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13화 (113/538)

113. 챕터20. 부서지다 (3)

바투한은 머릿속으로 초원을 그려보다가, 단언하듯 입을 열었다.

“이자이와 자쿤이 알아서 막을 거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그 들개 같은 놈들의 힘을 빼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음.”

“하긴...”

이자이와 만호장 자쿤은 몽골제국의 발원지인 후룬베이얼 인근을 다스리고 있는데, 우량카이는 동북초원을 휩쓸면서 그곳을 노리고 있었다.

이자이 또한 보르지긴의 이름을 이었고, 조용히 야심을 숨긴 채 호시탐탐 초원을 노리는 인물 아닌가.

이번 기회에 우량카이와 싸우면서 힘이 빠지는 건, 바투한 입장에선 결코 나쁘지 않다.

그는 말고삐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조선군을 따라 떠나도 위험이 될 만한 요소는 이제 없다. 있다면...’

이제 바투한이 걱정해야할 남은 세력은, 그들의 직접적인 경쟁자인 만호장 가루탄과 후부타이 뿐.

이들 또한 항명출신 만호장으로 오란찰포 인근에 위치한 부족이자, 그와 함께 산서를 휩쓸고 다녔던 이들이다.

그리고... 바투한이 조선군과 함께 움직이면, 누구보다 빠르게 바투한의 뒤를 칠 음험한 자들이지.

“조선이 우리를 끌어들이려 했다면, 당연히 그들 또한 끌어들였겠지.”

“끄응...”

뒤가 무서운데 누가 먼저 움직이겠는가.

예전에 산서의 태원을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한 의심을 씻어내려면 셋이 같이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예상대로 됐다.

물끄러미 칼간을 지켜보고 있는 구릉 저편에서, 그들과 똑같이 칼간을 지켜보고 있는 몽골기병이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칼간은 평범한 정주민 도시와 사정이 많이 달랐다.

목마장이 많아 몽골부락마냥 말과 가축이 많았고, 상행을 보조할 호위병인 칼잡이들도 많았다.

이들은 가문의 일원이면서도 어쩌면 낭인 같은 이들이고, 중국이 아닌 만리장성 너머의 먼 변방까지 흘러들어왔으면... 사정은 뻔하지 않나.

주인을 바꾸는 걸 전혀 어려워하지도, 어색해하지도 않았지.

그런 이들에게 “포로가 될 거냐? 아니면 함께 싸워서 전리품을 얻을 거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전자를 선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선군은 순식간에 의용군 이천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이들은 손발을 흔들며 몸짓으로 소통하며 빠르게 보조군에 녹아들어갔다.

한바탕 칼을 맞대긴 했지만, 조선군이 아량을 보여서 목숨을 구제받은 걸 누가 모를까. 다들 군말 없이 스며들었지.

이주 작업도 순풍을 달았다.

조선군은 보란 듯이 칼간 인근의 장원을 때려 부셔서, 부서진 잔해와 집기를 이용해 온갖 수레와 마차를 만들었다.

조선군은 악착같이 뭐라도 써먹으려 했으니, 그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면 상인가문은 자신들이 먼저 이삿짐을 싸야했지.

그렇게 마지막까지 남은, 혹시나 하는 희망까지 날아가자... 상인집안은 산동, 요동상인이 데려온 호위병의 안내와 감시를 받으며 줄줄이 초원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흥안령 남쪽을 뚫고 달려온 요동군.

요동군은 정신없는 칼간을 보며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살짝 겁을 집어먹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조선군이 요동군보다 험난한 길을 개척해 온 걸 알고 있었다.

파림좌기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토가바토르에 대해선 그들이 더 잘 알았고, 요동군으로는 하루아침에 그들을 멸절시킬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헌데 화포를, 그것도 백문이나 끌고 왔을 줄이야? 이건 정녕 예상에도 없던 사건이지.

사실 조선군이 거용관을 친다고 했을 때, 요동은 당연히 그 진위에 대해서 반신반의했다.

그냥 와서 북원잔당을 치는 시늉만 해도 감지덕지인데, 먼저 나서서 북평부와 싸우겠다고? 대체 왜?

하지만 그런 의심은 조선군이 흥안령을 휩쓸기 시작하면서 종식됐고, 이젠 진짜 목표를 코앞에 두고 있다.

심양파 요동군 입장에선, 좋긴 좋은데... 뭔가 알 수 없는 조선의 음모에 끌려가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허나 이젠 빠져나갈 수 없다.

북원잔당까지 끼어든 마당에, 이제 와서 빠지면... 상도를 공격하고 있을 요양파에게 명분이 밀리고 말테니까.

“음...”

“흐음...”

