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챕터17. 나아가다 (1)
“몇몇 제장들은 이 기회에 요동의 모든 여진족을 치고, 북원의 잔당과도 시원하게 싸워서 공을 세우길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
연오랑은 성질 급하기로 유명한 이순몽, 유은지를 특히 노려봤다.
“헛짓거리를 했다가는, 상왕전하와 전하의 뜻을 이어받은 내가 직접 목을 쳐주겠다.”
“...”
웃기게도 이걸 허풍으로 흘려듣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마도 정벌에 함께 하지 않았나.
품계가 없던 시절에도 막나가던 녀석이 이젠 감투를 썼네? 수틀리면 진짜로 목을 날려버릴지도 모른다.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은 것도 처음이고, 완편된 기병군단을 이끌고 북방으로 향한 것도 처음이고, 달단 초원까지 원정을 가는 것도 처음이다.”
“...”
“공에 눈이 멀어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돌다리 두드려 가듯 탄탄하게 다지면서 움직인다.”
“예!” “옙!”
“달자 놈들 열명 죽이는 것보다, 우리 병사 한명 죽는 게 더 아깝고. 우리의 목표는 따로 있다는 걸 잊지 마라. 그 전까지 실전연습을 한다고 생각하고 병력을 운용하도록.”
“알겠습니다. 대감.”
“옙!”
연오랑은 다시금 다짐을 받았고, 모두의 눈을 한명씩 굽어봤다.
사서에 남을 법한 대업에 동참한다는 생각에, 잔뜩 들뜬 녀석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날려줬다.
*****
야트막한 내천이 양 옆으로 흐르고, 이름 모를 잡초와 보리가 함께 뒤섞여 자라는 어설픈 밭.
옆으로는 울창한 산림 인근에선 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그 주변으론 사냥을 시작하는 호랑이처럼 기병대가 숨죽이고 포진해 있었다.
“장군. 배치를 완료했습니다.”
“소대별로 거리를 유지하고 진군해라.”
“옙!”
이각의 명을 받은 기병은 부리나케 튀어나갔고, 그 기병을 따라 십수기의 기병이 일시에 사방으로 퍼지면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살짝 튀어나온 구릉지 위에서 지켜보던 이각은, 저 앞에 보이는 여진부락을 포위하는 기병대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정말 빠르군.”
“예.”
사실 이각도 이런 대규모 기병부대를 지휘해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 알진 못했지만... 그래도 지금껏 봐왔던 병사들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는 건 알았다.
경기도와 충청북부, 강원도의 산을 타넘으며 포위작전을 해왔다더니... 평야로 내려오자 물 만난 고기처럼 팔딱거린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착호군 편제가 지휘에 도움이 되나?”
“글쎄요...”
이각의 질문을 받은 겸사복 출신 무관. 유응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빠졌다.
개개인의 실력은 착호군이 기존 조선군병을 압도한다.
이들은 무기술 집체훈련이라는, 생경하지만 체계적인 병기숙달훈련을 일 년 넘도록 꾸준히 해왔으니까.
하지만 “지금 조선군 편제와 착호군 편제 중에서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를 묻는다면... 마음이 기울지만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착호군 편제가 알아보기 편하고, 다루기 편한 건 사실입니다.”
“그건 그렇지...”
이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흐렸다.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더니, 이렇게까지 클 줄이야.’
똑똑한 미친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싹수가 보이던 녀석이었는데... 고작 몇 년 사이에 이각이 쳐다보지도 못할 자리까지 올라섰다.
알고서도 놀랄 따름.
연오랑을 잘 아는 삼인방 일당은 그간 들려오던 소문에 감탄을 금치 못했지.
‘대단하긴 대단하단 말이지.’
그는 대마도 정벌 때 연오랑을 지켜봤고, 특전대라는 생경한 조직을 미리 경험해 보지 않았나.
착호군은 그걸 보다 확장하고 체계화 시켰는데... 이게 좋은 것 같으면서도 낯설었다.
“3대대 2중대가 뒤로 쳐지는 군요.”
“음.”
둘은 자연스럽게 말을 나누다가, 서로를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큭.”
“허허...”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에서 튀어나온 걸 보면, 지금껏 공염불을 외운 꼴 아닌가.
뭐 하러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착호군은 연오랑이 21세기식 편제를 가져와 15세기에 맞춰 개조시켰다.
20인을 소대, 소대 다섯을 모아 중대(100명), 중대 넷과 보조중대를 모아 대대(500명). 대대 둘을 모아 연대(1000명), 연대 다섯이 모여 사단(5000명), 사단과 보조연대가 모여서 군단을 이뤘다.
