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챕터16. 건너다 (6)
“동팔참 인근에도 여진부족이 없었나?”
“확신할 순 없으나...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머문 흔적이 남아 있긴 한데, 버려진지 오래된 듯 했습니다.”
“음...”
연오랑은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려봤다.
원나라는 요동 심양에서 압록강까지 곧장 이어지는 역참을 만들었고, 이를 흔히 동팔참이라 불렀다.
원래 역사에선 이걸 명이 어중간하게 보수하면서 사용했다가, 여진족이 강성해지자 반쯤 방치했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지금은 명이 없어지면서 완전 방치됐고, 아직 여진족이 대거 남하하지 않아서 말 그대로 주인 없는 땅이 됐다.
요동상인조차 직통으로 이어지는 동팔참을 이용하지 않고. 요동반도를 돌아서 오는 안전한 길을 이용했으니까.
‘가면서 성곽을 지을 수 있는 지 확인해봐야겠네.’
산맥과 같은 지형은 딱히 변하지 않으니, 요충지는 예나 지금이나 요충지 아닌가.
동팔참은 하나같이 관문,거점 역할은 할 수 있을 거고, 여길 쥐어틀면 조선에서 요동으로 진출하는 길을 닦을 수 있을 거다.
연오랑은 생각을 정리하곤, 한선후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사대에 충원할 인재는 다 뽑았나?”
“예. 토관 중에서 마흔여덟을 뽑아 충원할 생각입니다. 헌데 이징석, 이징옥 형제도 명단에 올랐습니다만...”
“천오백명 중에서 마흔여덟이라, 토관 실력도 나쁘지 않군.”
기사대장. 한선후의 대답에 연오랑은 턱을 쓱쓱 매만지며, 물끄러미 김종서를 바라봤다.
“...”
김종서는 딱히 잘못한 것도 없지만, 괜히 부담스러워서 눈을 슬그머니 흘렸다.
“판군사대장. 그들 신원 확인은 끝났습니까?”
“예. 여진인이 포함되어 있으나, 신속한지 오래되어 문제없습니다.”
“흐음.”
연오랑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인도 연오랑과 같은 군의 작호를 가지고 있지만, 품계를 따지면 연오랑이 더 높았다.
나아가 태종과 연오랑 밑에 있긴 하지만, 어찌됐건 왕족인 그가 병사를 거느리고 있지 않나.
괜한 모함을 받지 않으려면 누구보다도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했고, 착호군에서 함께 구르면서 비슷한 연배인 연오랑과도 나름 친해졌지.
김종서는 일전에도 이런 모습을 보긴 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워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연오랑이 태종의 오른팔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지만, 태종의 서자마저 손끝으로 부리는 걸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병마부사兵馬副使.”
“예.”
드디어 자기 차례가 오자, 김종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토관이 착호군에 합류한지 한 달이나 됐다. 적응하는 게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익숙해져야지 않나? 하급 무관이라면 모를까, 장군쯤 되면 알아서 해야지.”
“예...”
김종서는 “네가 알아서 밑에 애들 굴려야지. 굳이 내가 나서야겠냐?”라고 돌려 까는 말에, 이징옥 형제를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김종서가 무능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니었다.
착호군은 21세기식 편제에, 15세기와 21세기를 합친 병과에, 15세기 조선군 병종에, 작전교리와 군율은 15세기와 21세기를 합친 형태를 띄고 있었다.
이 또한 끔찍한 혼종 아니냐.
그나마 절제사 이상의 장군급 무관은, 착호군에 파견되어 훈련 삼아 병력을 운용해봤지만... 김종서는 일을 너무 잘해서 오히려 기회를 못 얻었다.
지금 역사에선. 명의 멸망과 태조,태종의 화해로 인해, 동북면 여진족의 이탈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조정은 무력징치보단 유화책에 집중했고, 문관출신을 대거 함길도로 파견해 관리해 왔지.
해서 조정의 요직을 거치면서 승승장구해야할 김종서가, 이른 시기에 함길도에 박혀서 동북면을 관리하고 있었다.
문관출신인데 무관이 할 일만 오래 하다 보니, 장군이라 불리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음...’
김종서는 연오랑과 함께 있는 셋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연오랑의 타박은 그냥 한소리 하는 거니 마음에 두지 않는데... 이 세 사람을 대하는 건 정말 애매했기 때문이다.
착호군에는 특수기술군이라는 보조병과 말고, 연오랑 직속. 정확히는 태종 직속의 무력병과가 따로 있었다.
첫째는 21세기 특전사를 15세기에 맞춰 개조한 특전대.
대마도에서의 특전대를 보다 업그레이드한 병과로, 원래 역사에서 세종이 만든 체탐자의 상위,확장 형태 쯤 되지.
둘째는 조선팔도 전체를 뒤져서, 무예에 특출난 인물을 뽑아 만든 최정예 기병인 기사대.
연오랑은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을 중갑기사를 잊지 못했고, 그걸 조선에 맞춰 개조한 기사대를 만들었다.
마지막은 21세기의 군법무관과 헌병대를 합친 판군사대다.
