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챕터21. 불태우다 (5)
조선군은 숙영지를 사방으로 포위하고선, 손으로 과실즙을 짜내듯 우악스럽게 압박했다.
수가 압도적으로 부족하니 적진을 사방팔방으로 쪼개서 하나씩 쓸어 담는 방법도 있지만, 조선군은 다른 방법을 택했다.
개개인의 실력을 바탕으로 사방에서 포위.
직접 창칼이 맞부딪치는 전열을 최대한 좁게 만들고, 우악스럽게 힘으로 찍어 눌러서 적 지휘부를 무너뜨리는 것.
기습에 정신을 못 차리는 북평군이 장군기와 지휘기를 찾아 뭉쳐들 때면, 기사대와 연대기병이 늑대 떼로 변신해 달려들어 해체시켰다.
그리곤 계속 압박.
북평군은 피와 살점을 토해내며 점점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더 이상 압착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일부러 비어 놓은 남쪽을 향해서, 두서없이 패주를 시작한 것.
하지만 이곳은 조선군이 선택하고, 불길을 이용해 북평군을 유인한 전장 아닌가.
땅은 탄탄했고, 시야는 트였으며, 주변에 야산이나 숲, 전답 따윈 없다.
그저 작은 내천과 구릉만 줄줄이 이어졌으니... 패퇴한 적이 도망쳐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기병이 날뛸 수 있는 최고의 상황이 만들어진 거지.
지금부턴 전투가 아니라 사냥이 펼쳐지게 될 거다.
“어찌할까요?”
“2리까지만 추격하고 돌아오도록. 포로를 잡으면 좋지만 욕심낼 필요는 없다. 대신 갑옷과 무기는 최대한 수거하고.”
“옙!”
명을 받은 전령들은 재깍 연대장과 대대장을 향해 달려갔다.
한바탕 시원하게 싸운 탓일까?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이순몽은 연대를 이끌지 않고 연오랑 곁에 남아 있었다.
“왜?”
“이 정도라면, 북평으로 가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서라.”
연오랑은 자신만만한 이순몽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왜 남았나 했더니, 그를 설득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게 공명심인지 자신감인지, 아니면 그냥 해본 말인지 모르겠다만... 택도 없는 소리다.
“이 정도 숫자론 북평 함락은커녕, 온 사방에서 밀려온 북평군에 포위될 거다.”
“그래도 질 것 같진 않습니다만...”
이순몽은 연오랑의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내던졌다.
지금 보라. 아무리 기습을 했다지만, 오천 대 이만이 싸웠는데도 조선군의 피해는 경미하기 그지없다. 북평부 정예병과 싸운다고 해도 과연 쉽게 무너질까?
‘그럴 리가.’
이순몽은 기사대 혼자서 이천이 넘는 장창방진을 박살내는 걸 봤고, 연대기병이 양떼에 파고든 호랑이처럼 날뛰는 걸 직접 봤다.
자신감이 하늘 끝까지 차올라, 금군이건 뭐건 다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건 그럴지도 모르지만, 굳이 애꿎은 피해를 볼 필요는 없지. 보급도 그렇고... 약탈로 해결될 리가 없어.”
“...”
“쓸데없이 적을 만들 필욘 없다. 여긴 중국이다. 몽골이나 여진과 달라. 우리가 아무리 강성해도, 중국놈들은 우리에게 쉽게 복속하고 고개를 숙이지 않을 거다.”
“음...”
이순몽은 비수처럼 날카로운 연오랑의 말에, 행복한 망상에서 깨어나 냉혹한 현실로 되돌아왔다.
명이 망하고, 운석핵꿀밤으로 천명을 잃어버린 중국이라지만, 그래도 여전히 중국은 중국.
나라가 없어지고 중앙정부가 없어진 거지, 중국이 없어진 게 아니다.
지들끼리 싸울지언정, 지금껏 속국이라고 무시하던 조선에 쉽게 고개 숙일 리가 있나. 포로로 끌고 가는 것과 전혀 다른 일이지.
“그리고... 굳이 남 좋은 일을 해줄 필요는 없잖아? 균형을 맞춰야지. 균형을.”
“...!”
연오랑은 늑대떼처럼 온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연대기병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고, 이순몽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며 행간을 읽어 내려갔다.
“요동과 산동 때문이군요.”
“어.”
‘음...!’
이순몽은 연대장이기 전에, 조정에서 일한 중신 아닌가. 돌아가는 정세를 떠올리며 열심히 조각을 맞춰갔다.
지금 북평부는 산동과 요동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로 강성했다.
