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챕터17. 나아가다 (6)
“잠시 걷지.”
“예.”
이인은 연조운의 듬직한 등을 두들겨 주고선, 같이 걸음을 맞춰나갔다.
“요즘 어떤가?”
“저야 다를 게 있겠습니까. 조선에 있을 때와 달라질 것도 없습니다.”
“하긴...”
연조운의 직책은 착호군 훈련대 교관이었고, 여기서도 예전과 같이 착호군과 토관들의 집체훈련을 지도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전설장수인 이 녀석들은 연오랑의 지도를 받고, 날개가 달린 것처럼 실력이 상승해서 단박에 무기술 훈련교관 자리를 꿰찼다.
“토관들은 얼마나 따라왔지?”
“기창을 다루는 건 능숙해졌지만, 마상무술은 훈련을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다뤘던 무기와 다를 테니까요.”
“그건 그렇겠군.”
토관도 무관이니 기사와 기창은 당연히 할 줄 알았지만, 그 외의 편곤, 마상도법, 마상검법 등은 낯설었다.
서북면은 의주의 지원을 받아 신규격에 따른 통일된 무구로 교체됐지만, 동북면 출신들은 기존 무기를 그대로 사용했으니까.
호주에 와서 손에 안 익은 무기를 쥐게 됐으니, 아직은 미숙한 게 당연하지. 부대단위의 개인무술 집체훈련도 처음 받아봤을 테고.
“그래도 문제는 없겠지?”
“예. 사실 토관이야 말로 실전을 겪어본 이들 아니겠습니까. 다들 잘 따라오더군요. 오히려 전보다 처지가 나아져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음...”
이인이 듣기에 조선 재정이 부실하다고 말하는 건지, 착호군이 그만큼 충실하다고 말하는 건지 알쏭달쏭했다.
‘둘 다겠지만... 이제 곧 바뀌겠지.’
사실은 사실이지 않나.
예전이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지만, 조선팔도를 돌면서 살펴보니... 확실히 조선은 부족한 부분이 적지 않다.
그래도... 비록 정규군은 아니지만, 조선군이 이 정도로 성장한 게 어디냐.
“조선군병을 이끌고 요동땅을 밟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
이미 눈으로 봤음에도 이인은 감회가 깊었지만, 연조운은 ‘이게 뭐 별건가?’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유학을 공부하지도 않았고, 연오랑과 매일같이 붙어 다녔으니 생각이 다를 수밖에.
“다 왔군. 계속 수고하게.”
“예.”
이윽고 막사에 다다르자 연조운은 자리를 비켜줬고, 이인은 조심스럽게 천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등잔불에 의지해서 연오랑은 뭔가를 적고 있었는데, 때마침 일어서서 커다란 검을 들고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왔냐?”
“예. 무예도감을 쓰고 있었습니까?”
“잠이 안와서 말이다.”
“음.”
이인은 연오랑이 저러는 걸 한두번 본 게 아닌 터라, 스스럼없이 차주전자를 찾아 따라 마셨다.
술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터라, 물에 젖은 옷처럼 의자에 달라붙었다.
나른한 눈을 하고서, 처음 보는 장검을 바라봤다.
연오랑의 손에서 탄생한 생경한 무기가 많은데, 이번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엔 어떤 무기입니까?”
“쌍수대검. 서역에서 쓰는 무기지. 헌데 생각보다 잘 안되네. 이미 보급한 장도가 있는데, 굳이 쌍수대검이 필요한지 의문도 들고.”
“예...”
이인은 어린 나이에 착호군에 끌려와 구르지 않았나.
머릿속에 붓보다는 칼이 들어 있는 터라, 놀란 눈을 숨기지 못했다.
서역의 무기라니? 저런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
‘볼 때마다 놀랍단 말이지.’
이인은 연오랑이 건네준 쌍수대검을 힘없이 흔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군가는 왕자가 근본도 없는 이상한 군대에 끌려와 고생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인은 꽤나 만족하고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이복형이 있는 둘째 서자. 참으로 애매한 위치 아니냐. 태종의 자식은 한둘이 아닌 터라 더욱 그랬지.
한성에 있을 때는 조정대신들의 눈치를 보며,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게 일상이었는데... 인생이 바뀌었다.
나름 꿈이 있고 한량처럼 살고 싶지 않았던 그에게, 착호군은 구속이 아니라 기회였지.
해서 그는 왕자랍시고 거만 떨지도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용연군이 된 연오랑을 존경했다.
나이차도 한 살밖에 나지 않으니 신분을 뛰어넘어 어느새 형님 아우 하는 사이가 됐고, 태종은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안 그래도 연오랑과 왕실 사이에 오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터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게 딱히 어색하지도 않았고.
“술은 조금 깼냐?”
“예.”
“고생했다.”
