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08화 (108/538)

108. 챕터19. 무너지다 (5)

“좋네. 수레가 필요하나?”

“예.”

“그럼, 수레 값은 제하고 주지.”

허락을 받은 둘은 함박웃음을 애써 숨기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공민. 이들에게 갑옷 삼백벌을 내어주게.”

“예. 나리.”

관리의 말에 약간 어색한 말투가 섞인 대답이 들려왔다.

요동에 살던 고려인들은 중국어든, 몽골어든 둘 중 하나는 할 줄 알았고, 그 중에서 외국어에 능숙한 이들을 추려 원정군에 합류시켰다.

조선은 물질적인 대가를 줄 바에는 허울뿐인 감투만 주는 게 일반적이지만, 연오랑은 오히려 반대로 움직였다.

전쟁터로 끌고 왔는데 공짜로 부려먹으면 역효과만 난다. 그냥 전리품을 나눠주는 대가로 끌어 모은 거지.

둘은 일꾼을 시켜 요동에서 끌고 온 수레와 이곳에서 원정군이 만든 수레에 짐을 옮겨 실었다.

전쟁은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꼴 아닌가.

연오랑과 황보인은 전비를 채우기 위해서 파림좌기를 초토화시키듯, 어떻게든 몽골포로를 부려서 악착같이 뜯어냈다.

이곳의 질 좋은 목재로 수레나 마차, 하다못해 농기구와 건설공구라도 계속 찍어내는 거지.

나아가 몽골포로에게 잡일이자 직업교육을 시키면서, 딴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고.

“그리고... 오면서 대장간이 여럿 있는 걸 봤는데, 혹시 철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

“...”

‘역시 무리였나...’

밀고 당기는 흥정도 없이 딱 잘라 말하는 관리를 보며, 둘은 냉큼 입을 다물었다.

갑옷도 싹 수거했는데, 무기를 남겨뒀을까.

원정군은 어설프지만 간이대장간을 만들어서, 수거한 날붙이를 죄다 녹여서 농기구나 주괴로 만들고 있었다.

이건 전부 조선으로 가져갈 건데, 중국 상인에게 팔수야 있나.

“대신 혹시 갑옷을 더 구입할 생각이 있나? 대금은 쌀로 대신하지. 쌀은 의주로 가져오면 되네. 어떤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살짝 실망한 기색을 보였던 둘은, 언제 그랬냐는 양 활짝 웃으며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왕청, 왕민처럼 중국 상인들은 파림좌기를 돌며 돈이 될 만한 물건을 챙겼고, 곧장 포로와 가축을 데리고 이틀 차이를 두고 줄줄이 떠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이 일대의 초지는 죄다 맨땅이 되기 직전인터라, 가축을 옮기는 게 급선무이기 때문이다.

동쪽으로 떠나는 포로 무리와 반대로, 원정군은 서쪽을 향해 출정했다.

파림좌기를 지킬 10연대와 보조군 절반을 남겨둔 원정군은 쾌속질주를 하듯 빠르게 몽골초원으로 진격.

남쪽에 흥안령을 끼고, 수원지와 초지를 찾아다니며 주둔지를 건설하면서 계속해서 남하했고.

이윽고 목적지를 눈앞에 뒀다.

“행수님. 우리도 떠나야 되는 거 아닙니까?”

“당장 떠나는 것도 어렵지만, 떠난다 한들 어디로 가야 할까? 그저 목숨만 구제하려고 이 모든 걸 버리고 떠나자고?”

“끄응...”

중년인은 딱히 답이 없는 질문에, 말문이 막혀서 신음만 흘렸다.

맞는 말이다. 십수년동안 이 낯선 땅에 터 잡아 기틀을 잡아왔는데, 이제 와서 다 버리고 떠나기엔 너무 아깝다.

사실 머리는 떠나는 게 정답이라 말하고 있지만, 가슴은 그게 아니라고 외쳐댔다.

“일단 이야기라도 들어보는 게 우선이다.”

“예.”

둘은 그리 말을 나누고선, 칼간의 관청 역할을 하는 건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전쟁의 불티가 날아와서 일까? 상인들로 북적거리던 거리는, 난장판이 되어 혼잡스러웠다.

어느 일가족은 나귀가 끄는 수레를 끌고 떠나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등짐만 지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반대로 어설픈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고래고래 소리치며 뛰어다녔고, 인근 목마장에서 전부 끌어온 가축과 말들은 두서없이 뭉쳐서 사방에다 똥을 싸고 있었다.

‘엉망이군. 정말 엉망이야.’

“후...”

행수라 불린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옛 기억이 떠올라 한숨을 내뱉었다.

오래전에 북원의 천호장이 쳐들어왔을 때도 이랬는데, 지금은 그 때보다 상황이 더 어려운 것 같다.

칼간(장가구)은 오래전부터 북방유목민과 중국이 대립하고 교역하던 유서 깊은 도시다.

