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챕터18. 부딪치다 (2)
일렬로 쭉 늘어서 있던 100문의 화포가 순식간에 자리를 바꾸기 시작.
화포병들은 말과 연결한 포가를 끌고 재빠르게 움직여, 이번엔 서쪽을 향해 5열로 늘어섰다.
“1포대부터 발포!”
“발포!”
이번에도 연이어 굉음이 터지고, 화기대가 있는 곳은 물안개라도 피어난 것 마냥 회색연기로 가득 찼다.
“계속해봐. 방열하는데 얼마나 걸리는 지 봐야겠다.”
“옙!”
요동에 와서 처음 하는 실전훈련 아니냐. 초장부터 빡세게 굴려댔다.
지금까진 요동군과 우량카이3위를 의식해서 화포를 보여주지 않았지만, 이젠 감시의 눈길도 멀어졌으니 훈련을 해야지.
화기대는 서쪽을 향해 화포를 쏴댔다가, 방향을 바꿔 동쪽을 향해 쏘고, 각 포대별로 분열해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축차사격도 하고.
계속해서 온 대지를 회색연기로 물들여 갔다.
“토관의 전마들은?”
“아직은 혼란스럽지만, 곧 적응하게 될 겁니다.”
서북면의 토관을 이끌고 온 최윤덕, 동북면의 김종서는 연오랑의 물음에 냉큼 답했다.
‘이젠 이런 모습도 익숙하군. 아니군. 이 녀석은 처음 봤을 때부터 이랬던가?’
최윤덕은 속으로 쓴웃음을 흘렸다.
대마도 정벌 때 만해도 까마득하게 어렸던 녀석이, 지금은 올려다볼 인물이 됐다.
그의 입장에선 참... 적응하기 힘들지만 어쩌겠나.
대마도에서부터 싹이 보였기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것 같았는데... 이런 식일 줄은 몰랐지.
군 작호를 받은 태종의 오른팔이라니, 너무 올라간 거 아니냐.
“설마 죽거나 다친 말이 있진 않겠지?”
“예. 아직 없습니다.”
연오랑이 슬쩍 눈을 흘기자, 둘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녀석의 갈구는 솜씨는 이미 파다하게 알려졌지 않나. 이미 한번 찍힌 김종서는 또 찍히고 싶지 않았다.
말은 꽤나 똑똑하고 겁이 많은 동물이라서, 전장의 혼란한 상황과 소음, 냄새 등에 익숙하게 만들어야 했다.
시간을 들여, 체계적인 훈련을 거쳐야 진짜 전마가 만들어지는 거지.
원래 역사에서건 지금 역사에서건, 유목민족기병의 천적이 괜히 화약무기가 된 게 아니다.
문제라면 토관이 데려온 전마들은 화포의 굉음과 화약 냄새를, 생각 외로 낯설어 했다는 거다.
아무래도 여진족을 두들겨 팰 때는 화포를 쓴 적이 얼마 없어서,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 같았다.
원래 역사와 많이 비틀어진 지금은 여진족과의 충돌이 생각보다 없고, 오히려 조선이 말을 안 듣는 여진족을 일방적으로 때리는 상황이니까.
해서 녀석들은 화기대가 훈련할 때마다, 뒤에서 구경하면서 화포에 익숙해지고 있지.
“연대별로 화기중대를 배속하는 건 알고 있지?”
“예.”
“최대한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다. 흥안령을 넘는 순간, 지금보다 빠르게 진군할 거다. 문제가 생기면 대계가 흔들려.”
“...”
최윤덕과 김종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대계라는 무게에 절로 어깨가 무거워졌으니까.
명이 있던 시절을 기억하던 둘에게, 지금 시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우니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꼭 명심해라. 나중에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
끝까지 얄밉게 한소리 하는 연오랑을 보며, 둘은 눈을 마주치며 쓴웃음을 흘렸다.
원정군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일주일이 지나자 드디어 흥안령을 마주하게 됐다.
21세기엔 대흥안령이라 불리는 이곳은 오래전부터 몽골 고원과 요서,요동을 나누는 기준이 되었던 곳이다.
허나 거대한 산맥치고 생각보다 험준하지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살기에 험한 산맥이었으면, 유목민족의 발원지가 되지도 않았겠지.
완만한 산세를 이루며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고, 평평한 분지초원도 나오고, 강도 꽤 흐르고, 거목들이 꽤나 많이 박혀 있었다.
이런 산맥 속 평평한 곳엔, 몽골 부락이 드문드문 위치했지.
달리 말하면, 원정군은 몽골 잔당이 그러는 것처럼, 큰 어려움 없이 이곳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뜻.
연오랑이 이끄는 사령부와 보조군은 느긋하게 협곡을 따라 진군했고, 10개의 연대는 부채꼴을 그리듯 사방으로 퍼지며 흥안령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
“연대장님. 몽골부락을 발견했습니다.”
“수는?”
“마을을 이룬 걸로 보아, 못해도 사백호는 될 것 같습니다.”
