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94화 (94/538)

94. 챕터17. 나아가다 (4)

지금의 조선은 명나라가 있던 시절의 조선이 아니지 않나.

상국의 백성이라고 봐주던 시절은 예전에 끝났고, 이젠 오히려 비웃음이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북적이라 멸시하던 몽골조차 “명나라? 천벌 받아서 망해버린 나라 아냐? 오랑캐는 지랄.”이러면서 무시하는데, 나름 알만큼 아는 조선은 오죽할까.

조선이 중국을 예우했으면, 의주에서 추방, 강탈, 처벌을 받은 상인이 없었겠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밀수하다가 목이 날아간 상인도 있었다.

지금은 연오랑의 인정과 호의를 기대해야 하니, 더욱 납작 엎드려 비위를 맞춰야 하지.

“편히 앉아라.”

“... 예! 장군.”

유창한 중국말에 둘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냉큼 눈을 내리깔고 연오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과연 소문이 맞는지, 생전 보지도 못한 거한이 앉아 있다.

입고 있는 백호피로 보아하니, 식인 백호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는 소문도 사실인 것 같다.

“상인의 화술로 이야기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귀찮으니 바로 묻겠다. 미분을 원한다고?”

“예. 장군님.”

“네가 알지 모르나, 미분은 조선에서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비싸고 만들기 어려운 물건이다. 그러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

“뭐든 구해보겠습니다.”

“초석을 가져와라. 그럼 거래를 허락해주마.”

“...!”

산동상인 왕청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뜩 뜨였다.

이건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뜬금없이 초석이 왜 나와? 뭐든 가져올 물건에 초석은 안 껴있었다.

“너 뿐만 아니라, 의주에 드나드는 모든 상인이 동일한 조건이다. 초석을 가져오면 미분을 준다.”

“예...”

왕청은 눈을 질끈 감고서, 말을 흐렸다.

“허나. 여기까지 온 수고는 인정해주마.”

연오랑은 그리 말을 하고선, 미분이 담긴 주머니를 꺼냈다.

“산동에서 왔다지? 이야기 해봐라. 요즘 산동 상황은 어떠냐?”

“그게...”

왕청은 어린아이 머리통만한 주머니에 눈이 돌아가선,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사상적, 이념적 분열은 제쳐놓고.

중국이 아직도 봉합을 못하고, 오히려 더욱 분열되는 양상을 보이는 건 여러 이유가 겹쳐 있었다.

정난의 변이 일어날 당시에는 나라가 매우 안정적이었다는 점이다.

홍무제는 명을 건국하면서, 조선보다 강력한 농본주의 정책과 부정부패척결을 외쳤고 실효를 거뒀다.

백성들 입장에선 나라에 큰 불만이 없어서 난세의 혼란기마냥 “이대로는 못 살겠다!”라고 외치며, 사방팔방에서 농민반란이 터질 상황이 아니었지.

이후 운석핵꿀밤으로 불가항력적인 지방행정체제만 돌아가자, “지금 살기 좋구만. 뭘 또 바꾼다고 난리야? 싸우긴 왜 싸워?”이런 분위기로 흘러갔다.

잘 타오르지도 않는 전쟁의 불씨는, 냉랭한 찬바람에 금세 꺼지기 일수였지.

다음으론 야심가들의 최우선 타겟이 될 인적, 물적 기반이 모두 소멸됐다는 점이다.

남경은 명의 수도로서 전국의 인재와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각 지역의 유력자, 권력자가 잔뜩 모여 살았다.

공룡이나 다름없는 명나라를 지탱해 온 수만명의 관리들.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난다긴다하는 인재들이 모여 있었고.

중앙집권을 위해 만들어 놓은 온갖 행정서류와 지역자료 또한 산처럼 쌓여 있었다.

왕조가 교체되든 뭐가되든, 이런 밑바탕은 다음 왕조로 이어져 통치의 연속성을 보장하는데...

지금은 머리와 허리가 완전히 사라진 거지.

지방행정망을 넘어서 전국행정망을 조직하기 위해선, 맨땅에서 새롭게 쌓아올려야 했다.

세번째론 홍무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지방정치기구를 축소해서, 민정업무는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 사법, 재판, 감찰은 제형안찰사사提刑按察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가 담당하게 했다.

조선처럼 수령이 모든 권한을 행사하는 게 아니었지.

그럼 누가 1인자가 되어야 할까? 이 자리를 놓고 세 기관이 대립했다.

여기에 중국은 거대한 땅 크기만큼이나 지방호족의 세력 또한 강성해서, 사실상 사파전이나 다름없었지.

끝으로 사파전에 끼어든 세력이 하나 더 있었다.

정난의 변 당시에는 누가 봐도 황제군이 유리했다.

연왕의 정난군은 “이대로 있다가는 어차피 죽는다. 죽기 살기로 싸운다!”라며 영혼까지 끌어 모아 건곤일척의 승부를 걸었고, 대승을 하자마자 뒤도 보지 않고 남경으로 진격했다.

