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19화 (119/538)

119. 챕터21. 불태우다 (1)

“음...”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앳된 얼굴의 소년.

녀석은 검은 두정갑을 걸쳐 입었지만, 체구가 작은 탓에 꼭 어른 옷을 훔쳐 입은 아이처럼 보였다.

소년은 방금 끄집어내어 흙이 남아 있는 바위에 올라, 손 가리개로 햇빛을 가리며 저 밑에 있는 거용관 성벽을 굽어봤다.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손에 든 삼각자를 눈에 대고서 측량을 이어갈 때.

콰콰쾅! 저 멀리 거용관 성벽에서 굉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이쿠.”

“아이고. 도련님!”

헌데 다른 모두가 아무렇지 않아 하는데, 소년 주변에 있던 노복들이 연신 앓는 소리를 내뱉는 게 아닌가.

이들도 나름 무장을 하긴 했는데, 하는 꼴을 보니 착호군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영... 볼썽사나웠다.

“철환이 여기까지 날아올 리가 있나. 뭘 그렇게 겁먹고 있는 거야?”

소년은 괜히 부끄러워서 빽! 목청을 높였고, 야전화포를 방열하고 있던 화포병들이 그 모습을 보며 피식피식 웃음을 흘려댔다.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한편의 경극 같아 보여서다.

거용관에서 치솟았던 철환은 산중턱으로 오지도 못하고, 애꿎은 나무를 박살내며 산비탈에 우르르 틀어박히고 있었다.

소년 박강은 어려서부터 화포와 대장간일에 관심이 많았고, 착호군에 화기대가 편성되자 냉큼 몸을 날려 착호군으로 달려갔다.

약관이 되려면 한참 남았고, 나름 빵빵한 양반집 자제가 알아서 찾아왔고, 그것도 남들이 천시하는 대장간 일에 관심이 많다고? 태종과 연오랑 입장에선 꽤 신기한 녀석이었지.

더욱이 연오랑은 21세기의 기억 속에서 이 녀석의 정보를 찾아냈으니 반길 수밖에 없었다.

원래 역사에서 신기전을 만든 녀석이니까.

그런 만큼 특별 관리하며 키웠고, 지금은 나이를 뛰어넘어 어엿한 화기중대장 중 한명이 됐다.

물론 집안에선 녀석을 혼자 둘 수 없어서 건장한 노복들을 딸려 보냈고, 얘들은 괜히 보조군에 합류해서 팔자에도 없는 군생활을 하고 있었지.

“방열은 다 끝났습니까?”

“예. 저희 쪽은 끝마쳤습니다.”

“그럼 신호를 보내죠.”

박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화포병 중 한명이 어색하게 탁 트인 산비탈 한쪽에 서서 연신 깃발을 흔들어댔다.

반대편의 산중턱과 산아래에 있는 사령부에서 보이도록 열심히 흔들어댔다.

“거리가 애매하긴 한데... 일단 한번 쏴봅시다.”

“옙!”

박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산중턱을 깎아 만든 포대에 줄줄이 늘어서 있던 야전화포들.

이들은 거침없이 화염과 연기를 뿜어내며, 철령전을 날려 보냈다.

‘음... 각도를 더 높여야겠는데?’

박강은 연이어 하늘로 사라지는 나무화살과, 저 멀리 아른거리는 거용관의 포대를 굽어보며 머리를 굴려댔다.

이 시대의 화포는 최대 사거리가 1키로미터 정도. 유효사거리는 200~500미터 정도 밖에 안 됐다.

또한 평지에서 쏴대는 화포보다, 높은 성벽 위에서 쏴대는 북평부의 화포가 더 멀리 날아가는 게 인지상정.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군은 그냥 무식하게 산을 깎아 산중턱에 포진지를 만들었다.

요동군과 몽골군은 자기들이 깎아 만든 길에 제멋대로 이름을 붙였지만, 조선군은 그냥 간단하게 요동봉, 몽골봉이라 불렀고.

“어때 보입니까?”

“확실히 사거리가 닿지 않아서, 제대로 타격을 주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긴 한데...”

박강은 재깍 손을 놀려, 열심히 땅에 숫자와 글씨를 써가며 계산을 이어갔다.

거용관과의 거리가 있으니 정타로 맞추긴 힘들지만, 하늘로 치솟아 떨어지는 철령전이라면 충분히 타격을 주지 않을까?

철령전은 앞부분을 철판으로 감싼 거대한 나무화살.

이건 굳이 화약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하늘에서 떨어지면 뭐든지 박살내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성벽에 널려 있는 포대부터 한번 노려봅시다. 각도를 천천히 달리하면서 하나씩 쏴보죠.”

“알겠습니다!”