이곳을 통하면 서남으론 산서, 동남으론 북직례, 북쪽으론 몽골초원과 이어지니까.

몽골제국이 금나라를 칠 때도 이곳을 거쳐 지나갔고, 반대로 명나라가 북원을 칠 때도 이곳을 지나갔지.

홍무제 때에 북평에서 출발한 명군은 북원의 수도였던 카라코룸까지 가는 동안, 길목에 있던 모든 도시를 박살냈다.

칼간도 그 때 박살났고, 후에 명은 이곳에 마시馬市를 세워 항복한 몽골부락에게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주면서 어중간하게 관리해 왔다.

여진족을 관리하는 방법과 같은 방법을 쓴 거지.

허나 운석핵꿀밤으로 명이 망하자, 칼간은 붕 떠버렸다.

도시책임자는 강남 출신의 옛 명나라 관료였고, 위소의 병사는 출신이 중구난방에, 거주민은 몽골인이 절반. 산서, 북직례 출신의 중국인이 절반이다.

주로 드나드는 상인들은 산서 출신과 몽골초원출신이 반반이었고, 도시 인근의 경작지엔 중국인들이 농사를 짓고 조금 떨어진 초지에선 목마장이 즐비했지.

이렇다보니 어느 누구하나가 주도권을 잡을 수 없었고, 그냥저냥 협의체 비슷한 형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서 지금의 칼간은 군사도시보단 상인가문이 중심이 된 무역도시에 더 가까웠다.

“오셨소.”

“다른 소식이 들어 온 건 있소?”

“너무 많은 소문이 들려와서... 쯧.”

행수는 모여 있는 상인들을 살피며 혀를 찼다.

쓱 살펴보니, 역시나 항상 보이던 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오가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만...?”

“오가뿐이겠소? 진가와 풍가도 태원으로 갔소.”

“음...”

칼간과 칼간 인근에는 중국식 장원이 여럿 있었고, 한 집안 사람들이 모여 목마장을 일구거나 농장을 이루며 살았었다.

명이 망한지 벌써 이십년 가까이 됐고, 이곳에 있는 이들은 명나라나 북원출신이 아니라 칼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대부분이지.

그럼에도 나름 터줏대감인 세 집안이 떠났다고 하니, 행수는 다시금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건가?’ 하는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줏대도 없는 놈들이지. 산서로 간다고 한들, 그 놈들이 우릴 받아주기나 할까. 등쳐먹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

행수는 욕을 해대는 동료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산서 또한 세력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터라, 근거지를 잃은 상인집안은 그저 돈덩이로 밖에 안보일 거다.

그 자신 또한 그런 이유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번민에 빠진 거니까.

“다들 모였소?”

“예.”

도시책임자인 장구보가 나오자, 모여 있던 상인들이 가볍게 목례를 건넸다.

그 또한 고심이 많았는지. 눈은 잔뜩 충혈 되어 있었고, 눈꺼풀이 잔득 내려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 동쪽에서 온다는 적이 정확히 누굽니까?”

“올량합 3위, 요동, 조선군이 힘을 합친 것 같네.”

“허헙.”

“어억...”

“조... 조선? 그들이 대체 왜?”

혹시나 했던 소문이 사실로 판명되자, 장내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얼마 전부터 동쪽에서 온갖 소문이 다 밀려들었다.

누군가는 요동이 북원을 쳤다고 했고, 누군가는 몽골부족끼리 대전쟁이 벌어졌다고 했고, 누군가는 짐승갑옷을 뒤집어 쓴 정체불명의 북방유목민이 쳐들어왔다고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믿기 힘든 게, 조선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문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조선이 대체 여길 왜 쳐들어온단 말인가? 허나 도망친 몽골부족이 그런 말을 하니,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대체... 어째서?”

누군가 핵심을 찌르는 물음을 던졌다.

“정확히는 모르나, 북원잔당을 치는 것 같네. 올량합은 동북초원에서 피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요동군 또한 상도를 노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상도까지 말입니까!?”

이들은 몽골부락과도 거래를 하는 터라, 오히려 초원소식을 더 빠르게 전해들을 수 있었는데... 서쪽으로 도망가던 몽골부락이 경악할 소식을 전해주고 갔다.

“그럼 여길 노리는 게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건 또 아닌 것 같네.”

“...?”

다들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올랐고, 장구보 또한 어지러워서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정확히 모르지만, 아무리 못해도 셋 중 하나는 올 걸세.”

“적병이 얼마나 되는지도...?”

“...”

장구보는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초원으로 보냈던 정찰병은 보내는 족족 사라져서, 그도 답답했다.

소문으론 일천이니 만이니 십만이니 하는데, 뭐 하나 제대로 된 정보가 없지 않나.

힘겹게 알아낸 건, 조선군으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기병군단이 빠르게 남하하고 있다는 사실 뿐.

그나마 자세히 확인한 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흥안령 남쪽을 뚫고 요동군이 오고 있다는 거다.

