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97화 (97/538)

97. 챕터18. 부딪치다 (1)

아니다. 밭이 아니라 갈대바다를 보는 것 같다.

혹시나 싶어서 슬쩍 들어가 봤는데... 죄다 뻘에서 구른 것 마냥, 진흙투성이가 되어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기겁할 노릇이다.

더군다나 아직 여름이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물안개마냥 날벌레가 잔뜩 피어오르고 있다.

여름에는 모기떼까지 튀어나올 텐데... 아우 상상하기도 싫다.

여긴 요택의 중심부도 아닌데 이 정도면, 남쪽으로 내려가면 갈수록 첩첩산중일 거다.

“예전의 사행단이 괜히 북로北路를 선호한 게 아니군.”

“예. 남로가 있긴 하지만 그곳은 요동군이 가고 있을 테니, 북로를 선택하길 잘한 것 같습니다.”

황보인은 질렸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요동과 중국이 연결되려면 어찌됐건 요택을 지나야했다.

해서 명나라는 북쪽으로 빙 도는 북로와, 해안가를 따라 요택을 뚫고 나가는 남로를 만들었다.

습지 중간의 마른 땅에 역참과 마을을 만들어서 교통로를 이어놓은 거지. 하지만 그게 제대로 된 도로겠는가.

아마 남로를 건너고 있을 심양파 요동군은 피똥을 싸고 있을 거다.

“걔들 병력이 온전히 보존 될까?”

연오랑 또한 질려서 고개를 내저으며 묻자.

“북진에 도착하면 광녕위에서 병사를 교체할 테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걔들도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하겠지만... 실제로 될까 싶어서 말이지.”

“광녕위엔 이미 주둔하고 있는 요동병이 많으니 괜찮을 겁니다. 대신... 기병의 비율이 줄어들지 않을까, 그게 걱정입니다.”

황보인과 이인이 말을 이어받았다.

몽골 초원으로 가는 판국에 기병비율이 줄어들면 곤란하지 않나. 다만... 요동병이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어떻게든 해결할 거다.

요택의 맛만 슬쩍 본 원정군은 곧장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나아갔다.

요동에서 몽골초원까지 쭉 이어지는 서요하에 가깝게 북진한 후에, 다시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서요하의 지류를 따라 평원을 가로질렀다.

전쟁을 나온 건지 행군을 나온 건지 헷갈릴 정도로, 목가적인 분위기가 이어진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지평선이 매일 같이 반복된다.

이곳은 우량카이 3위의 영역이긴 한데... 미리 소개疏開를 시킨 건지 워낙 인구밀도가 적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다만, 사람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 둘 다가 맞지 않을까?

조선군이나 요동군이 같은 몽골족인 북원잔당과 우량카이 3위를 구별하긴 힘들 테니까.

이런 무인지대를 계속 행군하다보니 뭐랄까... 딴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낮은 구릉과 숲이 계속 이어지고, 하천과 비슷한 옅은 개울이 듬성듬성 껴 있고, 황무지와 호수와 습지가 약간씩 섞여 있었다.

토질의 상태는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확실히 농사짓는 건 힘들 것 같다.

원정군은 연오랑의 지시 없어도, 각 연대장의 지휘에 맞춰 계속 분열합벽을 반복하며 나아갔다.

거창하게 말해서 분열합벽이지, 그냥 연대 단위로 행군하다가 대대나 중대로 쪼개져서 가상의 목표를 잡고 포위하는 훈련을 반복했다.

연오랑이 보기에 지금 조선의 기병은 뭐랄까...

창기병, 궁기병과 같은 병과로 나뉘는 게 아니라, 그냥 경기병, 중기병으로 나뉘는 듯 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병종을 딱히 따지지 않는 수준이었지.

죄다 기사와 기창은 기본이고 추가로 마상도검도 사용하니, 무장을 가볍게 하면 경기병이 되고, 단단히 챙겨 입으면 중기병이 되는 식이다.

아마도 원,여진,고려의 기병운용법이 전부 뒤섞이면서 이렇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문제라면... 재정이 부족하다보니 대규모 기병군단을 유지하고 훈련해 본적이 없어서, 수성은 잘할지 몰라도 공성과 야전에 대해서는 미숙하다는 점.

해서 연오랑은 하루도 빼먹지 않고, 계속 원정군을 굴려댔다.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 아니냐.

지금 아니면 이런 초원에서, 또 언제 기병 방진훈련을 해보겠어.

조선군 입장에선 퍽 어색하지만... 사실 이렇게 싸우는 게, 이런 평원과 몽골초원에서의 정석적인 전투방법이니까.

먼지구름을 뿌옇게 뿌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기병연대.

그 뒤를 둥둥. 작은 북소리를 내는 마차를 중심으로, 일단의 기병이 느긋하게 뒤따랐다.

