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15화 (115/538)

115. 챕터20. 부서지다 (5)

태행산맥과 연산산맥은 너무 거대하다.

대군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 아니더라도, 좁은 산길은 수도 없이 많았다.

원래 역사에서의 명나라조차 만리장성을 세워놓고도, 너무 길어서 다 수비하지 못하고 곳곳에 망루와 봉화를 세워 거점만 지켰었지.

허나 지금은 옛 성벽의 터만 남아 있는 곳이 부지기수였기에, 애초에 산맥을 넘어오는 걸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산길을 애용하던 이들은 다름 아닌 상인들.

칼간상인들과 북직례의 상인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밀수통로를 만들어 애용해 왔지.

특히나 거용관에 시도 때도 없이 뜯기던 칼간 상인은 더욱더 그러했다.

칼간 상인이 팔 물건은 당연히 가죽, 말, 가축 등의 유목민 특산품 아니겠나.

이걸 끌고 다니려면, 도보로 이동하는 좁고 험난한 길은 애초에 이용할 수가 없었지.

원정군 본대가 한창 칼간의 뒤처리에 열중할 때.

연오랑이 이끄는 5개의 연대는 조선에서 산을 타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동.

칼간 상인만 아는 밀수로를 따라, 거용관에서 떨어진 산능선을 타고 이리저리 빙돌아서 북직례로 진입.

순식간에 몰아쳐서, 연산산맥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이름 모를 마을을 점령하고 눌러 앉았다.

“음...”

“걱정되는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 본대는 어디쯤 왔을까 싶어서 말이야. 지금쯤이면 정리를 끝마쳤겠지? 요동군도 왔을 테고.”

“예. 아마도...”

연오랑은 마을에서 주워온 나무 탁자에 어설픈 지도를 펼쳐놓고서, 곰곰이 생각을 이어갔다.

'이제부턴 시간 싸움이군.'

본대가 거용관을 치기전에, 먼저 후방을 정리해 놔야 공성이 순조롭게 진행될 테니까.

“마을 주민은? 다 생포했나?”

“예.”

“사상자나? 반항하는 이들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기사대장 한선후는 히죽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반항도 상황을 봐가면서 해야 하는 법.

정체를 알 수도 없는 기병 오천이 몰려왔는데, 고작해야 오백여명도 안 되는 마을주민들이 무슨 수로 반항하겠는가.

굳이 본보기로 피를 볼 것도 없이, 전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고 있었다.

“지금 바로 이주 작업을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

“예.”

“알겠지만, 여기선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다. 반항하는 이는 본보기 삼아서 처리하도록. 앞으로 만날 이들은 그간 상대했던 몽골인이나 어중이 떠중이들이 아니라는 걸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기사대장 한선후는 각을 맞춰 경례를 하고선, 곧장 자리를 비켜줬다.

그간 털러온 몽골부락과 칼간에는 말이 넘쳐났고, 원정군은 예비마를 제외하고도 각자 말 2,3필씩은 더 끌고 왔다.

얘들 먹이려고 준비한 건초가 미친 듯이 사라지는 탓에, 원정군 또한 미친 듯이 산을 타넘어야 했지.

아무튼 이렇듯 준비를 해놨으니, 마을 주민들을 장성 밖으로 끌고 가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뭐... 지금 당장은 손발이 묶여서 포로취급을 당하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잖아? 수레와 말에 실려서 가는 거니, 힘들지도 않을 거고.

“정호. 주변 정찰은?”

“칼간 상인과 함께 돌고 있습니다. 인근에 마을이 3개. 그리고 남구 인근에는 총 11개의 마을이 있다고 하더군요. 허나...”

“그래. 산을 내려가면 들킬 수밖에 없겠지.”

특전대장 이정호의 말을 받으며, 연오랑은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애매하네.’

상인들의 정보를 취합해 만든 어설픈 지도 위에, 주워온 돌멩이로 이리저리 집어봤다.

하지만 아무리 돌멩이를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일거에 쓸어버리기엔 동선이 안 나온다.

나아가 쓸어버린다 한들, 소식이 퍼지는 건 너무 뻔한 일 아닌가.

‘결국 여기부터 처리해야 되나.’

지도를 헤매던 연오랑의 손가락은 결국 연산산맥 끝자락에 닿고 말았다.

거용관은 태행산맥과 연산산맥 사이에 위치했고, 북에서 남으로 이어지는 협곡 중앙에 틀어박혀 있었다.

저런 거대한 군사요새이자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선 후방에서 끊임없이 보급을 해줘야 하지.

그 역할을 맡고 있는 지역을 남구라 불렀고, 이 남구의 중심이며 산맥의 입구이자 출구에 붙어 있는 성이 보권성이다.

‘여길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곤란하겠는데...’

