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챕터19. 무너지다 (6)
거리를 두고 연대별로 늘어선 원정군은 느긋하게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지평선 저편으로 어설프게나마 남아 있는 도시성벽이 아른거리는데... 확실히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르다.
진나라 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역사의 풍파를 따라 확장,보수,붕괴를 반복했고,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직격타를 얻어맞았다.
원나라 입장에선 만리장성은 든든한 장벽이 아니라 장애물이니까.
원래 역사에선 영락제가 등극하면서 제대로 된 확장보수공사가 진행되지만,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시작조차 못했지.
칼간 또한 훗날 장가구로 이름을 바꾸면서 만리장성이 이어져 북방을 지키는 거점관문이 되지만, 지금은 그저 옛 성벽만 겨우 복구한 상태였다.
“사령관님. 적이 평원에 도열해 있습니다.”
“성벽을 안 끼고?”
“예.”
‘뭔 헛짓거리지?’
연오랑은 특전대원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원정군에 대해서 모른다한들, 그래도 기병군단과 야전에서 맞붙을 생각을 하다니?
“복병이나 지원군이 있나?”
“사방 30리까지 살펴봤지만, 대군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쟤들 화포도 없잖아? 뭔 생각이지?”
연오랑은 혼잣말을 내뱉고선, 훌쩍 말을 몰아 사령관 김을화에게 달려갔다.
“오셨습니까.”
“소식 들으셨습니까?”
김을화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같은 고민을 했는지 대답을 재깍 내놨다.
“우리가 몇이나 되는지 정확히 모르나 봅니다. 어쩌면 지난날 상대해온 몽골부락을 예상한 걸지도 모르지요.”
“함정을 파놓기엔 시간이 촉박했을 거고...”
“예.”
저런 평원에 함정을 만들어봐야 참호 정도나 가능할 텐데, 반대로 이렇게 탁 트인 평원에 만들어 봐야 얼마나 만들겠나.
“아니면 적장이 바보인가? 공명심에 눈이 돌았나?”
“글쎄요...”
김을화도 그것까진 몰라서,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칼간의 책임자인 장구보에 대해서는 몽골포로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지만, 속사정까지는 알 수가 없으니까.
“어찌하시겠습니까? 화기대를 쓰시겠습니까?”
지금껏 병력 운용에 대해선 연오랑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건 전투를 넘어서 후처리까지 엮인 상황 아닌가.
김을화는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연오랑의 뜻을 물었다.
“보류하지요.”
연오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거부를 표했다.
칼간은 파림좌기보다 크진 않지만, 반대로 거주민은 만만치 않게 많았다.
저들은 유목민 몽골부락이 아니라, 정주민 중국인에 더 가깝지 않나.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것보단, 오히려 적당히 달래서 집어삼키는 편이 더 나은 방법이다.
더군다나 화약 비축량을 생각해하면, 지금 마구 쏴대는 건 무리지.
“전군 돌격 방진을 짜고... 거칠게 밟기 전에, 느긋하게 한번 밀어서 반응을 보지요.”
“예.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길게 늘어져 있던 원정군은 전열을 짜고, 발맞추어 앞으로 척척 나아갔다.
파림좌기에 병력을 놓고 왔어도, 원정군은 일만이 넘는 기병군단 아닌가.
먼지구름을 작게 피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지만, 그럼에도 쿵쿵.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평원을 채우기 시작했다.
확실히 칼간은 원정군에 대해서 몰랐던 게 분명.
평원을 포위하듯 새카만 갑옷을 입은 이들이 가득차자, 웅성거리면서 당황에 빠진 모습이 연오랑의 눈에게도 들어왔다.
“함정은 없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음...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이동식 지휘망루에 올라탄 연오랑과 김을화는, 칼간의 진형을 보며 오히려 생각이 깊어졌다.
‘아무리 봐도 함정이 아닌 것 같은데? 저 정도 병력이면,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다 끌어 모은 거 아닌가?’
연오랑은 오히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싸워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군기가 흔들리려 하고 있다.
제대의 숫자, 깃발, 포진한 지역을 살펴보니... 대충 사천명 정도 되어 보이는데, 어째 생각만큼 기병이 많지 않았다.
몽골경기병처럼 보이는 이들이 양익에 위치해 있고, 중앙엔 창병과 궁병들이 듬성듬성 늘어서서 사각형으로 모여 제대를 이루고 있었다.
“양익 기병을 다 합쳐도 천이 안 되는 것 같지요?”
“그래 보입니다.”
“음...”
“...”
“2연대와 3연대에게, 양익으로 빠져서 기병을 견제하라고 해라. 전열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 적이 우회해서 후위를 치지 않는 이상, 굳이 무리해서 싸우지 말도록. 병력을 보존하는 게 최우선이다.”
