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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120화 (120/538)

120. 챕터21. 불태우다 (2)

“곰곰이 따져보게. 우린 거용관이 무너지든 안 무너지든, 어찌됐건 한 달만 이곳에서 머물 걸세. 그 안에 결실을 보는 건 그대들 몫이지.”

“한 달이란 말이오?”

“그렇네. 정확히 한달일세. 자네들이 북직례를 얼마나 휘젓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든 안 돌아오든, 우린 한달 뒤에 이곳을 떠날 걸세. 만약 그 전에 거용관을 무너뜨리면, 후속처리 후에 바로 떠날 거고.”

“음...”

세 만호장은 침묵에 잠겼고, 김을화 또한 침묵에 잠겼다.

‘과연 잘 되려나?’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북평부의 힘을 줄일 방책으로, 북원잔당을 끌어들인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이 녀석들이 북평부에 기생해 힘을 키우면 어떻게 될까? 다만... 곰곰이 생각해봐도 딱히 문제될 건 없어 보인다.

‘어차피 초원의 몽골부락은 많고 많지 않나.’

이 셋은 초원남쪽에서나 힘을 쓰지, 칸의 자리를 노리는 섬서나 초원서,중부의 거대부락과 비교하면 아직 미욱하다.

이 녀석들이 힘을 키우면, 오히려 북원잔당의 정세는 더욱 어지러워지지 않을까?

*****

쾅쾅쾅! 저 멀리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굉음은 메아리가 되어, 산맥의 협곡을 따라 흘렀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마차 하나가 겨우 지나갈법한 산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안색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들은 온갖 집기를 등에 짊어진 말과 함께 걷고 있었는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여기저기에서 아기의 울음소리 혹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걷다보니 삐빅! 날카로운 호각소리가 울려 퍼졌고, 모두는 자리에 주저앉아 뻐근한 다리를 주물렀다.

동시에 주섬주섬 짐을 뒤져 나무식기를 찾았고, 눈치를 보며 한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하루 이틀 겪어본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두렵고 낯선 건 당연한 일.

말도 통하지 않는 조선기병과 머리를 빡빡 깍은 몽골기병들. 이들은 능숙하게 손을 놀렸다.

솥에 이것저것 섞어 끓인 죽을 듬뿍듬뿍 퍼서 배급했고, 사람들은 냉큼 고개를 숙이며 밥그릇을 받아 챙겼다.

“장형.”

“왔나.”

둘은 산길 귀퉁이에 대충 등을 붙이고 앉아서, 주변을 살피며 뜨거운 김이 나는 죽을 조심스럽게 들이켰다.

“오씨는 어떻게 됐을까요?”

“글쎄...”

잘 모르겠다고 말은 하지만, 둘 모두 같은 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분명 길도 모르는 산길을 헤매다가 들짐승에게 당하거나, 아니면 산을 벗어났다가 다시 붙잡혔겠지.

“조선이라...”

“음.”

거친 한숨을 내쉬어 보지만 달라질게 있나.

그저 빨리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

이들은 남구에 살던 백성들로 조선군에 의해 끌려와, 산길을 타고 떠나고 있었다.

당연히 반항했지만, 마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이가장이 어떻게 됐던가.

조선군의 말발굽에 밟혀 개미새끼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초토화 됐다. 그러더니 이가장의 재물을 마을 주민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는 게 아닌가.

이게 대체 뭐하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 후에도 조선군의 행태는 꽤 기이했다.

약탈이나 강간 따위는 전혀 하지 않았고, 나름 말로 어르는 모습을 보였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마을 주민을 전부 소집하고, 집기까지 챙겨 이삿짐을 싸게 하더니, 그대로 산길을 타넘는다.

그러면서 때 되면 밥 주고, 잠자고, 쉴 시간도 주고, 애들이 운다고 뭐라고 하지도 않으니... 남구 백성들은 자신들이 지금 포로인지, 노예인지, 이주민인지 헷갈렸다.

말이 조금 이상하지만, 조선군은 예의 바른 약탈자였지.

“도망친다고 달라질 건 없겠죠?”

“오히려 더 고생만 하게 될 거야.”

