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95화 (95/538)

95. 챕터17. 나아가다 (5)

“걱정 마시죠. 의주 상인들이 물심양면으로 밀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일이 꼬이면 자신들도 피곤해지는 걸 아는 터라, 집안일처럼 나서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건 다행이지만.”

연오랑은 천천히 행군을 시작하는 원정군과 점점 멀어져 가는 연산관을 보며 잡담을 이어갔다.

‘흠... 믿어봐야지. 별 수 있나. 너무 완벽하게 할 순 없지.’

직접 훈련시킨 병사들이 아니니 살짝 우려되지만, 그의 몸이 두세개도 아니고... 어떻게 다 처리하겠냐.

나머지는 믿고 맡겨야지.

지금의 토관들 실력은 그리 나쁘지 않으니, 잡스런 여진족이나 도적떼 따위에게 쉽게 당하진 않을 거다. 아마도?

“무장은 충실하지? 얘들 정신상태도 괜찮고?”

“옙! 제가 확인했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혹시나 싶어서 되묻자, 황보인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그의 입장에선 절대 빈말이 아니니까.

의주를 비롯해 서북면에서 주둔하는 토관과 토병은, 착호군 못지않은 충실한 보급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의주 상인 집안은 자신들이 파리 목숨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의 정책이 바뀌는 순간. 손바닥 뒤집듯 집안의 재산과 위세가 날아갈 테니까.

하지만 살얼음판을 걷는 처지에서 벗어날 방법이 딱히 없었다.

조정은 대외무역에 대해서 미숙했고, 의주를 실험체 삼아서 열심히 연구하고 배우고 있지 않나.

“너흰 우리 덕에 돈 벌고 있잖아? 위험은 감수해야지.”이런 자세를 고수했고, 조정에서도 딱 부러지는 깔끔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의주 집안은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이리저리 눈을 돌렸고, 그 때 딱 걸린 게 다름 아닌 자본유학과 기업이다.

양원경을 통하지 않더라도, 의주는 이미 기업으로 바뀔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지.

허나 당장 바꾸기에는 너무 위험한 도박이어서, 일단 때를 기다리며 살피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착호군이 창설되고 기업의 공인이 이뤄졌다.

의주 집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지.

상행으로 벌어들인 재산을 투자해 각자 마음에 두고 있던 기업체로 변모했다. 조정에 재산을 토해내고 무역이 끊어지더라도, 먹고살 토끼굴을 완성한 거다.

다만 문제가 생겼다.

기업은 국방세라는 있지도 않는 세금을 자발적으로 내서, 조정의 암묵적인 비호를 받으며 자신의 고향을 바꿔나갔다.

그게 도로를 까는 일이든, 저수지나 둑을 만드는 일이든, 하다못해 관아의 건물을 짓는 걸 도와준다든지.

하여튼 뭐든 하긴 했는데, 의주에서 그런 걸 하기에는 조정의 눈치가 너무 보였다. 괜히 쓸데없는 오해만 살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세금마냥 돈을 내자니, 안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잖아? 앞으로도 계속 뱉어내라고 하면, 그건 또 곤란하지.

“과연 어떤 게 조정의 의심을 받지 않고, 우리의 충성심을 증명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게, 토관과 토병들의 군수품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의주가 나름 부유해지고 있지만, 병사들의 무장상태까지 좋아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하여 의주목사를 통해 막대한 양의 군수품을 지원했고, 첫 번째 의주목사는 이걸 착복했다가 본보기가 되어 작살났지.

아무튼. 이런 지원이 이어진지 벌써 일년이 훌쩍 넘었으니... 토관과 토병들은 윤기가 좔좔 흐르는 준마에, 제대로 된 갑옷과 무기, 든든한 군량으로 배를 채운 정예가 됐다.

조정은 이 덕분에 살짝 남은 예산을 돌려 동북면을 지원했고, 국경변방을 더욱더 견고하게 다지고 있었고.

“헌데...”

“뭔데?”

“아깝지 않으십니까?”

“뭐? 연산관 말이냐?”

“예.”

연오랑은 황보인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많은 관리들과 제장들의 뜻이 비슷했던 모양이고, 황보인이 총대를 메고 물어본 듯싶은데... 기분이 묘했다.

원래 역사에서의 조선이라면 상상도 못할 발언이고, 그만큼 지금 역사가 완전히 비틀렸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조정관리 출신인 황보인이 이럴 정도면, 조선의 사상계가 자주화를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딘 게 아닐까?

“너도 알지 않나? 연산관은 요동의 권역이다.”

“허나...”

누가 모르나. 하지만 요동은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으니, 조선이 눌러 앉아도 별말 못할 거다.

식량과 생필품이라는 목줄을 조선이 쥐고 있으니까.

