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챕터19. 무너지다 (3)
황수(시라무렌 강)인근에는 오래전부터 짠물이 나오는 작은 웅덩이. 염호가 많았다. 요,금나라를 비롯해 이곳에 근거지를 잡은 이들은 이 염호에서 소금을 만들어 사용해왔지.
요동군은 그걸 사람한테 쓰지 않고, 땅에다 마구 뿌려대며 전부 황무지로 만들고 있나 보다.
물론 지들이 써먹을 소금도 엄청나게 캐냈겠지.
‘어지간히 견제하는 군.’
나중에 우량카이 3위가 그 땅을 차지해도, 전부 말라비틀어진 초지만 보게 될 거다.
“그럼 서쪽으로 더 진출하지 않는 건가?”
“작전대로 상도까지는 가지 않겠습니까.”
“음...”
다들 어설픈 지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몽골제국 시절에는 100만명 이상이 거주하며 동,서양의 교두보 역할을 하던 수도였던 상도(시린궈러맹).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대도(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여름 수도 역할을 해왔던 곳이자, 북원이 들어서면서 잠시동안 수도가 되었던 곳.
허나 명나라군이 진군하면서 다 쓸어버렸다.
심하게 파괴되어 대도시의 흔적만 어설프게 남아 있어서, 여느 초원 마을과 크게 다를 게 없지만... 상징성은 남아 있지.
요동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는 요양파라면, 분명 저길 공격해서 집권의 명분이자 정당성을 쌓으려 할 거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는 게 나을까?”
“이대로 흥안령을 돌파해서 서쪽 초원으로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열하로 가는 건 어떻습니까?”
“허나 그곳은 심양파 요동군의 진공로인데, 굳이 우리가 갈 필요가 있겠소?”
연대장들은 진공로를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놨다.
열하(청더)는 청나라 때에 피서산장, 열하행궁이 세워지면서 황제의 여름별장이 되어 번성하게 되지만, 지금은 그냥 그저 그런 지역 중 하나였다.
심양파 요동군은 만리장성을 아래에 놓고, 흥안령 남쪽으로 진군하며 서쪽으로 오고 있는 중인데, 이들의 진공로에 열하가 껴 있었다.
연대장들은 굳이 우리가 걔들을 도와줄 필요가 있냐고 묻고 있다.
“음... 그래도 상도 근처로는 안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북원잔당이 다시 되돌아올 때를 생각하면...”
1연대장 최윤덕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상도가 비록 옛 위상을 잃어버렸지만, 어찌됐건 상징성은 있는 곳 아닌가.
북원잔당에겐 충분히 보복할 명분이 될 테니, 굳이 조선군이 거길 얼쩡거렸다가 꼬투리 잡히면 피곤해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의 시선이 사령관인 김을화에게 닿았고, 김을화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다시 연오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의견 모두 나쁘지 않으니, 선택을 넘기겠다는 뜻.
“심양파 요동군의 실력을 봐야하니 도와줄 수 없다. 우리보다 빨리 오긴 힘들겠지만, 적어도 너무 늦게 오면 생각을 달리 해봐야겠지.”
“음...”
“흠.”
다들 앞으로의 계획을 알고 있는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칼간(장가구)에 도착하면 심양파 요동군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그들 실력이 미덥지 않으면, 작전을 다시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있나. 초원길로 가되 흥안령을 남쪽에 끼고 서남쪽으로 가도록 하지. 어차피 그쪽에 수원이 있으니 강을 끼고 가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그쪽을 중심으로 정찰하겠습니다.”
이정호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명을 받들었다.
다음으론 원정군의 모든 보급과 행정업무를 맡고 있는 황보인이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사망자는 56명, 부상자는 194명입니다. 모두 화장해서 유골은 따로 정리해 놨습니다. 부상자는 한동안 이곳에 머물다가 회군할 때 함께 돌아갈 예정입니다.”
“음..”
“허허.”
다들 반색하면서 좋아했다가, 신음을 흘리기를 반복했다.
이 시대는 정면으로 군대와 군대가 부딪쳐서 몰살당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었다. 보통은 회전이 벌어져 패퇴하다가, 탈영병이 발생해서 부대가 녹아 없어지는 게 대부분이지.
그런 면에서 보면 이번 싸움은 꽤나 극적인 승리다.
한 번의 싸움으로 토가바토르를 아예 끝장을 내버렸고, 너무 빠르게 끝나버리는 바람에 조선군이나 몽골군이나 탈영병이나 패주병이 발생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마냥 기뻐하기가 뭐한 게, 착호군은 출신성분이 하나같이 쟁쟁하지 않나.
자식이 죽은 집안을 생각하면 속편하게 웃을 수가 없다.
이들과 연이 있는 집안이 분명히 있을 거고. 나아가 앞으로도 사상자는 계속 생겨날 테니까.
