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챕터18. 부딪치다 (6)
‘설마... 우릴 얕본 건가?’
문뜩 그런 생각이 피어올랐다.
허나... 원정군에 대해서 토가바토르가 제대로 알지 못하겠지만, 고려 때를 기억하면 조선이 만만한 나라는 아니지 않나?
지금 조선군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활도 잘 쏘는 나라지, 활만 잘 쏘는 나라가 아니니까.
‘좌우군을 모두 붙들어 놓고, 전력으로 중군을 노릴 생각인가? 그런데 우리가 너무 잘 버텨서 꼬인 거고?’
생각은 꼬리를 잡고 이어졌다.
착호군은 지난날의 조선군을 한참 웃도는 정예병 아니냐.
어쩌면 그 옛날 태조대왕과 함께 하던 가별초보다 뛰어날지도 모른다. 적어도 무장은 더욱 충실하니까.
아마 이 부분이 토가바토르의 예상을 비틀지 않았을까?
‘허나 나쁠 건 없다. 어차피 중군을 노린다면, 차라리 잘된 일.’
“예비중대를 서쪽으로 투입한다. 퇴로를 틀어막아 중군 방향으로 더 빠르게 밀어붙인다.”
“옙!”
머릿수가 현저히 적은 중군이지만... 충분히 버텨내는 건 물론이고, 오히려 몽골기병을 한방에 격침시킬 수 있을 거다.
“음...”
마차를 개조해, 바퀴가 달린 작은 지휘탑에 올라 있던 최윤덕.
그는 먼지구름이 가득한 전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진행되고 있다.
딱히 방법도 없지 않나.
토가바토르 입장에선 일점돌파를 통해 전황을 바꾸는 수밖에 없고, 중군이 유인책이자 함정인 걸 알고서도 힘으로 뚫고 나가려고 할 게 뻔하지.
허나 그 결단의 시간이 더욱 촉박해졌다.
미끼이자 방벽 삼아서 좌우군으로 밀어 넣은 몽골기병이, 토가바토르의 예상보다 빠르게 무너지고 있으니까.
“좌군과 우군 모두 예비대를 투입했습니다!”
“음.”
다 같이 토의했던 것처럼, 김효성과 조비형 모두 일심동체로 움직이고 있다.
포위망을 좁혀, 지금 당장 중군으로 밀어 넣겠다는 움직임이다.
‘토가바토르의 예비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비대를 빼놓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기병끼리 맞붙는 상황에서 그럴 여유가 얼마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쪽 지형을 원정군이 완벽하게 알지 못하니, 걸리지 않고 어딘가에서 숨어서 틈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본대를 무너뜨리면, 예비대가 남아도 의미가 없지 않나.
‘지금 당장은 작전대로 움직이는 게 우선이다.’
“옵니다!”
최윤덕 옆에 있던 눈이 좋은 정찰병이 목청 높여 외치자.
“준비!”
그 또한 명을 내렸고, 중군은 대장기에 맞춰 천천히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좌우군은 중군보다 빠르게 움직이며 포위망을 완성했다.
하늘 위에서 본다면. 넓게 퍼져 있던 4,7연대의 제대가 점점 오므라들어서, 흡사 집게발처럼 몽골기병을 감싼 것처럼 보일 거다.
집게를 오므린 가재의 입을 향해, 양 옆에서부터 압착되기 시작한 몽골기병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와아!!”
“우삿바투호!”
“끼요옷!”
몽골기병은 비명을 지르는 건지, 고함을 지르는 건지 알 수 없는 괴기한 소리를 내며 중군을 향해 달려왔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니, 이젠 중군을 뚫지 않는 한 답이 없는 걸 알 터.
그야말로 필사의 각오를 품고 밀려든다.
쿵쿵쿵. 점점 다가올수록 지축이 흔들려 천지가 울부짖고.
중군에 속한 소대원들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힐끔 시선을 돌려 소대기와 소대장들만 살폈다.
먼지구름에 파묻혀 아른거리던 몽골기병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지고, 서서히 서로의 몸이 그려질 정도까지 가까워졌다.
오백보 앞으로 몽골기병이 돌입하자.
“제대 분열!”
삐삐빅! 중대장, 소대장의 명령과 호각소리가, 지축을 흔드는 말발굽소리를 뚫고 피어올랐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준비하지 않았나.
몽골기병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제일 앞선에 서 있던 기병소대는 빠르게 움직여 후방으로 향했다.
“대기병창 준비!”
“온다!”
몽골기병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병소대 뒤에 숨어 있던 장창병들이 재깍 자리를 잡았다.
땅에 내려놨던 거대한 나무 기둥이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간 조선군이 애용하던 3미터 크기의 일반적인 장창이 아니라, 그 두 배는 될법한 거대한 대기병창.
흥안령 일대의 거목을 털어서 만든 비밀병기가 등장.
장창병들은 혼자 들기도 힘든 대기병창을 비스듬히 들어올려, 수십개의 고슴도치로 변해 웅크렸다.
