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16화 (116/538)

116. 챕터20. 부서지다 (6)

인공불빛에 오염되지 않은 15세기의 밤은 무척 어둡다.

말 그대로 달빛에 의지해서 움직여야 하는데, 달이 구름에 가릴 때마다 눈을 장막으로 가리는 것처럼 시야가 어두워졌다.

피아 구분을 하기도 힘든 상황에 야전을 벌이는 건 쉽지 않을 일이고, 말을 몰아 질주하는 건 더 미친 짓 아닌가.

땅의 굴곡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신나게 질주하다가 발목 부러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지.

해서 어둠에 파묻힌 채로, 기병연대는 산보하듯 느긋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죄다 말발굽에 천을 감싸고, 재갈에도 천을 감싸 소리를 죽였다.

사박사박 천이 짓이겨지는 소리만 나지막하게 퍼졌고, 그 또한 조심하며 살얼음판을 걷듯 천천히 보권성 인근으로 다가가 웅크렸다.

“하마!”

“하마!”

속삭이듯 들리는 소리가 어둠에 퍼져나갔고, 기병연대는 말에서 내려 말조차 조용히 꿇어앉혀 뉘었다.

배를 땅에 대고 눕는 게 익숙하지 않은 전마가 투레질하며 신경질을 부렸지만, 기병들은 연신 갈기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남은 건 이제 신호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일 뿐.

수천의 기병은 거친 숨소리를 애써 집어삼키며, 어둠에 파묻혀 회색거성을 바라봤다.

반대로 일단의 그림자는 산맥에서부터 이어지는 성벽을 끼고, 조심스럽게 성벽에 달라붙어 움직였다.

성벽의 높이는 대충 6~7미터 정도 됐는데, 보수를 여러번 한 탓에 회색빛 성벽에는 발받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움푹 파인 곳이 여기저기 존재했다.

성벽 위엔 여기저기에 화롯불이 피어올라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는데, 밝아진 시위를 뚫고 이따금씩 그림자가 스쳐지나갔다.

순찰병이 순찰을 도는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그림자가 사라지자마자 성벽에 붙어 있던 이들이 재깍 몸을 날렸다.

휭휭. 휙! 빙빙 돌리던 밧줄을 힘차게 성벽 위로 집어 던졌고, 가죽으로 꽁꽁 감싼 밧줄고리가 성벽의 요철에 걸렸다.

몇몇은 실패해서 땅으로 떨어지고, 또 몇몇은 성공해서 밧줄을 힘차게 잡아당겨 팽팽하게 고정.

“몇이냐?”

“열하나입니다.”

“좋아. 오른다.”

연오랑의 수신호에 연조운, 연전위, 연손찬은 각기 훈련대를 이끌고 밧줄 앞에 조용히 웅크리고 앉았다.

탁탁! 애초에 성벽을 타넘으려고 만든 밧줄이니 당연히 매듭이 촘촘히 매여 있었고, 강철장갑이 우드득 접혀지자 중력을 거슬러 몸이 떠올랐다.

연오랑은 날다람쥐로 변신해 재빨리 성벽을 기어올랐다.

연오랑의 작전은 간단했다.

그와 훈련대가 성벽을 몰래 타넘어서 성문을 열면, 기병연대가 들어와 공격한다.

이러니 연대장들이 기겁해서 미친놈 보듯 봤던 거지.

하지만 그는 나름 자신 있었다.

화살비만 안 맞으면, 이런 야심한 밤에 위험에 빠질 일이 있겠는가.

또한 훈련대원들은 눈먼 칼에 맞아 죽을 만큼, 어리숙한 이들이 아니다.

그는 “노련한 훈련관” 특성이 어느 범위까지 적용되는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별 수 있나. 착호군의 실력을 최대한 끌어 올려야 하니, 집체교육을 하면서 열심히 빨빨거리며 돌아다녔지.

분명 착호군 중에서도 적용받은 이들이 있고, 못 받은 이들이 있겠지만... 확실한 건 훈련대원들은 받았다는 거다.

훈련대원은 출신을 불문하고, 조선에서 나름 한칼 하는 이들이 모여 있지 않나. 심지어 오래전 대마도의 특전대에 속했던 녀석도 있었다.

이들은 연오랑의 직속제자 마냥 매일같이 붙어서 온갖 무기술을 전수받았고, 이들이 또 착호군을 훈련시켰다.

토관들이 훈련대를 보고서, 괜히 칼귀신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지.

그런 칼귀신들이 속속 성벽 위로 올라섰고, 웅크리고 앉은 연오랑은 재빠르게 수화를 날려 명을 내렸다.

연전위, 연조운, 연손찬은 각각 훈련대를 이끌고 성벽의 요철 그림자에 숨어 움직였고, 연오랑 또한 훈련대 일개 소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녀석들이 죽을 일은 없겠지?’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가볍게 날려 보냈다.

연오랑과 마찬가지로, 전설장수인 녀석들 아니냐.

궁병 수십이 일제히 조준사격을 하지 않는 이상, 눈먼 칼에 맞아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성벽을 여는 건 녀석들이 알아서 할 터.

