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14화 (114/538)

114. 챕터20. 부서지다 (4)

칼간의 의용병, 파림좌기에서 온 보조군이 합쳐진 조선군 팔천, 조선에 복속한 몽골의용병 일천, 요동군 칠천, 만호장 몽골군 선발대 일천.

총 만칠천여명의 군대는 칼간에서 거용관까지 이어지는 양하강을 따라서 빠르게 남하했다.

원래 역사에선, 명이 건재해 칼간과 거용관을 잇고, 칼간을 중심으로 만리장성의 외장성이 보수되어 이어지지만... 지금 역사에선 전부 없던 일이 됐다.

명이 망한 후에 칼간이 제대로 크기 전까지, 칼간과 거용관 사이의 지역은 항상 말발굽에 밟히던 지역이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역사에 남지도 않을 작은 마을만 있었고, 이 또한 조선군이 휩쓸어 칼간으로 전부 끌고 갔다.

원래 역사에서라면, 앞으로 몇십년 후. 이곳에서 토목의 변이 벌어지지만... 지금 역사에선 꿈도 못 꿀 일이지.

과거 명나라 군과 북원잔당이 박살내 놓은 선화성, 토목보, 회래성 등을 지나 드디어 연산산맥에 발을 디뎠다.

21세기엔 유명한 관광명소가 될 팔달령 장성은, 지금 시대엔 완성이 안 되어 있었다.

그저 옛 시절의 장성이 산능선을 따라 어설프게 늘어서 있었는데... 군데군데 구멍 나고 뜯어진 모양새다.

멀리서 산 위를 올려 봐도, 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는 곳이 한둘이 아니었다.

“장성을 제대로 보수하지 못했군.”

“북평부는 거용관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음...”

박강과 장구보의 아들 장영은 황보인의 말을 재깍 이어 받았다.

칼간에서 나고 자란 2세대들은 칼간의 입지에 맞춰 기질도 바뀌었는지, 유목민과 정주민의 성향이 뒤섞여 꽤나 개방적인 녀석들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는데, 조선군을 원망하고 분노를 품어봐야 달라질 게 있겠는가.

그럴 바엔, 이참에 제대로 협력해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게 이득.

또 아직 나이가 어린 녀석들이니, 온갖 맹수갑옷을 뒤집어 쓴 조선군을 살짝 선망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지.

이들은 길잡이 역할을 자처하며 원정군을 안내했고, 지금까진 꽤나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정찰도 나오지 않는 건가?”

“예. 칼간에 와서 세금을 걷어갈 때 빼곤, 문을 꽉 틀어막고 있었습니다.”

장영은 그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부드득 이를 갈았다.

북원잔당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거용관에선 병사를 파견해 일년에 두 번씩 칼간을 뜯어먹었다.

허나 북평부에 대항할 수 없으니 어쩌겠나. 참고 당해줄 수밖에. 괜히 칼간 주민들이 북평부를 싫어하는 게 아니지.

‘지금은 더욱 그렇겠군.’

황보인은 속으로 생각을 이어갔다.

거용관에선 이미 두 번이나 병력을 빼냈으니, 수비 병력이 현저히 줄어들었을 게 분명.

그저 문을 꽁꽁 닫고서, 별일 없는 척 연기하는 게 최선일 거다.

원정군의 앞을 가로 막은 건, 말 그대로 첩첩산중.

길고 긴 산맥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어서,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에서 끝나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겹겹이 겹쳐 있는 산능선을 뚫고, 능선과 능선이 맞물리는 협곡을 따라, 원정군은 꾸불꾸불한 산길을 뚫고 나아갔다.

허나 산길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폭이 넓고 정돈되어서, 옆에 절벽처럼 솟아 있는 산세만 아니라면 대로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중국 하북지역. 북평이 있는 북직례는 북쪽의 연산산맥, 서쪽의 태행산맥으로 막혀 있었다.

고래로부터 북방민족은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위해선, 이 산맥을 지나야 했지.

반대로 중국은 여기에 만리장성을 쌓아 막았고.

워낙 넓은 산맥이니 당연히 샛길이 있겠지만, 수만의 대군이 이동하고 숙영할 만한 지형은 정해져 있지 않나.

중국은 그런 요충지마다 곳곳에 관문을 세워, 중국 내지로 들어오는 걸 막았다.

원정군이 향하는 거용관이 그 대표관문 중 하나.

관문이라고 해서 단순히 성벽을 쌓고 협곡을 틀어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하나의 거대한 성채이자 도시나 마찬가지다.

“과연...”

“오...”

“저게 바로 천하제일웅관.”

칼간 출신을 제외하고, 거용관을 처음 본 이들은 하나같이 감탄성을 내뱉었다.

산세를 끼고 거암괴석처럼 굳건하게 박혀 있는 웅장한 성채. 과연 천하제일웅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움푹 파인 협곡에는 관문도시가 위치했고, 가파르게 치솟은 산세를 따라 성벽이 타원을 그리며 능선을 따라 세워져 있었다.

