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21화 (121/538)

121. 챕터21. 불태우다 (3)

“탈영병을 또 붙잡았습니다.”

“이번엔 몇이냐?”

“마흔여섯입니다. 여기. 취조한 내용입니다.”

연오랑은 등잔불에 의지해, 이정호가 내맨 보고서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역시... 걸려들었네.’

“달라진 건 없군?”

“예. 그간 탈영병에게 알아낸 내용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붙잡은 탈영병만 오백이 넘으니까, 전체 탈영병은 몇 배는 더 될 거잖아? 그런데도 아직도 이만이 넘다니... 진짜 급한 모양이네.’

연오랑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북평부는 조선보다도 인구가 적은데, 고작 며칠사이에 수만명을 끌어 모아 보낼 정도면...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게 맞는 모양이다.

“불길은 어디까지 번졌지?”

“이제 남쪽은 슬슬 꺼지는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여름이 오고 있고, 오늘 아침에 소나기도 내렸으니까요.”

‘북평까지 불이 번졌으면 좋았겠지만... 역시 무리였네.’

북평으로 내려갈수록 산은 없어지고 구릉과 평야, 내천만 이어지니, 아무리 불을 열심히 질러대도 생각만큼 번지지 않았다.

그냥 남구만 날려버린 걸로 만족해야지.

“좋아. 출정한다.”

“옙!”

이정호는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높였고, 이내 곧 조선군 진지가 떠나갈 듯 시끄러워졌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마을 관청을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순몽과 조비형을 비롯한 연대장, 대대장들이 달려왔다.

“이제 칩니까?”

“그래.”

“오!!”

“결국 일주일이나 벌었군요.”

이순몽은 신이 나서 어깨춤을 췄고, 조비형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 땅을 죄다 불태워버릴 생각을 할 줄이야? 여기가 아무리 조선땅이 아니라고 해도, 쉽게 떠올릴 생각이 아니다.

북평에서 황급히 올라온 북평군은 앞길을 막는 불길에 잠시 주춤했다.

그냥 불이 아니라 남구의 모든 걸 휩쓸어버리는 불의 바다가 펼쳐졌는데, 어찌 쉽게 움직일 수 있을까.

허나 목에 비수가 드리운 북평의 명령은 지엄했다.

지금은 죽기 일보직전이니, 손가락이 잘리는 각오를 하고서 비수를 맨손으로 치워야 할 판국.

북평군은 불의 바다를 헤치며, 조선군이 의도적으로 남겨 놓은 구불구불한 관도를 따라 보권성으로 올 수밖에 없었지.

깡그리 불타버린 검은 잿밭을 밟으며 나아가자, 당연히 행군과 사기는 개판이 됐다.

중국은 땅도 넓고 사람도 많은 만큼, 혼란한 지금 시대만큼.

나름 무용이 출중한 칼잡이들이 무수히 많았다.

허나 칼잡이와 군인은 엄연히 다른 법.

진법에 따라 움직이는 방법, 제대를 만드는 방법, 숙영방법, 정찰방법, 하다못해 열 맞춰 움직이는 제식, 자신의 안위보다 부대전체를 위하는 희생정신 등등.

단순히 칼질을 잘한다고 군인의 덕목이 생기는 게 아니고, 오히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칼잡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부지기수지.

이건 원래 역사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칼잡이도 아닌, 그냥 농사짓던 일반 백성도 껴 있다면? 더욱 말할 필요도 없지.

관도 주변이 전부 불에 타면서 행군대열은 걷잡을 수 없이 길어졌고, 제대로 잠도 못자고 탄 연기를 맡으며 걸어야 했고, 원래 숙영을 해야 했을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황폐해졌다.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몰라, 매일같이 가시를 세우고 경계해야했지.

시일에 쫓겨 마구 긁어모은 북평군 중에서, 이런 정신적, 육체적 압박을 버텨낼 자가 몇이나 될까.

