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챕터17. 나아가다 (2)
착호군의 표면적인 명분은 “맹수 4종세트를 때려잡아, 백성을 편안케 한다!”였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태종과 연오랑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군주가 그렇듯, 태종 또한 365일 훈련만 하는 최정예 상비군을 원했다.
하지만 이건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조선은 하급 무관인 갑사를 잔뜩 늘려놨지만... 얘들 녹봉을 제대로 못줘서, 체아직으로 만들어 상하번으로 돌리고 있지 않나.
헌데 연오랑은 태종의 고정관념을 깨버렸다.
“60살까지 군역을 치르는 건 너무 낭비 아닙니까? 지금처럼 깔짝깔짝하지 말고 그냥 한 번에 왕창 몰아서 치르면 안 됩니까?”라는 발칙한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이게 되나.
몇 년을 군대에서 복무하면 농사는 누가 지어? 나아가 녹봉도 안주는 게 군역인데, 이걸 어떻게 유지할 수 있지? 군역을 치르는 동안 어떻게 먹고 살아?
그런데 연오랑은 또 재밌는 소리를 했다.
“군역 기간 동안 먹고살 걱정이 없는, 여유 있는 집안 출신들만 불러 모으시죠? 양민, 양반집안, 호족집안을 가리지 말고, 얼렁뚱땅 넘어가던 놈들을 이번에 때려잡으시죠?”라고 주장한 거지.
고려 때 대병을 뽑아낼 수 있었던 건, 봉건지주가 알아서 사병을 유지했기 때문 아닌가.
살짝 생각을 바꿔보면, 연오랑의 방책이 고려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
다만 소속과 지휘관이 각 귀족집안이 아니라, 태종 한명이라는 게 다르지.
“이게 되나?” 싶은데, 어찌됐건 재정문제는 한숨 돌릴 수 있잖아?
물론 강제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착호군 오든가, 아니면 그냥 지금처럼 군역을 지든가. 올 사람만 와라.” 라는 식이었지만.
“좋은 말할 때 와라. 안 오면 니들 집안은 앞으로 관직 생활을 꿈도 꾸지 마라.”라고 밖에 안 들렸지.
여기에 왕실이 모범을 보인다면서 공녕군 이인까지 끌고 갔는데, 누가 감히 개길 수 있을까.
자본유학을 따르는 서얼들이 대거 합류하고, 기업으로 변모한 지방호족, 과거 길이 막혀 있던 향리출신 자제들이 모여드니... 양반사대부들도 위기감을 느끼고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는, 태종 밑에 온통 이상한 녀석들 밖에 없을 테니까.
이래서 태종은 착호군을 인질이라고 표현한 거지.
여기에 하릴없이 빈민으로 살던 이들도 착호군으로 달려왔다.
어찌됐건 착호군에 가면 호구지책은 면할 수 있고, 나아가 맹수 때려잡으면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지 않나.
또한 천민이 군역을 통해 양민이 되는 보충군 제도를 준용해서, 보충군을 착호군으로 대체하자 이들 또한 밀려왔다.
지금까지의 보충군 제도는 복무일수가 길고, 식량을 스스로 마련해야 돼서 회피하는 이들이 많았지만. 착호군은 태종이 이끌고 있으니 그럴 일이 없지 않나.
마지막으로. 어떻게든 오지 않으려는 집안에 대해선, 다른 제안을 던져줬다.
“너는 잘나가는 집안의 자제이니, 아무나 대신할 순 없겠지?” 이러면서, “군역을 면하는 대가로 사노비 네 명을 대신 보내.”라고 했다.
뭔가 굉장한 억지 같지만... 어쩌겠어.
태종은 "누구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본보기를 보여주마."라며, 모인 병력을 이끌고 조선팔도를 휩쓸고 다녔으니... 다들 바짝 엎드릴 수밖에.
얌전히 말로 하는 것과 칼을 들고 겁박하는 건, 확실히 다른 법이지.
착호군이 쓸어버린 산과 숲은 전답이나 기업용 대지가 됐고, 온갖 방법으로 뜯어온 노비와 천민을 전부 양인으로 바꿔서 이 개간지에 박아 넣었다.
이렇듯 태종이 군사력, 중앙집권 강화를 이룩했다면.
연오랑은 합법적으로 자신이 마구 부릴 수 있는 인력과, 조선의 군제개조를 위한 실험부대를 만들 수 있었다.
평생 유학을 익히며 책과 붓만 잡고 산 녀석들에게, 맹수 사냥을 통해 피맛을 알려주며 정예 칼잡이로 키웠다.
여기에 “연오랑 무기술” 집체교육을 통해, 상무정신과 자본유학을 쑤셔 넣으면 어떻게 될까? 얘들이 착호군을 끝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이 결과로 탄생한 게 지금의 착호군이니, 이징석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혼자 까불다가 바보 취급을 당한 거지.
“형님. 저기 보시죠.”
“음...”
