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05화 (105/538)

105. 챕터19. 무너지다 (2)

“아니!?”

뜬금없이 튀어나온 기사대를 보고 놀랐던 최윤덕.

그는 연오랑에 대해서 잘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알던 게 빙산의 일각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대마도 원정 당시 이순몽 한칼사건을 봐서, 연오랑의 실력에 대해선 의심하지 않았지만... 저렇게 기병대마저 정면으로 맞부딪쳐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황소처럼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가, 머릿수가 몇 배는 차이나는 예비대를 일도양단해버릴 줄이야? 보고도 믿기지 않을 노릇.

저렇게 위압스럽고 강맹한 기병돌격은 난생 처음 봤다.

“대감!”

최윤덕은 대대장에게 전장 정리를 맡기고선, 재깍 몸을 날려 연오랑과 기사대를 맞이했다.

온몸에 피칠을 한 호랑이들이 위풍당당하게 다가왔다.

기사대원들은 다들 한칼 하는 이들이고, 당연하게도 호랑이를 마구 때려잡아 호피두정갑을 마련하지 않았나.

승리에 도취된 최윤덕과 원정군의 눈엔, 호랑이 떼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느긋하게 다가오는 그들에겐 큼지막한 전리품이 들려 있었다.

연조운, 연전위, 연손찬은 각자 기창에 부족장의 머리통을 꽂아서 위풍당당하게 본대를 향해 다가왔다.

“...!”

호랑이 떼를 이끌며 가장 앞에 선 인물.

시뻘건 피로 물든 백호가 히죽 웃으며 손을 흔들자, 냉큼 달려온 최윤덕은 예법도 잊어버리고 묻고 말았다.

대체 연오랑이 여길, 어떻게 딱 맞춰서 당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복속한 부족장이 말해주더군. 바툰과 올란부르가 이끄는 부락이 토가바토르에게 합류했다고 말이야. 6연대와 10연대가 허탕 치면서 확실해졌지.”

“음!”

최윤덕은 재깍 머리를 굴려 사정을 읽어갔다.

그는 토가바토르를 상대함에 있어서 시간을 끌지 않았다.

시간을 주면 방비가 더욱 탄탄해질 거고, 어쩌면 다른 부족을 끌어와 세력을 더 불릴 수도 있다.

해서 4,7연대가 도착하자마자 곧장 홍산을 넘어 파림좌기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령부에 연락을 안 한건 아니었지.

연오랑은 백호장 바툰을 정리하러 간 6연대, 올란부르를 담당한 10연대에게 빈 마을만 발견했다고 보고 받았다.

여기에 자발적으로 복속한 부족장의 첩보가 섞였고... 그들이 이미 토가바토르에게 합류한 걸 알고서, 혹시나 싶어서 지원 온거지.

예상대로라면, 토가바토르의 가용병력이 삼천을 넘어갈 테니까.

“손도 부족한데, 얘들을 많이 보내는 것 보단 그냥 내가 오는 게 더 낫잖아? 그래서 산그늘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지.”

“허허.”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건방지게 내뱉는 말에, 최윤덕은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과연 배포하나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으뜸이다.

하지만 연오랑 입장에선 틀린 판단이 아니었다.

행정처리 업무는 일당백이 불가능하지만, 싸우는 건 일당백이 가능하잖아?

그래서 기사대 1중대만 이끌고 곧장 달려와 매복하고 있었고, 토가바토르의 예비대가 등장하자마자 녀석을 후려친 거지.

“빠르게 정리하자. 사흘 내로 사령부가 도착할 거다.”

“옙!”

“알겠습니다.”

연오랑은 공치사를 끝마쳤고, 모두는 승리의 기쁨을 잠시 미루고 재깍 몸을 날렸다.

시원하게 이긴 건 이긴 거지만, 뒤처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전쟁은 준비와 후처리가 더욱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법이다.

원정군과 토가바토르와의 싸움도 그러했다.

이 일대의 유일한 천호장급 인물이었던 만큼 파림좌기는 나름 큰 도시였고, 여기저기서 흘러들어온 유민까지 합치면 거주인원이 만 명이 넘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야심찬 토가바토르가 나름 준비를 잘 해놨다는 점? 식량이 빠듯하긴 하지만, 적어도 당분간 굶주릴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포로들을 분류, 격리하고, 죽은 몽골병사들을 처리하고, 주둔지를 건설하는 동안 시간은 재빠르게 흘렀다.

이윽고 사령부 본대가 도착하자.

점령군과 피정복민간의 애매모호한 쌀쌀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환기되고, 도떼기시장 마냥 시끌시끌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불어 닥쳤다.

지금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지만 어쩌겠는가.

파림좌기에 살던 부락민들조차, 이렇게 많은 수많은 부락민들. 멋들어진 두정갑을 입고 있는 조선군병. 병사인지, 장인인지 알 수 없는 보조군들이 한자리에 있는 걸 겪어보기나 했을까.