대패 후 재결집한 패잔병들, 또 포위하듯 사방에서 몰려온 황제파 지원군은 정난군의 뒤를 쫓아갔는데...

운석핵꿀밤으로 전부 날아가 버렸네? 이제 어떻게 하지?

몇몇은 그대로 발길을 돌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몇몇은 모래알처럼 흩어져서 도적 집단으로 변신했고, 또 몇몇은 아예 병력을 앞세워 은근슬쩍 자리를 깔고 눌러앉았다.

사파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외부세력이 끼어들어 오파전이 된 거지.

이래서 각 지방은 하나로 통합되어, 대륙통일을 위한 전국예선이 시작되기는커녕... 아직도 지역예선조차 끝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산동은 이 난장판의 표본이라 할 수 있었고.

“해서 공청 대장군 파벌과 영기옥, 장민 파벌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모르겠다.

원래 역사에서의 명나라 네임드 인물들은 운석핵꿀밤으로 다 죽어버려서, 지금 역사에서 떠오르는 실력자들은 죄다 처음 들어본 인물들이다.

“공청이라... 산동 출신이 아니라고 했지?”

“예. 장군님. 호광 출신으로, 옛 황제군 패잔병을 이끌고 산동에 자리 잡았습니다.”

산동은 황제군과 정난군이 격돌한 주 전장이었고, 당연히 둘 사이에 껴 있던 산동 병력은 예전에 다 날아갔다.

공청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아예 산동에 자리 잡고 실력자로 성장했다.

“병권은 공청이, 나머지는 영기옥, 장민이 가지고 있겠군?”

“예.”

“공청이 남부 지방을 차지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제남부와 동창부는 영기옥이, 등주부와 내주부는 장민의 세력권입니다.”

왕청은 재깍 입을 놀려 설명을 이어갔다.

영기옥은 포정사사에 속했던 고위관리로, 명조정이 박아 놓은 포정사를 재껴버리고 자리를 차지했다.

제남과 산동 북부 지역을 차지한, 산동 내륙지역의 호족 대표라 할 수 있지.

반대로 장민은 상인출신으로, 산동반도 해안가 지역을 대표하는 호족이고.

공청은 산동 남부 지역인 연주부와 청주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병권을 가진 공청은 이들의 세력을 빼앗고 싶었고, 당연히 돈이 되는 사업에 뛰어들고자 했지.

그건 다름 아닌 조선과의 무역이었고, 공청의 후원을 받은 신흥 상인세력이 의주와 요동에 진출하는 중이었다.

초석이라는 금수물품을 조선에 넘겨준 것도, 그 일환일 가능성이 컸다.

연오랑은 머릿속으로 중국 전도를 그려봤다.

‘청주부를 차지하고 있으면, 초석 광산은 공청이 가지고 있겠네.’

21세기의 산동성 임기시 인근을 지금은 청주부라고 불렀다.

이곳은 미디블워 게임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초석광산이 있었고, 공청은 분명 이걸 지렛대 삼아서 다른 지방과 이리저리 줄을 트고 있을 거다.

중국도 조선만큼이나 화약무기를 많이 사용했고, 초석을 구하기 힘든 지방은 똥줄이 타고 있겠지.

‘공청이라... 이놈이 크면 피곤해질 거 같은데.’

말없이 손가락을 튕기며 머리를 굴려본다.

산동이 요동과 순망치한의 관계가 된 건, 북쪽의 북직례, 남쪽의 남직례, 서쪽의 하남, 산서에 둘러싸였기 때문이다.

가장 강성한 북평부. 북직례를 견제하기 위해선 요동과 손을 잡아야했지.

이런 상황에서 공청이 산동의 1인자가 되기 위해선 당연히 외부와 손을 잡을 텐데, 녀석이 손을 뻗을 곳은 고향인 호광일 게 뻔하다.

21세기에도 꽌시關系라는 문화가 있는데, 15세기에는 오죽하겠는가.

중국은 땅도 너무 크고 사람도 너무 많아서, 타지에서 같은 고향사람끼리는 뭉치는 건 패시브 같은 거다.

나아가 조선 뺨칠 정도로 학연,인맥,혈연으로 단단히 뭉쳐 있지.

공청의 고향인 호광은 21세기의 호북,호남성을 합친 지역 아니냐.

명나라 장군쯤 됐으면 집안도 빵빵했을 거고, 당연히 호광의 실력자들과도 연줄이 있을 거다.

이놈이 걷잡을 수 없이 커버리면 산동을 일통할 거고, 그 다음으론 산동과 호광 사이에 있는 하남을 노릴 테고, 하남을 통합하면 그 다음 수순은 북직례가 될 게 뻔한 일.

연오랑이나 조선조정이나, 중국은 지금처럼 지역예선이나 하고 있어야지, 통일을 위한 전국예선으로 돌입하는 사태는 막고 싶다.