“음...”
연대에 배속된 특전대원의 보고에 이순몽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전대는 착호군을 만들면서 연오랑이 매섭게 굴린 녀석들이다.
예전에 연오랑이 거제도에서 했던 말을 떠올려보면... 특전대는 무력정찰대로서 충실히 키워졌을 거고, 북변의 날랜 정찰병보다 실력이 나을 거다.
이순몽은 특전대원의 보고를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저기가 호할라라고 했나?”
“예. 장군님.”
이순몽의 날카로운 눈빛에, 길잡이들은 절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요동군과 우량카이 3위가 붙여준 길잡이 둘. 요동상인을 통해 받은 길잡이가 셋.
각 연대별로 길잡이가 다섯명 이상 붙어 있었고, 원정군은 이들을 앞세워 몽골 부락을 찾아냈다.
서로 말이 다른 경우에는 당장 목이 날아갈 판국 아니냐.
길잡이들은 맹렬하게 자신이 아는 지식을 토해냈고,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정보만 취합하면 진실에 도달했지.
“항복을 청하면, 받아들일 것 같으냐?”
“...”
아니나 다를까. 길잡이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다들 부정적으로 보는 게 분명하다.
“어째서지?”
“호할라의 웅가 족장은 잔악하기 짝이 없는 자로, 스스로 칸을 꿈꾸며...”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한 건지, 몽골인 길잡이는 맹렬하게 말을 토해냈다.
너무 빨리 말해서, 역관이 다 알아들을 수도 없을 정도로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간단히 말해서 명나라에 제일 먼저 항복했다가, 또 제일 먼저 배반했고, 사방팔방 약탈을 다니며 세력을 키운 녀석들이라는 거다.
저 사백호의 부족민 중에서, 삼분의 일은 납치해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힐끔 눈길을 돌려보자, 녀석의 설명을 알아들었는지 요동인 길잡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호할라의 패악질에 대해서 소문을 들은 모양이다.
“좋아. 친다.”
“옙!”
잠자코 지켜보며 길잡이들을 압박하던 중대장들은, 재깍 경례를 하고선 빠르게 흩어졌다.
산맥 협곡 한 귀퉁이를 틀어쥐고 쉬고 있던 3연대는 순식간에 잠에서 깨어났다.
흥안령은 조선땅처럼 산과 구릉, 협곡과 평지가 모두 뒤섞인 땅 아닌가.
먼 곳에서부터 적이 다가오는 걸 알아차릴 수 없으니, 3연대는 나지막한 산맥의 허리를 타고 호할라로 향했다.
고개를 치켜들고 봐야 끝이 보일 정도로 치솟은 거목들 사이로, 기병들이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길이 없으면 어떠냐.
여긴 늪지도 잡풀이 무성한 곳도 아니어서, 기병이 움직이는데 문제가 없었다.
오르락내리락하며 산세를 타고 이동한 3연대는 저 아래쪽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멈춰 섰다.
“화기중대장.”
“예.”
“저곳에 방열하도록.”
“옙!”
이순몽은 마을을 조망할 수 있는 살짝 튀어나온 산기슭을 가리켰고, 화기중대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움직였다.
대마도 정벌 이후 이순몽은 조정에서 일하면서, 착호군에 불려가 병력을 지휘해 본 적이 있었다.
세종과 태종이 점찍어 둔 인재니, 미리미리 경험시킨 거지.
해서 급하게 원정군에 참여했음에도 빠르게 적응했지만... 화기대는 솔직히 낯설었다.
그는 성격조차 돌격대장 스타일인 터라, 이 완벽한 기병연대에 화기대를 끼워 넣는 게 영... 그랬으니까.
이런 훌륭한 정병을 놔두고, 뭐 하러 비싼 화약을 써가며 미지근하게 싸운단 말인가.
야전화포가 아무리 이동력이 뛰어나도, 화끈하게 기동하는 기병연대와 발을 맞출 순 없잖아?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이내 쏙 들어갔다.
개량된 야전화포는 이순몽이 아는 화포와는 차원이 달랐고, 병력 손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연오랑이 버티고 있다.
몇 번이고, 화기대와 보조를 맞추는 일에 익숙해지라고 강조했는데... 성격에 안 맞는다고 버티다가는 진짜로 뒤진다.
“1대대 1,2,3중대는 서쪽으로, 2대대 1,2,3중대는 동쪽으로, 1대대 4중대, 2대대 4중대는 북쪽. 보조중대는 남쪽을 막는다.”
이순몽은 기창 끝으로 땅바닥에 죽죽 그림을 그려가며, 작전을 지시했다.
몽골 부락 사백호 정도면, 싸울 수 있는 병사는 아무리 많아봐야 천명 정도.
기습 포위를 하면, 도망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거다.
“대기해라. 공격신호는 화기대가 해줄 거다.”
“옙!”
“충성!”
대대장, 중대장들은 경례를 했고, 이순몽 또한 어색한 손짓으로 경례를 받아줬다.
