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챕터18. 부딪치다 (7)
북쪽 산세를 끼고 빙 돌아서 후방을 점한 토가바토르의 예비대.
이들은 최윤덕이 예상했던 것처럼, 경기병과 중기병이 혼합된 병종이었다.
지금 동아시아 시대는 중기병이 주병종으로 활약하는 시절이 아니다.
금나라가 무너지고 나서 두터운 마갑을 두르는 중기병의 명맥은 사멸해갔고, 원과 명으로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기병이 경기병으로 대체됐다.
명 입장에선 경기병 위주의 몽골을 상대하려면, 같은 경기병이나 압도적인 물량의 보병궁수, 화약무기를 운용하는 게 더 편하고 싸게 먹히니까.
원래 역사에서의 조선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전까지의 주적은 북방의 여진족이었고, 여진 경기병에 대항하는 전술과 병종이 발전해갔지.
허나 딱 지금 시기의 조선은 모든 게 혼합된 형태였다.
여말선초 시절에는 명,몽골,여진,왜구 등을 모두 상대해야했기에, 경,중기병과 보병까지 전부 운용했고.
운석핵꿀밤 이후 국제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이걸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이런 다양한 병종을 운용하는 건 사람과 재정이 넘쳐나는 정주민족인 명과 조선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토가바토르 입장에선 같은 몽골부족을 제압하려면 소수라도 중기병을 키워야 했지.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키운 중기병을 향해, 그보다 더 육중한 중기병이 밀어닥쳤다.
햇빛을 받아 번뜩이는 강철장갑과 강철군화. 두텁게 보강한 기사대 전용 두정갑.
몽골갑옷을 개량해 빳빳한 말가죽을 겹쳐 엮은 마갑. 금나라 중기병 마냥 눈만 내놓고 꽁꽁 싸맨 찰갑투구.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생경한 형태의 거대한 기창.
조선군도, 몽골군도, 금나라군도 아닌 괴상한 형태의 중기병이 등장.
뜬금없이 산세를 끼고 튀어나와 옆을 치는 기사대를 보고, 토가바토르의 예비대는 황급히 돌진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기사대의 돌격이 더 빨랐다.
거대한 오각형의 돌격진영을 이룬 기사대는, 예비대의 목덜미라 할 수 있는 부위를 노렸다.
“거창!”
“거창!”
연오랑의 외침에, 하늘로 우뚝 치솟았던 기병장창이 송곳으로 변해 앞으로 튀어나왔다.
두정갑 옆구리에 튀어나온 걸쇠에, 손잡이를 짧게 한 두터운 기병장창을 얹혀 놓는다.
옆구리에 꽉 끼어서, 긴 기병장창이 흔들리지 않게 고정.
“후...흡.”
“후훕!”
강철보호대로 감싼 무릎이 옆 사람과 닿을 정도로 바짝 붙자, 서로 내뱉는 숨소리가 말발굽소리를 뚫고 들려온다.
먼지구름에 가려 있던 몽골기병이 완전히 눈에 들어오고,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그들의 표정까지 읽어진다.
순식간에 거리는 가까워졌다.
위아래로 흔들리는 시선은 한 점으로 응축되고, 긴 기병장창의 끝이 몽골기병과 일직선이 되어 가려졌다.
전마와 기병장창, 기수가 혼연일체가 되어 새로운 존재로 탄생.
대지를 가르는 거대한 창으로 변해, 날아드는 포탄이자 바윗돌이 된다.
콰쾅! 몽골기병이 사용하는 기창보다 훨씬 긴 기병장창이 먼저 닿았고.
찰나의 순간에 생사의 저울질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하!”
꽉 쥔 기병장창이 몽골기병의 가슴팍에 적중하자, 퍽! 몽골기병은 충격량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말에서 낙마해 뒤로 튕겨나갔다.
쿠르르릉. 연오랑 뿐 만이랴.
기사대원들의 기병장창은 하나같이 몽골기병이나 몽골전마를 들이받았고, 몽골기병은 죄다 튕겨나가거나 전마의 앞발이 꺾어 고꾸라졌다.