똥마차를 끌고 가다가, 이징옥은 저쪽 한편에 고려인이 왕창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고려인이야 군진 주변에 넘쳐나지만, 저쪽에는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색다르다.
어설프게 임시로 만든 대웅전이라도 되는 걸까?
석상이나 목상 대신 부처 족자를 걸어 놓고서, 승려들이 불법을 설파하고 있는 게 아닌가.
“오래 살고 볼 일이네. 군진에서 승려를 보게 될 줄이야.”
“그건 그렇네.”
전조 때엔 호국불교를 내세우며 승려들도 외적과 싸우던 일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것과 분위기가 사뭇 다르지 않나.
조정은 얼마 전까지도 승려들 때려잡았는데,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승려들을 괴롭히는 걸까?
‘괴롭히는 것치고는 너무 편하게 지내는 것 아닌가?’
이징옥은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쁠 건 없지 않나.
한성이나 큰 도시에서야 승려 탄압이 살벌하게 이뤄졌지만, 북변에서는 그냥저냥 공생했다.
그쪽은 워낙 빈한해서, 사찰조차도 빈한했으니까.
“나중에 한번 가봐야겠군. 속이 터질 거 같으니까.”
“가는 건 좋은데, 입조심 하고요.”
“알았다니까.”
둘은 티격태격하면서 계속 나아갔다.
고려인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고, 보조병과에 속해 있던 병사들이 그들을 통솔해서 숙소를 배정해 주고 있었다.
저쪽 한편에는 길게 줄이 서 있었는데, 그 앞에는 작은 탁자를 놓고 몇몇 관리들이 열심히 붓을 놀리는 게 보였다.
“저 친구들도 착호군이겠죠?”
“그렇겠지.”
원정군에 합류한 후엔. 토관 출신들은 전투병과에 배속되어, 착호군 편제에 익숙해지는 일에 열중했었다.
둘은 사령부라 할 수 있는 보조병과를, 가까이 보는 건 또 처음이라서 꽤나 낯설다.
“병사인지, 군서기인지 모르겠네.”
“둘 다 겠죠.”
“음...”
원정군 보조병과는 연오랑 직속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사람들이 다 모여 있는 터라, 잘난 맛에 사는 이징석조차 대하기 껄끄럽다.
특히나 저렇게 행정업무를 보는 이들은 더욱 그랬다.
중앙군은 무관들만 합류했으니 분명히 조정관리는 아닐 텐데, 대체 저런 건 어디서 배웠을까.
'알아서 뭐할까. 안 엮이면 그만이지.'
이징옥과 이징석은 동시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가죠.”
“그래.”
둘은 완전히 군진에서 빠져나와, 산기슭 한편에 도착해 열심히 땅을 팠다.
호주에선 거름을 만든다고 하면서 똥마차를 옮기기만 하면 끝났는데... 여기선 그냥 땅에 파묻으라고 하니, 할 일이 두배로 늘었지.
이윽고 일을 끝마친 둘은 다시 똥마차를 변소 근처에 놓아두고, 본업을 하러 찢어졌다.
이징옥은 애써 쪽팔림을 밀어내고선, 냉큼 막사로 되돌아가 갑옷을 챙겨 입었다.
이젠 노역병이 아니라, 신입 기사대원으로 변신할 시간이니까.
호주에서 미리 맞춰놓은 기사대 전용 두정갑을 뒤집어쓰고, 의기양양하게 발을 놀렸다.
예전부터 동팔참 관문으로 쓰이던 연산관은, 멋들어진 성채와 관문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작은 마을과 다를 게 없었다.
원래 역사에선 영락제 등극 후 본격적인 요동 공략에 들어가면서, 요동에 수백개의 보와 진지를 세워 곳곳에 방어거점을 만들었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했고, 요동은 홍무제 시절에 만들어 놓은 것들만 가까스로 유지하는 수준이었지.
그런 작은 마을에 고려인이 밀려들고 원정군까지 도착하자, 연산관을 지키던 요동군병은 인파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걔들 입장에선 여기가 요동땅인지, 조선땅인지 헷갈릴 거다.
기가 팍 죽은 요동군병은 원정군이 뭘 하든 입도 뻥끗하지 못했고, 원정군은 자기땅인양 마음껏 구획을 정하고 또 마음껏 사용했다.
이징옥이 향하는 곳도 그런 훈련장 중 하나로, 말이 훈련장이지 그냥 갈퀴로 땅을 긁어서 돌을 치운 공터다.
“음...”
이징옥은 한편에 박혀 있는 크기가 다른 깃발을 보며,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제일 작은 게 소대깃발, 그 다음으로 큰 게 중대깃발, 색이 다른 저게 대대깃발이라는 거지.’
처음 봤을 때는 헷갈렸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못 알아보고 어리바리한 모습을 보이면, 사방에서 눈치가 쏟아졌으니까.
못 보던 인물이 등장해서 일까? 저쪽에서 훈련을 하고 있던 기사대원들이 다가와 그를 살폈다.
“이번에 새로 온 신입이쇼?”
“그렇습니다. 이징옥이라 합니다.”