‘하여간 특이한 건, 죄다 만든단 말이지.’
경례 또한 연오랑이 착호군에 퍼트린 건데, 이건 의외로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조선 군례는 딱히 정해진 게 없었고, 지금의 군사체제는 군계급이 아닌 실직과 품계가 섞여서 서열이 정해지지 않나.
그렇다보니 윗사람을 대하는 예가 딱히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라면. 유학적 논리가 민간과 군문에까지 퍼지면서 유교식 예법이 자리 잡게 되지만, 사상계가 쪼개진 지금은 중구난방이잖아?
해서 누구는 절을 하고, 누구는 꾸벅 목례하고, 누구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반대로 “너 지금 나 무시 하냐? 상전을 대하는 예를 제대로 취해야지?”이러면서 난장을 피우는 이들도 있었고.
이게 정식 관리끼리는 더 복잡해진다.
품계마다 맞는 예법이 따로 있어서, 5품이 1품을 대하는 예와, 3품이 1품을 대하는 예가 달랐다.
지금은 이런 예법조차 “망한 명나라의 법을 왜 따르냐!”라며 바꾸자고 난리치곤 해서, 두 배로 골치가 아프고.
하지만 이것 보라. 전례도 없고 근본도 모르는 군례지만, 깔끔하고 명확하잖아?
누가 됐건 상급자에게 오른손을 올려 이마에 닿기만 하면 끝이니, 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편했지.
이순몽은 상념을 날려버리고선 화기대와 함께, 중대가 자리 잡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특전대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준비가 완료됐다고 알려왔고, 이순몽은 곧장 명을 내렸다.
“초탄은 장군전으로. 목표는 마을 정중앙에 있는 큰 가옥이다.”
“예.”
마을로부터 숲이 우거진 이 구릉까지의 거리는 대략 삼백보 정도 됐고, 마을에선 이쪽을 보더라도 딱히 이상한 걸 느끼지 못할 거다.
이쪽 흥안령 일대. 내몽골 지역은 원나라와 명나라 시절을 거치면서 반쯤 정주민화 된 몽골 부족이 살고 있지 않나.
그래서 게르가 아니라 멀쩡한 북방식 집에 살고 있었다.
초원에서는 집짓고 사는 게 힘드니까 게르에서 사는 거고, 여긴 넘쳐나는 게 목재다.
“후탄은 목책을 노리고.”
“옙.”
“그 후에는 튀어나오는 놈들을 노린다. 어지간하면 말을 노리지 말고, 몽골 놈들만 노려봐.”
“예...”
정신없이 왔다갔다하는 놈들을, 육중한 화포를 이용해서 뭔 수로 골라잡을까.
무리한 요구인 걸 알지만, 화기중대장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화포병들은 열심히 포구를 닦고 화약과 격목. 끝으로 철량전을 쑤셔 넣었다.
짧게 잘라 놓은 심지에 불이 붙자.
콰쾅! 폭음이 터지며, 묵직한 나무화살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하늘에서 떨어진 통나무마냥, 펑펑! 마을 정중앙에 있는 가옥을 박살내며 틀어박혔다.
10개의 대장군전 중에서 4발만 적중하고, 나머지는 엉뚱한 곳에 떨어져 애꿎은 가옥을 박살냈지만... 이게 어디냐.
초탄에 이 정도 명중률이면 훌륭한 편이다.
“포각 수정해!”
“여기 지반이 더 낮잖아! 더 올려!”
화포병들은 포가에 달려 있는 도르래 손잡이를 열심히 돌리자.
포신을 받치고 있는 톱니바퀴가 움직여, 포신 앞쪽을 위로 들어올렸다.
“수정 완료!”
포각을 수정하는 동안, 다른 화포병은 끝에 천이 달려 있는 막대기로 포구를 청소했고, 뒤이어 다시 화약과 격목을 꾹꾹 밀어 넣었다.
“준비 끝!”
“발포!”
콰쾅! 화포병들은 재빠르게 재장전을 완료했고, 10대의 화포는 짧은 시간차를 두고 연이어 대장군전을 쏘아냈다.
화포가 개량된 후. 일반 정군과 달리 꽤나 특별한 대접을 받은 화포병들 아닌가.
투자한 만큼의 효과가 제대로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군도 아니고 착호군도 아닌 애매한 소속이었지만, 반대로 혜택은 양쪽으로 받았다.
지금껏 조선의 화포병은 대체로 화약장, 염초장이 겸하고 있었는데, 화기대가 창설되자 군역을 벗어던졌다.
확대한 화약제조청과 군기감으로, 장인들이 죄다 빨려 들어갔으니까.
얘들을 군역으로 부리느니, 그 시간에 화약을 더 만드는 게 이득이다.
해서 화포를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병종이 새롭게 필요했고, 연오랑의 입김을 잔뜩 받아 만들어진 화기대는 뭐랄까... 그냥 화포를 쏘는 기병이었다.
얘들은 화포가 없으면, 그대로 기창과 기사를 하는 기병으로 변신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