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챕터19. 무너지다 (7)
허나 연오랑은 강력하게 밀어붙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련했다.
그 결과 착호군은 산을 타넘으며 맹수사냥을 하면서, 기병임에도 오히려 보병처럼 움직이는 전술에 더욱 익숙해졌지.
‘만약 북변의 조선군이 이런 상황에 닥쳤다면, 어떻게 막아야 했을까?’
김을화는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칼간 수비병의 전투방식은 기존의 조선군이 여진족을 상대하는 방법과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지금의 여진족은 북원잔당이나 우량카이 3위에 비하면 하위호환수준이니, 당장은 문제가 없어 보였던 거지.
‘기사를 하고 있지만 이걸 보병궁수로 바꿔보면... 맞상대할 방법은 결국 머릿수 밖에 없는 건가? 아니면 화포든지.’
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진족이 아닌 다른 군대와의 싸움을 상정하면, 지금 북변의 조선군은 변화가 필요했다.
그런 해답을 떠올리자... 불연 듯 생각지도 못한,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를 결론이 도출됐다.
‘착호군은 여진족을 상대하려고 만든 게 아니구나!’
이미 원정군의 최종목표를 알고 있음에도, 막연히 멀게 느껴졌던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연오랑은 몽골부락과 칼간 수비병을 상대하면서, 오히려 보병 중심의 군대에 대항할 연습이자 훈련을 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조선 주위에 보병 중심의 군대를 운용하는 곳은 정해져 있고, 비싼 기병을 굳이 보병처럼 운용하는 건... 장거리 원정을 상정한 경우 말고는 없지 않나.
‘처음부터 요동과 중국을 노리고 있었던 거군. 이번 원정은 그 첫 실험이다!’
김을화는 갑자기 격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고, 말없이 전장을 살피는 연오랑을 보며 다시금 혀를 내둘렀다.
김을화의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와중에도, 원정군은 피를 먹는 기계처럼 쉬지 않고 움직였다.
칼간 수비병이 제대를 느슨하게 배치해서 투사공격의 피해를 줄이려고 한들, 머릿수에서 압도당한 이상 달리 방법이 없다.
쏟아지는 화살비를 버틸 수 없었고, 선두 제대는 뭐 해보지도 못하고 우수수 녹아내리기 시작.
“으억.” “도망쳐!” “이대로는 안 돼!” 앞에 있던 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등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고, 화살에 맞은 이들은 땅을 기어서라도 뒤편의 제대 틈으로 파고들었다.
예전의 명군이라면 독전관이라도 둬서 탈주병을 처리했겠지만, 몇 명 되지도 않는 칼간의 수비병은 모두가 아는 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그저 부상병과 패잔병을 수습해 후미로 퇴각시켜, 전열을 새로 정비하는데 급급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리가 있나.
원정군은 연오랑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해서, 칼간 수비병이 빠져나간 자리만큼 전진해서 화살 공격을 이어갔다.
우직하게 밀어붙여, 칼간 진형을 점점 성벽쪽으로 밀어 냈다.
“이거. 우린 할 일이 없겠는데?”
“그럼 좋지 않습니까.”
“재미는 저 녀석들만 봐서 그렇지.”
“끄응...”
대대장은 입맛을 다시고 있는 이순몽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살포시 내저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손실된 전마도 없이 승리하면 그보다 더 좋을 게 있을까.
허나 이순몽은 손이 근질근질한지, 쥐고 있는 기창을 계속 위아래로 흔들고 있었다.
3연대는 좌익에 위치한 칼간 기병대를 견제하면서, 거리를 두고 느긋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칼간 기병대는 단박에 조선군으로 돌진해 화살 공격을 끝내고 싶지만, 전열의 측면을 비우는 순간 조선기병이 옆구리를 쳐서 전열 전체를 뒤집어엎어버릴 거다.
이러다보니 오히려 3연대가 칼간 기병대로 돌격하지 못하게, 부지런히 전열 근처를 맴돌며 눈치만 보고 있었지.
다만 이 대치 또한 굉장히 정적이었는데, 말은 빨리 달릴 수 있는 동물이지 오래 달릴 수 있는 동물이 아니지 않나.
기수와 마구를 걸친 전마는 생각보다 쉽게 지치는 탓에, 서로는 전마의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산보하듯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러니 성질 급한 이순몽 입장에선, 지루할 지경이지.
화끈하게 한바탕 붙으면 좋겠지만, 그도 그 정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아는 인물이니... 그냥 입으로만 불평을 내뱉었다.
“저기! 선두 제대가 또 무너지는 군요. 저러면 틈이 보일 법도 한데...”
“음!”
이순몽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전장 저편을 바라봤고, 저 멀리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뒤로 빠지고 있는 칼간 수비병이 눈에 들어왔다.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예.”
대대장은 무너지는 제대를 보며, 의심하지 않고 동의했다.