연오랑은 생각을 정리하고선 명을 내렸고, 그의 시선을 느낀 김을화 또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옙!” “넵!”
연락병은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빠르게 흩어졌다.
2연대장 유은지와 3연대장 이순몽은 나이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해서, 혹시나 사고 칠까봐 연오랑이 주의 깊게 살피던 인물들 아닌가.
반대로 그 괄괄한 성격만큼이나 기병전에는 일가견이 있으니, 변수가 발생해도 칼간의 기병을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거다.
“나머지 제대는 그대로 진군한다. 돌격대형이 아닌 기사대형을 갖추도록. 그간 훈련한대로 움직이라 해라.”
“옙!”
부웅! 사령관이 쓰는 대라소리가 퍼져나가자, 중대장, 소대장들의 호각소리가 참새가 지저귀는 것 마냥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제대에 껴 있던 2연대와 3연대는 뱀처럼 매끈하게 빠져나와, 전열 뒤편으로 크게 돌아서 양익으로 자리를 옮겼다.
칼간의 수비병이 볼 수 있을 정도로 대놓고 움직였으니, 칼간 기병대를 견제하려는 걸 알아차렸을 거다.
기병군단 곳곳에 박힌 검은 깃발이 사방에서 펄럭이고, 연대는 소대별로 모여 마갑을 씌운 중기병을 앞세워 열을 맞춰 나란히 섰다.
이윽고 느긋한 경보로 진군.
서로의 외형이 눈에 보일정도로 가까워지자, 쿵쿵쿵. 지축을 흔드는 굉음은 더욱 커지고, 정말로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칼간의 보병진 또한 울리기 시작.
흔들리는 땅 때문인지 아니면 흔들리는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만, 나름 줄을 맞춰 정렬해 있던 제대가 삐거덕거리는 게 확연히 보였다.
어스름한 형태만 보이다가 이젠 윤곽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칼간의 수비병들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앞선 제대에 있는 병사들은 고개를 돌려 사방을 살폈지만, 온통 적들만 가득했다.
눈앞에는 평원을 빼곡하게 채우면서 검은기병이 땅거미처럼 쫙 깔리기 시작했고, 땅거미 옆에는 연신 피를 달구며 먼지구름을 일으키는 다른 기병대가 눈을 사로잡았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들이 불시에 들이닥치면 모래성처럼 무너질 게 뻔하지 않나.
혼란과 당황에 빠져, 매를 만난 꿩 마냥 계속해서 고개를 돌려가며 서로를 살피고 두려움을 전파해갔다.
반대로 조선군은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연대는 각 소대별로 쪼개져, 4열을 이루고 횡으로 길게 늘어섰다.
“돌격소대 앞으로!”
휙휙. 팔자를 그리며 휘날리는 소대깃발을 따라, 마갑을 껴입어 육중해 보이는 중기병들이 전열 앞으로 살짝 튀어나왔다.
지금 적을 코앞에 두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푸르르. 중기병 기수들은 투레질하는 전마를 다독이며, 겁도 없이 앞을 책임졌다.
“후...”
소대원은 자기도 모르게 터지는 심호흡을 뱉어내며, 소대깃발을 들고 있는 소대장에게 집중했다.
‘음...’
쓱. 고개를 돌려 옆을 살피자, 항상 함께 하던 동료들이 투구 밑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뿌리는 게 보였다.
더 멀리 시선을 돌려보지만, 보이는 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검은갑옷과 맹수모피갑옷의 향연 뿐.
제대가 너무 길어서,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저 전열 앞으로 살짝 튀어 나와 있는 소대장들과 소대깃발만 살피면서, 다른 연대와 중대가 어디 있는지 확인할 따름.
두둥! 연대별로 포진된 북소리가 울려 퍼지자, 삐빅! 소대장의 호각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겁먹지 마라! 이 거리에선 화살을 맞아도 안 다친다! 너희 갑옷을 믿어라! 그게 얼마짜리인데!”
“...”
어느 소대장이 농담을 던져보지만, 잔뜩 긴장한 소대원들은 그저 거친 호흡만 뱉어내며 호각소리에 맞춰 열심히 앞으로 전진.
이윽고 서로가 개개인의 윤곽이 보일정도로 가까워지자.
“정지! 준비!”
파도가 몰아치는 것 마냥, 소대원들은 일제히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후흡...’
소대원은 심호흡을 하면서 시위를 당길 준비를 하고, 저 멀리 아른거리는 칼간 수비병을 살폈다.
지금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정확한 조준사격을 하는 게 아니지 않나.
병력차를 앞세운 광역 제압사격이니, 그저 머릿속으로 화살의 궤적을 그리며 시위를 잡아당겨 가슴팍에 붙였다.
‘사실 지겹도록 해왔잖아?’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두려움을 날려 보냈다.