“토가바토르는?”
“사망 687명, 부상 511명. 포로가 2천여명입니다.”
“허...”
“흠.”
역시나 토가바토르는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동원했고, 한 번의 회전치고는 생각보다 많이 죽었다.
“화기대에 당한 건가?”
“예. 사체의 흔적으로 보아 그렇습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여댔다.
이들 모두 화기대의 위력을 똑똑히 경험하지 않았나.
자리와 기회만 주어진다면, 경기병을 몰살시켜버릴 수 있는 게 화기대의 조란탄이다.
“붙잡은 몽골인는?”
“파림좌기에서 대략 일만사천 정도 되고, 여기저기에서 긁어온 포로까지 합치면 이만삼천 정도 될 것 같습니다.”
“끄응.”
“흡!”
연대장들은 다들 기겁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각자 열심히 연대를 이끌고 털어댈 때는 감흥이 적었는데,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엄청난 수가 됐으니까.
연대장이 보급을 담당하는 직책이 아니더라도, 저렇게 많은 포로가 모이면 문제가 생긴다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중국 상인이 왔으니, 빠르게 정리할 수 있을 거다. 적개심이 강하고 반항적인 몽골부락민 위주로 그들에게 넘겨라.”
“예. 걱정 마시죠.”
황보인은 연오랑과 이야기를 나눴기에, 자신 있게 말을 내뱉었다.
“잔여 보급품 상황은?”
“식량과 건초는 대략 3개월 분량만 남았습니다. 이제부턴 전투식량을 사용해야 될 것 같습니다.”
‘흠... 간당간당하네.’
연오랑을 비롯해 연대장들은 다들 생각에 잠겼다.
호주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산동과 요동이 지원해준 식량을 사용해, 매일같이 밥을 지어먹었다.
또한 흡사 몽골군이 그러하듯, 일부러 초지와 식수원을 찾아다니면서 주둔지를 건설했고, 생초生草 반, 건초 반을 먹이면서 전마를 유지해왔었다.
이젠 그렇게 여유롭게 움직일 시간이 끝난 모양이다.
“포로가 늘어났으니 기존 군량은 넘겨야겠군.”
“예. 몽골부락이 본래 가지고 있는 식량이 있지만 올해는 파종을 하지 못했으니... 그들을 옮기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겁니다. 또한 원정군도 최대한 빠르게 파림좌기를 떠나야 할 겁니다.”
“음...”
“끄응.”
황보인의 말에, 연대장들 모두 고개를 내저었다.
식량 문제는 언제나 군대의 발목을 잡는 존재 아닌가.
각 개별 부락을 다 털어오듯 쓸어왔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괜찮지만,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그들의 가축을 다 까먹게 생겼다.
‘3개월이라...’
연오랑은 계속해서 머리를 굴려가며,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왔다 갔다 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생각하면... 넉넉하진 않을 것 같다.
‘몽골놈들이 문제겠네.’
심양파 요동군이 과연 얼마나 충실하게 병력을 보존했는지 모르겠다만, 문제는 조선군이 아니라 요동군, 그리고 중국에 있을 북원잔당이 될 거 같다.
“중국 상황은 어떻지? 새로운 소식은?”
“예상대로 와라는 사천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한중에서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음...”
“흠.”
중국 소식은 산동상인을 통해 요동과 조선으로 전해지고, 요동에서 다시 파발을 보내 원정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해서 시간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지만... 고착된 상황이 급변하긴 힘들 테니, 시일이 지난 지금도 딱히 달라질 건 없을 거다.
그쪽 상황은 사람과 조직의 문제로 막혀 있는 게 아니라, 지형을 극복하지 못하고 멈춰 있는 거니까.
“한중이라... 그래도 용케 거기까지 갔네.”
연오랑이 피식 웃으며 말하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오이라트도 참 대단하다 싶다.
비록 통일왕조인 명이 들어서고 나서 한중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한중은 사천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곳.
또한 진령산맥은 한중과 서안이 있는 관중을 가르는 험준한 산맥 아닌가.
삼국지에서도 나오는 제갈량의 북벌은 이 진령산맥을 넘으려고 기를 쓰던 거지.
다만 오이라트는 진령산맥을 넘는 대신, 서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진령산맥을 비켜와 한중을 쳤을 거다. 그쪽은 그나마 기병이 돌아다닐 수 있는 완만한 길이 있으니까.
“대파산맥에서 막혔나 보군?”
“예. 사천으로 진입하는 대신 한중에 정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허허...”
황보인의 말에 연대장들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생각이 깊어졌다.
대파산맥은 한중과 사천을 나누는 험준한 산맥이고, 여기엔 이미 천년도 전부터 검각, 가맹관 등의 천혜의 요새가 세워져 지금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 대단했던 몽골제국도 사천을 공략하려고 난리법석을 떨었는데, 하나로 통합도 못한 오이라트가 뭔 수로 여길 넘을 수 있을까.