그는 그을음을 묻혀 반사광을 죽인 장도를 빼들고 조용히 나아갔다.

한 마리의 도마뱀이 되어 발걸음 소리도 줄이고 이동.

“컥...”

성벽 모퉁이에 어슬렁거리는 그림자를 향해 비조처럼 몸을 날리고.

강력한 일격에 맞아, 쇄골과 목울대가 찢어진 병사가 피를 울컥 토해내며 쓰러졌다.

“무...”

동료의 피가 얼굴에 튀기자, 놀라서 기겁하는 병사 또한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빛살처럼 날아간 장도는 하늘로 치솟기 무섭게 떨어졌고, 단발마의 비명도 내지르지 못하고 또 다시 목덜미가 갈라졌다.

“갑옷을 제대로 안 입고 있네?”

“역시 거용관만 믿고 있나 봅니다.”

“하긴...”

연오랑의 뒤를 바짝 따라붙은 소대장이 재깍 말을 받았다.

천만다행으로 예상이 적중했다.

이쪽은 평시나 다름없으니, 순찰을 도는 병사들조차 흉갑만 입고 있었다.

“잘됐군. 가자.”

“예.”

죽은 병사를 성벽 그림자에 대충 앉혀서 숨기고, 연오랑 소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보권성은 일반적인 도성이 아닌 군사거점이자 보급창고의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남구 11개 마을에서 생산한 온갖 군수, 보급품이 보권성으로 모이고, 보권성은 그걸 분류, 정리해뒀다가 꾸준히 거용관에 전달했지.

해서 이곳엔 주둔군 막사 이외에도 창고건물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고, 연오랑은 창고건물이 있는 곳을 골라 계속해서 중심으로 나아갔다.

물론 지나가다 걸린 순찰병은 가차 없이 저세상으로 떠났지.

쉐엑! “큽.” “커억.”

연오랑뿐일까. 건물 벽 그림자에 숨어, 훈련대원들은 일제히 화살을 쏘아 2층 전각 귀퉁이에서 자고 있던 경계병을 처리했다.

‘이젠 다들 익숙해졌군.’

연오랑은 강철장갑을 낀 훈련대원이 능숙하게 활을 쏘는 걸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깍지를 이용하는 기존 조선사법은 강철장갑을 끼고 쓸 수가 없잖아? 해서 그냥 손가락으로 당겨서 쏘는, 양궁사법이라 불리는 지중해식 사법을 끌어왔지.

기존 사법에 비해서 낯설긴 하지만 뭐... 가까운 거리에서 대충 맞추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겠나.

어차피 훈련대에게 활은 보조무기니까.

‘저기군.’

소대원이 쓰러진 순찰병을 처리하는 동안, 연오랑은 여기저기에서 화롯불이 피어오르는 누각을 바라봤다.

보권성은 남구를 다스리는 성이니, 당연히 중심부엔 성주를 비롯한 고위무관, 북평부 소속 행정관료등이 살고 있었다.

지금 당장의 야습과 훗날을 생각하면, 얘들이 자고 있을 때 싹 쓸어버리는 게 최선.

“성주가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

“예. 칼간 상인이나 산골 마을 촌민도 여기까지 와 본적은 없어서...”

혹시나 소리칠까 싶어서 순찰병을 족치지도 않았는데, 일이 조금 귀찮게 됐다.

‘하지만... 뭐 어차피 다 처리할 거니까.’

“가자.”

“...”

연오랑은 냉큼 몸을 날려 앞으로 나아갔다.

내성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고, 그렇다고 장원의 담벼락이라고 하기엔 조금 높은 외벽으로 전진.

“...?”

“누구냐?”

내성문 앞에서 벽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경계병은, 그림자를 끼고 나타난 연오랑 소대의 등장에 목청을 높였다.

그림자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지, 이들이 적인지 동료인지도 모르는 모양새다.

“누...?”

모르면 일단 맞아야지.

성문 앞으로 나와 몸을 드러내자, 쉐엑! 모퉁이에 붙어 있던 훈련대원이 일제히 화살을 날려 경계병 둘을 쓰러뜨렸다.

“이제부턴 그냥 달린다. 앞을 막는 이들은 전부 처리한다.”

“예.”

모두는 조용히 답을 하고선, 활을 등에 걸치고 각자 독문무기를 꺼내들었다.

원래 역사의 무예도보통지가 나오려면 한참 남았고, 지금의 조선군은 전법훈련서는 있어도 개인무술서는 딱히 정해진 게 없었다.

허나 연오랑은 착호군을 창설하면서, 꾸준히 무예도감을 만들어 오지 않았나.

이건 그의 전공분야이니. 무기술 훈련법은 물론이고 생리학, 해부학, 재활운동법 등의 지식도 포함되어 있어서, 기존의 무술서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세종이 이걸 보고서, 괜히 무기술학 혹은 무술학문이라고 부른 게 아니지.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그간 조선에 없던 무기 및 기존 무기를 연오랑의 방식으로 표준규격화 하는 것에 대해서 아무도 군말하지 못했지.

하여튼 이 정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게 훈련대 아닌가.

