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85화 (85/538)

85. 챕터16. 건너다 (1)

‘음... 하지만.’

그럼에도 왜구기지가 없어지는 건, 확실히 마음에 든다. 또한 지금 당장은 써먹지도 못해서 지도에 이름만 올려놓는 상황 아닌가.

주판을 튕겨 봐도 애매하니, 조정대신들이 크게 반대하진 않을 것 같다.

“헌데... 왜국이 쉽게 포기하겠습니까?”

“어렵다면 어렵지만, 쉽다면 쉬울 것이다. 네가 보기에 언제쯤 대마도에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음...”

모르긴 몰라도 최소 십년은 지나야 할 거다.

또한 지금 당장은 대마도의 주인을 자처할 사람이 없다. 일본 입장에서도 애매해진거지.

“우리도 못 쓰는 섬이 되었지만, 저들도 못 쓰는 섬이 됐다. 중국과 무역을 튼 이상, 과연 누가 대마도를 재건하려 할까.”

“예.”

“나아가 저들은 우리가 왜국본토까지 넘볼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이건 확실하다. 얼마 전에 온 왜국사신과 조서는, 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극공의 예를 다하고 있었으니까.

태종과 세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허세를 부리듯 왜국사신을 잔뜩 밟아서 되돌려 보냈다.

사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한 꼴을 보니, 허풍 협박이 제대로 통한 거지.

“우리에게 넘긴다 한들, 우리 또한 당장 써먹을 수 없지 않느냐. 침공의 위협이 줄어드니, 저들은 결사반대를 외치지 않을 거다.”

내정 돌리는 일에 열중하는 무로마치 막부는, 대마도고 나발이고 지방 영주들이 딴 마음을 먹기 전에 이 사태가 빨리 종결되길 바라고 있다.

괜히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져서, 영주들이 힘을 키우는 걸 반길 리가 없다.

“그럴 가능성이 높긴 하겠군요.”

“게다가 만약 제주에 왜관을 연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느냐.”

“...”

세종은 태종의 물음에, 다시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조선 내부의 사정을 넘어 왜국과 제주, 중국을 넘나들며 날실 꿰어 이어갔다.

‘아... 그렇군.’

조선과 거래하던 지역은 당연히 동래와 제일 가까운 본주(혼슈)서남부 지방과 구주(규슈)북부지방이다.

하지만 중국과 무역이 시작되자, 본주보다 중국과 더 가까운 구주로 흐름이 넘어갔다.

이로서 미묘한 신경전이 시작됐지.

이 판국에 왜관은 폐쇄되고 대마도는 사라졌네? 시간이 흐르면 구주가 무역을 독점할게 뻔하지 않나.

헌데 조선은 동래가 아닌 제주에 왜관을 열겠다고 하는데... 제주 또한 본주보다 구주에서 더 가깝지 않나.

그들 입장에선, 조선과의 거래선마저 구주에 빼앗기게 되는 꼴 아닌가.

“대내전大內殿(오우치)을 필두로 한 본주의 영주들은 왜관의 위치를 바꿔주기를 바라겠군요.”

“그렇게 되겠지. 하지만 대마도는 구주의 소이전少二殿(쇼니)과 관계가 깊지 않더냐. 그들이야 말로 우리를 제일 두려워하고 있으니, 대마도를 넘겨주고 대신 제주에 왜관을 개설하길 바랄 것이다.”

“그러면 또 본주의 영주들이 반발할 테니... 그들도 결국 대마도를 포기하는 쪽으로 가겠군요.”

세종의 대답에 태종은 히죽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러하다. 우리에겐 손해가 없지 않느냐? 그들끼리 알아서 처리할 테니, 우린 지켜보다가 편한 걸 택하면 될 거다.”

“음... 그들을 쪼개려면 제주와 동래. 나중에는 대마도에 왜관을 여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애초에 왜관을 열려는 건, 일본을 경제적으로 종속시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지 않나.

많은 영주와 엮일수록 이득이다.

“그렇다.”

태종은 한발 더 나아간 세종이 기특해서,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아니나 다를까 세종은 다시금 한발 더 나아갔다.

“강역으로 만드는 건 둘째치고... 지금 당장 쓸모도 없는 대마도를 얻으려는 건, 그곳에서 어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맞다.”

대마도가 척박한 건 사실이지만, 반대로 온갖 진귀한 생선이 많이 나는 것 또한 사실이지 않나.

걔들은 맨날 왜관에 생선 가져와서 “이거 좀 사주세요!”라고 징징거렸으니까.

어설픈 어선을 가지고도 그 정도였다면, 신식어선으론 엄청난 어획량을 기대할 수 있을 거다.