착호군으로 활동하면서, 매번 하던 훈련이 이것 아니었나.
다른 점이라면 표적이 맹수나 허수아비에서, 지금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뿐이다.
“발사!”
투두둑. 비단 찢기는 소리와 함께, 쉐에엑! 온 사방에서 두서없이 화살이 날아가 하늘을 검게 만들었다.
후두두둑. 저 멀리서 화살이 땅에 박히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5보 전진!”
먼저 앞서서 나가는 소대장을 따라, 소대원들은 다시금 천천히 말을 몰아 5보 앞으로 전진.
“준비!”
물 흐르듯 연계 동작이 이어졌다.
다시금 전통에서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고, 호각소리에 맞춰 화살을 날리길 반복.
평원 저편에서 떠오른 검은 반원이 하늘로 치솟기 무섭게, 칼간 수비병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크억.” “컥.” “어억...” 한차례의 화살비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짧은 화살이 해를 가리며 날아와 콩 볶는 소리를 만들었다.
당황한 칼간 궁수대가 화살을 마주 쏴보지만, 어째 조선군에 닿기도 전에 대다수가 땅에 우수수 박히며 화살밭을 만드는 게 아닌가.
아마도 칼간 수비병들은 편전에 속은 모양이다.
최대사거리인 100보 전후의 간격을 두고, 서로는 화살비를 날려댔다.
헌데 조선군은 화살비를 쏟아내고는 오히려 후퇴.
앞 열부터 줄줄이 말을 몰아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고, 다시 처음 출발했던 그 자리에 도착했다.
친절하게도 땅에 박혀 꼬리를 흔들고 있는 화살대 덕분에, 더욱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지.
“다시 전진. 준비!”
또 다시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가선, 사정없이 화살비를 쏟아냈다.
조선군이 상리에 벗어나는 움직임을 보이자, 칼간 수비병은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기존 몽골기병이라면 50보 안으로 빠르게 다가와서 화살을 쏘고 되돌아가는 방식을 썼지만... 지금 조선군은 흡사 보병궁수 마냥 조금씩 전진해 멈추고선, 화살만 쏴대고 있지 않나.
워낙 멀리서 쏴대는 탓에 맞고 쓰러지는 수는 드물었지만, 머릿수가 너무 차이난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 마냥, 칼간 수비병의 선두 제대가 점점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조선이 비정상적으로 궁병과 궁기병을 많이 키워서 그렇지, 사실 활은 익히기 어렵고 숙달되는 데 오래 걸리는 무기잖아?
그 차이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확실히 몽골기병만 상대해 온 모양입니다.”
“예. 그래 보이는 군요.”
김을화와 연오랑은 멀리 보이는 전장을 살피며, 전황을 읽어나갔다.
칼간이 지금껏 싸워온 상대는 경기병 위주의 몽골부락이니, 당연히 창병과 궁병, 마무리를 지을 기병이 혼합된 제대를 운용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칼간 수비병은 밀집방진이 아닌 창병의 보호를 받는 느슨한 방벽 속에 궁병을 배치해서, 스웜전술을 사용하는 몽골기병을 역공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허나 조선군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기사를 할 줄 아는 일만의 기병은 일만의 궁병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앞도적인 물량으로 칼간 궁병대를 짓눌렀다.
매섭게 치고 들어와서 쑤시고 지나가는 궁기병이 아니라, 발이 빠른 보병 궁수처럼 운용하는 거지.
다만 일반적인 보병궁수라면 양익의 몽골기병을 보내 견제했겠지만, 지금은 두 배나 많은 조선기병에 붙들려 있는 상황.
설령 그들이 없다한들. 가만히 서서 활을 쏘던 이들이 순식간에 궁기병으로 탈바꿈할 수 있으니, 결론적으론 스웜전술의 유인책에 당한 것과 차이가 없지 않나.
이런 방식의 전투는 아마 칼간도 처음 겪어봤을 거다.
반대로 김을화 또한 이런 방식은 처음 봤다.
‘이래서 악착같이 착호군을 전원 기병으로 키운 걸까?’
김을화는 연오랑을 슬그머니 곁눈질하면서,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게 우연인지, 아니면 여기까지 생각한 건지 알 수 없다. 허나 만약 후자라면 심계가 깊어도 너무 깊다.
‘확실히... 단순히 조선내지에서 활동할 군대가 아니었구나. 언제가 됐든 조선의 강역을 넓힐 준비를 하고 있었어.’
김을화는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라, 발끝부터 소름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게 오롯이 연오랑의 뜻은 아닐 터. 세종과 태종은 착호군 창설시기부터, 북방으로 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다.
사실 따지고 보면... 조선의 험준한 산을 타넘으며 맹수 사냥을 하는 군대가, 굳이 기병으로 모두 구성될 필요가 있을까? 유지비용이 몇 배나 차이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