연오랑 또한 이인처럼 작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이 시대는 술을 잘 마시는 것도 능력이자 재능으로 치지 않나. 이인은 기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술을 왕창 먹고 왔을 거다.
사실 원정군의 핵심인 연오랑이 요동 지휘관들을 만나는 게 맞겠지만...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거길 가서 뭐하겠는가.
미래를 위한 씨앗을 열심히 준비해야 돼서, 귀찮은 일은 전부 이인에게 떠넘겼다.
어찌됐건 조선왕자 잖아?
과할정도로 격을 맞춰줬으니, 요동 지휘관들은 만족했겠지.
“선화사寺는 어떻게 됐냐?”
“요양 인근에 짓기로 결정 났네요. 딱히 강하게 반대하진 않더라고요. 일전에 월경했던 승려들이 머물던 사찰을 넘겨주기로 했죠.”
“음...”
조선 건국 후 억불정책이 지속되자, 많지는 않지만 조선승려들이 요동으로 월경해 명의 도움을 받으려 했었다.
다만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명이 망하자, 월경하는 승려가 사라졌지. 개판이 된 중국으로 가봐야 딱히 달라질 게 없으니까.
해서 요양에는 예전에 넘어온 조선승려가 머무는 사찰이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조선에게 넘기기로 했다.
“선화사가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쉽게 허락한 걸 보면... 우리 눈치를 보는 모양이군.”
“예. 확실히 분열된 분위기를 보이더군요.”
이인은 연이은 연회와 연회를 빙자한 밀담을 나누고 온 터라,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유호방과 양곤이라, 어떤 인물인 것 같아?”
“음...”
이인은 연회 동안 추파를 던지듯, 은근슬쩍 달라붙던 두 사람을 떠올려봤다.
정난의 변 당시.
건문제는 요동도사였던 양문에게 연왕의 뒤통수를 후려치라고 명령했다.
양문은 요동군병과 우량카이 3위의 지원군을 이끌고 북평으로 쳐들어갔으나 대패했고, 이후 다시금 병력을 모아 재차 공격했으나... 이번에도 패배하여 포로로 잡히게 됐다.
하지만 운석핵꿀밤이 떨어지자, 연왕부도 흔들리게 됐다.
연왕부를 지키던 연왕의 삼남 주고치를 놓고 충성파와 반대파가 충돌했고, 반대파가 승리하면서 “천벌이 일어난 원흉”인 주씨를 쓸어버렸지.
충성파의 수장이었던 유강은 패잔병을 이끌고, 요동도사였던 양문을 앞세워 요동으로 후퇴했다.
이로 인해서 연왕부에서 북평부로 간판을 갈아 끼운 북직례와 요동이 원수사이가 된 거지.
하지만 요동으로 들어오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유강의 연왕부 패잔병이, 기존 요동세력을 밀어내고 요동을 차지한 꼴 아니냐.
양문이 요동병을 꼴아 박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겠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
이 애매한 관계는 지속됐고, 지금까진 유강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어찌저찌해서 하나로 묶어놓을 수 있었는데... 재작년에 그가 사망하고 아들인 유호방이 권력을 잡자 문제가 터졌다.
양문의 아들인 양곤이 그간 소외됐던 구요동파벌을 결집해서, 유호방의 신요동파벌과 본격적으로 대립했다.
그 전에도 티격태격했었는데, 이게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격화된 거지.
둘은 근거지를 따라서 요양파와 심양파라 불렸다.
“둘의 품성이나 능력은 어떤 것 같아?”
“그간 들려온 소문과 평판으로 보아 우열을 가리기 힘들죠. 나이도 비슷하고, 살아온 배경도 비슷하고. 일세의 준걸까진 아니지만 그렇다고 머저리도 아니라서...”
“큭.”
연오랑은 이인도 참 나쁜 물이 들었다싶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왕자 입에서 머저리라는 말이 나오다니, 조선도 진짜 이상해졌다.
“세력은?”
“아무래도 유호방의 요양파벌이 양곤의 심양파벌보다 조금 앞섭니다. 유강 때부터 산동상인을 밀어줘서, 돈이 될만한 건 요양파벌이 쥐고 있죠.”
“흐음.”
연오랑은 이마를 쓱쓱 매만지며 머리를 굴려봤다.
간단히 말해. 요양을 기준으로 요동반도를 필두로 한 남쪽은 요양파가, 북쪽은 심양파가 주요 요직을 차고 있는 상황이다.
지리적 요건 상 우량카이 3위는 심양파와 조금 더 가깝긴 하겠지만... 그래봐야 어차피 힘센 쪽에 붙을 놈들이고, 여진족도 마찬가지겠지.
‘우릴 기만하려는 건, 확실히 아니군.’
우량카이 3위, 조선군, 요양파와 심양파의 요동군.
이번 원정은 이렇게 넷으로 쪼개져, 각자 알아서 흥안령을 넘기로 되어 있었다.
애초에 서로를 완전히 믿지도 못하는데, 함께 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냐.