전부 생경하지만, 사실 마지막 부대가 토관 출신들을 제일 괴롭혔다.
조선뿐만 아니라 15세기 군대는 일상 구타가 패시브고, 지휘관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구분이 흐릿했다. 여기에 신분제가 결합하면 더욱 심해지지.
즉. 지휘관이 부하들을 자기집 노비 부리듯 마구 부렸다는 거다.
21세기에서 온 연오랑이 이걸 그냥 놔뒀겠는가.
군형벌의 처벌이 구타와 체벌만 있어서는 서로 감정만 상하고, 전투력 보존에는 전혀 도움도 안 된다.
나아가 명확한 권한과 제약 없이 부하들을 마구 굴려대면, 이게 곧 비리부패와 파벌화로 이어지고, 정말 심해지면 사병화로 나아간다.
사병화라니? 태종이 경기를 일으킬 소리 아닌가.
당연히 신군율을 밀어붙였고, 판군사대장에 공녕군 이인을 박아 넣었지.
무려 태종의 아들이 판결해서 벌을 주겠다는데, 어느 누가 개길 수 있을까.
하여 신군율은 권한과 임무를 명확히 해서, 부하들을 사사로이 부릴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처벌조항에서 구타와 체벌을 없애고, 보다 세련되고 악랄하게 굴었지.
녹봉을 깎고, 복무일수를 늘리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개인단련을 시키고, 취사,야간경계근무,청소 같은 노역으로 대체했다.
토관 출신들은 멋도 모르고 전처럼 굴다가 여럿 개망신을 당했고, 이번엔 이징옥 형제를 넘어서 김종서까지 망신을 당한 거지.
“판군사대장. 처분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둘이 형제라고 하니, 변소청소노역 일주일로 하겠습니다. 그 전에 출정하게 되더라도 노역일자는 변하지 않습니다. 임시 주둔지에서도 노역은 계속합니다.”
“나쁘지 않군요.”
“...”
김종서는 혹시나 했던 판결이 떨어지자,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토관 중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이징옥 형제가 똥수레를 끌고 다니게 생겼으니... 상관으로서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처분은 그렇게 하고. 이징석은 특전대로, 이징옥은 계획대로 기사대로 옮기지.”
“...?”
뜬금없이 이징석을 떠맡은 특전대장 이정호는, 연오랑을 향해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 못 차리고 허울뿐인 권위에 목메는 녀석이니, 네가 맡아서 굴려라. 특전대에 속해 훈련하다보면, 나쁜 물도 조금 빠지겠지.”
“알겠습니다.”
특전대는 무예실력만 보고 뽑은 터라, 양반사대부,지방호족 자제들뿐만 아니라 천민, 양민이 모두 뒤섞여 있는 부대다.
이징석처럼 헛바람이 잔뜩 들어간 녀석을 보내면... 잘 적응해서 정신상태가 바뀌든가, 아니면 외톨이가 되어 전장에서 혼자 죽겠지.
“종서.”
“예. 대감.”
“적응기간은 끝났고, 이제 실전이다. 토관들이 지금처럼 어설프게 굴면, 결국 죽게 되는 건 자기 자신이다. 살기 위해서라도 똑바로 처신하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지휘관 회의가 있으니, 같이 가지.”
“옙!” “넵.”
연오랑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다들 줄줄이 일어서 지휘막사를 향해 나아갔다.
연오랑 일행이 지휘막사에 도착하자, 곧장 회의가 시작됐다.
특전대장 이정호가 정찰해 온 사항을 놓고, 자기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이동계획을 짰고... 연오랑은 말없이 지켜만 봤다.
‘이야. 눈이 부시구만. 올스타전이네.’
자리에 위치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고 있으니, 세종과 태종의 속마음이 읽어진다.
최윤덕, 이순몽, 유은지, 조비형, 하경복, 이각, 김효성, 김종서, 김윤수, 전흥, 최해산, 이각, 황보인.
원래 역사에서 세종의 아이돌 그룹 멤버. 4군6진 개척의 주역이 전부 포함되어 있으니, 지금 역사에서도 다들 능력이 있는 모양이다.
‘미리미리 경험을 시키려는 거군.’
이제 슬슬 태종의 시대가 저물고 세종의 시대가 오고 있으니, 조정대신들의 후임자를 찾을 때가 됐나 보다.
눈여겨보는 이들에게 원정경험을 시켜서, 북방 경락의 틀을 짜려는 속셈일 테고.
‘나쁘진 않은데, 너무 급하게만 안하면 좋겠는데...’
연오랑은 의욕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종과 태종을 떠올렸다.
태종은 착호군 2기를 이끌고 강원도에서 맹수소탕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거다.
동시에 맹수의 영역이었던 산과 숲을 개간해서 사람의 영역으로 바꾸고 있을 테고.
세종은 열심히 신농법을 조선팔도에 전파하고, 양전사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경기도에서 이앙법을 확대해 과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고 있을 거다.
이렇듯 안 그래도 바쁘니, 지금 당장은 동북면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지 않을까.
‘적어도 원정군이 회군하고 나서부터 진행되겠지. 문제라면 태종 그 양반이 걱정되긴 한데...’