튕겨나간 몽골기병 중 몇은 안장에 발이 낀 채로 메마른 땅을 연신 빗자루질 했고, 히히힝! 주인을 잃은 전마는 흥분해서 마구 날뛰며 몽골기병의 진형을 헝클어트렸다.
파도에 맞은 모래성처럼, 토가바토로의 예비대는 옆구리가 움푹 파여 속도를 잃고 말았다.
‘됐군.’
랜스를 본 따서 만든 기병장창은 일회용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길이에 비해 손잡이가 압도적으로 짧은 기병장창은, 쥐고 휘두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충격의 순간에 무거운 기병장창을 내던진 연오랑은 빠르게 주위를 읽어냈다.
랜스차징에 얻어맞은 몽골기병은 도미노처럼 우르르 무너져 돈좌됐다.
이젠 빡빡하게 전열을 유지할 필요 없이, 기사대의 무용을 뽐낼 자리가 만들어진 상황.
“소대별로 정렬!”
연오랑의 외침이 터지기도 전에, 기병장창을 내던지고 기창을 뽑아든 기사대원들.
바짝 붙어 있던 이들은 밤송이가 쪼개지듯 서로 간격을 벌리며, 재정렬을 완료.
“돌파한다!”
뛰어오르는 개구리처럼, 주위를 가리지 않고 온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호주로 토관들이 소집되어 착호군 방식으로 훈련을 받을 때.
그들은 “니들이 뭐 얼마나 대단한데 우릴 시험하냐?”라는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허나 시험을 시작하자마자, 그들의 자부심은 부서졌지.
동시에 토관들 사이에서 괴상한 소문이 퍼졌다.
창을 귀신 같이 쓰는 창귀신들은 죄다 기사대에 몰려 있고, 칼을 귀신 같이 쓰는 칼귀신들은 훈련대에 몰려 있다는 것.
지금 그 창귀신들이 본색을 드러냈다.
진짜 호랑이로 변신한 것 마냥, 걸쳐 입은 호피두정갑을 펄럭이며 날뛰기 시작했다.
연오랑은 소대 선두에 서서 거침없이 나아갔다.
기창을 뽑아들고 랜스차징을 하듯 매섭게 찔러갔다.
바람을 가르고, 먼지구름마저 그 압력에 밀려 동그랗게 말려 날아간다.
날카롭게 갈린 기창의 창날은 빳빳한 말가죽 갑옷의 헤집고 들어갔고, 연오랑의 힘이 더해지자 옆구리가 뚫린 몽골기병은 만곡도를 떨어뜨리며 허리를 굽혔다.
“합!”
꽂아 넣었던 기창을 뽑아내자 핏줄기가 함께 딸려왔다.
휘릭. 풍차를 돌리듯 머리 위로 한바퀴 돌려, 이번엔 왼쪽으로 기창이 옮겨갔다.
“죽어라!” 캉캉! 괴성과 함께 옆에서 매섭게 찔러오는 몽골기병의 기창을 튕겨내고, 자세가 흐트러진 몽골기병을 향해 육탄공격을 감행.
스치고 지나가듯 바로 옆에 달라붙어, 뾰족한 징이 달린 기병군화로 몽골전마의 아랫배를 후려쳤다.
히힝! 뜬금없이 뱃가죽이 뚫린 전마가 발광하며 날뛴다.
낙마하는 몽골기병을 뒤로하고, 또 다른 몽골기병의 만곡도가 양쪽에서 날아드는 게 느껴진다.
‘옆! 둘!’
보이지 않았지만, 연오랑의 예민한 감각이 경고를 보낸다.
더욱더 전진해 날뛰는 몽골전마를 아예 밀어 붙이고선, 허리를 비틀어 양 옆에서 날아드는 만곡도를 기창으로 올려 쳐냈다.
캉캉! 불꽃과 함께 아린 파열음이 터지면서, 연오랑의 힘을 버티지 못한 만곡도가 하늘로 치솟았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기창이 진격.
