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챕터21. 불태우다 (4)
“사령관님!”
“적이 정신을 차렸나?”
“정확히 알 순 없으나, 지휘기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북평군 숙영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오랑과 일단의 기병들.
그들은 전령의 보고를 받기 무섭게, 곧장 몸을 일으켜 나아갔다.
숙영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 주위를 살피곤, 피를 묻힌 채 부서진 진채에 도착하고서야 멈춰 섰다.
“이쯤이면 될까?”
머릿속으로 기병의 움직임을 그린 후에, 연오랑이 조용히 물어보자.
“예.”
기사대장 한선후 또한 같은 생각을 했는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합을 맞춘 게 몇 년이고, 한선후가 연오랑에게 기사대 전술을 배운 게 몇 년인가.
눈만 마주쳐도 무슨 생각인지 재깍 알아차렸지.
기사대원들은 다른 무기는 전부 놔두고, 손에 익은 대검과 장도만 허리춤에 끼고 있었다.
대신 보권성에 머무는 동안 만들어 놓은 기병장창 다섯 개를 힘겹게 끼고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건 커도 너무 커서 안장에 끼워 세워놔도 땅에 질질 끌릴 정도였다.
“준비!”
한선후의 목소리와 호각소리가 퍼지기 무섭게, 기사대원들은 거추장스럽게 하늘로 치솟아 있던 거대한 창을 조심스럽게 꺼내 땅에 푹푹 꽂아 넣었다.
순식간에 대나무 숲 마냥 장창의 숲이 만들어지고, 소대별로 뭉쳐 돌격진영을 갖췄다.
바로 코앞의 북평군 진지는 여전히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곳은 경건할 정도 집중해서 소음조차 밀려나는 듯 했다.
“경보!”
다그닥. 다그닥. 비명과 고함, 함성이 어우러진 전장을 향해 강철의 물결이 흐르기 시작했다.
북평군 숙영지의 외각은 전부 무너졌고, 그 무너진 잔해 위에 서서 조선기병들은 연신 화살을 안으로 쏴대고 있었다.
어느 중대는 계속 육박전을 벌이며 안으로 파고들고 있었고, 정신을 차린 북평군병은 지휘기가 세워진 곳으로 헐레벌떡 재집결을 하고 있는 중.
“후흡!”
“후하!”
찰갑가리개 때문에 눈만 내놓은 기사대원은, 흔들리는 전마의 움직임에 맞춰 숨을 내뱉으며 박자를 맞춰갔다.
연대기병이 정리해 둔 공터를 느긋하게 질주하며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자, 저 앞에 앞서거니 두서거니 뭉쳐 있는 북평군 창병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에 휘날리고 있는 북평군 지휘기 또한 안구에 새겨진다.
저기가 바로 핵심.
북평군 사령관이 저기 있는지 없는지 알 순 없다만... 어쨌든 저길 무너뜨리면 기세를 꺾어버릴 수 있을 게 분명.
“거창!”
기다란 기병장창은 하나둘씩 기사대원의 옆구리에 걸쳐, 강철의 송곳니가 앞으로 향하고.
“속보!”
위아래로 흔들리던 시선이 보다 격하게 요동치며, 전마의 약동하는 심장의 고동이 허벅지를 타고 전해졌다.
“충격!”
“와아아아!”
“아아!”
기사대원의 함성소리가 전장을 가로지르기 무섭게, 기병장창이 먼저 북평군 방진에 먼저 닿았다.
유럽에선 장창방진을 깨기 위해서 기사들은 장창보다 더 긴 랜스를 사용했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장창보다 더 긴 파이크방진이 만들어진다.
둘은 서로 물고 물리면서, 랜스는 길어지고 랜스차징은 더욱 정교해졌고, 반대로 파이크 또한 길어지고 파이크방진은 더욱 단단해졌지.
허나 동아시아에는 최종완성형 랜스차징이 등장한 적이 없는데, 기존의 장창방진으로 막을 수가 있나.
푸헉! 장창이 닿기도 전에 기병장창이 북평군 병사의 가슴을 뚫고 들어갔고, “커헉!” 비명을 내지르며 장창을 놓아버리자 기병장창은 더욱 밀고 들어왔다.
“켁...” 앞열에 서 있던 동료의 등을 뚫고 나온 기병장창이 뒤에 서 있던 병사의 목덜미에 닿자, 그 병사 또한 장창을 내던지며 옆으로 꼬꾸라졌다.
‘음...!’
“허흡!”
이징옥은 손아귀에 진하게 전달되는 마지막 생의 의지를 느끼며, 자기도 모르게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찌를 것 같던 적 장창벽은 속절없이 허물어졌고, 그의 옆구리에 붙어 있던 기병장창은 요란하게 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기병장창을 쥔 손아귀가 터질 것 같아 냉큼 기병장창을 내던졌다.
쿵... 내던진 기병장창은 굴러가다 말았는데, 그의 장창에 꽂힌 북평군 병사 둘이 서로 겹쳐져서 하나가 되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
“흡!”