인근 3개의 마을은 산맥에 붙어서 사는 마을답게 칼간과 북직례의 밀수상인과 관련 있고, 약초나 화전을 일궈서 사는 이들이니 조선군에 쉽게 항복했지만...

남구의 평야지대에 위치한 11개 마을은 거용관과 보권성을 지탱해 주는 곳이니, 지금처럼 쉽고 편하게 처리하진 못할 거다.

이들의 항전의지를 꺾어버리고, 거용관에서 보낼 연락병을 처리하려면 역시 보권성을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고 잠시 기다리고 있자, 주변을 살피던 연대장들이 속속 되돌아왔다.

이번 작전에는 2연대장 유은지, 3연대의 이순몽, 4연대의 조비형, 5연대의 하경복이 함께했다.

다들 야전과 기병전술에 능한 이들이지.

하지만... 이놈들 성격이 하나같이 괄괄해서, 연오랑은 항상 매의 눈을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기존 조선군에서 그랬던 것처럼, 술 처먹고 폭급하게 굴다가 기강이 흐트러지면 곤란해지니까.

“장성을 넘었는데, 얘들 상태는 어때?”

“다들 괜찮습니다. 이번 대업에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가문의 영광은 무슨...”

연오랑은 눈을 흘겼고 이순몽과 유은지는 ‘또 뭘 잘못했나?’하는 생각이 들어, 냉큼 차렷 자세를 하며 각을 맞췄다.

무인이 술 먹고 사고치는 걸. 호방, 호탕하다고 여기는 시대 아닌가.

연오랑과 연오랑이 꿈꾸는 신식군대인 착호군에 어울리지 않았고, 아니나 다를까 체벌과 구타를 없앤 신군율에 가장 적응하지 못했던 장군이 이 두 사람이다.

해서 연오랑은 호주에서부터 쥐 잡듯이 족쳐서 정신교육을 시켰는데, 다행이 아직 군기가 빠지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북평부를 공략하는 데 문제는 없단 말이군?”

“예. 전조를 통틀어 중국 본토를 직접 공격하는 건 저희가 처음 아니겠습니까? 사서에 남을 대업에 동참했는데, 거부할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순몽은 능구렁이마냥 연오랑의 비위를 맞추며, 조용히 하지만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음...”

‘다행이군.’

혹시나 중국 본토를 공격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나 했는데, 그렇진 않은 모양이다.

‘역시... 확실히 바뀌긴 바뀐 모양이야.’

원래 역사에선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니, 연오랑은 속으로 히죽 미소를 숨겼다.

원정군 대다수는 일반 백성이 아니고, 하나같이 나름 잘나가는 집안에서 유학을 배운 자제들 아닌가.

그런 이들이 중국과 한판 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다는 건, 중화사상이나 사대주의, 중국이 주도하는 천조질서에 딱히 구속되지 않는다는 뜻.

조선의 자주화라는 게, 이런 식으로도 발현되는 모양이다.

‘계획대로 잘 되겠군.’

연오랑은 지금쯤이면 승전보를 받고, 시원하게 웃고 있을 세종과 태종을 떠올리며 다시금 히죽 웃었다.

조선이 이번 원정을 결정한 건, 따지고 보면 간단한 이유였다.

연오랑, 세종, 태종은 이미 개혁 아닌 개혁 작업에 돌입했고,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선의 내정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세종은 과전을 정리하고, 삼남지방에 이앙법을 보급하고, 양전 사업을 진행해서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을 밟아버릴 시간이 필요했다.

태종은 착호군을 통해 조선내지의 맹수4종세트를 몰살시키고, 야생의 미개척지를 사람의 터전으로 만들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외부로 확장하지 않더라도, 조선내부에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연오랑은 조선이 유학의 나라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아무튼 원래 역사와 다른 조선으로 나아갈 토대를 다시 쌓으려 했지.

그가 괜히 십만에 가까운 외국인 포로를 온전히 잡아서, 조선에 쑤셔 넣는 게 아니지.

아무튼 이런 속내는 둘째치고라도, 조정의 신료들은 중국이 찢어진 지금 상황을 나름 흡족해 했다.

내부에선 시끌시끌하지만, 어찌됐건 예전에 명나라가 지랄하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헌데 북평부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눈에 거슬렸다.

다른 지역은 아직 지역예선조차 끝내지 못하고 따로 놀고 있는데, 오래전에 내전으로 지역예선을 끝마치고 홀로 독주하는 세력이 북평부다.

물론 요동도 통합되어 있지만, 요동의 인구는 아무리 긁어모아봐야 오십만을 조금 웃도는 수준밖에 안 된다.

하지만 북평부는 아무리 못 잡아도 요동의 네다섯배는 되지 않나.

지역예선을 끝내고 중국통일이라는 전국예선으로 발을 뻗으려는 북평부는 조선 입장에선 우환거리지.