퍽! 몽골기병의 광대뼈를 부수고 들어간 기창은 순식간에 뼛조각과 함께 빠져나왔다.
머리 위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 방향을 바꾼 기창.
연오랑은 물 흐르듯 기창을 내리찍어, 옆에서 달려오던 몽골기병의 투구를 때렸다.
투구에 맞고 튀어나와 하늘로 치솟았던 기창을 재빨리 회수.
휘잉. 반탄력을 그대로 이용해 이번엔 사선에서 달려오는 몽골전마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무너지는 몽골기병과 함께, 수실 대신에 달려 있는 검은 소대깃발에 피가 딸려왔다.
파팡. 기창을 회수해 다시 정면을 겨누자, 소대깃발은 피를 털어내며 창대를 휘감았다.
일순간에 앞을 가로 막은 몽골기병을 모두 쓰러뜨린 연오랑.
“돌격! 빠져나간다!”
그는 기창을 앞세우고 다시금 박차를 쳐, 흥분한 전마를 앞으로 몰아갔다.
캉! 매섭게 찔러오는 만곡도를 기창으로 쳐내고, 휘릭. 옆에 스치고 지나가는 몽골기병의 기창을 밀치고, 매섭게 다가오는 몽골전마의 엉덩이를 살포시 찌르고 나아간다.
기창은 뱀처럼 꿈틀거리며, 강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계속해서 좌우를 치며 나아갔다.
굳이 연오랑이 다 처리할 필요 있나.
그가 치고 들어가며 몽골기병의 전열을 무너뜨리자, 퍽! “컥...” 파팡 “크억.” 말꼬리를 타고 몽골기병의 신음소리가 스쳐갔다.
소대별로 모인 기사대는 뾰족한 쐐기꼴을 하고 있다.
거리를 살짝 벌려 연오랑의 뒤로 따라붙은 기사대원은, 그가 흘려보낸 몽골기병을 마찬가지로 흘려보냈고.
밖으로 점점 밀리며 스쳐지나간 몽골기병들은 가볍게 내지르는 기창을 한방씩 얻어맞았다.
소대의 끝에 가선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얼마 가지도 못하고 데구르르 말등에서 굴러 떨어졌다.
연조운, 연전위, 연손찬이 이끄는 소대는 연오랑이 이끄는 소대와 마찬가지로, 나뭇가지가 퍼지듯 몽골기병의 전열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거친 질주는 이미 끝나지 않았나.
한 덩어리로 뭉쳐 허우적거리는 몽골기병대를, 안에서부터 파먹으며 시체와 사체밭을 뚫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후...”
“하...”
후끈한 열기와 함께 긴호흡이 찰갑가리개를 비집고 빠져나왔다.
머리에 뒤집어 쓴 연오랑 마상건이 무색하게, 끈적끈적한 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휘릭. 기사대원들은 허공에 가볍게 기창을 휘둘렀다.
피와 살점이 잔뜩 묻은 창날을 털어내며, 연오랑은 엉망이 된 전장을 빠르게 살폈다.
기사대는 토가바토르의 예비대를 사선으로 뚫고 나왔다.
선두에 위치했던 이들은 화들짝 놀라서 다시 반전해 전열을 가다듬고 있고, 후미에 위치해 있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멈추는 바람에 진형이 다 헝클어져서 엉거주춤하게 뭉쳐 있는 상황.
‘됐군.’
소대는 짧게 원을 그리며 반전해, 다시 몽골기병을 앞에 두고 멈춰 섰다.
힐끔 고개를 돌려 엉망진창이 된 주전장을 바라봤다.
회색 연기는 바람도 불지 않는 대지에 그대로 뭉쳐 있었고, 온 사방은 먼지구름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저편에 크게 원을 그리며 맹렬하게 달려오는 이질적인 먼지구름이 재깍 눈에 들어온다.
‘오는군.’
연대장들은 바보가 아니지 않나.