이징옥은 자기가 한 짓임에도 믿기지가 않아서, 악독한 눈빛을 흘리며 쓰러지는 북평군 병사의 눈길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허나 멈춰버린 머리보다, 단련되고 익숙해진 몸이 먼저 움직인다.
삐익! 호각소리가 들리자,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잡아채곤 말머리를 돌려 재깍 뒤로 달려 나갔으니까.
힐끔 스쳐지나가며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지옥도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어설프게 뭉쳐 있던 장창방진의 머리는 흔적도 없이 박살났고, 남은 거라곤 짙은 피냄새 뿐.
특히나 연오랑과 한선후를 비롯한 기사대 최정예가 돌격한 곳은, 거의 사열이 무너져서 포탄을 맞은 것 마냥 황량하게 비어 있었다.
‘이런...!’
그는 말을 몰아 후퇴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고삐를 놓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아귀를 살폈다.
항상 나무인형을 상대로 연습만 해왔지, 이렇게 산 사람을 상대로 해본 건 처음 아닌가.
파림좌기 전투에는 기사대 신입인 그가 참전하지 못해서, 다른 기사대원의 무용담에 그저 웃고 말았는데... 모두 사실이었다.
여러모로 짜릿한 충격과 끔찍한 느낌에 시야가 노래졌다.
쿵쾅쿵쾅. 전마의 심장보다 더 크게 울리는 심장고동소리에, 정신이 아득한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나름 토관으로 생활하면서 여진족과도 싸워봤지만,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고양감과 흥분이 온몸을 지배했다.
지금이라면 흡사 천신만군이 되어 하늘이라도 찢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다.
허나 하늘을 붕붕 떠다니는 기분은 금세 가라앉아, 이징옥을 다시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 내던져졌다.
“재정렬!” 삐익! 처음 그 자리로 되돌아온 기사대원들은, 호각소리에 맞춰 땅에 박아놨던 기병장창을 다시 꺼내들었다.
“준비!”
다시금 기병장창을 높이 세우고 진영을 맞추고.
“경보!”
피바다가 된 적 장창방진을 향해 달려가고.
“충격!”
콰콰쾅! 아직 제대로 수습도 하지 못한 북평군 방진을 짓이기며 밟아버렸다.
‘헛!’
이징옥은 또 다시 박살나버린 북평군 방진을 뒤로하고 후퇴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우악스런 기병돌격이 또 어디 있을까.
여진족을 상대할 땐, 이런 전술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넌 막아라. 난 친다.” 이렇게 대놓고 말하면서 달려드는데, 북평군은 바위 앞의 계란이 되어 그저 박살나고 찢겨나갔다.
뭐 하지도 못하고 계속 얻어맞을 수야 있나.
북평군은 후퇴하는 기사대를 뒤쫓아 가려 했지만... 적은 기사대가 전부가 아니다.
전열을 빠져나오거나 화살을 쏴대던 궁병들은, 옆에서 틈만 노리고 있는 연대기병에게 호되게 당해 목이 쏙 들어갔다.
“재정렬!” 삐익! 또 다시 들리는 고양된 목소리와 호각소리에 맞춰 기사대는 재집결을 끝마치고.
이제는 누가 봐도 동요하기 시작하는 장창방진을 향해 다시금 돌격.
콰콰쾅! “크억!” “아악!” “막아!” “저...!” 북평군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소리를 연신 내질렀고, 방진 뒤쪽에선 앞의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북소리와 깃발 휘날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걸 들을 병사들은 이미 전부 쓰러지고 말았다.
기사대는 가져온 기병장창을 다 써버릴 생각인 걸까?
다섯 번에 걸친 랜스차징을 맞은 북평군 장창방진은 너덜너덜해졌고, 이젠 뭉쳐있지도 못한 북평군을 향해 기사대의 뒤를 쫓아온 연대기병이 비집고 들어갔다.
“무너지는 군.”
“예.”
연오랑과 한선후는 땀을 뻘뻘 흘려서 축축해진 전마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녀석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사상자는?”
“없습니다.”
말은 담백하게 하지만, 찰갑가리개를 젖혀 놓은 한선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장창방진을 아예 찢어놨는데, 아군 손실이 한명도 없으면 충분히 자랑할 만하지.
“그래야지.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데.”
“...”
허나 심드렁한 반응이 날아왔고, 한선후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냉큼 표정을 고쳤다.
충격기병용 전마는 민첩함 보다는 힘이 더 중요했고, 당연히 덩치가 크면 클수록 좋았다.
기존 전마보다 쉽게 지치는 건 당연하지만, 그걸 예상하고 예비마를 끌고 다니는 거잖아?
다만 조선을 비롯한 여진족에게는 이런 덩치 큰 품종의 말이 드물었고, 연오랑은 오래전부터 강철기사를 꿈꾸며 준비해 오지 않았나.
천금을 쏟아 부어 한혈마를 들여오고, 조선과 여진, 우량카이를 박박 긁어 덩치 큰 말을 구해서 교배하고 키워냈는데... 그 고생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
기사대 창설 이후 한선후는 그걸 옆에서 전부 지켜봤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전마 상태는?”
“한번은 더 돌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연오랑은 엉망진창이 된 숙영지를 다시금 굽어봤다.