몽골기병을 상대하기 위한 느슨한 방진은, 반대로 말하면 중량으로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중기병의 돌격에 취약하다.
그리고 지금. 껍질이 까지듯 선두부터 점점 무너지는 칼간 수비병 전열은, 돌격하기 딱 좋은 상태 아닌가.
대대장 또한 이순몽과 함께 3연대를 열심히 굴렸고, 이들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저렇게 깔짝깔짝 화살공격을 퍼붓지 않고, 말 그대로 무식하게 돌격해도 속절없이 짓밟아 버릴 수 있다.
“무슨 생각인지... 이거야 원.”
“글쎄요.”
허나 연오랑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 별 수 있나. 시키는 일이나 잘하는 수밖에.
이순몽은 ‘제발 그만 버티고 덤벼라.’라고 속으로 외쳐봤다.
“이제 틈이 생겼는데, 돌격할까요?”
“아닙니다. 지금처럼 계속 밀어붙이지요.”
“...”
김을화는 살짝 아깝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군말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요철모양으로 하고 평원에 잔뜩 박혀 있던 칼간 수비병 제대는, 두서없이 무너지면서 군데군데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기병돌격에 취약한 방진 아니냐.
헌데 이젠 기병이 아예 전열을 뚫고 나가도 될 정도로, 제대 간의 간격이 벌어지고 따로따로 흩어져 있었다.
이대로 돌격명령만 내리면, 충분히 피를 달군 전마는 벼락처럼 내달려 칼간 전열을 아예 수십 조각으로 쪼개버릴 수 있을 거다.
“지금이 적을 무너뜨릴 좋은 기회인 건 분명하지만... 저들을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뒤처리가 피곤해지지 않겠습니까?”
“흐음...”
일견 맞는 말이긴 하니... 김을화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주제를 알고 제풀에 주저앉게 만드는 게 최선 아니겠습니까? 저들은 몽골부락과 또 다르니, 많이 죽이고 무작정 두려움을 심어주는 게 상책은 아닐 겁니다.”
“예. 뜻대로 하시지요.”
“50보 앞까지 전진하고, 이제부턴 체력을 안배하면서 화살을 쏘도록. 굳이 많이 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승기는 넘어왔으니, 저들이 알아서 무너지길 기다린다.”
“옙!”
연락병은 또다시 퍼져나갔고, 둥둥둥! 웅장한 북소리는 다시금 전장을 뒤흔들었다.
아까와 비슷하지만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원정군에 맞춰, 칼간 수비병의 대응 또한 적극적으로 변했다.
물론 그게 좋은 건 아니었지.
끝도 없이 쏟아지는 화살공격에 버티지 못한 일부 제대가, 기병소대의 꼬리를 붙잡기 위해 거칠게 진격.
기병소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뒤로 빠졌고, 칼간 제대가 전열에서 빠져나와 홀로 돌출되자... 피에 굶주린 늑대떼가 몰려들었다.
알아서 그물 안으로 들어온 꼴 아닌가.
사방에서 기병소대가 몰려와 거칠게 찢어발겼다.
화살을 쏘면서 접근해선, 기창과 편곤으로 제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그 반대편에서 달려온 또 다른 기병소대가 2타로 제대를 두동강 내버렸고, 후퇴했던 기병소대가 반전하여 엉망이 된 제대를 아예 박살내버렸다.
스웜전술 유인책의 전형적인 움직임이었고, 악에 바쳐 튀어나온 몇몇 제대는 죄다 똑같이 박살나서 사라졌다.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자 칼간 수비병들의 동요는 더욱 심해졌고, 반대로 원정군의 압박은 보다 거세졌다.
원정군은 흡사 당장이라도 돌격할 것 마냥 바로 앞까지 다가와 화살을 날려댔고, 칼간의 전열은 급격하게 무너졌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전열의 모든 선두 제대가 우르르 무너져 후퇴를 시작.
칼간 수비병 전열은 선두와 후미가 뒤섞여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건, 앞뒤 가리지 않는 무질서한 후퇴뿐.
아니나 다를까. 칼간 수비병들은 소속된 제대를 무시하고, 마구잡이로 칼간의 성벽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지금...!”
드디어 등을 잡을 순간이 찾아오자, 김을화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가... 물끄러미 보고만 있는 연오랑을 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승리의 기쁨에 흥분해서, 방금 전에 했던 말을 잊고 말았다.
“적이 도망칠 시간을 줘라.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성벽까지 진군하고, 부상당하거나 미처 패주하지 못한 포로를 수습하도록. 특히 2,3연대에게 적 기병을 추적하지 말라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둥둥둥! 부우웅! 기다렸던 마지막 북소리와 대라소리가 터지자, 평원은 조선군이 내지르는 함성소리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전투는 어찌 보면 허망하게 끝이 났다.