저 먼 유럽에서 기사들을 씹어 먹고 있을 파이크방진이 만들어진다.
기병이라고 꼭 말을 타고 싸워야 할 필요는 없잖아?
하마기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고, 지금처럼 오롯이 정면으로 맞부딪칠 땐 경기병을 씹어 먹는 게 장창병이다.
이들은 그간 훈련해 왔던 것처럼 기계같이 땅을 파서 대기병창을 고정시키고, 각자의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어 4열로 된 방벽을 만들었다.
“발포!”
“발포!”
장창병이 방진을 만들고 웅크리자, 이번엔 장창병의 보호를 받는 속 알맹이가 불을 뿜어냈다.
3개 연대에 배속된 화기대는 중군에 전부 몰려 있었고, 화기대는 이미 장전까지 완료하고 중군의 전진에 맞춰 천천히 이동하고 있던 상황.
이 모든 작전의 핵심은 중군으로 몽골기병을 유인해서, 화포를 이용해 한방에 쓸어버리려는 것 아니었나.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으니, 화기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내뿜었다.
자신들의 돌격과 동시에 중군이 부산스러워지자, 겁먹고 패퇴한다고 생각하고서 두서없이 달려오던 몽골기병들.
그들의 눈이 일순간에 어두워졌다.
쾅콰콰콰쾅! 지축을 뒤흔드는 몽골기병의 말발굽소리마저도, 화포 30문의 일제사격에 밀려나 하늘로 사라졌다.
장창병의 시야가 모두 가려질 정도로. 매캐한 냄새가 진동하는 회색빛 연기가 순식간에 고슴도치들을 감쌌다.
기병을 잡는 게 화약병기고, 그 중 제일이 산탄 아닌가.
엄지손가락만한 자갈을 꽉꽉 채워 넣은 주머니는 날아가면서 확 주둥이를 펼쳤고, 거의 직사로 날아간 조란탄은 콩 볶는 소리를 내며 몽골기병을 휩쓸어버렸다.
“크어억!” “으억!” “크학!”
조란탄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는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먼지구름마저 덮어버릴 피보라가 피어오르고, 살점의 소나기가 쏟아졌다.
선두에 섰던 몽골기병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이겨졌고, 뒤따르던 몽골기병들은 혼란에 빠져 난장판이 벌어졌다.
한방에 싹 쓸려버린 백여구의 시체와 사체에 걸린 후속기병이 나뒹굴어 땅이 짓이겨진다.
달리는 관성과 뒤에서 미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몽골기병은 멈추지 못하고 계속 장애물에 부딪쳐 고꾸라지기를 반복.
“흐...” “크억...” “커컥...”
메말랐던 밭이 피로 흥건해진 뻘밭로 변해가고, 몽골기병과 장창병 사이에 얕은 시체산이 만들어졌다.
화포의 굉음에 놀란 몽골전마들이 날뛰자 뒤이어 달려오던 몽골기병의 전열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그런 혼란을 틈타 다시금 몰아치는 강철의 폭풍.
콰콰쾅! 이차로 쏟아진 불벼락은 이미 땅에 쓰러져 있는 몽골기병, 달려오다 나뒹구는 몽골기병, 저 뒤쪽에서 앞에서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체 달려오든 몽골기병까지.
차별 없이 전부 싹 쓸어버리며, 화포는 만족스런 입김을 내뿜었다.
“온다!”
“정렬!”
“버텨라!”
화포병이 열심히 포구를 닦고 재장전을 준비하는 동안.
똘똘 뭉친 장창병들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지르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애써 붙들어도 손은 벌벌 떨리고,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오려 하고, 눈가는 핏줄이 터져 시뻘게졌다.
지금 조선군이 사용하는 흑색화약은 연기가 심하게 피어오르고, 지금처럼 화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상황이라면 더욱 심해진다.
회색 연기는 흡사 안개처럼 피어올라 중군을 뒤덮었다.
사방은 비명소리와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오싹한 소음만 가득한데, 앞도 보이지 않는 장창병이 평정심을 유지하는 건 쉬운 게 아니지.
아무리 이들이 맹수를 때려잡으며 훈련해온 정예라지만...
이전처럼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과 사의 중심에 서서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두려움이 엄습하는 건 당연한 일.
그저 누군가는 눈을 꼭 감고, 누군가는 반대로 목청을 높여 고함을 외치고, 누군가는 부처님에게 기도하며, 손등의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대기병창을 꽉 붙들고 웅크렸다.
이내 곧 바라지 않던 상황이 펼쳐졌다.
쾅! 푸욱! “크억!” “으아악!”
장창병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혼란에 빠져 달려오던 몽골기병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이들이 장창병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되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고, 화포의 공격에 넋이 나가버린 전마를 정교하게 통제할 수 없다.
그저 “앞으로. 앞으로!”를 외치며 달려올 수밖에.
두서없이 우르르 몰려온 몽골기병이 대기병창의 방벽에 부딪치자, 중군 전체가 부르르 몸을 떨며 창대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중군을 집어삼켰다.
