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챕터16. 건너다 (2)
누가 봐도 눈길을 사로잡는 백호가 등장하자.
막사 근처에서 무구를 점검하거나 노닥거리던 병사들이 하나같이 부동자세를 취하며 잔뜩 긴장했다.
몇몇은 뭐가 뭔지 몰랐지만, 눈치를 보면서 재깍 따라했다.
이곳엔 착호군 출신과 북계 양변에서 차출된 무관도 섞여 있는 터라, 다들 짬밥이 있어서 그런지 눈치가 꽤 빠른 모양이다.
“충성.”
“쉬어. 쓸데없이 멈추지 말라고 했지? 그냥 하던 거 해라. 전쟁터에서도 인사하고 그럴 거냐?”
“아닙니다!”
“누가 와서 ‘왜 인사 안 하냐?’라고 시비 걸면, 내가 시켰다고 말하고 나한테 보내. 알겠냐?”
“옙!”
한바탕 뒤집어 놓고 연오랑이 지나가자.
다들 무관들은 가볍게 숨을 내쉬었고, 근처에서 노닥거리던 이들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분이 용연군 대감 맞나?”
“맞네.”
“오...”
백호피를 둘러쓴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이미 오래전에 식인 백호를 때려잡았다는 소문이 조선팔도를 강타했으니, 다들 긴가민가하면서도 혹시나 했지.
“그런데 왜 그렇게 긴장하나?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토관 출신 무관의 질문에, 착호군 출신 무관들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쓴웃음을 흘렸다.
“이번 원정이 끝나면 자네들도 착호군으로 오겠지?”
“글쎄... 12사 소속 갑사들만 착호군으로 가는 거라서, 우리까지 가게 될지는 모르겠군?”
“나중에 대감 밑에서 훈련해보면, 우리가 왜 이러는지 알걸세.”
‘지옥을 맛보게 될 거다.’라는 표정으로, 무관들은 씁쓸한 표정을 이어갔다.
1년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연오랑과 함께한 지난 시간은 무관이 되겠다고 일평생 창과 활을 휘둘렀던 시간보다 더욱 혹독하고 힘들었으니까.
아마 겪어보면... 제 아무리 북변의 토관이라고 어깨를 으스대던 놈들도, 피똥 싸면서 살려달라고 외치게 될 거다.
“그나저나 저 나이에 용연군 대감이라... 벼락출세도 저런 벼락출세가 없을 걸세.”
“글쎄...”
“벼락출세라... 자네 대마도에 안 갔나보군?”
“아니지. 우리처럼 구르기만 했어도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착호군 출신 무관들은 또 다시 피식 비웃어줬고, 자신의 말에 동조할 줄 알았던 이들이 반대를 표하자 토관의 얼굴이 굳어졌다.
“용연군 대감이 비록 약관도 되지 않았지만, 그 실력만큼은 고금제일일세. 난다긴다하는 무관들도 죄다 한칼을 버티지 못했고, 그 정수를 우리에게 알려줬지.”
“그러니 여기서 함부로 혀를 놀렸다간 피곤해질 걸세. 용연군 대감 밑에서 칼질과 창질을 배운 무관과 병사들이 어디 한둘일 것 같은가? 이거 보게.”
무관은 그리 말을 하고선, 토관들의 부러움을 잔뜩 받는 호피 두정갑을 쓰다듬었다.
“이런 물건을 어디서 구할 수나 있을 것 같나? 이거 한 벌에 얼만 줄이나 아나? 다른 건 몰라도 대감 덕분에 팔자를 편 한미한 집안 출신이 한둘이 아닐 걸세.”
“그건 그렇지.”
다른 무관도 동조했고, 토관은 원정군 내에 호피, 표범피, 웅熊피, 늑대피 갑옷을 입은 무관을 숱하게 본 터라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저 짐승가죽으로 갑옷을 만들려면 한 마리로 되겠는가.
못해도 세,네마리는 필요할 테니, 착호군은 정말로 엄청나게 산짐승을 잡아댔을 거다.
갑옷 말고 그냥 팔려나간 물량도 엄청날 테니, 다들 한몫 든든히 챙겼을 테고.
연오랑은 저걸 마구잡이로 빼앗지 않고, 공에 맞춰 나눠준 것만으로도 모두에게 칭송을 받았지.
“아무튼. 어지간하면 대감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대감은 사람이 좋은 것 같으면서도 까칠한 면이 있으니까 말일세.”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게 말이지...”
연오랑이야 워낙 만나는 사람이 많아서 무관들에 대해 잘 모르지만, 밑에 사람들은 연오랑 성격을 잘 알았다.
미친놈이지만, 참으로 허물없고 격식 없는 인물. 시키는 것만 잘하면 뭘 하든 신경도 안 쓰는 털털한 인물.
하지만 실수하거나 수틀리는 일이 생기면 야차로 변하는 인물.