고작 행군 나흘 만에 탈영병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고, 조선군은 그들을 붙잡아 북평군의 현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조선군이 전장으로 선택한 지역에 북평군이 자리 잡았다.

“땅은 어때?”

연오랑은 물끄러미 고개를 들어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봤다.

무수히 많은 별이 반짝이고 있지만, 그 빛이 대지에 닿지 못해 여전히 사방은 어두웠다.

다만 아직도 슬그머니 남아 있는 구름이 거슬린다.

“오늘 아침에 소나기가 내렸지만, 워낙 거친 땅이니 말이 달리기 힘들 정도로 질퍽해지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먼지구름이 올라오진 않을 정도로, 딱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비가 또 오진 않겠지?”

“예.”

조비형과 몇몇 대대장들 모두 하늘을 올려보며 구름을 살폈다.

먹구름은 이미 지나가고, 가벼운 솜털구름만 달빛에 날리고 있으니 비가 오진 않을 것 같다.

“적병이 이만이 넘지만 모두 보병이고, 하루면 오는 거리를 탄 연기를 마셔가며 삼일에 걸쳐 왔다. 사기와 체력은 땅에 떨어졌고, 지금쯤이면 지쳐서 꿈나라에 가 있을 거다.”

“흐흐.”

“분명 그럴 겁니다.”

“오늘 싸움으로 이번 원정을 종지부 짓는다.”

“예!” “알겠습니다!” “충성!”

연오랑의 단호한 명령에 연대장은 물론이고, 조선군 모두가 목청 높여 기세를 끌어올렸다.

조선군은 야음을 틈타 조용히 이동했다.

오천에 이르는 기병이 움직이건만 요란스럽지도 않았다.

느긋하게 밤산책을 하듯 발을 놀려, 미리 정해둔 각자의 자리에 위치했다.

이 인근은 수로정비가 되지 않아 황무지에 가까웠고, 그래서 불에 잘 타지도 못했다.

허나 내천을 끼고 맨땅이 드러나 있는 탓에, 숙영하기에는 딱 알맞은 장소.

북평부 장군들이 보기엔 여기는 분명 함정처럼 보였지만, 이미 병사들의 불만이 폭주하고 사기가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딱 봐도 쉬기 좋은 장소를 놔두고, 또 행군을 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싸우기도 전에 알아서 녹아 없어질 거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저 경계를 튼튼히 하면서, 바닥까지 떨어진 체력과 사기를 끌어올리는 수밖에.

조선군은 북평군 진지 코앞까지 어둠에 파묻혀 이동했고, 인근을 살피던 경계병을 해치우고 그들처럼 연기하며 시간을 벌었다.

어차피 들키겠지만, 이제 곧 동이 틀 때가 되지 않았나.

잠시만 시간을 벌면 되니, 교대하러 오는 병사들도 모조리 해치우고선 느긋하게 기다렸다.

각궁을 덥히며 침묵을 버텨내자 서서히 여명이 밀려오며, 전장에 깔린 밤의 장막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송글송글 맺혔던 아침이슬이 부르르 몸을 떨고, 아직 떠오르지도 않은 태양빛에 온 사방은 어스름하게 푸른빛으로 변해갔다.

이제 앞이 보일 정도로 밝아졌는데, 더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쉐에엑! 어둠과 빛 사이를 가르며, 불화살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전군 진군!”

연오랑의 목소리에 맞춰, 연대 기병이 줄줄이 늘어서서 천천히 질주를 시작.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다른 연대에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았지만, 모두는 불화살의 신호에 맞춰 일심동체로 몸을 일으켰다.

다각.다각.다각. 운율을 맞춰 하늘이 노래를 부르고, 그리 급하게 달려오지도 않건만 대지가 춤을 추기 시작.

“적이다!” “적 기병이다!”

“저... 저기도 있다!” “이쪽에서도 온다!”

주변을 지키던 경계병들의 고함소리와 황급한 북소리가 마구 터지지만, 잠에 빠져들었던 북평군 진지는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근 삼일만에 잿밭이 아닌 제대된 땅에서 잠을 잤는데, 바로 반응할 수가 있나.