질서 없이 시끌벅적한 비정상적인 상황이 펼쳐졌고, 모두는 일순간에 뒤집어진 분위기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했지.

여기에 각 연대가 몽골부락 포로를 이끌고 하나둘씩 복귀했고, 끝내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중국상인들까지 몰려오자... 파림좌기는 겉으로 봤을 땐 활기찬 무역도시로 변모한 듯 했다.

“이럴 줄 알고 승려를 데려온 겁니까?”

“겸사겸사. 저놈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줄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죠.”

연오랑과 이인은 화장터 앞에서 연신 염불을 외우고 있는 승려와 몽골인들을 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몽골의 전통적인 장례방식은 시체를 초원에 내놓아 들짐승이 먹게 해서 뼈만 추리는 초장草葬이지만, 티베트의 라마교가 들어오면서 화장이, 중국을 지배하는 동안 매장 풍습도 받아들였다.

이곳 만리장성 인근의 접경지는 원나라 시절에 중국 본토에서 살다가 쫓겨난 북원 잔당이 많이 살지 않나.

해서 연오랑은 합동 장례 및 단체 화장을 밀어붙였다.

초장이나 매장을 할 시간도 없고, 포로로 잡은 몽골인들을 전부 조선으로 데려갈 건데... 이곳에 무덤을 만들면 괜히 골치 아픈 일만 생기지.

유골을 조금이나마 나눠가져가면, 그나마 위안이 될 거다.

병 주고 약 주는 꼴이지만, 약도 안주는 것보단 낫잖아?

“부락민들 반응은 어떠냐?”

“적개심을 표하는 이들이 있긴 한데...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있습니다. 역시 몽골족이라서 그런 걸까요?”

“우리가 두려워서 일수도 있고, 저들 풍습이 그런 걸 수도 있고.”

두 사람은 생전 처음 보는 조선 승려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기도를 하고 있는 몽골인들을 굽어봤다.

토가바토르의 일족이야 다 죽였지만, 그 외에 파림좌기에 살던 몽골인도 적지 않게 희생되지 않았나.

남은 이들이 분노를 표한 건 당연한데, 한편으론 패배를 받아들이고 조선에 승복해서 반항하지 않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어쩌면 초원의 방식이라는 게, 진짜로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판군사대가 나서서 잘 위무하고 관리하도록 해라. 어찌됐건 이제 저들도 조선인이 될 거다. 원정군이 저들을 함부로 여겨서 골칫거리가 되면, 애써 조선으로 데리고 갈 이유가 없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이인은 조선인이라고, 혹은 승리자랍시고 까부는 녀석들을 떠올리며, 다시금 회초리를 들 마음을 다잡았다.

‘흠. 쉽지 않긴 하지만, 그래도 해야겠지.’

이인은 팔짱을 끼고서, 물끄러미 화장터를 보고 있는 연오랑을 힐끔 살폈다.

사실 지금 원정군의 행태는 지금 시대에선 보기 힘들게 관대하면서도, 기이한 방식이었다.

조선군은 흔한 약탈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어느 정복군이 이렇게 포로를 잘 대해주고, 먹고 살 거리마저 걱정해 준단 말인가.

이곳을 지배하고 다스릴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충 데려가서 노비로 써먹는 게 보통이건만, 연오랑의 생각은 아예 밑바닥부터 다른 것 같았다.

그래서 장군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긴 했지만... 어쩌겠나.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단순히 형님의 뜻이 아닐 테니까.’

모두가 알다시피, 연오랑은 단순한 보급사령관이자, 착호군 창설자가 아니지 않나.

그가 내리는 명령과 의도에는 세종과 태종의 뜻이 담겨 있다.

이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태종의 아들인 이인으로서는 믿고 따르는 게 인지상정이지.

다만 걱정되는 건...

“조정이 이들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송환된 고려인도 적지 않은데...”

“아마도?”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문제가 터지기 싫으면 어떻게든 해야 하지 않겠냐.”

“예...”

속 편하게 히죽거리는 연오랑을 보며, 이인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대마도에서 끌고 온 왜인포로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게 고작 몇 년 전이다.

지금은 그 때보다 몇 배는 될 포로를 사로잡았고, 앞으로도 몇 배는 더 잡을 예정이다.

과연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이인은 솔직히 감이 잘 안 잡혔다.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는 이인을 보며, 연오랑은 그저 히죽 미소만 계속 이어갔다.

‘너도 생각하는 걸, 조정대신들이라고 생각 못 할까. 과연 어떻게 되려나.’

연오랑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한성을 떠올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괜히 고소하다는 생각과 함께, 골머리를 앓고 있을 이들을 약 올리고 싶어진다.

요동에 살던 고려인과 앞으로 포로로 잡아서 끌고 갈 몽골인과 중국인을 합치면, 거의 십만에 가까운 거지떼가 조선으로 밀려들 텐데...