“여기가 좋겠다. 잠시 멈추자구나.”

“예. 아버님.”

백발이 성성한 노인. 이회는 마차의 차양에서 나와 뻐근한 뼈마디를 두들겼다.

이 멀고먼 외지에 오기엔 나이가 적지 않지만, 평생의 염원을 이룰 수 있게 됐는데 어찌 마다할 수 있을까.

조선의 고지도인 팔도도를 제작하고, 원,명,고려,일본의 고지도를 종합해,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든 인물이 바로 이회다.

죽기 전에 자신의 눈으로 요동과 요서, 몽골 땅을 밟을 기회가 생겼는데, 이걸 마다할 인물이 아니었지.

연오랑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의 지도는 ‘이게 지도인가?’ 싶을 정도로 수준이 떨어졌고, 개량하고 싶어도 지식이 부족해서 혼자 할 수가 없었다.

별 수 있나. 그가 잘하는 시간+공돌이+자본을 쑤셔 넣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다만 괜히 지도를 만든다고 까불다가, 조정에게 밉보일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시대는 민간지도의 제작이 활성화된 시대가 아니니까.

지금까지 조선은 지도제작을 담당하는 부서가 없어서, 필요할 때마다 관료들을 모아 공동으로 작업했다.

도화원圖畫院의 화가, 관상감의 지관과 천문학자, 수에 능한 산학박사算學博士등이 모여서 지도를 만드는 거지.

하지만 착호군이 만들어졌잖아? 연오랑은 대대적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착호군 내에 지도를 제작하는 전문부서 지리감地理監을 만들었지.

조정대신들은 “쟤들 또 이상한 거 만드네? 저래도 되나?”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세종과 태종이 밀어붙였지.

이렇게 만들어진 지도는 군사용뿐만 아니라, 양전사업의 밑바탕이 되니까.

양반사대부, 지방호족들이 그간 얌체처럼 은전隱田으로 빼돌렸던 토지를 싹 찾아내고, 불법점유 및 강탈한 토지를 빌미로 두들겨 팰 수 있었지.

해서 조정관리,임시관리가 뒤섞인 지리감은 착호군의 이동경로를 따라가며 지도를 새롭게 제작했다.

착호군엔 솜씨 좋은 대장장이와 목수가 널려 있으니, 그들은 누구의 간섭도 없이 상상력을 마구 발휘해서 측량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들어냈다.

저 특이하게 생긴 마차도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지.

기리고차記里鼓車는 바퀴의 회전수를 계산해서, 크기가 다른 톱니바퀴를 겹쳐서 북과 종을 치고, 그걸로 거리를 측정하는 물건이다.

기리고차의 원리는 오래전에 중국에서 한반도로 넘어왔고, 원래 역사에서의 세종이 그걸 개량해서 기리고차를 만들었지.

하지만 연오랑은 미디블워 게임을 통해서 기리고차를 알고 있었고, 그가 만든 신형마차의 구조를 결합해서 업그레이드 된 기리고차를 만들었다.

이 지도제작은 원정 동안 계속됐고, 오히려 여기 와서 제대로 꽃을 피웠다.

이젠 조선팔도 뿐만 아니라, 외국땅을 마음껏 밟으며 지도를 만들 수 있었으니까.

이회는 이들의 최고책임자였고, 각 연대에는 지리감 소속 지도제작자들이 함께하면서 열심히 지도를 만들고 있었다.

지리감을 포함해 보조군 모두가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정신없는 곳은 따로 있었다.

“준비됐나! 대감들께서 보고 계시니 제대로 해야 된다.”

“걱정 마시죠. 장군님.”

“아무튼. 제대로 해야 돼!”

“예에...”

우락부락한 중년의 외침에, 화포병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저 양반이 저렇게 채신머리없는 모습을 보이는 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오늘은 유독 더 심했다.

이유야 별거 있나.

최해산과 그의 아들 최공손에게 변소청소노역을 시킨 인물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그렇다.

최해산은 화기 전문가로서 이미 조정에서 나름 입지가 있는 인물이고,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게 원정군 내에서도 통하겠는가.

그는 호주에 오자마자, 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리저리 뺀질거리는 모습을 보였다가 제대로 걸렸다.

당장 연오랑과 이인에게 끌려가 잔뜩 욕을 얻어먹고, 무려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완전군장을 하고서 뺑뺑이를 돌고 변소청소노역을 했지.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 없었는데, 감히 개길 수도 없고...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거기서 끝이면 “에라이. 똥 밟았다.”하고 넘어갈 텐데, 연오랑은 매일같이 화기대로 와서 두 부자를 갈궈댔으니... 이젠 이름만 들어도 경기가 들릴 지경이지.