혹시나 누가 들을까 싶어서, 목소리를 줄이고 귓속말을 이어갔다.

북평부는 필요한 군수품의 수요량이 정해져 있는데, 장인의 수가 줄었다고 해서 그 양이 줄어들 리가 있나.

사람이 줄어든 만큼, 남은 사람이 더욱 밤낮으로 굴러야겠지.

“지금도 힘들었는데, 앞으로는 더 힘들어 질 게 뻔하지 않나.”

“음...”

사정이 이러한데도 몰래 도망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지만, 조선군은 딱히 붙잡지도 않았다.

그저 통역을 시켜 한마디 했을 뿐.

“여기서 도망쳐본들 어디로 갈 생각이냐? 거용관이 무너지고 남구가 초토화됐는데, 북평부가 너흴 가만 둘 것 같으냐? 나아가 이 첩첩산중에서 홀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이 말 한마디에 모두는 낙심해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릴 수밖에 없었다.

초토화된 고향으로 되돌아가 거지처럼 살 건지, 아니면 조선으로 가서 그나마 편하게 살 건지 선택하라는 말이었으니까.

특히나 가족이 있는 이들은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지.

“흐음.”

“...”

빡빡 깎은 머리가 어색한지, 몽골기병은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죽을 퍼먹었다.

말린 어포와 해초가 들어간 밀,보리죽은 생긴 것과 달리 굉장히 맛있었는데, 해산물에 놀란 몽골기병들은 ‘이 귀한 걸 포로에게 먹여도 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군이 그렇게 한다는데 뭐라고 할까. 복속한 이상 시키는 대로 따르는 게, 인지상정이지.

“그런데 말이야.”

“뭐가?”

“조선에 저런 군병이 몇이나 될까?”

“글쎄...”

똑같이 죽을 퍼먹던 몽골기병은 포로로 잡힌 중국인들 너머, 저편에 뭉쳐 앉아 있는 조선기병을 바라봤다.

조선군이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몽골기병을 받아들였을 리가 있나.

복속을 청한 몽골부락민 대다수는 조선으로 떠났고, 나름 칼질을 한다는 이들만 조선군에 합류한 상태였다.

이들 또한 적잖게 마음이 싱숭생숭했고, 과연 자신들의 선택이 옳은 건지 그른 건지 고민했지.

하지만 이 몽골병사는 한걸음 더 나아간 고민을 던졌다.

다른 부락과 싸우면서 나름 잔뼈가 굵어졌다고 생각했건만... 막상 조선군의 실력을 보니 자신감이 뚝 떨어진 것.

“조선이 땅은 작지만 사람은 많은 나라라고 들었는데, 모든 조선군이 다 저 정도 실력일까?”

“그럴 리가 있나.”

다른 몽골병사가 대답은 그렇게 했다만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흥안령 일대에 살던 몽골부락이 조선에 대해서 얼마나 알겠는가. 그저 마을 어른들에게 원말명초, 여말선초 시절의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게 전부다.

그러니 조선군과 조선에 대해서도 막연한 두려움과 환상이 공존했고, 이들이 착호군이라는 괴상한 군대라곤 상상도 못했다.

“복속하면 조선군에 바로 속할 줄 알았는데, 그게 쉽진 않을 것 같고...”

“안 된다고 해서 굳이 애쓸 필요 있나? 조선 관리들이 목장을 일굴 땅을 준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적어도 예전보다는 낫겠지.”

“그건 그렇겠지만...”

기다렸다는 듯이 조선에 냉큼 복속한 이들은 흥안령 일대에서도 먹고 살기 힘들었던 부락들 아닌가.

먼지바람과 산의 아침이슬을 맞아가며, 근근이 하루하루 살던 이들이니... 조선에서의 삶이 아무리 삭막해도 예전보단 나을 거다.

“움직인다!”

“기상!”

삐익! 이런저런 상념을 깨우는 호각소리가 산길에 울려 퍼졌고, 각자의 고민에 빠진 몽골기병과 중국인 포로들은 다시 몸을 일으켜 발을 놀렸다.

“저기 오는군.”

“음...”