나아가 누구도 모르겠지만... 연오랑은 언제가 됐건 조선이 만주를 집어삼킬 계획을 세워놨는데, 요동의 바로 코앞에 강맹한 북평부가 존재하는 건 피곤한 일이지.

해서 이번 기회를 통해 북평부의 힘을 확 줄이고, 앞으로도 계속 될 우환거리를 만들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바로 거용관을 무너뜨리는 일.

언제가 됐건 북원잔당은 다시 초원에서 힘을 키울 거고, 거용관이 뚫린 이상 북평부는 계속해서 말발굽에 시달리게 될 테니까.

그렇게 북평부가 발버둥치면 칠수록, 함께 엮여 있는 요동과 산동 또한 정세가 어지러워질 터... 시간을 벌고자 하는 조선에겐 나쁠 게 없잖아?

그래서 이 말도 안 되는 원정이 시작된 거지.

“좋아. 다른 특이사항은?”

“아직 정확히 확인된 건 아니지만... 취조 결과. 대병이 남하 했다고 합니다.”

“...?”

연오랑이 살짝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자, 2연대장 유은지가 재깍 입을 열었다.

연대장들은 마을을 정리하면서 남구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는데, 꽤 많은 이들이 거용관과 보권성에서 수비 병력이 빠져나와 북평으로 가는 걸 목격했다고 했다.

“거짓은 아니겠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취조는 각자 달리했던 거라서...”

유은지는 흡사 도움을 청하듯 주위를 둘러봤고, 3연대장 이순몽, 4연대장 조비형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각자가 따로 움직였는데, 같은 결과가 나왔으니까.

“어떻게 된 것 같아?”

“연합군의 움직임을 확인했을 테니, 요동을 견제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북평부 입장에선 이곳이 후방일 테니...”

연대장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내놨고... 다 취합해보면, “이곳의 병력을 빼서 동쪽으로 옮기지 않았을까?” 라는 결론이 나왔다.

남쪽의 산동, 동쪽의 요동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북쪽이 후방이 되었고, 북원잔당이 섬서로 떠난 이상 거용관이 공격당할 거리곤 생각도 못할 테니까.

“거용관에서 병력을 뺄 정도면, 자형관과 도마관에서도 병력을 뺐겠군?”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실 산서보다 북방이 더 위협적일 테니까요.”

“음...”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서쪽을 그려보며, 머리를 굴려봤다.

북직례의 머리에서부터 서쪽 옆구리를 따라서 태행산맥이 남쪽으로 이어지고, 태행산맥을 기준으로 산서와 산동, 산서와 북직례가 서쪽과 동쪽으로 나눠진다.

당연히 그곳에도 만리장성을 쌓고 요충지에 관문을 건설했지.

자형관과 도마관은 산서에서 북직례로 들어오는 관문이었고, 북쪽의 거용관까지 합쳐서 보통 내삼관이라 불렀다.

지금껏 산서와 북직례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으니, 당연히 산서 쪽 방비는 미비할 터... 남구를 중심으로 이곳. 북직례의 서북쪽지역은 무주공산이란 말씀.

“좋아. 산골 마을을 정리하고, 곧장 보권성으로 간다.”

“옙!”

“충성!”

연대장들은 힘차게 경례를 하고선 흩어졌다.

연오랑이 이끄는 별동대는 벼락처럼 움직였다.

북쪽에 연산산맥을 끼고 계속 서진.

밀수상인이 이용하던 마을 두 개를 마저 정리해서 칼간 출신 상인 편에 딸려 보냈고,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

저 멀리. 산맥 입구에 우두커니 홀로 서 있는 거성을, 산맥 그림자에 숨어 조용히 지켜봤다.

산골 마을을 마저 털면서 확인한 결과. 보권성과 거용관에서 병력이 빠져나간 건 확실해졌다.

그것도 거의 오천에 가까운 병력이 빠졌으니...

“보권성의 병력은 몇이나 남았을까?”

“대충... 전투병력은 일천에서 이천정도 되지 않겠습니까?”

“흐음.”

연오랑은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평지성을 보며, 머리를 열심히 굴려댔다.

확실히 이쪽은 전운의 분위기가 흐르지 않았다.

산골 마을 주민들의 반응으로 보아, 장성을 넘어 공격당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히 보권성의 경계도 삼엄하지 않을 터... 다만 화포도 가져오지 못했는데, 딱 봐도 더럽게 크고 튼튼해 보이는 성을 기병만으로 공략하는 건 지난한 일.

“쟤들. 공격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겠지?”

“거용관의 후방에 있으니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단이 났으면 거용관에서 먼저 연락이 오겠지요.”

“그럼...”

연오랑은 장군들에게 간단히 작전을 설명했고, 모두는 “이런 미친놈을 봤나?”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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