여긴 그래도 성벽 상태가 양호한지, 아래서 올려다보자 푸른 숲 위에 황토와 회색빛으로 머리를 덧칠한 것처럼 보였다.

“쉽지 않겠군.”

“예. 아무래도...”

김을화와 황보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있자, 요동군 사령관인 고준이 다가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숙영준비부터 하고... 진채부터 만들지요.”

“예.”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원정군은 바쁘게 움직였다.

거용관을 바로 앞에 마주하고, 살짝 떨어진 곳에 숙영진지를 건설.

대로 옆에는 울창한 삼림이 가득했지만, 그나마 경사가 완만한 지점과 식수원을 찾아 숙영진지를 물색했고.

수만명의 병사들은 곧장 나무꾼으로 변신해서 벌목을 시작했다.

자르고 남은 나무는 대로로 가져와 목책을 만들고, 혹은 남는 나무는 얼기설기 엮어 통나무집을 완성.

공성전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맨땅에서 막사만 펼쳐놓고 사는 것보단, 어설픈 나무집이라도 있는 게 낫잖아?

진액에 묻어나는 생나무는 망루와 막사, 목책으로 변해 작은 마을로 탈바꿈했고, 그 안에 게르가 곳곳에 박혀 있으니... 뭔가 굉장히 이질적인 숙영진지가 만들어졌다.

뭔가 특이한 조선식 숙영진지가, 요동군과 칼간 출신, 몽골인에게 어색하긴 했지만... 어쩌겠나.

다르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다들 ‘이렇게 만드는 이유가 있겠지? 헛고생 하는 건 아니겠지?’ 라는 의문을 품고서, 열심히 손을 놀렸다.

숙영지를 만드는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조심스럽게 거용관으로 다가갔다.

이들은 벌목해 온 목재로 화포의 사정거리 밖에서부터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고, 파서 나온 흙을 쌓아 올려 어설픈 방벽과 포대를 만들었다.

“화기대장.”

“오셨습니까.”

화기대를 담당하는 최해산.

그는 포대진지를 살피러 온 황보인과 일행을 반갑게 맞이했다.

최해산은 호주에 있을 때부터 연오랑에게 야전화포의 운영방법과 야전축성에 대해서 배웠는데, 그 기나긴 갈굼의 결과를 드디어 보여줄 때가 되지 않았는가.

흡사 어린아이마냥, 황보인에게 히죽 웃으며 다가갔다.

꼭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이다.

“오...”

반대로 이런 조선군의 공성방식은 처음 봐서 일까?

황보인과 함께 온 고준은 차마 물어보진 못하고 연신 감탄과 의문만 흘려댔다.

특별한 건 없어 보이지만... 뭔가 확실히 요동군의 방식과 다르다.

‘저건 포대를 만드는 건가? 아니면 적 포격을 막으려고 하는 건가?’

고준은 이곳저곳에 무덤처럼 쌓여 있는 흙무더기를 보며 연신 머리를 굴렸다.

이런 사소한 차이가 결과의 차이를 크게 벌리지 않나.

비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지만, 군사기밀을 알려줄 것 같진 않아서, 그저 눈을 굴리며 눈치만 봤다.

고준 옆에 있던 노장도 마찬가지.

요동군에서 화포를 담당했던 화포장인 마윤철 또한 눈을 번뜩이며 하나라도 더 알아내려고 눈알을 굴려댔다.

그런 둘을 방해하는 질문이 날아왔다.

“장군. 거용관에 화포가 얼마나 있는지 아십니까?”

“음...”

고준은 힐끔 마윤철에게 시선을 돌렸고, 그는 최해산과 황보인을 보며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아무리 못해도 100문은 있을 겁니다.”

“흐음...”

“음...”

최해산과 황보인은 둘 다 곰곰이 생각에 빠져 들어갔다.

화기와 화포가 발명되고 발달하면서, 가장 먼저 쓰이기 시작한 곳은 다름 아닌 수성전이다.

기존의 공성방법은 운제와 같은 사다리차를 이용해 성벽을 넘는 방법. 충차를 이용해 성문을 부수는 방법. 원거리에서 투석기로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 땅굴을 파서 들어가는 방법 등이 있었다.

그 외에 이런저런 심리전술, 지형지물을 이용한 화공이나 수공 등이 있지만 이건 예외적이고 변칙적인 방법이지.

그리고 이 모든 공성공격에 대응하고, 확실한 역공을 가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화포다.

화포만 있으면 공성무기를 손쉽게 무력화 시킬 수 있고, 반대로 공성 측 또한 화포를 이용하면 그나마 손쉽게 성채를 공략할 수 있었지.

원나라 시절의 화약무기는 원말명초 시절에 빠르게 발전했고, 명의 화기기술은 곧 고려에도 전해졌다.