“옙!”

박강의 실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건, 부하들인 화포병이 더 잘 알지 않나.

다들 군말하지 않고 재깍 몸을 날렸다.

밤낮 없는 포격을 시작한지 벌써 삼일째.

이젠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다.

“음...”

“흠.”

최해산과 황보인은 얼얼한 귀를 매만지며, 저 멀리 보이는 거용관의 문루를 살펴봤다.

귀에 솜을 잔뜩 넣어도 굉음은 귀를 찔렀고, 한번 쏠 때마다 머리가 울려서 어지럽다.

고개를 슬쩍 들어 하늘을 살펴보니... 시야의 양측에 걸린 산중턱에선 화산이라도 폭발한 것 마냥 검은 연기가 계속해서 피어올랐다.

반대로 거용관 또한 검은 안개에 잠식된 것 마냥, 성벽의 모양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콰콰콰쾅! 이 기이한 광경을 뚫고 계속해서 폭음이 밀려왔고, 거용관에서 쏴대는 철환과 조선군이 쏴대는 철령전이 교차하며 눈앞의 전장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다만 거용관에서 쏴댄 포탄은 조선군 포대까지 날아오지 못하고, 대로의 공터를 굴러다니거나 흙무더기로 쌓아올린 흙벽에 박히기 일수.

반대로 산중턱의 조선군 포대에서 쏴대는 철령전은 긴 꼬리를 흔들며 마구잡이로 성벽을 향해 몸통박치기를 이어갔다.

저건 아무리 봐도 화포를 쏜다는 느낌보다, 철령전을 하늘로 날린다는 느낌이랄까?

과연 저걸로 성벽을 부술 수 있을지 솔직히 미심쩍었지만... 중요한 건, 성벽은 버티더라도 성벽 위의 포대가 하나둘씩 무너지고 있다는 거지.

콰쾅! 아니나 다를까. 열발 중 한발만 맞아도 이득인 철령전이, 거용관 포대 하나를 박살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성벽 귀퉁이가 무너지며 혈화가 확 피어났다가 사라지는 게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 때.

콰쾅! 흙무더기 뒤에서 불을 뿜은 거대한 화포가 굉음을 내질렀고.

쿠르릉...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함께, 저 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게 아닌가.

“오!”

“와아!!”

“무너진다!”

둘 뿐일까. 거용관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이들이 하나같이 환호성을 질러댔고, 산을 끼고 메아리가 퍼지면서 모두를 흥분시켰다.

드디어 성문 위에 3층으로 층층이 올려 있던 누각. 문루의 기둥들이 부러지고 부서졌다.

지진이라도 난 듯,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문루가 성벽 안쪽으로 무너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과연! 과연!”

“드디어...!”

화포병들은 자신이 쏴댔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서로 얼싸안고 환호를 내질렀고, 최해산과 황보인 또한 놀라서 발을 동동 굴렀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충분히 거용관 성벽도 부술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하!”

최해산은 열기가 풀풀 올라오는 거대한 화포를 보며, 연신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기존 조선화포는 개별 장인이 만드는 수공예품에 가까웠기에, 세부 수치가 은근히 제각각이었다.

세종은 화약제조청과 군기감을 대대적으로 확장,정비하면서, 전국의 장인을 끌어 모아 지식을 집대성하고 재교육시켰다.

소요되는 재원은 여진족과의 무역을 확장, 독점하면서 충당했고.

이를 통해 보다 균일한 품질, 단일 품종의 화포를 한곳에서 대량생산하는 체제로 바꿨지.

여기에 연오랑의 조언이 끼어들었고, 그 결과 탄생한 게 야전화포다.

다만 야전화포는 기병의 기동성과 발을 맞추기 위해 필연적으로 무게의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고, 이는 곧 운용상 한계에 봉착했다.

성벽이 아무리 화포에 취약하다곤 하나... 어지간한 성벽은 그 폭이 3~8미터 정도로 넓었고, 겉면은 벽돌,석재로 쌓아올렸어도 내부는 자갈과 흙으로 다져진 형태다.

이런 두툼한 성벽을 소구경 야전화포로 때려 부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허나 화약과 화포제조기술은 한계가 있으니, 보다 큰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선 화포의 크기가 커질 수밖에 없는 노릇.

그리하여 야전화포의 두 배는 될법한 거대한 공성용 화포를 만들게 됐다.

훗날 오스만제국이 사용할 우르반 대포처럼 정신 나간 물건은 당연히 아니고, 굳이 비교하면 미래의 홍이포 정도 되려나?

조정대신들은 “조선이 공성전을 할 일도 없는데, 굳이 이런 거대화포가 필요한가?” 라는 반문을 던졌지만, 세종과 태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밀어붙였지.

