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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111화 (111/538)

111. 챕터20. 부서지다 (1)

고려출신의 상회 수행원들과 함께 조선군 진영에 이르자, 번들번들한 검은 모피 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그들을 이끌었다.

‘곰 가죽인가...?’

박강은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 기병이 입고 있는 갑옷을 살펴봤다.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비싼 곰가죽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을까 싶다만... 여긴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닌 모양이다.

곰가죽은 당연하고 심지어 검은 줄무늬가 선명한 호피갑옷을 입은 기병도 보였으니까.

부모에게 듣던 고려의 기억을 떠올려보지만... 잘 모르겠다. 이들이 자신이 아는 고려와 조선인이 맞는지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

범처럼 매서운 눈빛을 뿌리는 장군들이 즐비하지만,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백호갑옷이 박강의 눈을 사로잡았다.

묻은 피가 아직 벗겨지지 않았는지, 갑옷은 연분홍빛을 띄고 있어서 더욱 어색할 따름.

‘헙! 백호피로 만든 갑옷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박강은 딱 봐도 연오랑이 높은 사람인 걸 알아차리고 넙죽 숙였다.

“박강이라 하옵니다.”

“고려 출신이냐?”

“예.”

“상인인 너희가 상황 파악을 못하진 않았을 터... 긴말하지 않겠다. 항복하면 목숨과 재산의 일부는 보존해주겠다. 너흰 모두 조선으로 가서, 지금처럼 살게 될 거다.”

“...!”

예상 보다 경악스러운 말에, 박강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연오랑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갔다.

“이것저것 고민해봐야 더 나은 해답은 없을 거다. 우리가 아니면 너흰 올량합이나 요동군에게 노예로 끌려갈 텐데, 설마... 그걸 원하는 거냐?”

“...”

그럴 리가 있나. 박강은 대답 대신 그저 침만 꿀꺽 삼켰다.

“그들에게 붙잡히면 마소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게 될 건데, 그럴 바엔 차라리 여기보다 살기 편한 조선으로 가는 게 낫지 않나? 조선인이 되어 살아야겠지만, 이 척박한 땅에서 몽골인도 중국인도 아닌 상태로 살던 너희라면 금방 적응하겠지.”

“...”

점을 찍듯 단언하는 말이지만, 박강은 뭐라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만 빼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니까.

“싸울 테면 더 싸워봐라. 이젠 우리뿐만이 아니라 몽골초원의 만호장도 함께 상대해야 할 터. 그들이 너흴 가만 둘 것 같아?”

“헙...!”

폭풍처럼 몰아치는 연이은 협박에, 박강은 물론이고 함께 따라온 수행원들 모두 기겁한 모습을 보였다.

칼간이 비록 자치를 유지하곤 있지만, 몽골부락은 언제나 두려운 존재 아닌가.

특히나 만호장 급의 거대부락은 칼간에겐 자연재해와 같다.

‘만호장을 부른다고? 그렇다면... 칼간을 아예 없애버리려는 거구나!’

박강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질끈 감았다.

거대 몽골부락이 칼간을 건들지 않는 건, 통치하는 것보다 그냥 놔두는 게 더 이득이라서 그렇다.

허나 이젠 그 상황이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몽골은 어찌됐건 중국의 물산이 필요할 텐데, 대체 무엇으로 그걸 보충한단 말인가? 조선이나 요동으로 될까?’

그럴 리가 있나.

앞으로는 동쪽초원을 놓고 우량카이 3위와 북원잔당 간의 혈풍이 계속해서 몰아칠테니, 동쪽무역로는 사실상 없어진 거나 다름없다.

서쪽의 섬서가 있지만... 몽골초원의 정중앙까지 육로로 오기에는 너무 멀고, 부딪치고 협상해야할 부락도 너무 많다.

‘뭐지? 뭘 놓치고 있지?’

고민에 빠진 박강을 보며, 연오랑은 시원하게 해답을 날려줬다.

물론 그 발언에 박강 일행뿐만 아니라, 연대장들 모두가 얼굴이 굳어졌지만.

“우린 요동군, 북원의 만호장과 함께 거용관을 무너뜨릴 거다.”

“...!”

“앞으로 칼간은 격전의 중심지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한 일. 어차피 너흰 여기에서 못 살아. 그러니 차라리 적극 협력해라. 상인이라면 장성을 넘는 샛길을 알고 있겠지? 길 안내를 부탁하지.”

‘거용관을 무너뜨린다고?’

박강은 비릿하게 웃는 연오랑을 보며, 충격에 빠져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

“흠... 여긴 또 다르군.”

“예.”

공녕군 이인은 메마른 사막을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이젠 몽골초원의 생경한 풍경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천만의 말씀.

여긴 그가 아예 겪어보지도 못한 자갈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물론 끝도 없이 사막만 있는 건 아니었고, 초지와 산맥 사이에 잠깐 나타났던 거지만... 분명 조선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땅이지.