아마 한중을 끼고 앉아서, 하서회랑을 복구해 초원과 한중과의 연결고리를 견고하게 유지하려 하지 않을까?
지금의 한중이 옛날에 비해 지력이 많이 쇠하고 낙후되었다곤 하나, 그래도 몽골초원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이니까.
“북원잔당은?”
“마찬가지입니다. 서안을 공략하긴 힘들어서 포위만 하고서, 변두리부터 잡아먹고 있다고 하더군요. 벌써 파종을 시작했답니다.”
“끄응...”
“흠.”
연대장들은 또 다시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렸다.
비록 원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고려 때를 살진 않았지만, 그래도 들어온 이야기가 있지 않나.
몽골이 다시 중국에 터 잡는 게 나름 싱숭생숭한 모양이다.
‘뭐... 조선에게는 나쁘지 않잖아?’
반대로 연오랑은 속으로 히죽 웃으며, 중국 상황을 그려봤다.
중국은 기동력을 바탕으로 한 북방 유목민족을 완벽하게 막을 방법이 없었고, 곳곳에 거점과 요충지를 세워 병력과 사람을 보존하는 방법을 썼다.
살은 조금 내주더라도, 뼈와 장기는 지키는 전략이지.
사람과 재원이 넘쳐나는 중국에겐, 그 정도 피해는 충분히 감수할 만하니까.
하지만 북원잔당 대다수는 수십년 전까지 중국을 지배하던 자들 아닌가.
거대한 도둑떼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기존 유목민족하고는 성향이 다르지.
또한 예전이라면 사방에서 몰려올 지원군이 무서워서 약탈만 하고 빠져야 했지만, 지금은 중국이 갈기갈기 찢어졌잖아?
이들은 명나라 시절의 거점과 요새를 포위하고선, 주변에 있는 마을과 고을을 약탈하는 대신에 아예 끼고 앉아서 주인행세를 시작.
“네가 오래 버틸까? 내가 오래 버틸까?”라고 묻듯, 엉덩이를 붙이고 통치와 지배에 들어간 거지.
이러면 몽골족에게 복종하고 협력하는 한족이 등장하기 마련. 예전 원나라 시절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서안이 3개월 이상 버틸 수 있을까?”
“버티지 않겠습니까? 섬서는 북원잔당에게 넘어가더라도, 산서까지 넘어가는 일은 막아야 할 테니... 산서의 병력이 움직여 몽골군과 대치할 겁니다.”
“흠...”
섬서와 산서는 맞붙어 있고, 산서 또한 확고한 우두머리 없이 세력이 난립하는 상황.
하지만 코앞에까지 다가온 몽골군을 무시하진 못하겠지.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거다.
‘3개월이라... 애매하군. 애매해.’
북원잔당은 크게 보면, 중국에 살면서 정주민화된 몽골부족과 원나라 시절에도 몽골초원에 살던 이들로 나눠져 있다.
조선군을 비롯한 연합군이 우려하는 건, “원래부터 몽골초원에 살던 몽골부족이 언제 회군할까?”하는 점이다.
원나라 시절을 기억하던 이들은 섬서에 정착할 테지만, 아닌 이들은 약탈로 배가 두둑해진채로 다시 몽골초원으로 돌아올 테니까.
연합군의 공격소식이 전해졌는지 모르겠다만... 이미 벌여놓은 일은 어떻게든 정리해야할 테니, 당장 회군하긴 힘들터.
그저 3개월 내로 모든 게 끝나길 바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그쪽 일에 신경 쓰지 마라. 우린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연오랑은 흔들리는 분위기를 다잡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원정로의 주둔지는?”
“계획대로 이어놨습니다. 본국의 관리들과 중국 상인이 무리 없이 이곳까지 온 걸 보면, 원정로를 어지럽힐 몽골 부락은 없어 보입니다.”
이인은 연대장들이 알아볼 수 있게, 지도 이곳저곳을 짚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착호군은 괴상한 형태의 주둔지를 만들었고, 적이 없음에도 숙영할 때마다 계속 반복했다.
야전숙영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앞으로 붙잡을 몽골 포로를 조선으로 쉽게 옮기기 위한 중간 거점을 만든 거지.
흡사 역참을 만들 듯, 원정군은 동녕위에서 파림좌기까지 오는 길목 곳곳에 임시 숙소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조선에서 파견한 관리와 요동에서 출발한 상인들이 이 원정로를 따라서, 큰 문제없이 파림좌기에 도착했다.
이제 조선에서 파견한 관리들은 각 거점에 머물면서, 몽골포로를 조선으로 보내는 일을 담당하게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