출신을 구별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구분하니, 솔직히 말해서 지휘관 입장에선 편하지.
소대장은 소대만 잘 챙기면 되고, 대대장은 소대장, 중대장을 관리해서 대대만 챙기면 되니까.
나아가 이렇게 특기와 병과를 나눠 명령체계를 확실히 구분지어 놓으면, 함부로 월권을 행하거나 사사로이 부리기도 힘들다.
단박에 “그건 네가 해야 될 일이잖아? 내 소대원을 네가 왜 건드려?”라는 말이 튀어나오니까.
이 신편제는 장군이나 병사들 사이에서 의외로 거부감이 적었다.
5나 10의 배수로 병사를 쪼개고 나누는 방식은 고려,원,명,조선 모두가 대동소이하게 쓰는 방식이니까.
대대니 소대니 하는 명칭이 어색했던 거고, 조선식 바꿔보면 “대충 엇비슷하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였지.
특별한 부분은 더 있다.
“확실히 개별 깃발이 있으니 알아보긴 편하군. 병사들도 그럴 거고.”
“예.”
둘은 좌독기坐纛旗를 변형해서 만든 소대깃발을 보며, 다시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소대 주제에 뭔 깃발을 세워?” “저 말도 안 되는 해괴한 깃발은 대체 뭐냐?” 싶으면서도, 솔직히 구분하긴 편했다.
21세기에도 조선군 좌독기는 멋있기로 유명했잖아?
원래 역사에서 조선군기로 쓰일 좌독기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연오랑은 기억을 더듬어 좌독기의 변형 버전을 여럿 만들었다.
태극과 팔괘는 크기를 줄이고, 반대로 점처럼 박혀 있는 낙서洛書는 크게 만들어 알아보기 쉽게 한 거지.
연오랑이 상수학象數學이나 역학 따위를 신경이나 썼겠는가.
소대를 구분할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한자를 쓰자니 자주화에 방해가 되니까 넘어갔다.
아라비아 숫자를 쓰자니 멋이 없고, 동물이나 문양을 쓰자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감도 못 잡고, 로마자를 쓰는 건 너무 나갔다.
해서 그냥 낙서의 점을 이용해서 구분했다.
점 하나, 점 셋, 점 넷이 찍혀 있으면 1대대 3중대 4소대 깃발. 이런 식이지. 나중에 부대가 많아지면 조금씩 변형하면 되고.
주역周易을 아는 이들이 보면 “뭐 저런 엉터리가 있어?”라고 기겁하겠지만, 반대로 일자무식인 사람이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잖아?
전장처럼 난장판인 곳에선, 자기 소속 깃발을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건 큰 이점이지.
이렇게 착호군기를 만들어 뿌리자, 설왕설래 말이 많았지만... 일단 닥치고 쓰게 해서 굴렸고 금방 익숙해졌다.
언제나 그렇듯. 낯선 이질감만 이겨내고 나면, 편한 건 편한 거다.
이윽고 이각이 이끄는 6연대가 여진부락을 완전히 포위했고, 화살한발 쏘지 않았지만 여진부락은 난리가 났다.
밑도 끝도 없이 저 먼곳에서부터 우르르 몰려와 포위해버렸으니, 이 생경한 복색을 한 군대를 보며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짙은 먹빛과 검은 두정갑은 처음 보고, 여진족 족장들도 입기 힘든 온갖 맹수가죽으로 된 갑옷을 껴입고 있다.
단단히 무장한 걸 보면 여진부족은 당연히 아니고, 요동군이나 몽골군도 아닌 것 같은데... 남은 건 조선군뿐이지 않나.
헌데 조선군이 여길 왜 왔을까?
오래전에 대마도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호주에 대한 소문이 퍼졌던 터라... 여진족장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가지.”
“예.”
이각과 유응부가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중대장, 소대장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수색중대는 주변을 살펴보도록.”
“알겠습니다.”
몇몇 무관이 떠나기 무섭게, 이각은 누군가를 찾았다.
‘저기 있군.’
저쪽 무관들 뒤편에.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빡빡머리를 하고, 갑옷 대신 승복을 입은 승려가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게 보였다.
“호정! 가서 말을 나눠보겠나? 선물도 가져가고.”
“... 알겠습니다.”
군종승軍宗僧이라는 특이한 병과에 속해서, 낯선 요동땅을 밟게 된 승려 호정.
그는 ‘이래서 여진말을 배우라고 했던 걸까?’라는 추측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발을 놀렸다.