“태원과 북평부에서 지원을 요청한 건...?”

“...”

역시나 고개를 내저었고, 다들 침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북원잔당이 섬서를 공격한 건 다들 알 걸세. 그 일부가 산서 서쪽을 약탈하면서 삼문협과 함곡관을 노리고 있지. 산서의 태원부도 병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했네. 여기보단 자기들 터전이 더 중요하다는 거지.”

“...”

지금까지 산서상인이 칼간에 와서 이익을 본 게 얼만데, 이렇게 입을 싹 씻을 수 있단 말인가.

다들 괜히 억울한 마음이 피어올랐지만... 자기 집이 불에 타게 생겼는데, 남의 집 사정까지 살필 여유는 없었겠지.

“북평부 놈들은 생각도 말게.”

이를 으드득 가는 장구보를 보며, 상인들은 또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오래전 일이지만 장구보는 연왕이 아닌 건문제 편에 섰던 인물 아닌가. 연왕부의 후신인 북평부를 결코 좋게 보지 않았다.

나아가 지금껏 북평부는 칼간을 뜯어 먹으려고만 했지,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 놈들은 칼간이 무너지든 말든, 거용관만 지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천호장 호르가가 쳐들어왔을 때도 막아냈는데, 이렇게 겁에 질려만 있을 겁니까!”

장내가 암울함에 물들어가자, 중국식 갑옷인 명광개를 입은 사내가 목청을 높였다.

허나 굴하지 않고 어느 상인이 반문을 던졌다.

“차라리 항복하는 건? 도망친 몽골부락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군은 항복한 몽골부락을 다 받아줬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를 믿소? 여기서 조선까지의 거리가 얼만데, 원정을 떠나 온 놈들이 그렇게 살갑게 굴 리가 있겠소?”

“음...”

“끄응.”

충분히 일리가 있는 터라 다들 얼굴이 찌그러졌고, 어찌할 바를 몰라서 발만 굴렀다.

“하면 어떻게 싸울 생각이오? 성벽에 의지하는 건...”

“그게 가능할 리가 있겠소!?”

누군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이번에도 반문이 터져 나왔다.

칼간의 성벽은 오래전에 무너졌고, 보수를 했다지만 성벽높이가 3,4미터밖에 되지 않는 낮은 흙성이다.

나아가 도시 크기에 비해서 병력이 한참 부족해서 성벽을 다 지키기도 힘들다. 애초에 칼간의 인구는 이만을 조금 넘는 정도니까.

만약 수성을 고수하다가 뚫리기라도 하면, 항복할 틈도 없이 도시는 함락되고 대학살을 당하게 될 거다.

“허면 야전을 하자는 말이오? 적의 기병이 몇이나 되는지도 모르는데?”

“맞소. 북원잔당도 부수며 내려오는 자들과 무슨 수로 야전을 한단 말이오?”

“진짜배기 북원잔당은 이미 다 중원으로 떠나지 않았소? 쭉정이들만 남았는데, 그들을 깨부셨다고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지 않소?”

“그럼?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성이 떨어지기만 기다릴 생각이오?”

“우린 화포가 있잖소!”

“그게 고철덩어리가 된 게 언젠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핀잔을 들은 상인은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명이 있을 적엔 이곳에 화포를 배치해 놓고 써먹곤 했지만, 북원에게 기술이 유출될까 두려워서 정작 중요한 화약기술자를 보내지 않았다.

비축해 놨던 화약은 이미 오래전에 다 써버렸고, 명이 망한 후엔 중국이 개판이 됐는데 화약을 무슨 수로 구할까.

“호르가와 싸울 때도 예상을 깨고 야전에서 승부를 보아 이기지 않았소!”

“맞소. 각 가문의 호위와 위소의 병사를 모으면 우리도 적지 않은 병사를 모을 수 있지 않소!”

장내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해갔고, 뭘 선택해도 딱히 이점은 없었기에 그저 말꼬리만 잡는 상황으로 이어져갔다.

“저기가 칼간이군.”

“예.”

“흠...”

연오랑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저 먼 곳에 아른거리는 도시를 바라봤다.

지나 온 몽골초원은 요서와 비슷하면서도 낯설었다.

사막과 초지, 강과 산맥이 뒤섞이고, 어딜 봐도 온통 지평선이 깔려 있는 탁 트인 대지는 모두에게 낯섦과 묘한 감동을 줬지.

평생을 좁은 조선땅, 나아가 고향땅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몽환적인 풍경은 세상을 보는 안목을 높여줬지.

허나 목가적인 일상은 이내 익숙해지기 마련.

수일이 지나자 감흥은 식었고, 전투조차 없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곳은 인구밀도가 워낙 낮고, 소문을 들은 몽골부락은 이미 어디론가 다 떠난 상태니까.

하지만 칼간에 도착하자 전투의 피냄새가 슬금슬금 피어올라, 모두의 긴장감이 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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