“수산기업이 이문을 올리기 시작하면... 조정대신들도 기업에 대해 달리 생각하게 되고, 대마도가 마냥 쓸모없는 섬이 아닌 걸 인정하게 되겠군요.”

“그렇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대마도가 살만하게 되면, 그때 본격적으로 사람을 보내 먹어치우면 된다.

만약 동래 왜관을 폐쇄하고 대마도에 왜관을 설치하면, 일본 영주들은 딴소리 못하고 꼼짝없이 대마도를 포기해야 할 테고.

나아가 이 일이 성공하고 제대로 유지되려면. 지금보다 강력한 해상지배력이 필요하니, 기선군이 증강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이걸 이용해서 조정대신들을 찍어 누르고, 군제개편을 통한 군사력 강화를 꾀할 수 있다.

둘은 닮은꼴을 하고서, 서로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왜관은 시간을 두고 그렇게 처리하면 될 테지만... 제주를 개발하는 일을 굳이 그 녀석에게 맡길 필요는 없겠구나. 전, 현임 하동현감과 하동의 기업가문을 이용하면 어렵지 않을 거다.”

“...?”

세종은 태종이 무슨 다른 생각이 있나 싶어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오랑과 뭔가 이야기를 나눈 게 있어 보이는데... 대체 뭘까?

세종은 자기가 놓친 게 뭔지, 생각하지 못한 게 뭔지, 골똘히 고민했다.

태종은 그런 세종을 보며, 이번엔 시원하게 이를 드러내며 웃어줬다.

자신도 연오랑의 제안을 듣고 화들짝 놀랐는데, 과연 세종은 어떨까?

“착호군捉虎軍을 만들까 한다.”

“착호군... 말입니까?”

‘호랑이 잡는 부대라고?’

세종은 감이 잡히지가 않아서,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냥꾼을 키우겠다는 건가? 그걸 굳이 군대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나.

연오랑이 호랑이 사냥에 도가 튼 건 알고 있지만, 녀석을 고작 사냥꾼으로 부리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맹수를 잡는 부대입니까?”

“글쎄다...? 이게 사냥꾼 군대인지, 개척군인지, 잡일꾼인지, 인질인지... 나도 잘 모르겠구나.”

“...?”

웃음기 머금은 태종의 말에, 세종은 더욱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

*****

조선 30년. 세종 3년.

파릇파릇하게 싹이 피어나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음...”

연오랑은 봄이 찾아오는 대지에 우두커니 서서, 심란한 눈으로 먼 곳을 굽어봤다.

저 뒤로 햇빛에 반사되어, 뱀처럼 꾸물거리는 물결이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저 꿈틀거리는 거대한 강이 21세기에도 보지 못했던 압록강이다.

허나... 뭔가 가슴을 간지럽히는 감흥보다는 짜증만 피어올랐다.

‘저길 건넌다고 개고생을 했지.’

그나마 겨울이 지난 지 얼마 안 되서 다행이지, 여름에 건너려고 했으면 진짜 죽을 고생을 해야 했을 거다.

“씁...”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개 같은 몽골새끼들. 멍청한 중국놈들.’

심란한 마음에 한숨과 함께 욕을 내뱉어 본다.

조선의 내정을 돌리기도 바빠 죽겠는데, 이게 뭔 난리인가.

강에서 시선을 떼고 앞을 향하자, 가시덩굴처럼 빼곡하게 땅에 박혀 있는 수백개의 막사가 박혀든다.

조선에는 야전 막사 같은 게 딱 정해져 있진 않지만, 이미 본받을 만한 훌륭한 선배가 있지 않나.

연오랑은 몽골식 게르를 만들어 쫙 뿌려버렸다.

만들기도 편하고 익숙하기도 하고 좋잖아? 조정대신들 중 일부는 기겁했지만, 이것보다 싸고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야전막사가 또 어디 있겠냐.

저게 모두 자신의 업적이니 자랑을 해도 부족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가만 보니... 저거 만든다고 개고생을 했던 걸 생각하면, 또 짜증이 치솟는다.

허공에 손발을 휘두르며 짜증을 토해내고 있자.

“어르신!”

저 멀리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

누가 자길 찾나 하고 뒤를 바라보니, 떡대들 셋이 냉큼 달려오는 게 아닌가.

그래도 저 자랑스러운 녀석들을 보니, 그나마 기분이 조금 풀어진다.

‘쟤를 일찍 찾은 건, 정말 다행이지.’

연오랑은 연전위, 연조운과 함께 있는 또 하나의 전설장수. 연손찬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 시대 조선에는 불법체류자 같은 부류가 둘 있었다.