‘이런 땅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걸까?’

문뜩 그런 생각이 떠올라 사라졌다.

농사가 불가능하고 변변찮은 작물도 자라지 않는 이 땅에서, 대체 어떻게 하면 백성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연오랑을 따라다니면서 생각이 깨인 이인은, 막연히 오랑캐라 부르던 이들을 되돌아보게 됐다.

“저기. 정찰병이 또 왔군요.”

“음...”

기사대장 한선후는 평원 저편을 가리켰고, 상념에서 깨어난 이인은 길게 그림자를 그리고 있는 일단의 기병을 발견할 수 있었다.

뒤를 보며 손을 까닥거리자,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몽골기병이 재깍 달려왔다.

“알아볼 수 있겠나?”

“음... 오란찰포의 바투한이 맞습니다. 장군.”

파림좌기에서 합류한 고려,몽골인 혼혈병사는, 한참을 눈을 찡그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선말로 답을 했다.

“좋아. 경계를 늦추지 말고 느긋하게 다가간다.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차리겠지.”

“옙!”

“충성!”

이인의 명에 일단의 기병대가 한차례 울었고, 부르르 떨리는 깃발을 보며 평원 저편의 몽골정찰병의 몸이 흔들렸다.

기사대, 판군사대, 훈련대, 자발적으로 합류한 몽골기병까지.

그야말로 원정군 최정예만 데리고 오지 않았나.

이인을 비롯한 중대장들은 그 어떤 몽골부락과 만나도 자신 있었고, 그 자신감을 감추지 않고 표출 했다.

팔백의 기병 선두엔 커다란 흰 깃발과 검은빛깔의 착호군기가 휘날렸고, “싸우러 온 거 아니다.”라고 말을 하듯, 몽골정찰대가 보란 듯이 느긋하게 나아갔다.

대체 언제부터 통용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흰 깃발은 평화와 교섭의 상징 아니던가.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다.

한참을 그렇게 초지와 얕은 개울을 따라 오란찰포(우란차부)를 향해 나아가자, 드디어 기다리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낮은 구릉 저편에 몽골기병들이 줄줄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준비해라.”

“옙!”

당장이라도 시원하게 맞붙어도 이상하지 않건만, 조선군은 오히려 반대로 움직였다.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사방을 살폈고, 수십의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 후다닥 간이 막사를 만들고 음식을 준비했다.

뜬금없이 밥 짓는 흰 연기가 피어올랐고, 간이 막사의 앞에는 저편에서도 훤히 보일 정도로 큼지막한 흰 깃발을 꽂았다.

“올까?”

“궁금해서라도 오지 않겠습니까? 초원의 패권을 두고 싸울 정도라면, 이 정도 배포는 있겠지요.”

“흠.”

이인의 호위로 따라온 연전위는 허리춤에 걸려 있는 검파를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이인은 곰처럼 묵직한 연전위를 보며 가볍게 미소를 머금었다.

두터운 호피갑옷을 껴입어서 그런지, 안 그래도 큰 덩치가 더 커보여서 진짜로 곰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이런저런 말이 더 필요할까.

연전위만 이인 옆에 붙어 있으면, 적어도 목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손님을 맞이할 채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자, 아니나 다를까 몽골기병들이 잠시 소란스럽더니... 저들 또한 느긋하게 조선군을 향해 다가왔다.

“수는 비슷하군요.”

“어딘가에 숨겨놨겠지.”

“예.”

이인은 물끄러미 초지 저편을 굽어봤다.

보이진 않지만, 저편에 꾸물꾸물 이어지는 구릉과 산세 사이에 병력을 숨겨놓았을 거다.

동쪽에서부터 전화의 불길은 거칠게 피어올랐고, 시일이 지난 지금. 몽골초원 중앙까지 불길이 옮겨 붙었다.

벌써 칼간이 무너진 건 알 수 없겠지만, 아무튼 적이 가까이 왔다는 건 알고 있으니... 저들도 싸울 준비를 했겠지.

다만 어째 한바탕 시원하게 피를 부를 것 같던 이들이, 이렇게 친한 척을 하고 있으니 당황했을 테다.

“만호장 패아지근 바투한이라...”

이인은 조용히 그 무서운 이름을 읊조렸다.

북원이 망한 이후로 패아지근(보르지긴)의 이름값은 땅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몽골제국의 황실혈통은 무시할 수 없지.

적어도 초원에서 칸을 자칭하려면 보르지긴의 이름은 달고 있어야 하니까.

조선출신인 이인은 막연히 사서와 소문으로만 들어봤지만, 그럼에도 그 무거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운석핵꿀밤으로 역사가 비틀리면서, 당연히 몽골의 역사 또한 비틀렸다.

