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87화 (87/538)

87. 챕터16. 건너다 (3)

태종은 “이 좋은 걸, 우리만 할 수 없지!”라며 착호군 이외에 기존 12사 출신의 갑사들까지 불러와 같이 굴려댔다.

내금위 총지휘관이던 김을화는 부하들이 어떤 훈련을 받았는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 와서 보니 감흥이 색달랐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방금 전까지 산을 타넘으며 맹수를 때려잡다 온 정예병.

완전편제 된 일만삼천의 중기병이라니!

조선이 건국된 이후로 이 정도의 기병군단이 모인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김을화 뿐만 아니라 모든 장군들은,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마냥 다들 눈을 반짝였지.

이 기병군단을 만들어낸 1등 주역이 바로 연오랑 아니냐.

김을화는 연오랑이 뭔 지랄을 해도, 웃으며 받아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헌데 무슨 일로... 혹시 산동에서 새로운 소식이 왔습니까?”

“그렇습니다. 결국 가욕관嘉峪關이 뚫렸다고 합니다.”

“머저리 같은 중국놈들. 다 망한 거지떼 놈들을 못 막아서, 이게 뭔 지랄이야. 대체.”

김을화는 연오랑의 욕설에 흠칫했다가, 얼른 표정을 가다듬었다.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더니, 소문이 사실이구나.’

젊은 무관들 중에선 중국을 얕보거나 별거 아닌 취급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연오랑은 한술 더 떠서 자신 앞에서 쌍욕을 하고 있다.

아무리 망해도 중국은 중국인데, 진짜 개똥 취급을 하고 있다.

“와라瓦刺(오이라트)와 달단(몽골)은 견원사이나 마찬가지인데, 용케 힘을 합쳤나 봅니다?”

“서로 상잔해서는 답이 없는 걸, 깨달을 때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망할 놈들이 영원히 깨닫지 못하면 좋겠는데... 아무튼. 병력은 몇이나 쳐들어왔답니까?”

“산동 상인들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대략 20만 정도 추정된답니다.”

“20만은 무슨. 하여간 중국 뻥쟁이놈들 허풍은...”

“허허...”

연오랑의 막말에, 김을화는 멋쩍어서 그저 헛기침만 내뱉었다.

지들끼리 싸우기도 바쁜 놈들이 무슨 20만이냐.

잘게 찢어진 몽골이 20만명을 뽑아낼 정도로 뭉쳤으면, 이미 진작 가욕관을 뚫고 들어가서 중국 서북부를 다 먹었을 거다.

“20만에서 반으로 뚝 잘라야 맞을 것 같고, 거기에 애가 타는 산동 놈들이 우릴 떠보려고 또 부풀렸으니 반의 반쯤 깎고...”

연오랑은 가볍게 계산을 하고선, 결론을 내렸다.

“대충 6,7만 정도가 쳐들어왔을 거고, 으르렁거리는 둘이 함께 다니진 않을 것 같은데...?”

“예. 와라는 사천으로, 달단은 서안(장안)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흐음.”

그래도 나름 똘똘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천은 원말명초 시절에, 최후까지 원-명 세력이 대립하던 지역.

나아가 들어가기도 나오기도 쉽지 않은 지역이라서, 명나라 시절에도 중국내지와 조금 동떨어져서 지내던 곳 아닌가.

그래서 생각만큼 안정된 곳이 아니었다. 반대로 물산은 또 풍부했지.

아무튼 여긴 일단 먹으면 꿀땅 인터라, 운석핵꿀밤 이후로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사천군벌끼리 열심히 싸워대고 있었다.

장안은 당나라 이후 쭉 쇠락했다가, 명이 들어서면서 재개발이 이뤄져서 나름 부활한 곳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예전의 위상을 찾진 못했지만 장안은 장안 아니냐. 그곳 역시 윤기가 좔좔 흐르는 탐스러운 먹잇감이지.

“이제 출정을 하긴 해야겠군요.”

“예. 회의를 준비하겠습니다.”

“아아.”

연오랑은 손을 쓱쓱 흔들며 만류했다.

애초에 그는 조정이 임명한 원정군 장군이라기 보단, 태종의 명으로 곁다리로 껴 있는 상태 아닌가.

특히나 작전 담당이 아니라 보급과 군수 담당이니, 굳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움직일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아셨습니까? 제 눈치 보지 마시고 알아서 명을 내리시지요. 영감께서 총사령관 아닙니까.”

“예...”

김을화는 뭐라 말하기 힘든 애매한 눈으로 연오랑을 바라봤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를 무시할 수가 있나.

용연군이라는 품계는 둘째 치고, 태종의 어여쁨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인물 아니냐.

착호군을 이끌면서 둘이 딱 붙어서 다니는 걸 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대신이자 총사령관인 김을화도 연오랑을 무시하는 건 부담스러웠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산동 상인이 왔다고 하니, 보급품을 점검해야겠군요.”