이들은 장도와 월도, 대검, 방패와 환도를 꺼내들고, 정문을 열어 대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에 파묻힌 호랑이들이 성큼성큼 달려갔고.

밑도 끝도 없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당황하는 건 당연한 일.

횃불을 들고 근처를 돌던 순찰병은 호피갑옷을 뒤집어 쓴 이들을 보고, 기겁하며 소리치려는 찰나.

“뭐...!? 크억.”

“컥!”

다들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다말고 허물어졌다.

“부셔라!”

“옙!”

연오랑은 명을 내리기 무섭게, 앞에 있는 전각의 미닫이문을 박살내며 돌진.

소란스러움에 비몽사몽하며 잠에서 깬 이들은, 검은 칼날을 맞아 속절없이 쓰러졌다.

갑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있고, 뿌연 천옷을 입은 이들도 있고, 값비싼 비단옷을 입은 이들도 있었지만, 사이좋게 붉게 물들었다.

“여긴 어디냐?”

“자재를 정리하는 이들인가 봅니다.”

소대장은 피 묻은 종이를 살피더니, 조용히 답을 이었다.

대병이 빠져나가면서 후속처리를 해야 하니,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일을 하고 있던 모양인데... 안타깝게 됐다.

“가자.”

“옙!”

소대별로 찢어진 이들은 눈에 보이는 전각을 하나하나 점령하며, 안에 있는 이들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쓸어냈다.

이윽고 가까이 있던 3층 전각을 쓸어버린 후에, 연오랑과 소대원들은 곧장 내성의 중심부로 바삐 발을 옮겼다.

성주가 어디 있는지 모르니 별 수 있나.

가볍게 소란을 일으켰고, 보고하러 가는 병사를 찾아 뒤쫓을 수밖에.

그렇게 담벼락의 그림자에 숨어 피냄새를 풍기며 달리고 있자, 앞서서 미친 듯이 뛰어가든 병사가 요란하게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열심히 중국어를 익힌 보람이 있다.

병사가 뭐라고 하는지 또렷하게 들려왔다.

‘오? 성주는 아니지만 지휘동지라 이거지?’

북평부가 웃기는 놈들인 게, 명의 잔재를 치운다는 명분으로 연왕의 자식을 쓱싹해버렸으면서, 옛 명나라 관제는 그대로 쓰고 있었다.

옛 명나라 관직으로 보면, 지휘동지는 이곳 보권성의 2인자쯤 되는 인물.

“적이라고?”

“예.”

“누가 감히!”

지휘동지로 보이는 이가 발을 쿵쿵 구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그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일단의 호위병들이 움직이려는 찰나.

“...!”

호랑이들이 먼저 그들을 덮쳤다.

“합!”

연오랑은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전력질주를 하며 달려갔고, 소대원들 또한 마찬가지.

이들은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호위병을 거침없이 물어뜯었다.

스휙! 한칼 거리에 들어오기 무섭게, 연오랑은 발이 보이지도 않게 잔걸음을 치며 빠르게 전진.

캉캉! 호위병이 뽑아든 중국식 대도를 비틀어 흘려보냈고, 넓적한 칼날을 타고 그대로 들어가 호위의 손목을 날려버렸다.

“크억!” 퍽! 양 손목이 날아가 비명을 내지르는 호위의 안면을, 묵직한 도파로 찍어 코를 뭉개서 쓰러뜨렸다.

“...!”

흉흉한 눈빛으로 빠르게 훑어가자, 불꽃처럼 타오르는 연오랑의 안광과 마주친 호위들이 흠칫 몸을 떨며 잠깐 몸이 굳었다.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폭풍이 몰아쳤다.

“크억.” “컥.” “억...” 연오랑과 일부가 시선을 끈 사이에, 옆 전각을 끼고 돌아 후방을 점한 훈련대원들이 매섭게 몰아친 것.

월도의 날은 대도를 찍어 누르고 호위의 목을 갈라버렸고, 장도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대도를 휘감아 흘려서 팔뚝을 쪼갰고, 창날은 대도를 무시하고 날아들어 호위의 복부를 헤집어 놨다.

지휘동지를 감싸고 있던 보호벽이 한 꺼풀 벗겨지고, 푸핫! 연오랑은 쓰러지는 호위병을 밀어붙이며 장도를 매섭게 휘둘러댔다.

까닥까닥 움직이는 손목의 움직임에 장도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마냥 정신없이 흔들렸고, 호위병의 대도는 장도와 마주치지도 못하고 애꿎은 허공에 긴 궤적을 그리고 말았다.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매섭게 물어뜯었다.

번쩍. 호위병의 눈을 어지럽히던 검은 빛줄기가 일순간 사라지고, 호위병의 대도가 다시금 하늘로 살짝 떠올랐다가 떨어졌다.

“끄어...”

손목이 갈라지자 호위는 자기도 모르게 피를 막으며 허물어졌고, 연오랑은 강철군화로 호위의 얼굴을 걷어차며 지휘동지에게 돌진.

“허헙!”

“허헙은 무슨.”

연오랑은 옆에서 날아오는 창날을 아무렇지 않게 강철장갑으로 튕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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