원래 역사에선 내년에 태종이 죽게 되지만, 지금은 글쎄... 아무리 봐도 한 10년은 더 살 것 같다.
귀찮게 하는 조정대신도 없고, 잔소리하던 원경왕후도 세상을 떠났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냥을 마음껏 할 수 있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 정병이 자신 손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말을 안 듣던 양반사대부, 지방호족들이 고개를 숙이고, 이 병력을 이끌고 다니면서 골칫거리였던 지방호족을 뜯어내고 있다.
태종 인생에서 지금보다 행복한 시절이 없으니, 스트레스도 안 받고 장수하겠지.
“...”
이런저런 상념을 하고 있는 동안 회의는 끝이 났고, 모두의 시선이 연오랑에게 닿았다. “마지막으로 더 할 말 있어?”라고 눈빛으로 묻고 있다.
연오랑은 마다하지 않고, 모두에게 잔소리를 날려줬다.
“이번 원정의 목표를 알고 있을 거다. 우리가 왜 남의 싸움에 끼어들었는지 알지?”
“...”
다들 답을 알고 있지만, 이걸 정리하기가 힘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명이 망한 후. 요동은 북원의 잔당, 명의 요동, 동방3왕가에서 이어진 우량카이 3위, 자잘한 여진족 부족이 대치했다.
북원의 잔당은 요동지방으로 내려오려 했고, 요동과 우량카이 3위는 힘을 합쳐 남하를 막고 있었지.
헌데 칸의 자리를 놓고 죽도록 싸우던 북원잔당이 임시 협정을 맺고, 나아가 원수사이인 오이라트와도 손을 잡고 중국 서북부를 침공했다.
요동과 우량카이 3위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빈집털이를 감행.
북원잔당을 서쪽의 몽골 초원까지 밀어붙여, 요동의 압박을 해소하려 했지.
하지만... 뒤가 불안하다.
조선은 강성했던 명과도 으르렁거렸던 놈들이고, 얼마 전엔 대마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으며, 조선 내지에는 완편된 수만명의 군대가 돌아다니고 있다.
아무리 봐도 조선의 움직임이 수상한 거지.
빈집털이를 갔는데, 자기집이 빈집털이를 당하면 곤란하지 않나.
둘은 조선과 협정을 맺고, 원정군을 요청했지만... 조선이 뭐가 아쉬워서 저들의 부탁을 들어줄까.
결국 둘은 통 크게 내질렀다.
몽골 출신인 우량카이 3위가 내줄 수 있는 거야 뻔하지 않나. 말, 양, 염소 같은 가축 만여마리를 넘겼다.
요동은 원나라 시절부터 몽골족, 여진족, 한족, 고려인이 섞여 살았고, 원명교체기에 꽤 많은 고려인이 조선으로 되돌아 왔다.
후에 명이 들어서면서 이걸 막았는데, 말과 문화가 다른 이들은 요동에 제대로 동화되지 않고 겉돌고 있었지.
지금 역사에선. 명이 망한 이후로 고려인이 알음알음 조선으로 넘어왔고, 요동은 그걸 어떻게 통제하거나 제약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해서 어차피 붙잡지도 못하는 상황이니, 요동은 5만에 가까운 고려인을 조선에 송환하기로 한 거지.
하지만 조선은 “야. 어차피 니들도 다 먹여 살리기 힘들어서 우리한테 보내는 거 아냐.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어. 뭐 더 없어?”라고 강짜를 부렸다.
실제로도 틀린 말이 아니잖아? 지금은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졌다고는 하나, 5만의 거지떼가 밀려오면 조선이 쉽게 감당할 수가 있나.
안 그래도 간당간당하게 버티는 요동은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지원군이 등장했다.
이전부터 순망치한의 관계를 유지하던 산동이다.
북원잔당이 서쪽으로 대거 이동하자, 과거 연왕부였던 북평부는 여유가 생겼다.
북평(북경)을 지키는 북쪽 관문인 거용관居庸關에서 병력을 빼서, 산동 북부로 돌리기 시작한 거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산동은 “우리가 군량을 다 대줄게. 고려인 먹여 살릴 식량도 우리가 준다!”라고 조선에 외쳤지만.
조선은 “니들이 지금까지 눈탱이친 게 얼만데, 고작 이걸로 되겠냐?”라며 또 강짜를 부렸다.
하여 산동 또한 통 크게 내질렀다.
조선이 그렇게 바라던 초석을 넘긴 것이다.
산동에는 미디블워 게임에도 등장할 정도로 유명한 초석광산이 있었는데도, 그간 산동은 죽어도 조선에게 초석을 안 팔고 있었지.
세종과 태종은 뜯어 먹을 만큼 뜯어 먹었다고 생각하고선, 이미 준비가 되어 있던 착호군에 12사 중앙군과 북변 토관을 합류시켜 원정군을 꾸렸다.
사실 조선 입장에서도 북원잔당을 밀어내서 여진족의 숨통을 열어놔야 했고, 요동-북평부-산동 사이의 관계가 지금처럼 유지되길 바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