연오랑은 최해산 부자의 성품에 대해선 익히 들었고, 당연히 ‘걸리기만 해라. 조져서 정신머리를 개조시켜주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름 능력도 있는 놈이, 왜 저렇게 방종하고 방정맞게 사는지 모르겠다.

저래서야 이번 원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화기대를 맡길 수가 없잖아?

신병을 굴리듯 미친 듯이 갈궈서, 정신개조를 시켰다.

약발이 제대로 받았는지, 조정에서 함께 지낸 다른 장군들이 “저 인간이 내가 알던 최해산이 맞나?”라고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바뀌었지.

“1포대부터 발포!”

“발포!”

콰콰쾅! 폭음과 함께 매캐한 냄새가 퍼지고, 지축을 흔드는 진동이 이어졌다.

“2포대 발포!”

“발포!”

연이어 터지는 굉음. 10개의 야전화포를 하나로 묶어 1개 포대. 화기중대를 만들었는데, 순서대로 총 10포대의 화포가 연신 불을 내뿜었다.

“고작 100문이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반대로 “100문이나 끌고 왔어?”라고 말해야 한다.

이 시기의 화포는 청동으로 만든 거라서, 무지하게 비싼 물건이니까. 나아가 기병군단이 야전화포를 끌고 다니는 건, 이미 시대를 초월한 발상이지.

세종과 태종은 연오랑의 제안을 받아들여, 기존에 있던 화포를 전부 녹여버리고 새로운 형태로 제작했다.

덤으로, 대마도에서 약탈해온 범종과 온갖 구리물품은 전부 군기감으로 들어갔지.

이 개량작업은 다양한 방식으로 연구가 이어졌는데, 그 선행 작업으로 화약제조청과 군기감이 먼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착호군이 창설되면서, 천민, 신량역천인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섞어버리지 않았나.

모두의 우려와 불만을 날려버리듯, 착호군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지.

이에 세종은 착호군과 배봉마을의 방식을 본받아, 두 기관을 확장하고 화약장과 철장들을 대대적으로 면천시켰다.

배봉마을이 보여준 체계화, 학문화 연구방법론.

맨땅에 헤딩하는 노가다 무한반복 작업의 효용성은 이미 증명됐잖아?

초석, 황, 목탄의 비율을 미묘하게 달리해보고, 목탄으로 쓰이는 나무의 종류를 달리해보고, 화포를 만드는 방식을 미묘하게 바꿔보고 등등.

작은 변수를 하나하나 만들어, 계속해서 경험치를 쌓아올리는 거지.

다만 이걸 위해선, 관노를 부리는 기존방식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무리 글을 아는 관리들이 지도한다고 해도... 직접 불과 금속을 다루는 장인들이 스스로 변수를 통제하고, 비교대조군을 확인하고 이해해야 하니까.

이러려면 장인들이 자본유학에서 말하는 실사구시, 잡학근본을 공부하든가. 아니면 관리들이 직접 손을 데여가며 불과 금속을 다룰 줄 알아야 했지.

세종은 당연히 둘 다 시켰다.

전국의 관아에 속해 있던 솜씨 좋은 철장들, 철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관리들을 긁어모아서 배봉연구소처럼 꾸몄다.

화약과 화포제작을 학문화, 체계화시키는 작업에 돌입한 거지.

원래 역사에서도 세종대에 이런 통일화작업이 이뤄지지만, 이건 이미 그런 차원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어쩌면 이내 곧. 화약학이라는 잡학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바로 이 야전화포다.

크기는 기존과 거의 엇비슷하지만, 포가 옆엔 큼지막한 바퀴를 달고, 포가 끝엔 걸쇠를 달아 두필의 말이 끌고 다닐 수 있게 했다.

반동이 줄어들고, 조준이 편해진 건 당연한 이야기고.

그 결과. 야전화포는 전원기병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아무런 무리 없이 따라다닐 수 있었다.

쾅쾅! 굉음과 함께 온 사방은 회색연기로 가득 찼고, 화기대 뒤편에 있던 기병연대에선 연신 말울음소리가 터지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대장군전을 비롯한 화포용 나무화살. 철령전鐵翎箭이 긴 꼬리를 흔들며 평원 저편에 떨어지는 게 모두의 눈에 들어온다.

“그대로. 이번엔 철환으로 쏴보라고 해라.”

“옙!”

연오랑의 명에 화포병은 재깍 달려가 최해산에게 전했고, 이윽고 100문의 화포는 다시금 천지를 흔들며 큼지막한 쇳덩이를 뱉어냈다.

이번 건 확실히 작아서 그런지, 멀리 나아가자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다.

“회수할까요?”

“아니. 진형을 바꿔서, 훈련한대로 다시 방열해봐.”

“옙!”

연락병 역할을 맡은 화포병은 재깍 발을 놀렸고, 화기대는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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