하지만 연오랑은 생각이 달랐다. 그는 땅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네 생각에 연산관이 발전하면 누가 가장 이득을 볼 것 같냐?”

“조선 아니겠습니까?”

“틀렸다. 요동과 여진족이다. 길게 보면 조선은 오히려 손해만 볼 거다.”

“...?”

물론 조선도 돈을 벌긴 벌겠지만, 가까운 연산관을 놔두고 호주까지 올 요동상인과 여진족이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연오랑은 최대한 사람을 끌어들여서 압록강변을 발전시키는 게 목적인데, 엉뚱하게 연산관이 먼저 발전하면 계획이 틀어진다.

“그깟 연산관 따위는 언제든지 차지할 수 있다. 하지만 연산관이 발전하면, 호주의 발전이 몇 배는 느려질 거다.”

“...”

“호주의 발전이 지체되면, 압록강 상류인 강계로 나아갈 시기가 지체될 거고, 백두산을 넘어 두만강 인근으로 확장할 시기 또한 지체되겠지.”

“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라서, 황보인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은 요 몇 년 사이에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어서, 조정 관리인 자신마저도 자고 일어나면 뭔가 바뀐 걸 느낄 정도다.

이 추세라면 압록강변을 완벽하게 조선의 강역으로 집어삼키는 게, 결코 헛된 꿈이 아니다.

“잊지 마라. 집중할 건 언제나 여진족이고, 그들을 조선으로 끌어와 흡수시키는 게 우선이다. 지금 당장 요동과 척을 칠 이유도 없는데, 마을 하나 가지겠다고 쓸데없이 분위기만 경색시킬 필요는 없지.”

“예.”

“그리고 연산관을 차지하면 동팔참을 우리가 관리하고 확장해야 하지만, 호주로 요동상인이 찾아오면 그들이 알아서 동팔참을 정리하게 될 거다. 지들이 돈을 더 벌기 위해서라도, 우리를 대신해서 정리해 주겠지.”

“아...”

“그렇게 까지 할까?”싶지만, 불편한 건 그들이지 조선이 아니지 않나.

고려인 송환만 끝나면, 동팔참은 조선보다 요동상인이 더 자주 이용하게 될 거다.

더불어 요동상인은 요동반도를 돌아가는 상행길을 이용하지 않을 테니, 산동상인의 영향력에서도 조금은 벗어날 수 있고.

“동팔참을 제대로 복구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십니까?”

“그래. 동팔참은 요동의 권역이 아니니 우리 것으로 해도 문제는 없으나, 지금 당장 자본과 인력을 투입할 이유가 없지. 동팔참을 노릴 세력도 없는데, 굳이 성채와 관문을 만든다고 고생할 필요는 없잖아?”

“예.”

“멀리 봐라. 이번 원정이 끝나고 나면, 북방의 정세가 어떻게 될까.”

연오랑은 말을 멈추고, 황보인이 생각할 시간을 줬다.

지금 조선인들, 특히나 의주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서서히 한반도라는 인식의 한계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막연히 “오랑캐 놈들, 달자 놈들, 망한 명나라 중국놈들.”이라는 단편적인 인식에서 깨어나,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려고 하고 있지.

황보인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는 조정관리들이 국제정세를 예측하지 못하는 건, 스스로 한계를 규정했고 정보가 부족해서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북원잔당이 전부 중국내지에 정착하진 않을 테니, 다시 되돌아오면 한바탕 폭풍이 불겠군요.”

생각을 정리한 황보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맞다. 몽골 초원은 너무 크고, 북원 잔당은 쓸데없이 너무 많아. 항명降明출신 몽골 부족도 너무 많지. 올량합 3위가 흥안령 너머를 차지한다고 해도, 그들이 강성해지는 건 쉽지 않을 거다.”

“흐음.”

황보인은 연오랑이 무얼 말하는 지, 이제야 깨닫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나아가 이게 단순히 연오랑의 뜻이겠는가.

분명 세종, 태종과도 이야기가 되어 있을 테니, 사정을 모르는 자신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무례한 소리지.

원정군은 꿈에나 그리던 요동지방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목적지는 요양과 심양 사이에 위치한 동녕위다.

이곳은 예전부터 고려인이 많이 살았는데... 홍무제는 한족과 고려인을 구분하고, 조선과 왕래하는 걸 금지하기 위해서 위소를 설치해 묶어놨었지.

지금은 고려인이 송환되면서 이곳이 해체되다시피 했고, 그 빈자리로 원정군이 향했다.

요양으로 바로 향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하겠는가.

조선으로 치면 한성 바로 옆에 외국군대가 주둔하는 꼴이니, 요동이 반길 리가 없지.