조선기병은 적들이 움직이든 말든 속도를 유지하고 계속 전진.

100보 앞까지 느긋하게 걸어와 화살을 건 시위를 당겼고, 쉐에엑! 하늘을 잠깐 어둡게 만들며 온 사방에서 화살비가 쏟아져 내렸다.

마구잡이로 쏴댔지만, 저긴 적이 넘쳐나지 않나. 아무나 맞을 거다.

온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다시금 진동했고, 환영인사에 맞춰 화살비는 연이어 쏟아졌다.

조선 기병들은 슬쩍 속도를 높여 50보에서 마지막 화살비를 쏟아내고선, 활을 등에 걸치고 각자 익숙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서로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파악할 정도로 가까워지자, 적 진지에서도 이따금씩 화살이 날아왔으나 무용지물.

조선 기병들은 갑옷을 믿고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누구는 기창을, 누구는 편곤을, 누구는 조선월도를 꺼내, 하늘 높이 쳐들었고.

“돌격!”

“와아아!”

삐익! 소대장의 호각소리에 맞춰, 검은 깃발을 휘날리며 거침없이 북평군 진지를 향해 밀려들었다.

전력질주가 아닌, 사람이 달리는 속도로 묵직하게 밀려들었지만... 어설프게 서서 앞을 막던 북평군 경계병 전열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아무리 전력질주를 하지 않아도, 마갑과 기수를 태운 전마의 무게가 얼마인가.

수백근은 가뿐히 넘어가니 그저 들이받고, 가볍게 무기를 휘두르기만 해도 북평군 전열은 파도 앞의 모래성과 다르지 않았다.

마갑까지 껴입은 돌격기병이 선두에 서서, 전열을 갈고리처럼 쑤시고 들어가자.

곧장 거리를 두고 뒤를 쫓아온 기병이 난도질을 시작.

쓰러진 적병을 그냥 밟고 지나가고, 옆에서 소리치는 적병은 그저 스치며 치고 나아가고, 앞에서 벌벌 떠는 적병에겐 묵직한 한칼을 먹여준다.

고작 한 번의 돌격만으로, 북평군 경계진영은 와장창 깨져나갔다.

사실 숙영진지와 막사를 만드는 건 별게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이라도 해봤어야 쉽게 할 수 있는 일 아닌가.

또한 이곳은 목책이나 진채로 쓸 나무도 없고, 남구는 잿밭이 되어 재료로 쓸만한 물건을 구하지도 못했다.

북평군 진지는 허허벌판에 널브러져 있는 꼴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조선 기병은 아직 제대를 갖추지 못한 북평군을 그대로 짓밟으며 파고들었다.

콰쾅! “으억!” “컥!” “적이다!” “여기도 있다!” 하늘을 쪼개는 굉음과 함께, 온 사방에서 혈화와 함께 비명소리가 피어오른다.

우악스런 편곤에 맞아 북평군 병사들의 머리통은 사정없이 깨져나가고, 날카로운 기창에 찔려 이제 막 자다 깬 병사의 가슴에 구멍이 났다.

송나라 시절에 처음 등장한 언월도는 북방의 기병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연오랑이 개량한 조선월도는 그 크기가 몇배는 작고, 대신 몇배는 날렵한 무기가 되지 않았나.

이건 보병이 써도 좋지만, 기병이 써도 좋은 무기가 됐지.

붕붕! 파공음과 함께 반월을 그리며 날아든 조선월도는 북평군의 갑옷과 투구를 우그러뜨리며, 그 내용물에서 붉은 즙을 짜냈다.

“크억!” “어억!” “아악!” “불이야!”

조선 기병은 무리하게 기동하지도 않고, 그저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기병이 돌파력을 잃어버리면 위험한 건 당연한 사실이지만, 그건 적이 대기병 방진이나 탄탄한 전열을 이뤘을 때나 그렇다.