“예. 전체회의가 시작되면 알리겠습니다.”

“그리합시다.”

연오랑은 미련 없이 털고 나왔고, 곧장 발을 놀려 군진 밖으로 빠져나갔다.

조선군진은 의주 반대편 압록강 벌판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었다.

착호군이 조선 땅에서 매번 하던 일이 뭐겠냐.

산을 포위하여 감싸곤 숟가락으로 파먹듯이, 온갖 맹수와 산짐승을 다 때려잡아 무주공산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었다. 뒤이어 잡일꾼으로 변신해서 산과 숲을 개척,개간했고.

그러니. 조정의 명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할 일 없이 그냥 놀고먹는 꼴을 연오랑이 봐줬겠는가.

당연히 여기 와서도 작업은 이어졌고, 착호군은 군진을 완성하자마자 곧장 사냥 및 공사 작업에 들어갔지.

그래서 이곳. 21세기에는 단동이라 불리는 지역을 차지했고, 고작 한 달 사이에 번듯한 항구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음.”

연오랑은 도시 입구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마냥 길쭉한 석비를 바라봤다.

“호주”라고 적힌 지명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눈이 찡그려진다.

‘호주라... 왜 하필 헷갈리게 호주야?’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속으로만 내뱉어 본다.

저 멀리 한성에 있을 세종과, 강원도 어딘가에 있을 태종에게 욕을 날려준다.

압록강 하류, 북쪽 땅은 명의 영토였으나, 명이 망한 후론 무주공산이 됐다.

누구도 소유권을 주장하기 힘들었고, 그냥저냥 아무나 왔다 갔다 하는 곳이 됐지.

세종과 태종은 이번 원정길에 이곳을 집어삼켜서, 조선의 강역으로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조정에선 반대의견이 나왔지.

안 그래도 조선내지를 개척, 개발하기도 바쁘다.

헌데 여진족들이 왔다갔다거리는 이곳에 인력과 재원을 투입하는 건, 투자 대비 효과가 떨어지지 않나.

하지만 이미 훌륭한 전례이자, 일꾼이 있었다.

초반 개척 작업은 착호군을 동원해서 최대한 끝내놓고, 그 후에는 귀부한 여진족과 의주 집안을 쥐어짜서 인력과 재원을 보태게 한 거지.

세종과 태종은 그간 사무역으로 열심히 배를 불린 의주의 집안을 이번 기회에 단속할 생각이었고, 조정은 그 뜻을 읽고 나자 만장일치로 찬성했다.

별 수 있나. 왕이 까라면 까야지.

의주 집안은 인력과 자재 등을 압록강 너머로 실어와, 도시 건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들 입장에서도 마냥 손해는 아니잖아?

압록강 하류 양변을 모두 조선땅으로 만들어 틀어쥐면, 중국 상인과 여진족을 단속하고 견제하는 일이 더 쉬워지니까.

“오셨습니까. 어르신.”

“오냐.”

연오랑의 백호피는 너무도 눈에 띄는 지라, 공사판 한쪽 구석에 서 있기만 해도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당연히 책임자들이 냉큼 달려와 머리를 조아렸다.

다만 놀라운 건, 이곳의 책임자 중 하나가 우두만이라는 거지.

“잘 지내고 있냐?”

“헤헤. 저야 어르신 덕택에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르지 않습니까.”

“아부 떨어봐야 떨어지는 건 없어. 인마.”

연오랑은 어설프게 상투를 튼 우두만을 보며 피식 웃어줬다.

다만 둘의 허물없는 모습을 본 다른 여진족들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누구냐?”

“이번에 귀부해서 교육을 끝마친 부족장들입니다.”

“오강창이라 하옵니다.”

“변중철, 자강문, 구공포, 후면중이라 하옵니다.”

과연 교육을 받았다더니, 이름도 전부 조선식으로 바꾼 모양이다.

우두만의 소개에 족장들은 냉큼 고개를 숙였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공손하게 읍하는 게, 어지간히 겁을 집어먹었나 보다.

다들 털모자를 벗고 인사하자, 머리칼을 시원하게 밀어버린 민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머리 자르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

무슨 의도인지 몰라 다들 입을 다물었고, 우두만은 피식 웃으며 대신 답했다.

의도는 무슨, 연오랑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물었을 거다.

“다들 조선인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어설프게 굴어서는 죽도 밥도 안 되지 않겠습니까?”

“오... 죽도 밥도 안 된다는 말도 쓰고, 너도 많이 늘었구나.”

“헤헤.”

연오랑의 칭찬에 우두만은 다시금 헤실헤실 웃었고, 족장들은 자신들을 대하던 모습과 전혀 다른 우두만의 모습에 얼굴이 찌그러졌다.

글자도 모른다고 살벌하게 욕하던 녀석이, 어쩜 이렇게 아부를 떨까.

“다들 잘 지내냐? 지내는데 어려움은 없고?”