이렇듯 더럽게 비싸고, 화약을 많이 먹고, 무겁고, 까다로운 이 무기의 효용성에 대해서 다들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이렇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말았다.

‘이제 시작인건가!’

황보인은 먼지구름이 잔뜩 피어오르는 거용관 성문을 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실 거용관 공성전은 지루한 포격전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거용관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은 대로와 연결된 정문 성벽뿐.

이곳엔 백문 이상의 화포가 있는데, 기존의 공성사다리, 운제나 충차 같은 공성무기를 사용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하지 않나.

성벽에 달라붙기도 전에 죄다 고깃덩어리로 변해, 지옥도가 펼쳐질 거다.

괜히 북원잔당이 거용관 공략을 포기한 게 아니고, 북평부가 마음 놓고 거용관에서 병력을 뺀 게 아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군은 사거리 밖에서부터 참호를 파고, 그 흙을 이용해 포탄을 막을 방호벽을 쌓았다.

크기가 크다는 건, 사정거리와 위력이 강하다는 말과 동일.

비록 5문 밖에 되지 않는 공성포지만, 거용관의 화포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빵빵 쏴대는 걸 무슨 수로 막을까.

산중턱에 위치한 야전화포의 엄호사격을 받으면서, 조선군 공성포병은 거용관 성벽 위의 포대를 침묵시키며 조금씩 전진.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공성포의 위력과 정확도는 높아졌고, 드디어 문루를 부수고 말았다.

“이제부터 시작일세.”

“예. 걱정 마시죠!”

최해산은 가슴을 쿵쿵 때리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결국 무너지는군.”

“큼.”

“으음...”

경쟁자이자 동맹인 애매한 사이를 증명하듯, 말 위에 올라탄 몽골인 셋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신음을 흘렸다.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며 감히 도전할 수 없었던 거대한 장벽이, 신음을 흘리며 살점이 떨어지고 있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거용관의 문루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던, 만호장 바투한, 가로한, 호부패.

그들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장군. 조선군 장군이 찾고 있습니다.”

“알았다.”

바투한은 둘에게 힐끔 눈짓을 보내고선, 재깍 말을 몰아 조선군 숙영지로 발을 옮겼다.

간단히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김을화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공성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걸세.”

“...”

세 사람 모두 문루가 부서진 걸 보지 않았나.

거용관의 반격이 약해질 테니, 저 괴상한 포진지는 점점 앞으로 전진할거고... 지금부터 진짜 강철의 빛살이 협곡을 질주할 거다.

“하지만 자네들이 딱히 할 일은 없을 같고... 이러면 어떤가?”

“...?”

셋은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몽골병사의 통역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을화가 생각도 못했던 제안을 던졌으니까.

“숨겨진 샛길을 타고 북직례로 곧장 가란 말이오?”

“그렇네. 이곳에서 거용관이 무너지길 기다린다고 한들, 북평의 원군이 언제 도착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 그럴 바엔 차라리 북직례를 약탈하는 게 이득이지 않겠나?”

“음...”

“끄음.”

셋은 연신 머리를 굴려가며, 김을화의 제안을 맛봤다.

이들도 장성을 넘는 샛길을 알고 있지만, 산서로 가는 길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북직례로 가는 길은 오롯이 칼간 상인들만 알고 있었는데, 그걸 전부 풀겠다는 뜻.

“우릴 미끼로 쓰려는 속셈인...”

“그럴 리가 있나.”

김을화는 히죽 웃으며 바투한의 말을 끊었다.

“우린 지금껏 신의와 호의로 자네들을 대했네. 자네들이 더 잘 알지 않나? 다른 마음을 먹었다면 지금과 같은 공성방식을 취하지도 않았겠지.”

다들 말문이 막혀 속으로 반문을 주워 삼켰다.

만약 그들이 조선군 입장이었다면, 일단 몽골군을 앞세워 성벽을 공격했을 테니까.

“또한 북직례의 백성이 샛길을 통해 오는 걸 봤을 테고.”

“...”

밀수하던 산골 마을의 주민들이 이미 숙영지를 지나쳐, 칼간으로 가는 걸 보지 않았나.

셋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지금 조선기병 오천이 이미 남구를 점령하고 북평의 원군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네. 자네들은 무주공산이 된 북직례 서북부를 약탈하면 될 걸세. 한팔 보태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테고.”

김을화는 비아냥거리듯 히죽 웃었지만, 언중유골이라 했던가. 몽골군 만호장들은 이번에도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자신들이 왜 조선군과 힘을 합쳐 북평의 원군과 싸울까.

피 흘리지 않고 어부지리를 노리며, 손쉽게 약탈만 하는 게 최선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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