고려는 왜구를 상대하면서 화기의 유용성을 깨닫고, 조선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개량을 거듭해 왔다.

적어도 지금 시대에는 중국과 조선 모두 화포에는 나름 전문가인 셈이지.

“북평부의 화포가 꽤 대단하다지요?”

“예... 아무래도.”

뭔가 치부를 찔려서 그런 걸까?

고준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수도 없이 북평부와 국지전을 벌였던 요동군인 만큼. 북평부의 화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누구보다 두려워했으니까.

중국은 워낙 크고 난립하는 세력이 많으니, 어디에서 누군가 화기를 개량하고 발전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자타공인 최고의 화포를 가지고 있는 곳은 북평부였다.

북평부의 전신은 연왕부고, 연왕부는 명나라의 북방을 책임지며 북원잔당 및 기타 여러 유목민족과 대립했다.

이후 건문제가 등극하고 칼바람이 불자, 연왕부는 비밀리에 군수물자와 화약병기를 축적.

이후 정난의 변이 벌어지자, 지금껏 모아왔던 역량을 모조리 쏟아 부었다.

즉.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오래전부터 화기개량 및 생산의 기반이 깔려 있던 거지.

허나 운석핵꿀밤으로 중국이 사분오열되자 문제가 터졌다.

내전을 끝낸 북평부가 홀로 독주하자, 산동과 사이가 불편해져서 초석의 수급이 끊어졌다.

사천의 초석광산은 이미 사천군벌 간의 싸움으로 하루가 멀다하고 주인이 바뀌고 있고, 섬서의 초석광산은 오이라트와 북원잔당의 침입으로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화약을 자급해야할 상황에 처한 거지.

문제는 또 있다.

북평부는 예전 명나라가 아니다.

하북 지역인 북직례만 차지하고 있으니, 전처럼 막대한 양의 인력, 재원, 물자를 쏟아 부어서 물량으로 해결할 수 없다.

허면 당연히 양보다 질을 택할 수밖에.

어찌 보면 조선과 사정이 비슷한데... 다른 점이라면 조선은 군비 및 화기발달이 우선순위에서 조금 밀려나 있다면, 북평부는 최우선 순위라는 점이다.

온 사방에 적과 먹잇감이 깔려 있으니, 북평부는 무리를 해서라도 군비를 증강시키고 화약제조와 화포 개량에 온 역량을 쏟아 부었지.

그 결과가 바로 이것으로, 북평부의 화포와 화약제조기술은 중국 최고 수준이었다.

‘우리보다 나을까?’

‘...?’

설명을 듣던 최해산과 황보인은 서로 눈이 마주치자, 같은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지금껏 조선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연오랑이 개입하면서 시대를 초월하는 개념과 발달을 접하지 않았나.

화약제조청과 군기감이 확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비록 화약제조기술과 화포제조기술은 동시대에 머물고 있지만... 화기의 운용방식과 세부적인 개념은 시대를 뛰어넘었다.

‘결국 맞붙어봐야 알겠군.’

‘야전이 아닌 공성이니, 준비한 물건이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지는... 봐야 알겠구나.’

“일단 계속 준비를 하지요.”

“예. 헌데...”

고준이 말을 흐리자, 황보인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어지는 말을 종용했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면 북평에서 지원이 오지 않겠습니까?”

고준은 저 멀리.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거용관 성문 망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대놓고 거용관 코앞까지 다가와서 공성준비를 하고 있는데, 거용관에서 모를 리가 있나.

당연히 북평에 알렸을 거고, 회색성벽 안쪽은 난리가 났을 거다.

“원정군 일부가 장성을 넘어갔으니, 그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아...!”

고준은 벌써 별동대가 장성을 넘었다는 말에 눈이 번뜩 뜨였다.

안 그래도 조선군 숫자가 적어서 의문스러웠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허나 대군이 장성을 넘어가는 게 쉽진 않을 텐데...”

혹시나 별동대 몇을 보내놓고, 이렇게 천하태평인가 싶어서 한마디 덧붙여 보지만...

“기병 오천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우린 오롯이 거용관을 무너뜨리는 것만 집중하면 됩니다.”

“...!”

“헙!”

이어지는 황보인의 대답에, 고준은 물론이고 마윤철 또한 기겁해서 헛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나?’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기병오천으로 장성을 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대체 언제 출발했단 말인가? 그 준비는 또 언제 다 하고?

‘조선이 정말 단단히 마음을 먹었구나. 허나... 마냥 좋진 않구나.’

고준은 슬그머니 밀려오는 먹구름에,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이번 원정에선 조선이 강맹할수록 든든하지만... 조선은 요동이 아니지 않나.

이렇게 은밀하고 매섭게 날뛰는 조선의 칼이 만약 요동으로 향한다면... 그 땐 정말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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