칼간 주민들이 대충 만들어 놓은 주둔지에 하나둘씩 짐을 풀기 시작하는 요동군.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김을화와 황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려댔다.

아무리 봐도... 출정 전에 봤던 병력하고 너무 차이가 난다.

만오천이었던 병력이, 눈대중으로 대충 보아하니... 일만도 안 되어 보인다.

더 중요한 건, 기병은 거의 없고 죄다 보병이라는 점. 이래서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요택을 건너다가 병력을 망실이라도 한 걸까요?”

“설마 그렇게 안일했을 리가.”

남로를 통해 요택을 건너는 게 아무리 힘들어도, 거긴 원래 요동군이 이용하던 길 아닌가.

알아서 조치를 취했을 거다.

“허면... 우리가 모르는 거대 몽골부락이 또 있던 걸까요?”

“글쎄...”

김을화는 그것까진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선군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흥안령을 샅샅이 뒤지고 다니긴 했지만, 요동군 진공로에 속해 있는 남쪽까지 가진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요동군이 몽골부락 사정은 더 잘 알 것 아닌가.

알아서 준비해왔을 텐데...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병력을 날려먹었을까.

그런 의문을 숨기지 못하고 있자, 요동군 사령관인 고준이 황급히 달려왔다.

장군기를 옆에 끼고, 장군처럼 보이는 이들이 대놓고 구경하고 있는데 못 알아볼 리가 있나.

“사령관님.”

“오느라 고생 많았소.”

고준과 김을화, 황보인은 서로 예를 취하며 인사를 나눴다.

고준은 명나라의 요동도사였던 양문의 부하이자 심복이었고, 시간이 흘러 대를 이어 그의 아들인 양곤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 옛날 청년 시절엔 정난의 변에 참전했던 백전노장이자, 지금은 이른바 심양파의 핵심인물 중에 한명이지.

허나 나름 잔뼈가 굵은 인물임에도, 두 사람을 깍듯하게 대했다.

요동은 옛 명나라가 아니고, 조선 또한 명에 눌려 살던 조선이 아니지 않나.

세상이 바뀌었으니, 제 아무리 요동의 사령관이라고 한들 김을화에게 하대할 처지가 못 됐다.

또한 이미 요동에서 연회를 통해 안면을 익히기도 했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요동군 때문에 일이 지체됐으니, 고준이 무슨 할 말이 있을까.

타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서, 그는 자존심을 굽히고 저자세를 고수했다.

“오면서 큰일이라도 있었소?”

김을화가 “그 많던 병력은 다 어디가고, 이거 밖에 없냐?”라고, 차마 묻지 못하고 돌려 말하자.

그는 놀람과 반가움, 그리고 멋쩍음이 모두 섞인 얼굴을 하고서 급히 움직였다.

둘을 앞세워 지휘막사로 향했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북평부의 움직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병력 일부를 회군시켰습니다.”

고준은 빠르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선 원정군에 미리 알리지 못한 건, 단순한 이유였다.

그냥 조선군의 진격이 요동군보다 몇 배는 빨랐기 때문.

병력을 회군시켰을 땐, 이미 조선군 사령부는 파림좌기를 지나 칼간으로 떠났다. 그 사실을 알고 다시 사람을 보냈을 땐, 칼간을 접수한 상태였지.

해서 이렇게 부랴부랴 일단 달려온 거고.

“회군이라... 설마!”

김을화는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요동군이 회군할 만한 상황은 북평부가 움직이는 경우 말고는 없지 않나.

요동 동쪽 여진족의 동태는 조선이 강제하고 있을 테니, 그들이 요동을 노리진 못할 테니까.

“북평부요?”

“그렇습니다. 산해관과 직고(천진)의 수군이 움직여 광녕위와 금주위를 압박했습니다.”

“음...”

“흐음.”

고준의 말에 김을화와 황보인은 슬쩍 눈을 맞추고선,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직고는 영락제 때에 천진으로 개명되는 곳으로, 수나라 때 대운하가 연결되면서 지금까지 쭉 발전해 왔던 곳이다.

원나라 땐 대도의 항구이자 입구가 되었고, 연왕이 북평을 다스릴 때도, 그리고 북평부가 북직례를 다스리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해왔지.

특히나 동,남,북으로 압박받는 북평부는 밖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항구가 필요했고, 직고를 보다 확장해서 군항으로 만들었다.

그곳의 수군이 움직여 요동반도 끝 금주위를 압박하니, 목숨줄이 잡힌 요동이 발작을 일으킬 수밖에.

“해서 발이 빠른 기병을 회군시켜 광녕위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김을화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북평부의 움직임이 늦게 알려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육지로 이어지는 유일한 교두보인 요서회랑을 두고, 산해관과 광녕위의 정찰기병은 하루가 멀다하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지 않나.