천명도 잃어버리고 중화사상도 금이 갔는데, 통일중국을 바라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이나 미래나, 중국은 수십개로 쪼개져 있는 게 모두에게 이롭다.

‘미리미리 견제 해야겠군.’

산동-조선무역은 장민 파벌이 꽉 잡고 있으니, 지금처럼만 계속 거래하면 특별한 변동은 없지 않을까?

문제라면 초석을 대가로 거래를 요청하는 경우일 텐데... 이건 그때그때 상황을 봐서 처리하면 될 거다.

‘그 정도는 세종 형이 알아서 처리하겠지.’

지금의 세종은 원래 역사의 세종과는 판이하게 다른 인물 아니냐.

어떻게든 조선의 이득만 생각하며, 중국 사정을 봐주지 않고 요리조리 뜯어낼 궁리만 하고 있으니... 알아서 잘 요리할 거다.

산동상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연오랑은 흔쾌히 미분 주머니를 넘겨줬다.

“너는 요동상인이라 했지?”

“그렇습니다.”

왕민은 왕청의 예를 본받아, 넙죽 엎드려 고분고분 말을 이어갔다.

“흥안령 너머의 몽골부족과 거래를 해온 걸로 안다. 그곳의 지리를 잘 아는 길잡이를 구할 수 있나?”

“...!”

뜬금없는 연오랑의 말에, 왕민과 왕청 모두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졌다.

자기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나와 등을 적셨다.

흥안령은 몽골을 비롯한 무수한 유목민족의 발원지고, 지금의 흥안령 너머는 북원 잔당이 도사리고 있는 곳 아닌가.

조선군이 거길 간다는 건... 요동, 우량카이3위와 함께 북원 잔당을 친다는 뜻.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었으니, 이젠 빼고 박도 못하게 됐다.

연오랑은 둘을 보며 히죽 미소를 지었고, 둘은 맹수가 사냥감을 보는 미소인 걸 알고 눈을 내리 깔았다.

“구해 온다면 동팔참을 이용할 권리를 주겠다. 많이 데려오면 데려올수록 대가는 커지겠지.”

“...!”

둘은 뜬금없는 제안에,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지금까지 동팔참을 이용하지 않은 건, 그곳이 위험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나 도적떼에 습격당해도,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조선이 지키고 있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너희도 알다시피 고려인 송환은 적어도 몇 달 동안 지속될 터... 요동반도를 돌아서 가는 상행길보다 시간을 몇 배나 단축할 수 있으니, 단기간만 이용해도 이득을 볼 수 있을 거다.”

'그건 맞긴 맞지.'

둘은 슬그머니 눈을 맞추고선, 생각을 하나로 묶었다.

과연 얼마나 이득이 될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려 주판을 튕겨봤다.

“또한 염매권의 우선권을 줄 테니, 결코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테지.”

“헙!"

'소금이라고!?'

안 그래도 계속 놀라던 왕민은 소금을 거래품에 넣어준다는 말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명나라가 있을 때는 직고直沽(천진)의 소금밭과, 황수潢水(시라무렌 강)의 염수에서 소금을 뽑아내 요동에서 사용했었다.

허나 지금의 직고는 북평부의 권역에 속했고, 황수 일대는 북원 잔당의 세력권이니, 소금을 구할 수가 없다.

요동반도의 염전에서 뽑아내봐야 얼마나 뽑겠는가. 자연스럽게 산동소금이 시장을 지배하게 됐지.

만약 조선산 소금을 구할 수만 있으면,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을 거다.

“너 뿐만 아니라, 다른 요동상인과도 거래했다. 늦으면 늦을수록 너만 손해일 테니, 쓸데없이 머리 굴리지 말고 길잡이나 구해 놔라.”

“알겠습니다. 장군님!”

왕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어야 할 판국 아닌가.

간보지 말고 최대한 노력해서, 뭐라도 더 뜯어내는 게 이젠 이득이다.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자 정찰을 떠났던 연대가 모두 되돌아왔고, 연산관에 머물던 원정군은 다시 움직였다.

동팔참은 의주에서 건너온 토관과 토병들만 주둔하면서 관리하게 될 거고, 보조군에 속해 있던 조정관리와 임시관리가 연산관에 남아 마무리 작업을 이어갈 거다.

가장 큰 덩어리였던 첫 번째 이주민을 처리했으니,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처리해도 문제 될 게 없으니까.

“그런데 의주 토관과 토병을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착호군에 비하면 부족한데...”

“대감. 착호군과 비견될만한 정예가 있기나 하겠습니까.”

“아직 실전을 안 치렀다. 혹시 모르지.”

황보인은 지독하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눈을 흘겼다.

막말로 거의 일만에 가까운 착호군 모두가, 칼질 실력만큼은 내금위의 허리까지 쫓아왔다.

애초에 칼질을 하던 이들은 내금위를 뛰어넘었고.

대체 여기서 뭐 얼마나 더 오르길 바라는 건지, 황보인은 도무지 연오랑의 머릿속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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