그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데... 연오랑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여긴 아무리 봐도, 지금 당장은 꿀땅이 아닌 것 같단 말이지.’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21세기의 요동은 중국의 식량창고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허나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와서 지낸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느껴진다.

요동의 날씨는 연교차와 일교차가 극심해서, 한반도보다 더 지랄 맞다.

거기에 지구가 점점 소빙하기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이 한랭기후는 갈수록 더 심해질 거다.

땅도 사실 엉망이다. 동쪽은 그나마 괜찮은데 서쪽은 요하를 비롯해 크고 작은 강은 수도 없이 많다.

허나 하나같이 수리관개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범람은 매년같이 일어나고, 물길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어서 제대로 논밭을 일굴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오면서 보니, 이곳은 아예 쌀농사를 안 짓고 있는데... 과연 수리시설을 완공해도 쌀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확신을 못하겠다.

지금의 곡물종자는 21세기의 개량품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니까.

‘하긴 요동이 자력도생을 할 수 있었으면, 조선과 산동에 손을 벌리지도 않았겠지.’

엄살이나 비축분 축적이 아니라, 진짜로 빡빡하게 유지 되고 있으니... 이 땅의 곡물생산력이라는 게 크지 않은 건 분명하다.

논밭도 이런데, 제대로 된 도로나 다리 따위가 있을 리가 있나.

범람이 계속 되면 여름에는 늪지가 됐다가, 겨울에는 얼어붙기를 반복하면서 개떡 같은 땅이 되는 거지.

그나마 멀쩡한 땅인 이쪽에서도 뜬금없이 늪지가 튀어나오곤 했는데, 요택이라 불리는 지역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도 안 잡힌다.

‘괜히 20세기까지 사람이 안 살지 않았겠지.’

다 이유가 있을 거다.

생각만 해도 갑갑해서, 저절로 고개가 내저어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요양, 심양 동쪽 지역은 그냥 조금 추운 땅이지 그 정도로 개판인 땅이 아니라는 점.

농사짓기는 힘들어도, 광물자원은 풍부하다는 점이다.

물론 그걸 활용하려면, 그 지역을 완전히 조선의 구역으로 만들어야겠지.

점을 찍듯 도시만 개발해서 이것저것 만들어 놓으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진족이 가만히 있겠는가?

조선군이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와서 약탈하려고 난리를 피울 거다. 그걸 유지한다고 또 엄청 고생할게 뻔하고.

이런저런 앞날을 그려보는 동안 어느덧 동녕위에 도착했고, 원정군은 잠시 정비하며 원정의 마지막 준비를 시작했다.

산동에서 가져온 쌀과 여진족, 우량카이 3위 부족에서 구한 가축을 죄다 도축해 전투식량으로 만들었다.

남은 가죽은 다시 또 갑옷과 옷, 막사천으로 탈바꿈했으니, 원정군은 하나의 공장처럼 척척 돌아갔지.

물론 그러는 동안 지휘관들은 요양으로 넘어가서, 요동군 장군들과 회의를 빙자한 연회를 실컷 즐겼다.

“후...”

공녕군 이인은 붉게 달아오른 뺨을 매만지고선, 술기운을 뱉어냈다.

봄이 왔음에도 요동의 밤은 쌀쌀했고, 뒤집어 쓴 호피갑옷 안에선 술기운에 달아오른 몸이 후끈한 열기를 발산했다.

이 기묘한 느낌에 정신은 맑아졌고, 묘한 냄새가 섞여 있는 군진을 걸으며 술기운을 밀어냈다.

요양에서 되돌아오는 길에, 흔들리는 마차에 잠시 쪽잠을 잤던 게 도움이 되는 모양이다.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들을 제외하곤 군진은 말울음 소리도 없이 침묵에 잠겨 있었고, 이인은 자신의 발자국소리를 세기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도착한 목적지.

게르 중에서도 꽤 큰 게르 근처로 향하자, 횃불에 일렁이는 긴 그림자가 나타났다.

“판군사대장님.”

“조운 교관. 자네가 오늘 숙위인가?”

“예.”

이젠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을 쌓인 두 사람 아니냐.

이인은 경계근무를 서고 있는 연조운 곁으로 다가갔다.

“형님은 주무시나?”

“아직 깨어 계십니다.”

“음...”

연조운도 예전의 사냥꾼 연조운이 아니지 않나.

나름 예를 갖춰 이인을 대했고, 딱히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연전위, 연조운, 연손찬. 세 녀석은 연오랑과 찰떡 같이 붙어 다니면서, 그의 공훈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해서 실직은 없지만 품계는 나름 높았고, 그 품계에 맞춰 이젠 먹물도 머리에 찼다.

애초에 전설장수인 녀석들이니 지력 스텟이 낮지도 않고, 연오랑은 “출신으로 무시당하기 싫으면 공부해라.”라면서 계속 굴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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