원수지간인 요동과 북평부는 직접적인 통교가 없다.

북평부의 소식을 들으려면 산서상인을 통해 건너건너 입수해야하니, 뒤늦게야 알게 된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더 가용할 병력이 있습니까?”

황보인의 미심쩍은 물음에, 고준은 드디어 면이 생겼다는 듯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거용관의 병력을 추가로 빼낸 모양입니다.”

“허!”

“그런...!”

김을화와 황보인은 화들짝 놀라며, 이걸 좋아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애매해졌다.

‘우리의 병력도 줄었지만, 적의 병력도 줄었구나.’

둘은 똑같이 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눈이 마주쳤다.

요동, 우량카이 3위, 조선의 전쟁준비는 파다하게 소문났고, 북평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이 놈들이 뭐하나?’하고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지들끼리 싸운다는 건 역시 헛소문이었고, 오히려 힘을 합쳐 북원잔당을 치기 시작했지.

북평부는 요동이 설치는 꼴을 참지 못했고, 당연히 훼방 놓을 심산이었지.

하지만 산해관과 광녕위, 직고와 금주위는 서로 병력균형을 맞춰, 지금껏 대치해 오지 않았나.

이미 거용관에서 병력을 빼서 산동을 압박하는 중이고, 이에 맞춰 산동 또한 병력을 북진시켜 대치하고 있는 상황.

더 이상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없으니, 이번에도 또 거용관에서 병력을 빼서 직고로 보냈다.

이렇게 압박만 해줘도, 이미 한계치까지 뽑아낸 요동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릴 게 분명.

원정이 실패하든, 요동반도가 타격받든, 뭐가 됐든 이득이라고 생각한 거지.

“북원잔당이 섬서로 쳐들어갔으니, 북방이 위험할거라고는 생각도 안하는 모양이군요.”

“그렇지요. 북원잔당이 무슨 수로 거용관을 넘겠습니까.”

거용관이 괜히 천하제일웅관이겠나.

북원잔당이 노릴 수 있으면, 이미 진작 무너졌을 거다.

“허면 우리의 움직임은...?”

“당연히 모르지 않겠습니까. 요동에 있는 산서상인 출신의 첩자가 있을지 모르나, 그들이 우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는 건... 쉽지 않지요.”

“음...”

요동을 통해 조선으로 끊임없이 포로와 가축이 옮겨지고 있는 건 알겠지만, 정확히 뭐하는지는 모를 거다.

특히나 칼간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어갈 때쯤엔, 이미 거용관을 치고 있겠지.

“우리에겐 그리 나쁘지 않군요.”

“예. 그렇습니다.”

약조와 달리 병력이 줄어든 걸, 조선군이 물고 늘어지지 않아서 일까?

고준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음...”

“흠.”

“...”

셋은 나지막하게 신음을 흘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이 변수가 과연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지 예상해 봤다.

잠시 후. 이 잠시간의 미묘한 침묵을 깨고, 고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 괜찮은데, 살짝 걸리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헌데... 오면서 몽골기병을 봤습니다.”

“오란찰포의 바투한, 호화호특(후흐허트)의 가로한(가루탄), 홍격이소목(홍고르솜)의 호부패(후부타이)가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음...!”

고준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덜컥 흘러나왔다.

비록 만명의 병력을 뽑아내진 못하지만 어찌됐건 만호장에 임명되었던 이들이니, 초원의 패권에 도전할 능력이 되는 이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맞붙어 본 적은 없지만, 고준조차 이름은 여러번 들어봤다.

흥안령 너머의 동쪽까지 흘러들어온 몽골부락 중에선, 이들에게 두들겨 맞고 도망친 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들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안 믿습니다.”

황보인은 피식 웃으며 단호하게 답을 했다.

서로가 서로를 못 믿는 건 당연한 일.

다만 만호장이라 해도, 까불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조선,요동의 연합군은 무려 거용관을 박살내러 왔는데, 미쳤다고 몽골부락이 덤비겠는가.

그냥 곁에 붙어 있다가, 콩고물이나 주워 먹으면 그만이지.

“허면 그들은 공성전에 도움이 안 될 텐데...”

“하다못해 잡부로라도 써먹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거용관의 병사들은 몽골기병을 보면 사기가 죽을 테니, 나쁠 건 없을 겁니다.”

“예...”

비록 알려주진 않았지만... 조선군이 분명 뭔가 준비한 게 있는 걸 알아차리고, 고준은 냉큼 고개를 숙였다.

“행군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오늘 하루는 푹 쉬시지요. 내일 바로 거용관으로 갈 겁니다.”

“예. 배려에 감사합니다.”

작전계획이 틀어졌음에도 신경질을 부리지 않는 김을화와 황보인을 보며, 고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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