중대장은 관도를 따라 느긋하게 오고 있는 일단의 행렬을 굽어봤다.

수는 대략 서른명. 갑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북평 소속 군병일 게 분명해 보인다.

“친다. 준비하도록.”

“옙!”

소대장들은 재깍 발을 놀려 자기소대로 되돌아갔고, 인적 없는 마을 귀퉁이에 숨어 있던 기병들이 피를 달구기 시작했다.

마을 공터를 가볍게 돌면서, 나른했던 긴장감을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돌격!”

“하!”

“히럇!”

중대장의 호각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기병중대가 마을 밖으로 튀어나갔다.

소대별로 쪼개진 기병대는 질주하면서 포위망을 형성했고, 생각 없이 느긋하게 다가오던 북평 군병을 공격.

“크헉!” “적이다!” “억!” 가까이 다가가 화살비를 먹여주고선, 곧장 편곤을 꺼내들고 우악스럽게 뜯어먹었다.

소대 하나가 측면을 스쳐지나가자 마차 양옆에서 걷던 군병들이 우수수 머리가 깨져 쓰러졌고, 다른 소대가 반대편을 휩쓸자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

다섯 소대는 먹잇감을 노리는 늑대마냥 가운데에 두고 빙빙 돌면서 한방씩 치고 나갔고, 그 묵직한 일격을 버티지 못한 북평 군병은 결국 모조리 쓰러지고 말았다.

“역시 비어있나?”

“예.”

수레를 살핀 소대원은 냉큼 답을 했고, 소대장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싣고 떠날 준비를 해라.”

“옙!”

소대원들은 한두번 해본 게 아닌 듯, 능숙하게 시체를 빈 수레에 옮겨 싣고 말을 달렸다.

보권성을 점령한 후. 조선군은 곧장 관도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가장 먼 곳에 있는 마을에서부터 휩쓸고 올라왔다.

중국의 지방호족은 조선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를 자랑하지 않나.

칼잡이 식객을 호위마냥 부리면서 각 마을에서 왕처럼 군림하며 떵떵거리던 이들이 있었고, 조선군은 그들을 가만 놔두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일반 백성들을 건드려봐야 뭐가 남겠는가.

그들이 쩔쩔매던 우두머리를 쳐서, 감히 저항조차 하지 못할 충격과 공포를 선사해주는 거지.

그렇게 남구의 모든 마을을 점령했고, 마을 주민은 보권성에 와서 보급품을 싣고 산길을 타고 떠났다.

그러는 동안 조선군은 관도와 대로를 점령해서, 남구와 외부의 교통을 끊어서 북평이 이곳 사정을 알지 못하게 막았다.

하지만 이곳은 군수공장이나 마찬가지고, 당연히 북평 및 다른 지역에서도 상인들이 와서 물건을 구입하던 곳 아닌가.

조선군은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들 또한 모조리 사로잡았지.

문제는 일반 상인이 아니라, 군수품을 보급 받으러 오는 북평의 관리였다.

“사소마을에서 관병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피해는?”

“사상자는 없고, 적병 서른을 주살. 빈 수레를 끌고 온 걸로 보아, 이번에도 군수품을 수령하러 온 모양입니다.”

“음...”

북평과 남구는 말을 타고 가면 이틀, 도보로 가도 나흘, 닷새면 도착한다.

소식이 끊어지면 ‘이 자식들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적군이 거용관을 뚫고 와서 점령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무리지.

‘일주일이 지났고... 벌써 관리를 다섯이나 잡았지?’

“이제 반응이 올 때가 됐군?”

“예. 그렇지 않겠습니까.”

“흐음...”

연오랑은 보권성을 뒤져서 찾은 지도를 살피며, 손가락을 튕겨봤다.

북평부도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조사관을 파견할 터, 그들마저 처리하고 나면 변고가 생긴 걸 알아차릴 거다.

당연히 거용관이 공격당할 거라는 것도 유추할 수 있을 테고, 어느새 목에 닿은 비수를 보고서 발작할 거다.

‘그럼 어중간한 병력으로 오진 못하겠지.’

“북평부가 병력을 얼마나 뽑아낼 수 있을까?”