나아가 군대는 덩치가 커지면 커질수록 이동속도는 곱절로 느려지고, 보급문제 또한 곱절로 어려워진다.
다만... 아무리 요동의 권력을 놓고 싸워도, 일단 북원잔당부터 치워놓고 싸워야 할 거 아닌가.
그런데도 서로 군을 합치지 않고 떨어뜨린다는 건, 그만큼 둘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이겠지.
‘우릴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할 거고...’
요동이나 우량카이 3위 입장에서, 조선군이 자신들만큼 열심히 싸울 거라 생각하겠는가.
그들 입장에선 조선이 뒤통수만 치지 않으면 작전성공이니, 원정군이 흥안령 너머로 진군하기만 해도 만족할 거다.
하지만 조선군은 깜짝 선물을 던져줬지.
“둘 다 만나봤을 터, 우리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죠. 그들 입장에선 뜬금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 믿지 않을 수도 없을 텐데?”
“뭐. 자기들끼리 고민하는 것 같던데, 결국은 양곤이 함께하기로 했죠.”
“역시... 세가 부족하니 도박을 하는 군.”
“예.”
연오랑은 쌍수대검을 가볍게 흔들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요양파벌이 미끼를 덥석 물 줄 알았다.
조선군의 계획은 모두에게 이득일 테지만, 특히나 산동에게 이득이 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은 더 먼 곳까지 굽어본 모양이다.
원정이 성공하면, 우량카이 3위는 서쪽으로 밀려나게 될 거다.
빈 땅은 양곤의 심양파벌이 차지하게 될 테니, 요양파벌은 벌써부터 견제하려는 게 아닐까?
‘산동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군.’
뭐가 됐든 이득이니 별 생각이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양파벌에게 살짝 호의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그걸 예상 못하진 않았을 텐데, 뭔가 따로 연결고리가 있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지만, 지금 당장 알 수 없는 일 아니냐.
어찌됐건 요동군이 도와주면 나쁠 건 없다.
‘요동은 지금처럼 분열한 상태가 최선이니, 이번 기회에 세가 부족한 심양파벌을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연오랑은 그리 결론을 내렸다.
이윽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원정군은 곧장 진군을 시작했다.
요동군은 각각 일만오천의 병사를 동원했고, 우량카이 3위도 비슷한 병력을 동원했다.
혹시나 했는데, 요동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몽골잔당을 치울 작정인가 보다.
이게 얼마 안 되는 병력 같지만, 실상은 동쪽을 비우다시피해서 영혼까지 끌어 모은 병력이니까.
지금 요동의 주요 군사거점은 두 군데였다.
요동과 북평은 요서회랑을 통해 육로로 연결되고, 중국은 유목민족을 막기 위해서 관문을 만들었다.
역사를 따라 계속 보수되고 확장되면서, 지금의 산해관이 되었지.
하지만 요동 입장에선 북평부의 공격을 막을 성채나 관문이 없지 않나.
해서 산해관 반대편. 요서회랑의 입구인 대릉하를 끼고, 광녕위에 새로운 관문을 쌓았다.
미래의 영원성이 훨씬 이른 시기에, 보다 거대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있다.
웃기게도 역사가 거꾸로 돼서, 중국본토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성을 쌓은 거지.
다른 하나는 요동반도 끝 금주위. 21세기에는 대련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이곳은 산동과 이어지는 목줄이니, 반드시 지켜야 했지.
결국 두 곳을 지키는 병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병력을, 이번 원정에 동원한 셈이다.
회의 결과 나온 진격로는 간단했다.
가장 북쪽으로 우량카이 3위가 훑고 갈 거고, 그 밑으론 요양파 요동군이, 그 밑으론 조선군이, 가장 밑엔 심양파 요동군.
이렇게 네 갈래로 나뉘어서 그대로 흥안령을 넘어 서쪽으로. 21세기엔 내몽골 자치구라 불리는 지역을 쭉 밀고 가는 계획이다.
물론 앞을 가로막는, 거슬리는 몽골 부족은 싹 쓸어버릴 거고.
*****
“음.”
“흠...”
“과연.”
연오랑과 황보인, 이인은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신음과 감탄을 참지 못했다.
먼 옛날.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이 왜 요택을 건너다가 제풀에 쓰러졌는지 알 것 같다.
원정군은 우량카이 3위, 요동상인을 통해 구한 길잡이를 앞세워 흥안령을 향해 나아갔는데...
요양에서 벗어나 얼마가지도 않아, 악명 높은 요택을 마주하게 됐다.
뭐 이딴 개떡 같은 땅이 다 있나.
웅덩이도 아니고 호수도 아닌 애매한 소택지. 이어지다가 끊어지길 반복하는 강줄기.
끝도 없이 펼쳐지는 습지와 습지의 바닥이 보이지도 않게 쏟아난 갈대밭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