북원잔당과 오이라트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초원의 패권을 다툴 수 있었던 건, 어찌됐건 명이 견제와 지원을 해줬기 때문이다.

명은 한쪽이 강해지면 반대쪽에 왕작과 조공무역, 마시를 허가했고, 지원을 받은 세력이 강해지면 반대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를 반복해왔다.

허나 외부의 강력한 적이자 후원자가 없어지자 몽골은 더욱더 사분오열됐고, 허울뿐인 대칸조차 튀어나오지도 않았다.

원래 역사에선 칸이 되고, 또 지금은 죽었어야 할 본아실리(부냐시리). 그는 멀쩡하게 살아 섬서에 가 있었다.

부냐시리의 후원자가 되었어야 할 아로태(아룩타이) 또한 부냐시리와 경쟁하며 섬서로 떠났고,

원래 역사에서 앞으로 칸에 오를 아다이(아자이)는 동북초원에서 우량카이 3위와 피터지게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항명출신 몽골인으로 사서에 이름조차 남지 않은 바투한.

그는 지금 태원의 재앙이 되어, 산서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인은 사방이 트인 차향 아래에 앉아 바투한은 기다렸고, 잠시 후 상황 파악을 끝낸 몽골기병이 움직였다.

그들 또한 흰 깃발을 들고 위풍당당하게 다가왔지만... 다가올수록 점점 발걸음이 느려졌다.

온갖 맹수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대원과 훈련대원들을 보며 놀란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실전을 수도 없이 겪어봤을 이들이니, 이들의 강맹한 기세를 알아본 모양이다.

허나 굴하지 않고 다가온다.

몽골식 갑옷을 껴입은 이들은 오히려 두려움을 밀어내며 얼굴을 찡그리며 다가왔고, 허세를 부리듯 차향 밑으로 겁도 없이 들어와 이인 앞에 마주 앉았다.

허나 그런 자신감도 잠시. 호랑이처럼 웅크리고 서서, 매서운 눈빛을 뿌리는 연전위를 보며 흠칫 몸을 떨었다.

하긴 저렇게 큰 덩치를 언제 봤겠냐.

생경한 쌍검의 검파를 만지고 있는 연전위를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조선군이라 들었는데... 맞나?”

으르렁거리는 몽골 말투가 들려오고, 통역 삼아 있던 몽골기병이 재빨리 입을 놀렸다.

“맞다. 조선의 왕자. 공녕군 이인이다. 네가 만호장 바투한인가?”

“그렇다.”

이인이 옥패를 꺼내 보이자, 사내는 또 다시 흠칫 놀라 눈썹을 꿈틀거렸다.

조선군이 맞는 건 둘째 치고, 무려 왕자가 전장에 따라왔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던 모양이다.

이인은 말없이 찻잔을 홀짝거렸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투한에게 내밀었다.

그 뿐일까. 까닥까닥 손짓을 하자, 가마니를 잔뜩 실은 수레 5대가 몽골기병에게 전달됐다.

“...?”

바투한은 당최 이게 뭐하는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이인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소금이다. 첫 만남을 기념하는 선물이지.”

“...!”

하는 짓을 보아 적대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런 선물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던 모양새다.

“이런저런 긴말이 필요하진 않겠지? 우린 너희도, 이 땅도 관심없다. 하지만 북평부엔 관심이 있지.”

“...”

바투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조선군에 대한 뜬소문은 바투한도 들었고, 온갖 소문이 다 섞인 탓에 이렇게 직접 몸소 확인하러 나왔다.

그리고 대충 봐도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지.

이들의 움직임은 자신들과 비교해도 하등 부족하지 않았으니까.

이인은 놀란 바투한에게 또 다시 폭탄을 집어던졌다.

이번 건 더욱 강력하고 매혹적이다.

“우린 거용관을 무너뜨릴 거다. 어떤가? 함께 하겠나?”

“...!”

바투한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입이 벌어졌고.

“거용관 너머 북직례를 어떻게 하든 신경 쓰지 않겠다. 우린 거용관이 무너지길 바랄 뿐이니까.”

“...!”

이어지는 말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이 번뜩였다.

*****

“생각보다 협조적이군. 파림좌기보다 더욱 말을 잘 듣는데?”

“자신들 처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흐음.”

김을화는 이주준비를 하는 칼간의 사람들을 지켜보며, 황보인과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들 뒤론 박강을 비롯한 고려인 출신이 줄줄이 늘어서서,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기회에 조선군 눈에 들어서, 자기 몫을 챙기려는 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한 말을 전부 믿는 모양이군?”

“믿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화포를 봤으니... 거용관을 무너뜨리진 못하더라도, 칼간이 난장판이 될 건 직감했겠지요.”

“...”

북원잔당이 북직례를 치지 못한 건, 오롯이 거용관 때문 아닌가.

이번 공격으로 거용관이 무너지든 안 무너지든, 북평부는 이 일을 좌시하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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