즉. 비위를 잘 맞추고 할 일만 잘하면, 사사로운 예법이나 격식 같은 건 신경도 안 쓴다는 뜻.
착호군 출신 무관은 열심히 썰을 풀기 시작했고, 그게 꽤 재밌었는지 근처에 있던 다른 토관들도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뒷담화를 열심히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연오랑은 계속 군진을 순시하듯 돌아다니면서 살폈고... 뭔가 걸려들었다.
얌전히 준비나 할 것이지, 왜 시끄럽게 목청을 높여가며 싸우고 난리인가.
그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소음의 진원지로 향했다. 뒤따르던 떡대들 역시 다 같이 입을 다물고 뒤를 따라갔고.
역시 싸움 구경은 재밌는 걸까? 원을 그리며 병사들이 몰려 있었고, 그 안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왜 말리는 거냐?”
“이러면 안 된다는 거 몰라서 그러쇼?”
“안될 건 또 뭔데? 이제 상호군이 될 내가 이것도 못 가진단 말이냐?”
꽤 덩치 큰 사내 둘이 목청을 높여 싸워대는데, 한 사내는 연오랑에게도 익숙한 낭피狼皮갑옷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톡톡. 연오랑은 앞에 있는 병사의 어깨를 두들겼고, 병사는 “뭐야?”하는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얼음이 되어 입을 벌렸다.
“조용히 하고.”
“옙. 훈련대장님.”
“뭔 일이냐?”
“그게...”
병사는 조용히 입을 놀리기 시작했고, 근처에서 구경하던 병사들은 연오랑을 발견하고선 조심스럽게 발을 놀려 사라졌다.
연오랑 곁에 있으면 재밌는 걸 넘어서, 괜히 불똥이 튀겨 자신만 고달파질 수 있다.
사연은 별거 없었다. 갑옷을 쥐고 있는 이가 착호군 출신 무관의 낭피갑옷을 빼앗으려 했고, 옆에 있는 다른 이는 그걸 막고 있었다고 했다.
놀랄 사실은 이 둘의 정체다.
“이징석. 이징옥 형제라고?”
“예. 대감.”
‘뜬금없네... 이징옥을 여기서 만나는구만.’
연오랑은 눈을 반짝거리며 덩치 큰 형제를 살폈다.
이징옥은 나름 네임드 인물 아니냐. 미디블워 게임에서 쏠쏠하게 써먹었던 녀석으로, 나름 무력스펙이 높았던 “캐릭터”지.
다만 이 녀석 또한 이제 막 무관이 된 신참 인터라, 그의 기억 속 “이징옥 캐릭터.” 하고는 괴리가 있었다.
이징석은 기억에 없는 걸로 보아 별 것 없어 보이는데, 어째 하는 짓이 개차반이네?
“둘은 형제인데 성격이 뭐 저렇게 달라?”
“글쎄요...?”
병사는 “그걸 왜 나한테 묻냐?”라는 눈빛을 살짝 뿌렸다가, 냉큼 고개를 숙였다.
‘잘됐다. 토관 놈들은 나를 잘 모르니까. 기강을 한번 잡아줘야겠군’
연오랑은 그리 생각하고선, 고개를 까닥거렸다.
“가서 말려라.”
“옙!”
기다렸다는 듯이 떡대들이 달려갔고,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도망갔던 병사들은 눈을 반짝거리며 뒤에 숨어서 구경을 시작했다.
착호군 출신들은 연오랑이 무관들 굴리는 걸 여러번 보지 않았나. 이번엔 또 어떤 식으로 굴릴지 기대하는 모양새였다.
“...?”
“...!?”
이징옥 형제는 어디 가서 덩치로 꿀려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전설장수 얘들과 비교할 수 있나.
꿀 먹은 병아리가 되어, 눈동자가 사정없이 굴러갔다.
이들은 원정군에 차출된 함길도 토관이라지만, 호피갑옷을 맞춰 입은 거한의 소문을 못 들어 봤겠는가.
이 뒤에 등장할 인물은... 당연히 백호 사냥꾼이지.
“용연군 대감.”
“...!”
둘은 연오랑을 발견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고,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숨기지 않고 노려봤다.
“내 직책이 뭐냐.”
“...?”
둘은 뜬금없는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합류한지 얼마 안 되서 솔직히 잘 몰랐다. 함길도와 평안도 출신들은 다들 그냥 용연군 대감. 똑똑한 미친놈 연오랑. 벼락출세 연오랑, 훈련대장이라고 불렀으니까.
“전위야. 내 직책이 뭐냐.”
“북정원정군 율령판군사律令判軍使 겸 군수사령관입니다.”
“율령판군사가 뭔 줄 아냐?”
“...”
알 리가 있나. 둘 모두 조정에는 있지도 않은, 착호군과 원정군 내에서만 통용되는 임시관직이니까.
둘이 답을 못하고 있자, 연전위가 냉큼 입을 열어 대신해줬다.