무려 2만이 넘게 몰려 있는 숙영지다. 어지간한 마을 보다 더 컸고, 당연히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
그저 사방에 난무하는 북평군, 조선군의 깃발과 호각소리, 북소리를 들으며, 어림잡아 짐작만 할 뿐.
그래도 계획대로 잘 되어가는 것 같다.
“사령관님!”
아니나 다를까. 무너진 막사더미 위에 올라 있던 연오랑을 향해, 전령이 재깍 달려와 입을 놀렸다.
“4연대가 적 지휘기 하나를 무너뜨렸습니다.”
“적의 대응이 약했나?”
“그런 것도 있고, 4연대장이 적장을 활로 쏴서 맞혔습니다.”
“과연!”
한선후는 조비형의 활솜씨를 아는 터라, 그저 감탄만 흘렸다.
“좋아. 폭음이 들리지 않는 걸로 보아 훈련대가 잘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린 또 대기하지.”
“옙!”
“알겠습니다!”
전령은 재깍 4연대로 되돌아갔고, 한선후는 기사대원에게 다시 전투준비를 명령했다.
기사대는 멀리 떨어져 있던 본래 매복지에서 수레를 끌고 와서 기병장창을 보충하며 예비마를 준비했고, 언제든 들이칠 수 있게 조용히 체력을 보충하며 대기했다.
연오랑은 북평군이 오합지졸일 거라고 예측했고, 탈영병들을 쓸어 담으며 더욱 확신했다. 더불어 그들의 편제와 장군들, 보급과 병종의 현황 또한 알아냈지.
탈영병이 한두명이면 반간계라고 의심하겠지만, 사로잡은 이들만 오백명이 넘는데 무슨 반간계냐.
이놈들은 북평부의 진짜 정예가 도착하기 전에, 조선군이 북평으로 진군하지 못하게 던져 놓은 고기 방패에 불과했다.
그래도 진짜 고기방패로 던질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방책은 갖췄고, 그게 바로 금군 일부와 화포병이지.
다만 북평부라고해서 기존의 조선과 다를 게 있을까.
화포병은 화약장인의 역할을 겸했으니 애초에 그 수가 많을 수가 없고, 혹시나 북평이 공격받을 지도 모르니 화포병을 다수 딸려 보낼 수도 없었다.
그래도... 어찌됐건 화포는 화포.
병력 손실을 극도로 줄이고 싶은 연오랑은 북평군 화포병을 처리하기 위해 최정예를 내보냈고, 그들은 기대에 부응했다.
온 사방에서 난장판이 벌어지고, 불길이 일어나고 있지만, 이곳만큼은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 조용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물론 사방에 죽어 나자빠진 북평군과 저쪽에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병사를 보면 마냥 평온하진 않았지만.
“여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연손찬은 훈련대원이 내민 나무상자를 뒤져, 천조각에 감싸져 있던 검회색빛의 가루의 맛을 봤다.
“으... 퉤. 화약이 맞는 것 같지?”
“예. 퉤퉷.”
둘은 똑같이 얼굴을 찡그렸고, 마찬가지로 맛을 보던 훈련대원 또한 동의했다.
“화포를 찾았습니다!”
곧이어 막사를 뒤지던 훈련대원 일부가 목청을 높였다.
후다닥 발을 놀려 어설프게 천으로 대충 둘러놓은 막사에 도착하자, 수레에 실린 화포가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조선의 야전화포는 시대를 초월하는 물건 아니냐.
지금 중국의 화포는 이렇게 수레에 실어서 옮기고, 전장에 도착하면 땅에 박거나 나무지지대에 대충 거치해서 쏘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긴급방열 따위는 꿈도 못 꾸고, 이렇게 기습을 당한 상황에선 더욱 취약했다.
“어찌할까요?”
“이곳 숙영막사 주변을 돌면서 화포병을 더 찾아봐라. 헷갈리겠지만, 무기를 들고 덤비지 않는 놈들이 화포병일 가능성이 크겠지.”
“음...”
뭔가 말이 안 되는 명령 같지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말도 안 통하는 데, 북평군 화포병을 무슨 수로 찾겠나.
화포병은 거의 보조군 취급을 받으니까... 다짜고짜 싸우기 보단, 어딘가에 대충 짱박혀 숨어 있거나 도망칠 기회만 노리고 있을 게 분명.
걔들을 대충 챙기다보면, 화포병이 걸릴 거다.
훈련대원은 재깍 말에 타서 움직였다.
훈련대가 칼귀신들이라고 해서 말을 못 탈 리가 있나.
삼삼오오 모여 빠르게 흩어졌고, 연손찬은 막사에 꽂혀 있던 북평군 깃발을 던져버리고, 가지고 있던 조선군 깃발을 대신 꽂아 넣었다.
북평군이 이걸 보고 여길 탈환하려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나쁠 건 없지 않나.
‘몇이나 올까? 도망치느라 바빠서 굳이 오진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연손찬은 화약고나 마찬가지인 이곳을 정리시키곤, 월도를 끼고 만인지적을 뽐내듯 숙영막사 입구를 지키고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