이 사람들의 신분과 계급을 알 수가 없어서, 이징옥은 눈치를 살피며 공손히 답했다.
“그런데 신입이 왜 지금 오지? 다른 신입들은 출정할 때 다 왔는데?”
“아! 변소청소를 한다고 했던 그 친구군?”
“그런가?”
이징옥은 괜히 낯이 뜨거워 얼굴을 들지 못했고... 소란스러움을 느꼈는지, 저쪽 막사에서 누군가 등장해 그를 구해줬다.
“가서 훈련해라. 내가 맡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이징옥이라고? 난 3중대장 장호라고 한다. 김종서 장군께 이야기는 들었다. 가지.”
“옙!”
이징옥은 장호를 따라 걸음을 옮겼고, 막사에 도착하자 장호는 보고서를 살피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자네 토관이 아닌데, 어째서 토관과 함께 왔나?”
“병마부사께서 추천해주셨습니다. 함길도에서 근무한지 오래 되서 토관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더군요.”
“그래? 본래 어디 있었나?”
“사복시에 있다가 병마부사와 함께 함길도로 옮겼습니다.”
“흐음... 난 내금위에 있다가 착호군이 창설될 때 적을 옮겼지.”
“예...”
별로 연관도 없는 옛날 신변잡기를 늘어놓고선, 장호는 이징옥을 데리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자네도 알겠지만, 착호군은 착호군만의 계급이 있네. 기존 실직과 품계를 따지지 않지. 알지?”
“예.”
그걸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까불다가 된통 당했는데, 아직도 모를까.
그냥 구색만 맞춘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조정의 체계보다 위에 있는 줄은 몰랐다.
“이곳엔 내금위, 겸사복, 12사 소속, 토관, 영진군 소속, 아니면 아예 품계와 실직이 없는 이들까지. 온갖 부류의 사람이 다 섞여 있네.”
“...”
“착호군 계급을 무시하고, 전처럼 굴다가는 또 다시 판군사대에 끌려갈 테고... 그럼 자네 뿐만 아니라 자네 위로 줄줄이 골치 아파져.”
“예. 걱정 마시지요.”
장호의 얼굴에는 '너 때문에 나까지 귀찮아지게 만들지 마라.'라고 떡하니 써 있었다.
이징옥은 첫인상이 잘못 찍힌 것 같아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앞으로 자넨 중위일세. 다른 부대보다 우리 계급이 한 등급 높지.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하고.”
'전에 연대에서 적응할 때 계급이 소위였으니까, 한등급 오른 게 맞긴 맞구나.'
이징옥을 그런 생각을 하며, 장호의 말투에 담겨 있는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반대로 “너도 이제 기사대니 그만큼 실력이 있어야 한다.”라고 압박 받았고.
“기사대원은 전부 같은 계급이니 허물없이 지내게. 결국 남는 건 자네 옆에 서는 전우뿐이야. 자기만 잘났다고 설쳐대는 놈은 금방 죽지. 자네 일찍 죽고 싶나?”
“...”
이건 뭔 끔찍한 소리인가. 이징옥은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좋아. 새 갑옷은 어떤가. 익숙해졌나?”
“예.”
이징옥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낮에는 똥을 치웠지만, 밤마다 새 갑옷을 입고 열심히 길을 들였다. 그도 무관이니, 좋은 무구를 보면 눈이 반짝였지.
돈이 부족해서 맹수가죽으로 만든 갑옷을 구하진 못했지만... 이게 어디냐. 실제로 방어력에는 큰 차이도 없잖아?
기사대용 두정갑은 철편 대신 보다 큼지막한 철판을 이어 붙여서, 유연성이 떨어졌지만 방어력은 올라갔다.
반대로 말하면 기사대는 애초부터 돌격기병이자 근접육박전을 상정하고 무장했다는 뜻이고.
“해서 마상무기술에 능숙해져야 하지. 비록 이번 원정에서 우리와 같은 육중한 중무장기병이 활약할 상황은 많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훈련을 안 할 수는 없지 않나.”
“예.”
나름 북변에서 여진족과 뒹굴어본 이징옥은 냉큼 답을 했다.
“그럼 자네가 앞으로 뭘 배워야 할지 보여주지. 꽤 재밌을 거다.”
장호는 히죽 웃으며 이징옥을 안내했다.
이징옥은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이것저것 다 봤는데 ‘여기서 더 놀랄게 있을까?’라는 눈을 숨기지 못하고 뒤를 쫓았다.
하지만 잡인의 출입을 막은 숲 인근의 훈련장에 도착하자,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친 군마의 울음소리와 함께,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흔든다.
사람 키의 두배나 될법한 긴 창을 들고, 십수기의 기마가 일제히 돌격.
팔 벌린 허수아비처럼 생긴 나무인형의 손바닥에, 그 긴 창이 부딪치자.
허수아비의 팔이 풍차마냥 빙글빙글 돌아갔다.
“오...”
후끈한 열기와 무시무시한 박력에, 이징옥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