콰쾅! “크허억!” 퍼퍼퍽. 대기병창에 가슴팍이 뚫린 몽골전마가 쓰러지고, 그 쓰러진 전마를 밟고 뒤이은 몽골기병이 넘어진다.
그 위로 또 다시 돌격해온 몽골기병이 찢긴 살점이 남아 있는 대기병창에 다시금 꽂혀 무너졌다.
조란탄의 일제사격으로 만들어진 얕은 시체산이, 이번엔 대기병창의 장벽 앞에 만들어졌다.
허나 장창병들은 움직일 수도, 무언가 더 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저 버티고 또 버틸 뿐이다.
주공은 화포고 장창병은 무너지지 않게 굳건하게 버티는 게 임무 아닌가.
그런 그들의 염원을 알아차렸는지, 기다리던 굉음이 들려왔다.
콰콰쾅! 재장전을 마친 화기대는 장창방진 너머, 혼돈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몽골기병을 향해 또 다시 자갈의 벼락을 쏟아냈다.
“장군!”
“...!?”
“정체미상의 기병이 다가옵니다!”
최윤덕은 호들갑을 떨며 손가락질을 하는 정찰병을 보며, 그 역시도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큼지막한 부채로 연신 회색 연기를 날려보지만, 온 사방이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 달라질 게 있나.
그저 저 북쪽에서 흐릿하게 먼지구름과 함께 아스라한 그림자 덩어리가 보일 뿐이었다.
화포의 굉음에 아린 귀를 매만지며, 계속해서 부채를 휘둘러 연기를 밀어내길 반복.
드디어 정찰병이 말한 생경한 기병대가 눈에 들어왔다.
‘예비대인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토가바토르가 남겨둔 예비대일 게 분명하다.
조선군이 화포를 가져온 걸 알았을 수도 있지만, 30문이나 가져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거다.
나아가 멀쩡히 활을 쏴대던 기병이, 뜬금없이 대기병장창보병으로 변해 웅크릴 거라고도 상상 못했을 거고.
그러니 반쯤 와해된 본대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예비대를 투입하는 게 인지상정.
용케도 북쪽 산세에 잘 숨겨놨던 모양인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 보다 빨리 꺼내든 것 같다.
하지만 그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배는 많다.
4,7연대가 본대를 빠르게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중군이 위험할 정도로 많다.
‘음...!’
최윤덕은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자책해봐야 달라질 건 없다.
당장은 지금에 집중하는 게 우선.
'목표는?!'
중군을 노리고 오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예전 명군이나 요동군을 상대했던 것처럼 사령관만 사로잡으면 이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착호군은 기존편제와 다른 편제를 쓰고 있지 않나. 다만 그걸 모르니 저렇게 무리해서라도 달려오는 걸 테다.
‘예상과 달리 수가 많지만...’
장창병의 배치와 진형을 바꾸는 건 불가능한 일.
그냥 장창방진도 방향을 바꾸려면 측면이 도출되는 위험이 있는데, 새로 만들어진 대기병창방진은 그 단점이 더욱 극명하다.
더욱이 지금처럼 난장판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움직였다가는 중군이 그대로 무너질 게 뻔한 일.
4,7연대는 그물을 펼쳐, 중군으로 밀어 넣은 몽골기병이 후퇴하지 못하도록 목을 조르고 있다.
울타리 안에 갇힌 몽골기병을 쓸어내는 일은 화기대의 몫.
4,7연대는 그래서 화포의 사정거리 안으로 아예 들어오지도 않고, 제멋대로 전장에서 이탈하는 몽골기병만 처리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진형 재배치는 힘들다.
‘나보다 연대장들이 먼저 봤을 터...’
중군은 회색 구름에 갇혀 시야가 제한되어 있지만, 4,7연대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전체를 조망하고 있을 거다.
분명 후방에서 나타난 예비대를 발견했겠지.
‘버티고 기다린다.’
최윤덕이 그리 결정을 내리고 명을 내리려는 찰나.
“장군! 저기!”
“음!?”
정찰병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연기 틈 사이로 요망한 상황이 연출된다.
토가바토르의 예비대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또 다른 기병대가 눈에 들어왔다.
흐릿하지만 기병대 사이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검은 깃발을 보면 조선군이 맞는 것 같은데... 어렴풋이 보이는 깃발개수로 보아 1개 중대 정도로 보였다.
‘어째서 중대 하나만? 누가?’
최윤덕은 그런 의문을 품고, 눈이 매처럼 좋은 정찰병을 바라봤다.
말없이 재촉을 이어간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정찰병은 부채로 회색 연기를 날려가며 연신 눈을 찡그리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쩍 벌렸다.
검은 깃발 사이에 껴 있는, 다른 깃발을 발견한 것.
“뭐냐!?”
“기... 기사대가 왔습니다!”
“...!?”
‘뭐?’
최윤덕은 뜬금없는 대답에, 황망한 눈빛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