“참으로 좋습니다. 은덕을 베풀어 주시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습니까.”

“너도 조선말을 많이 익혔나 보군. 어려운 말도 쓰고. 나한테 감사하지 말고 조선과 전하께 감사해라.”

“예. 장군 어른.”

“너는?”

“저는 이번에 축산?목산?기업을 만들어서 양을 키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그래. 너는?”

“저는...”

족장들은 연오랑. 이 백호피를 뒤집어 쓴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익히 아는 터라, 조심스럽게 답을 이어갔다.

대마도 정벌은 생각보다 여파가 컸고, 여진족에게도 파문을 일으켰다.

만수천명을 포로로 잡고 그 큰 섬을 죄다 불태워버려?

이건 그간 깨작깨작 여진족을 밟아대던 조선의 방식과는 차원이 다른 공포였지.

“남쪽을 정벌했으니, 이제 북쪽을 정벌하면 어쩌지?”라는 두려움이 퍼져나갔고, 100호 미만의 작은 부족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앞다투어 조선에 신속했다.

하지만 조선의 반응은 예전과 달랐다.

세종,태종은 큰 그물을 뿌리고 큰 그림을 그리면서 양반사대부, 지방호족들까지 죄다 찍어 누르려고 하는데, 여진족들을 예전처럼 허술하게 봐줄 리가 있나.

일전처럼 조공 바치고 입조해서 충성맹세하고, 어설픈 자치권을 허락받는 시절은 끝났다.

여진족 습성을 버리고 완전히 조선 백성이 되든지, 아니면 그냥 그렇게 살다가 나중에 걸리면 뒤지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거였지.

이는 연오랑이 바라던 일로, 얘들을 싹 흡수해서 조선 내지로 뿌려버려야 인력난이 해소될 게 아닌가.

실제로 이렇게 흡수된 여진족들은, 부족단위가 아닌 가족단위로 찢어져서 각 기업들로 흡수되었다.

아무래도 하던 일이 목축일이 많다보니, 대다수는 행상이 열심히 만들고 있는 목장, 축산기업에 취직해 조선인으로 새 출발을 시작한 거지.

우두만은 이 과정의 첫 단추를 담당했다.

의주에 머물면서 신속한 여진족에게 조선문화, 조선법, 조선말을 가르치고, 이따금씩 압록강 너머를 떠도는 부족을 회유했지.

몇해 전부터 이런 새로운 회유정책이 지속됐는데, 드디어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것도 대마도 정벌 때보다 더 막강한 병력을 이끌고 등장.

압록강 인근 부족은 전부 비상이 걸려서 난장판이 펼쳐졌고, 또 다시 소부족들이 호주로 몰려와 조선에 신속하게 된 것.

이 족장들이 바로 한달 전에 흡수된 이들로.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을 보기 위해 냉큼 달려온 거지.

그리고 첫 만남인데도 곧장 알아차렸다.

“아. 이 인간. 보통이 아니구나. 우두만이 했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구나.” 라고 말이다.

저 거대한 덩치와 저 덩치를 감싸는 백호피라니? 이건 여진족 대부족장들도 갖지 못한 귀물 아닌가.

전설, 설화처럼 왜구 백수십명을 한칼에 썰어버렸다는 소문이, 마냥 헛소문이 아닌 걸 직감했다.

“두만. 넌 따라오고, 너흰 그럼 고생해라.”

“예. 어르신.”

“예. 장군 어른.”

연오랑은 쑥덕거리는 여진족장을 뒤로하고, 공사가 한창인 호주 중심가로 걸음을 옮겼다.

공사판을 지나 이윽고 도착한 곳은, 아직 생나무 냄새가 남아 있는 신식 관아.

이곳 역시 정신없이 바빴는데, 역시나 백호피를 알아보고선 책임자들이 냉큼 달려왔다.

이젠 나름 키가 커서, 연오랑의 가슴까지 올 정도로 자란 꼬마 이순지와 토목건축성애자 정분이다.

“어르신!”

“용연군 대감. 오셨습니까.”

“오냐.”

연오랑은 인사를 받기 무섭게, 곧장 본론으로 넘어갔다.

“부두 만드는 건 잘 되고 있냐?”

“넵! 걱정 마시죠. 석재도, 목재도, 인력도 모두 충분합니다.”

이순지는 앙증맞은 팔을 휘두르며 열심히 목청을 높였다.

이곳 호주 옆에 호산虎山이 있었고, 여기엔 고구려 시절에 지어놓은 박작성泊汋城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착호군은 이 잔해를 전부 뜯어와 건설자재로 써먹었고, 건물과 성벽, 부두를 짓는데 이용했지.

“최대한 빨리 완성하는 게 좋을 거다. 이번 원정의 보급품은 이미 다 옮겼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옙! 의주의 집안들도 빨리 만들어야 이득을 볼 테니, 눈치 보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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