“신군율에 따라 원정군을 감사하고 판결 내리는 직책입니다.”
“...”
둘은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다시금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네 집안이 잘났고, 네가 상호군에 오른다. 이거지?”
“...”
“벗어.”
“예...?”
“갑옷 벗으라고 인마. 내 집안은 사세사공을 배출한 집안이고, 난 용연군이다. 네 논리라면 넌 내 말을 따라야 하는 거 아니냐? 벗으라고.”
이징석은 외통수에 걸린 걸 알고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방금까지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심지어 동생인 이징옥에게 눈치까지 주며 머뭇거렸다.
그의 입장에선,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나 보다.
양반 중에 양반인 연오랑이 자기편이 아니라 일개 병사의 편을 들어줘서 당황한 모양이다.
“웃기는 놈 일세? 네가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지? 근데 왜 부하한테 시키고 지랄이야? 그리고 쟤는 네 직속부하도 아니잖아?”
연오랑이 그리 말하자, 낭피갑옷을 챙겨든 병사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딱히 강단은 없는 모양인지, 그는 욕을 먹고서도 계속 머뭇거리며 꼼지락거렸고... 연오랑은 순식간에 다가가 사정없이 정강이를 때려줬다.
“억!”
“아차. 내가 만든 군법인데, 내가 어기면 안 되지.”
“괜찮습니다. 어르신. 이런 경우에는 상급명령위반과 형집행위반이니 무력을 사용해도 됩니다.”
“오...”
연오랑은 뒤에서 냉큼 답을 하는 연손찬을 기특하게 보고선, 이징석의 남은 정강이를 후려쳐 무릎 꿇렸다.
이징석만 그랬을까. 옆에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라는 눈빛을 사정없이 뿌리는 이징옥도 함께 후려갈겨줬다.
“여기가 너희 집 안마당이냐? 넌 부하들이 보고 있는데, 상급자하고 목청을 높여서 싸워?”
“억...”
“회의 갔다가 올 테니까, 네 상관과 함께 판군사 막사에서 대기해라. 늦게 오면...”
연오랑이 말을 흐리자, 둘은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소문은 쫙 날거 같고...’
연오랑은 둘을 매섭게 노려보고선 몸을 돌렸다.
“가자.”
“옙!”
다시금 폭풍을 일으키고, 휘적휘적 발을 놀려 지휘막사로 향했다.
그가 만들고 체계화시킨 숙영 진지인데, 지휘막사가 어디 있는지 모를 리가 있나.
앞장서서 계속 걸음을 옮겼고, 만나는 이들은 하나같이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쿰쿰한 냄새가 나는 게르 천막을 들추고 들어가자.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나이도 한참 어린 연오랑을 공대하며, 반갑게 맞이한 건 백발이 성성한 노인.
이 북정원정군 총사령관인 김을화다.
연오랑이야 당연히 기억에 없던 인물이나, 일전에 대마도 원정 때 봤던 인연이 있어서 낯설진 않았다.
게다가 총사령관에 나이도 적잖게 많으니, 연오랑이 품계는 높아도 맞공대하는 게 이상하진 않지.
“앉으시지요.”
“예.”
둘은 가만히 앉아 부관이 차를 가져오길 기다렸고, 이윽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올라오자, 연오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와서 보시니 어떠십니까?”
“두말할 필요가 있습니까. 착호군. 착호군 하더니 과연...”
김을화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착호군과 토관은 미리 압록강을 넘어 파속부로婆速府路(단동)에 주둔하고 있었고, 장군급 지휘관들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허나... 그도 살아온 세월이 있으니, 조선 초부터 난다 긴다하는 부대를 다 이끌어 봤을 터, 이런 정병은 처음 봤을 거다.
‘허... 역시 연씨는 연씨라는 건가. 대마도에서의 일이 확실히 요행은 아니었어.’
김을화는 들어 올린 찻잔에 얼굴을 숨긴 체, 조심스럽게 과거를 더듬어갔다.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이 바라는 대로 “군”의 작호를 내려줬다.
반대는 젊은 신료들이 냈고, 오히려 노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들은 대부분 연씨를 알았고, 연오진이 팽 당한 것도 알고 있다. 속사정은 전혀 다르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지.
그랬던 연씨가 엄청난 공훈을 세웠으니, “군은 조금 많이 준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보상은 해줘야지.”하고 넘어갔지.
대마도 정벌에 참여했던 김을화 또한 같은 의견이었고. 나아가 실직도 없는 품계이니, 더욱 받아 들일만 했다.
이후 착호군이 창설되고 나서도 꾸준히 시끌시끌했다.
착호군은 창설명분이자 명칭처럼, 한성과 경기도의 산과 숲을 싹 쓸어버리면서 맹수소탕작업을 진행했고.
고작 일 년밖에 안됐지만, 이젠 한성 인근에서 호랑이 포효소리는커녕, 멧돼지 우는 소리도 안 들리게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