“글쎄요... 지금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았습니까? 보낸다면 북평의 금군을 보내거나, 아니면 북평에서 징집한 병력을 보내겠지요.”

“수는 아무리 못해도 오천에서 일만 쯤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약 북평에서 징집을 시행하면 일만이 넘을 수도 있습니다.”

연오랑의 물음에 4연대장 조비형과 5연대장 하경복이 재깍 말을 받았다.

지금 북평부는 사방으로 병력을 파견한 상태라서, 어디 한군데에서 왕창 병력을 빼왔다가는 죄다 무너질 판국이다.

나아가 먼 곳에서 병력을 빼온다? 그건 조선군에게 결코 나쁘지 않다. 그때쯤 되면 이미 이곳에서 떠났을 테니까.

‘징집하는 것도 나쁘지 않군.’

강제 징집이 어디 말처럼 쉬울까.

적병의 수준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거고, 그 행정, 보급처리만 하는데도 며칠은 소모될 거다.

‘거기에 이곳까지 행군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아무리 못해도 또 일주일은 걸리겠지.’

여기에 천만다행으로 호재가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몽골 만호장이 산맥을 넘었습니다.”

“눈치를 어지간히 봤군?”

“...”

연오랑이 쓴웃음을 흘리자, 연대장들 모두 같은 표정을 지었다.

김을화의 제안에 결국 몽골 만호장들은 북직례를 약탈하기로 마음먹었다.

허나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하니, 이들은 선발대를 보내서 보권성에 진짜로 조선군이 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본대가 움직인 것.

‘몽골군이 서북부를 휩쓸기 시작하면, 오롯이 거용관과 남구만 신경 쓸 수 없을 터...’

어쩌면 반대로 출혈을 감수하고 대병을 징집할지도 모르지만, 뭐가 됐건 나쁜 상황은 아니다.

“적병 이만을 상정하고 전장을 골라보자. 적어도 한번은 밟아줘야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옙!”

“알겠습니다.”

밑에서부터 수상스런 보고가 연이어 올라오자, 북평부는 난리가 났다.

뜬금없이 몽골군이 튀어나오고, 거용관과 남구는 연락이 끊겼다.

모든 게 가리키는 결론은 동쪽의 요동, 남쪽의 산동에 이어 이젠 북쪽에도 전선이 펼쳐졌다는 것.

하지만 북쪽의 전선이 훨씬 더 위협적이다.

거용관에서 북평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원래 역사에서의 명나라나 이전의 요,금나라 모두 거용관이 뚫리자, 순식간에 북평이 함락되거나 북평공방전이 펼쳐졌다.

결국 북평부는 수도인 북평 인근이 쑥대밭이 되기 전에 어떻게든 먼저 움직일 수밖에 없고, 직고와 산해관의 병력을 빼올 시간을 벌어야 했다.

예상대로 북평과 남부 인근 도시에서 백성들을 강제 징집.

일군은 서북부를 휩쓸고 있는 몽골군으로, 다른 일군은 미지의 적이 웅크리고 있는 남구과 거용관으로 올려 보냈다.

한명이 이동하는 것과 백명, 만명이 이동하는 건 차원이 다르다. 수가 늘어날수록 어려움은 곱절로 커지지.

식수문제, 군량문제, 숙영문제, 행군로 문제 등등이 바로 불거진다.

만명이 넘는 군사가 도적떼마냥, 마을 하나를 다 뽑아먹으면서 이동할 순 없는 노릇이잖아?

또한 일렬로 줄줄이 걸어갈 수도 없고, 제대를 맞춰 움직이려면 그만한 공간이 필요하니... 이동할 길은 대충 정해지기 마련.

괜히 행군 그 자체가 군사작전인 게 아니지.

하지만 연오랑의 악독한 수법이 펼쳐지자,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전부 불태워라.”

대마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선군은 남구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기 시작했다.

11개의 마을과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장원들, 추수가 막 끝난 전답, 야산과 숲. 남구의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갔다.

그 어떤 정복군도, 그 어떤 약탈자도 하지 않았던, 무시무시한 짓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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