지금처럼 난전이 펼쳐지는 상황에선, 굳이 달리지 않아도 기병은 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해 손쉽게 보병을 상대할 수 있는 법.

쾅! “옆이다!” 기창을 꼬나든 조선기병은 매섭게 소리치며, 냉큼 박차를 가해 옆에서 달려오는 북평군 병사를 공격했다.

순식간에 뻗어나간 기창은 북평군 병사의 목덜미를 쑤시고 지나갔고, 푸학! 기창을 회수하기 무섭게 병사는 무릎을 꿇고 허물어졌다.

손을 빙글 돌리자 기창 또한 빙글 한바퀴 돌아 창끝이 땅을 향하며 역수로 잡혔고, 기병은 다시금 동료의 옆을 노리는 병사에게 돌진.

과실을 짓이기듯, 기창을 내리찍어 북평군 병사들의 어깨와 쇄골에 구멍을 송송 내줬다.

콰쾅! 그 틈에 어느새 또 달려온 조선기병이 기창을 든 동료를 노리던 북평군 병사의 창을 후려쳤고, 차라락! 편곤의 자편이 창대를 후려쳐 박살냈다.

동시에 육중한 전마의 가슴팍으로 들이받자, 북평군 병사는 땅에서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며 쓰러졌고 곧장 말발굽에 밟혀 움직임을 멈췄다.

“저쪽이다!”

“우리가 막는다!”

북평군 숙영지는 온통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이들은 명령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알아서 막사 밖으로 튀어나오고 있지 않나.

일단의 병사들은 주위에 널려 있던 장창을 꼬나들고 막아보려 했지만, 온 사방에 장애물이 넘쳐나니 그게 될 리가 있나.

자기들끼리 우르르 쾅쾅 부딪치며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고, 순식간에 들이친 3명의 조선기병이 장창병들에게 달라붙어 편곤과 월도를 마구 휘둘러댔다.

퍽퍽퍽! 제자리에서 빙글 돌며 휘두르는 편곤에 하나같이 머리통이 박살나며 허물어지고, 그 뒤를 이어 월도날이 갑옷과 함께 가슴팍을 쪼개며 지나갔다.

모든 곳에서 같은 상황이 펼쳐지고, 조선기병의 일방적인 학살이 계속 이어졌지만... 그래도 적병의 수가 너무 많다.

숙영지의 겉 테두리는 피로 물들어 붉게 변했지만, 저 숙영지 중앙에선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깃발과 열기가 꿈틀꿈틀 피어올랐다.

“음...!”

캉! 비틀거리는 북평군 병사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박살내버린 소대장은, 앞에서 막사를 불태우고 있는 대대장을 재빨리 찾았다.

이미 다 계획을 세워뒀고, 이런 상황 또한 상정해 두지 않았나.

“대대장님! 적이 대응하려는 모양입니다.”

“적들이 뭉치고 있는 건가?”

“깃발을 보니 그렇습니다!”

소대장은 검은 연기 너머로, 저편에 보이는 북평부 군기를 가리켰다.

온 사방이 막사와 적병으로 빽빽해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저 멀리 북평군 병사들이 알아보라고, 높이 치솟은 군기가 펄럭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지휘부겠지?”

“예.”

“당연히 금군이 모여 있을 테고.”

“...”

더 말할 필요가 있나.

저게 장군기인지 아닌지 모르겠다만, 어찌됐건 부대장의 깃발이 맞을 거다.

북평부라고 뭐 딱히 다르진 않을 테니, 당연히 북평을 지키던 최정예병인 금군이 저 안에 웅크려서 기습공격을 수습하려 할 게 분명.

저들을 박살내는 게 최우선 순위다.

“다른 연대와 대대 또한 봤을 터... 길을 터라. 기사대를 부른다.”

“옙!”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소대장들은 흩어졌고, 곧장 난장판이 된 시체와 타다 남은 막사 잔해를 치워 길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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