하나는 재인才人이고 다른 하나는 화척이다.

재인은 훗날 사당패라 불리는 이들인데, 얘들은 조선판 집시 같은 녀석들이다.

일정한 거주지 없이 마을과 도시를 떠돌며, 재주를 뽐내고 동냥을 받았지.

그냥 여기서 끝났으면 문제가 없겠지만, 이놈들은 소매치기가 패시브고 여자단원들은 매음이 패시브였다.

질이 안 좋은 녀석들은 도둑질, 강도질, 납치를 자행했고, 여기저기 뒤집고 다니면서 마을을 어지럽혔지.

화척은 조선판 밀입국자 같은 녀석들이다.

이놈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모르겠는데. 거란,여진,몽골 출신이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조선 땅에서 유목생활을 하듯 이리저리 떠돌면서 사냥하고 목축을 했다.

지금 조선의 산과 숲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지 않나. 마을과 도시의 경계를 짓는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생활했지.

다만 이 녀석들도 얌전히 있으면 괜찮은데, 이따금씩 강도질을 하고 마을을 약탈하고 그랬다.

원래 역사에선, 세종 시기부터 이 녀석들을 전부 정착시키려고 노력했고, 이름조차 백정으로 바꿔 불렀지.

다만 이것도 쉽게 되진 않았다.

유목생활 하던 녀석들에게 갑자기 농사일을 시켰고, 그것도 좋은 땅도 아닌 곳에 던져놨으니 잘 됐을 리가 있나.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자 대다수는 정착했으나, 몇몇은 끝까지 말썽부리고 다니면서 화척, 백정에 대한 인식만 나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연씨의 가솔이 대체 왜 화척의 일원이 되었나. 별거 있나. 사랑 때문이다.

녀석의 아버지인 연초학는 화척 족장의 딸과 결혼했고, 차마 떠나지 못하고 화척과 함께 살면서 연손찬을 낳았다.

21세기 그가 박아 넣었으니 당연히 찾고 싶었지만... 화척답게 관의 관리도 받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연손찬을 뭔 수로 찾아내겠나.

착호군을 동원해서 강원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걸려든 거지.

아닌가? 어차피 화척과 화전민, 도적들은 다 잡아들였으니, 언제가 됐든 결국엔 찾았으려나?

아무튼. 녀석의 아버지는 멀쩡히 살아 있었기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넙죽 엎드려 연오랑을 반겼고, 연손찬 또한 당장 연오랑 밑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사령관님께서 어르신을 찾습니다.”

“내가 할 게 뭐가 있다고. 뭐 특별한 소식이라도 들어온 게 있냐?”

“글쎄요...”

셋은 세쌍둥이마냥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 자식들은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면서 훈련하더니, 연전위의 어리버리한 행동이 물들었나 보다.

‘호랑이도 한손으로 때려잡는 놈들이...’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바람결에 실려, 이젠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백호피가 펄럭거리며 그림자를 가렸다.

나지막한 언덕을 내려와 걸음을 옮기자, 바둑판처럼 빼곡하게 박혀 있는 군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 또한 연오랑의 작품 아니냐.

어설프게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어 고대로마군의 주둔지를 떠올리고, 21세기식 야전교범에, 조선군의 야전진지를 뒤섞어서 만들었다.

결국엔 네모반듯한 로마군 진지 안에, 몽골식 게르가 널려 있고, 그 게르와 게르 사이에는 21세기에나 있을법한 취사실과 화장실. 배수로와 참호가 결합됐다.

이건 21세기 사람이 봤어도 “이건 뭔 끔찍한 혼종이냐.”라고 할 거고, 조선사람이 보고도 “이건 대체 뭐냐.” 싶을 거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초창기 착호군을 창설하며 끌고 다닐 때. 얘들은 진지를 왜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 하는지 이해를 못했으니까.

물론 언제나 그랬듯이 두들겨 맞고 익숙해지자, 다들 불편했던 옛날로 돌아가지 못했지.

걸음을 옮겨 군진을 안으로 들어가자, 온갖 소음과 함께 고약한 냄새가 밀려든다.

수만필의 말들이 뿜어내는 냄새, 만여명의 병사들이 뿜어내는 열기. 온 사방에 빼곡하게 박힌 막사의 가죽냄새.

저쪽 한편에서 연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군침 돌게 하는 음식냄새까지.

예전이라면 ‘으... 내가 바로 성덕이구나!’라고 감명 받았겠지만... 일 년 넘게 이 생활을 계속하다보니 이젠 익숙함을 넘어 지겨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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