓고 조정이 골라서 단속하는 게 아니라, 조정의 통제와 허락 하에 풀어줘야겠지. 이로서 사족과 지방호족을 다시금 갈라치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세종은 점점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깨고, 애써 화제를 돌렸다.

어린 아이마냥 아무렇게나 마구 날뛸 흐름을 쥐어틀고 조정하려면, 보다 정교하고 복잡한 법과 절차가 필요할 게 분명.

달리 말하면, 이걸 위해서 또 관리를 뽑아서 교육시키고 연구해야한다는 뜻이다.

‘넘어가자.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일단... 무역에 관해서는 여진족을 완전히 휘어잡는 게, 지금 상황에선 최선이겠군요.”

“그래. 그들을 우리에게 종속시켜서, 중국과 요동에 손을 뻗는 걸 막아야겠지. 반대로 중국과 요동이 여진족과 거래하는 것도 막아야 할 테고. 시간이 흘러 조선이 성장하면...! 그때는 방향을 바꿔야할 거다.”

“예.”

세종은 태종의 번뜩이는 눈빛을 알아차리고선,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뜻을 받아들였다.

“그럼 제주에 왜관을 다시 여는 건 괜찮겠군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왜관을 그냥 내어줄 순 없는 일. 대가를 받아내야 하겠지.”

“...?”

예전과 정반대의 상황이 됐다.

왜구방지를 빌미로 일본이 왜관을 제안했다면, 이젠 조선이 일본침공을 빌미로 뜯어낼 수 있다.

물론 실제로 이게 가능하지도 않고, 조정은 관심도 없지만. 잔뜩 쫄아 있는 일본은 사정을 모르잖아.

모르는 틈에, 후다닥 해치우는 게 이득이지.

“대가라면...”

세종은 태종이 뻔한 대가를 원하는 게 아닌 것 같아서, ‘뭘 노리는 걸까?’하고 머리를 굴려봤다.

헌데 태종은 상상도 못할 이야기를 꺼냈다.

“대마도를 우리의 강역으로 만드는 건 어떠하느냐?”

“음...”

조선의 강역이라 함은 그곳에 백성을 살게 하고, 수령을 파견하여 항상 관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까진 대마도를 먹으면 손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거긴 정말로 너무 척박하니까. 밑 빠진 독에 물붓기지.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