연오랑의 조선불교 개창계획은 태종과 세종의 승인을 받고 진행되고 있었다.
계획대로 용연현에 모두 모여서 피터지게 불교교리를 가지고 논쟁하고 있고, 억지로 여진어를 익힌 승려들은 원정군에 끌려왔지.
승려들 입장에선, 난데없이 전쟁터에 끌려가는 거지만... 별 수 있나.
이젠 연오랑의 손을 떠나서 태종, 세종이 주시하고 있다.
말을 안 들었다가는 진짜로 죽을 판국이니, “저희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잘 좀 봐주시죠.”라고 아부라도 떨 듯, 냉큼 원정군에 합류하게 된 거지.
승려 호정과 몇몇 병사들은 마차를 끌고 나아갔다.
칼로서 위엄을 보였으니, 이번엔 먹을 걸로 회유해야하지 않겠나.
이곳 내륙에선 맛보기 힘든 최고의 선물.
절인청어와 소금가마니, 차茶를 가지고 여진부락 입구로 향했다.
이윽고 호정이 족장과 뭐라뭐라 이야기를 나누자.
“와아!”
“오오!!”
잔뜩 겁먹었던 여진인들이, 갑자기 환호하며 목청을 높이는 게 아닌가.
방금 전까지는 새끼 고양이마냥 경계하던 이들이, 이젠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며 반기고 있다.
“잘 먹히는 군?”
“소금이라면 환장하지 않겠습니까? 요동상인들이 제값을 쳐주진 않았을 테니까요.”
이각과 유응부는 잘됐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제 남은 건. 저들을 통해 인근 부락의 인원과 위치, 주변 상황과 특기할 점을 알아내는 일 뿐.
다만... 해가 지기 전까지 이 짓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되니, 피곤함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후...”
“끄응...”
이징옥 형제는 코를 찌르는 냄새에, 자기도 모르게 구역질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뭔 놈의 똥을 이렇게 싸대는지... ‘사람은 정녕 똥만 싸는 잉여인가.’ 라는 철학적인 의문이 떠오를 지경이다.
“그렇게 아무데나 싸지 말고, 여기 변소에서 싸라고!”
이징석이 짜증 섞인 소리를 내뱉자, 요동에서 온 고려인은 바지춤을 추스르며 짜증 섞인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얌전히 똥이나 치울 것이지. 왜 큰소리야?”
괜히 방해를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둘을 보고선 혼잣말로 연신 궁시렁거리는 게 아닌가.
혹시나 똥이 묻을까 싶어서 허름한 옷을 입고 있던 탓에, 둘이 무관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나 보다.
“으...”
“쓸데없이 열 내지 마쇼. 형님. 이게 뭔 꼴입니까. 이게.”
싫은 소리 한번 안하던 이징옥마저도 짜증이 치솟는지, 거친 말을 내뱉었다.
오늘이 변소청소노역의 마지막 날인데, 왜 하필 오늘부터 고려인이 송환된 걸까.
동팔참 구역 중에서 요동의 영향력이 미치는 연산관에 도착하자, 요동은 기다렸다는 듯이 고려인을 송환하기 시작했다.
이들 하는 꼴을 보면... “왜 이렇게 늦게 왔냐. 빨리 거지떼를 다 데려가라!”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제발 입조심 좀 합시다. 형님. 여긴 고향이 아니라구요.”
“...”
이징석은 화를 참느라,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게졌다.
“한번 더 걸리면, 우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집안이 망할 겁니다.”
“...후”
심호흡을 내뱉은 이징석은 말없이 말 궁둥이를 때렸고, 똥이 잔뜩 실린 마차는 천천히 군진 밖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잘난 맛에 살던 이징석은 이 모멸적인 처벌을 참지 못하고 반항하려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토관 출신들은 “언젠가 큰 코 다칠 줄 알았다.”라며 고소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고.
창설초기에 이런 일을 익히 겪어 본 착호군은 “성격이 더러우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상호군에 오른다더니, 그거 다 뻥 아니야?”라는 경멸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반응에 충격을 먹은 이징석은, 본의 아니게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됐지.
그런 이징석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삐를 잡고 있던 이징옥은 계속 입을 놀렸다.
“알아보니. 형님이 건드렸던 그 친구가 청주 호가의 서자라고 하던데... 성질부리지 말고,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십쇼. 까닥 잘못 됐으면 권세가와 원수지간이 될 뻔했으니까.”
“알아들었다. 그만해라.”
이징석은 한탄을 내뱉듯 말을 털어냈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이나 파던 녀석들이, 하나같이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들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징석 입장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던 거지.
풍문으로만 들었던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