특히나 조비형은 연오랑이 알지도 못했던 인물이지만, 생각 외로 야전지휘관으로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준 인물.
당연히 이곳을 지원하기 위해 예비대를 보냈을 거다.
‘놈들이 흩어지기 전에, 붙들어 놓고 끝낸다.’
후흡. 생각을 정리하기 무섭게, 기창을 앞세우고 외쳤다.
“정렬! 사행진이다.”
“합!”
연오랑의 외침에 기사대원은 다시 재정렬을 완료했고, 삐빅!삐빅! 보이지도 않는 저편에서 귀에 익숙한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소대 모두 정렬을 완료했다는 뜻.
삐이익! 뿔나팔이나 대라大螺만큼이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호각을 불자.
육중한 전마가 다시금 격한 호흡을 뱉어내며 발을 놀렸다.
비록 기병장창은 이미 써먹고 없지만, 조선군은 원래 기창만 들고 돌격하지 않았나.
다들 익숙하게 기창을 꼬나들고, 몽골기병에게 달려들었다.
쉬웅. 역시나 빛살처럼 날아든 연오랑의 일격을 제대로 막는 몽골기병이 없다.
휘두르는 만곡도 보다 더욱 빠르게 날아든 기창에, 쾅! 몽골기병은 겨드랑이가 찢어져 허물어졌다.
연오랑은 한손으로 내질렀던 기창을 회수하곤, 다시 머리 위로 빙글 돌려 양손으로 잡고 사방에서 날아드는 기창과 만곡도를 튕겨냈다.
캉캉캉! 불꽃이 여러 번 튕기며 서로의 무기가 왔던 방향의 반대로 흘러가고,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연오랑은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이번에도 뒤따르는 기사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컥!” “크윽...” “헙!”
아니나 다를까. 연이어 몽골기병들의 신음소리가 말발굽소리에 섞여 흘러갔다.
토가바토르의 예비대가 하려던 공격을, 오히려 기사대가 대신하고 있다.
적과 맞붙지 않고, 속도를 살리면서 계속 돌격.
예비대를 또 다시 뚫고 나가, 작은 제대 단위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려는 거지.
허나 몽골기병도 그걸 모를 리가 없고, 이 예비대는 나름 토가바토르의 정예병 아닌가.
걸쳐 입은 백호두정갑은 너무나 눈에 띄고. 진짜 백호에 빙의 된 것 마냥 날뛰며 질주하는 연오랑을 못 볼 리 만무.
그가 주장인 걸 알아차리고, 화려한 깃발을 앞세운 수십기의 몽골기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몽골군 특유의 화려한 기동전술과 명사수의 솜씨를 뽐낼 수 없는 상황 아닌가.
“놈...!” “죽어라!” “막아!”
그저 괴성을 내지르며 두서없이 연오랑의 앞을 붙잡고 늘어졌다.
수는 몽골기병이 더 앞서니 일단 돈좌시켜놓고 사방에서 포위해 처리하려는 생각인가 본데...
“건방진 놈들!”
연오랑은 친절하게 몽골어로 욕을 날려주곤, 자신의 앞을 막는 기병들을 향해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온다.’
예민한 감각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창의 세례를 읽어냈다.
마상무술은 보병무술보다 간결하고 빠른 게 특징이다.
말은 사람처럼 진퇴가 자유로울 수 없고, 힘을 주고 박찰 대지에 발이 붙어 있지 않으니까.
반대로 말 위에 올라타면 밑을 내려다볼 수 있으니, 위치의 이점을 누릴 수 있지.
육중한 무게로 밀어붙이는 돌격을 막기 힘든 건 둘째 치고, 보병은 기마를 상대하려면 올려봐야 하지만 기수는 그냥 대충 내려치기만 해도 보병의 머리를 가격할 수 있으니까.
같은 기병끼리 근접에서 맞붙는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간단해진다.
보다 능숙한 기마술과 보다 간결하고 빠른 일격이 주효.
연오랑은 교과서 같은 대응을 보여주며, 몽골기병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