기세 좋게 나섰던 칼간 수비병은 죄다 성벽 안으로 도망쳤고, 원정군은 흡사 양치기마냥 칼간 수비병을 몰아가면서 칼간을 포위했다.
이 또한 느긋하게 움직인 탓에 기병대 간의 교전은 벌어지지도 않았고, 이순몽과 유은지는 안타까운 마음에 괜히 욕만 내뱉었지.
칼간의 사방성문을 모두 포위하자, 조선군은 대놓고 화살의 사정거리 밖에 머물며 전장을 정리했다.
성벽 위에서 뻔히 보이는 자리에 머물면서, 보란듯이 진지를 세우기 시작.
아예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에 어설픈 제단을 세워 군종승들이 사망자들을 위무했고, 옆이 트인 어설픈 천막을 세워 부상자들을 치료할 진료소를 만들었다.
이 엉뚱한 작태를 두고 조선군조차 입방아를 찧어댔는데, 성벽 위에 올라서 보고 있던 칼간 주민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는가.
당최 이해할 수가 없어서, 발만 동동 굴렀다.
“사상자는?”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가 38명입니다.”
“적은?”
“아직 완전히 집계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사망자 143명, 부상자는 430명 정도 됩니다.”
‘좋군.’
가볍게 간만 보고 적을 패퇴시킨 것 치고는, 성과가 나쁘지 않다. 최대한 적게 죽이면서 사기는 바닥 치게 만들었으니까.
연오랑은 황보인의 보고를 들으며, 조용히 칼간 성벽을 살폈다.
와서 보니 쟤들이 왜 야전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번성했던 옛 시절의 도시터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탓에, 사람이 얼마 살지 않는 변경 도시치고는 너무 컸다.
성벽은 황토빛의 구운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보수를 하다가 만 건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고 물결치듯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예전에 저쪽으로 명군이 진입한 건가?’
연오랑은 느긋하게 말을 몰아, 성벽을 따라 돌면서 눈길을 이어갔다.
아예 보수조차 못해서, 성벽 곳곳이 뻥뻥 뚫려 목책으로 대충 땜질해 놓은 부분이 한두곳이 아니었으니까.
급조한 티가 역력해 보이는데, 조선군이 오기 전에는 구멍 난 성벽을 그냥 통행로 쓰지 않았을까?
“적이 항복하겠습니까?”
“당연히 하겠지만... 고민은 덜어줘야겠지.”
살짝 미심쩍은 황보인의 물음에, 연오랑은 단호히 답을 던졌다.
칼간이 저 어설픈 성벽만 믿고 수성전을 하면서 시간을 끌면 피곤해진다.
저들이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쥐고 있는 동아줄을 잘라줘야지.
“화기대는?”
“준비 됐습니다.”
연오랑과 황보인은 곧장 방열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 화기대로 향했고, 이번 싸움에서 구경만 했던 최해산과 화포병들은 기운차게 움직이며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저기. 멀쩡해 보이는 성문부터 부셔라.”
“옙!”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콰콰쾅! 백문의 화포는 시원하게 트림을 하며 불꽃을 뱉어냈다.
“후음!”
박강은 크게 한숨을 내쉬곤, 무너져 버린 성문을 애써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항상 오갈 때마다 봤던 성문과 성벽이 하루아침에 돌무더기가 되어 있으니,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지가 않는다.
성문을 나와 애써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본다.
‘후...’
자신을 사지로 내몬 자들이 야속하지만, 따지고 보면 자기 살길을 자기가 찾아야 하는 법 아니겠나.
애써 자기위안을 하며, 일평생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조선군 진영으로 나아갔다.
원말명초, 여말선초 시절에 꽤 많은 고려인이 중국과 요동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동화되어 살기도 했고, 고려인끼리 모여 마을을 이뤄 살기도 했지.
몽골인이 대부분이었던 파림좌기에도 고려인이 있었는데, 온갖 출신이 다 모여 있는 칼간에 고려인이 없었을까.
운석핵꿀밤으로 칼간이 따로 놀게 되자, 그들은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구성원의 일부가 되었고.
박강은 장원과 목마장을 가진 상인이자, 고려인을 대표해서 칼간 상회의 일원이 되었지.
다만 박강은 고려인 2세라서 조선은 가본적도 없는데... 그저 조선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이렇게 협상사절이 되고 말았으니 억울할 따름.
그 억울한 마음을 애써 털어내며, 큰 흰 깃발이 펄럭이는 곳으로 나아갔다.
박강을 비롯한 칼간 주민들은 성벽 위에서 전투를 지켜봤고, 조선군의 요상한 행태를 똑똑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이쯤 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아이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조선군은 칼간을 무너뜨릴 수 있음에도 봐주고 있고, 이렇게 먼저 나서서 행동으로 교섭을 말하고 있었다.
만약 이 손을 잡지 않으면? 화포에 의해 성벽이 무너지는 걸 보지 않았나.
더 말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