기업의 공인과 착호군 활동으로 조선이 발전하고 생산력이 조금 올라가긴 했지만, 이들을 전부 감당할 수 있을까?

물론 먹여 살리는 문제는 산동과 중국상인의 도움을 받긴 하겠지만, 이들을 정착시키고 써먹는 일은 쉽지 않을 거다.

‘조선 내부에 폭탄을 심고 싶지 않으면, 어떻게든 달라져야 하겠지.’

연오랑은 세종과 태종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라면 전례 없는 이 비상상황에 맞춰, 어떻게든 지금의 체제를 뜯어고치고 바꿔나가지 않을까?

이 인원을 관리하기 위해선 조정관리가 엄청나게 필요할 거다.

지금도 관리가 많아지자 감당이 안 돼서, 과전을 주지 않는 임시관리만 잔뜩 뽑아놨는데... 앞으로는 이 상황이 더욱 가속화될 게 분명한 일.

어떻게든 과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관료체제의 개편이 필요할 거고, 이는 필연적으로 조선의 신분제와 양반관료체제를 뒤흔들게 될 거다.

그리고 그게 연오랑과 두 왕이 바라는 일이지.

‘다만 당장 과전을 혁파할 순 없을 테니... 아마도 삼남지방의 토지개혁과 농지개량부터 시작하겠지.’

연오랑은 세종, 태종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미래를 그려봤다.

세종은 경기도에서 과전을 정리하는 양전사업을 하면서, 태종은 착호군을 이끌고 다니면서.

일 년 내내 건설, 토지정리만 하는 수천명의 왜인포로. 건설일꾼의 위력을 제대로 실감했다.

얘들을 먹여 살릴 방도만 있다면. 조정대신이든 양반사대부든 지방호족이든, 어느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고 조선개조사업을 척척 진행할 수 있지.

지금 조선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는 고려인들을 똑같이 써먹을 게 분명하지 않겠나.

당연히 압도적인 잉여인력을 투입해서, 조선땅을 다 뒤집어 놓을 거고... 당장의 주요 목표대상은, 나름 방귀깨나 뀐다는 집안이 많은 삼남지방이 될 거다.

그곳의 농지에서 전부 이앙법을 시행하면서 양전사업을 진행하면, 아마 꽤나 많은 양반사대부, 지방호족들이 곡소리를 내게 되지 않을까?

그놈들의 힘이 확 줄어드는 건, 당연히 이어지는 수순일 거고.

“어르신. 회의 준비가 완료 됐습니다.”

연오랑과 이인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갈 때. 조용히 다가온 연전위가 둘을 불렀다.

토가바토르가 살던 나름 으리으리한 저택을 원정군이 꿰차고 앉았고, 지휘부의 사령실로 써먹고 있었다.

원나라와 명나라 건축양식이 뒤섞여 오묘한 느낌을 주는 건물로 향하자, 잡일을 하고 있던 몽골인 하인들이 화들짝 놀라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백호피를 뒤집어쓰고 있는 인물과 호피갑옷을 뒤집어 쓴 이들이 어떤 일을 벌였는지, 벌써 소문이 쫙 퍼지지 않았나.

토가바토르와 인근에서 나름 세를 과시하던 백호장들을 썰어버린 주인공이니, 못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

몽골인 하인들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선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충성.”

연오랑과 이인이 회의실에 들어서자, 다들 일어나 경례했다.

“쉬어.”

연오랑은 히죽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옛 관습에 익숙한 장군들마저도 신식 경례에 익숙해졌으니, 다른 병사들은 더 볼 필요도 없을 거다.

‘양심에 조금 찔리긴 하지만, 나쁠 건 없잖아?’

그는 21세기 군대의 경례방법을 15세기 조선에 이식한 게 조금 찔리긴 했지만... 뭐 어때. 다들 만족하며 편하게 쓰면 그만이지.

“정찰보고부터 듣지.”

“옙!”

특전대장 이정호는 재깍 일어서서 입을 놀렸다.

특전대는 각 연대로 찢어져 배속되어 있었고, 이들은 원정군의 눈과 귀, 그리고 척후병이자 연락병 역할을 해왔다.

남들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에도, 이들을 열심히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면서 이 근방을 정찰했지.

“이제 흥안령 일대에 남은 거대부락은 없는 걸로 파악됐습니다. 있어도 50호 미만의 작은 부락만 남아 있을 걸로 사료됩니다.”

“요양파 요동군이 있는 곳까지 갔다 왔나?”

“예. 황수를 따라 진군하면서 흥안령을 넘은 것 같은데, 지독하게 망가뜨리고 있더군요. 황수 인근의 염호에서 뽑아낸 소금물을 사방에 뿌려대고 있었습니다.”

“허...”

“흐음.”

이정호의 말에 연대장들 모두가 신음을 흘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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