그래서 거용관을 무너뜨려 북원잔당을 끌어들이고, 북직례를 몽골의 놀이터로 만들 계획을 세웠지.
그런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조선군이 심대한 타격을 주면, 북평부가 아예 셋에게 눌려버릴 지도 모른다.
물론 북평부가 그 정도 타격을 입으려면, 조선군도 만만치 않게 희생당할 거고.
“북원잔당이 얼마나 해줄지가 문제군요.”
“문제는 무슨...”
연오랑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갔다.
“중국물품을 공급하던 칼간이 없어진 이상, 그 놈들은 북평부를 약탈하지 않곤 못 버틸 거다. 또 한(칸)의 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섬서와 초원에 즐비한데, 항명출신 만호장이 힘을 키우는 걸 봐줄 리가 있나. 걔들은 지들 살기 위해서라도 산서와 북직례를 해마다 짓밟게 될 걸?”
“예...”
“그러니 쓸데없이 욕심 부릴 필요 없이, 거용관을 빨리 무너뜨리는 게 우선이다. 이번에 지원군을 박살났으니, 다음에는 더 많이 끌고 올 거다.”
“허헛...”
이순몽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빠르게 정리하고 떠난다. 가면서 한번 더 불장난을 하자고.”
“알겠습니다.”
거용관 공성전은 계획대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본래 이만이 넘는 병사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두 차례의 파병으로 지금은 칠천으로 줄어든 상태.
워낙 많은 보급물자를 비축해놔서 보급은 문제가 없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게 부족해지고 있었다.
바로 화포병.
화포야 쌓아놓은 게 많으니 어떻게든 되지만, 사상당한 화포병은 보충할 방법이 없지 않나.
수비병을 임시로 교육시켜서 화포를 쏴본다 한들, 잘못해서 자기 화포를 터치기 일 수였다.
더군다나 문루가 무너진 이후로, 조선군 포격은 더욱더 거세고 정밀해졌다.
거용관 병사들이 경험하지 못한 괴상한 흙방벽.
포대의 반격이 약해질수록 참호는 점점 거용관에 가까워졌고, 어느새 200보 거리까지 참호가 완성됐다.
거미줄처럼 점점 퍼져가는 참호를 보며, 거용관 병사들은 두려움과 암울함에 잠식되어갔지.
그들의 저항을 박살낼 마지막 한수가 등장.
그간 거용관 포대를 괴롭히던 야전화포가 산중턱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아무리 구경이 작아도 화포는 화포다.
백문의 화포가 쏴대는 철령전은 거용관 성벽 위의 포대를 모조리 침묵시키고, 나아가 두터운 거용관 성벽마저 두들기며 부수기 시작했다.
성문은 이미 오래전에 공성포에 맞아 박살났고, 거용관 성벽은 하루가 멀다하고 지진을 감내해야했지.
이렇게 포격을 쏘아내는 동안에도, 요동군은 열심히 손을 놀려댔다.
지금껏 뭐 한 것도 없지 않나.
끝이 다가오는 걸 느끼는지, 조선군과 같이 참호를 파기 시작하며 200보 거리에 있던 흙방벽을 100보까지 더 전진시킨 거지.
“궁병을 준비할까요?”
“글쎄요...”
요동군 사령관 고준의 물음에, 김을화는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적이나 우리나 궁병이 의미가 있겠습니까? 차라리 운제라면 모를까.”
“끄음...”
몸이 살짝 달아오른 고준은 의견을 내보고 싶건만, 김을화의 말이 틀린 게 없어서... 그저 끙끙 앓는 소리만 냈다.
포격전을 주고받고 있는데, 성벽 위에 병사를 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살아 있는 과녁이 될 뿐이다.
반대로 거용관이 성벽에 병사를 올리지 않으면, 연합군 또한 궁병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엔, 운제와 사다리차를 동원해 바로 성벽을 점령하는 게 낫지.
그런데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성벽이 무너지겠습니까?”
“무너지긴 분명 무너질 겁니다. 이미 여기저기 이가 나가지 않았습니까.”
거용관은 정말 더럽게 튼튼해서, 수백발의 포탄과 철령전을 얻어맞고도 아직도 버티고 있었다.
물론 군데군데 부서진 곳도 있지만, 아예 지반이 보일 정도로 폭삭 무너진 곳은 없었지.
그래도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 다른 문제라면...
‘성벽은 저게 하나가 아니고, 무너뜨린다 한들 포대가 전부 부서진 게 아니라는 거겠지.’
김을화는 욕이 절로 나오는 거용관을 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협곡 사이에 파묻힌 거용관이니, 당연히 양쪽은 산에 반쯤 걸쳐 있다.
오래전부터 산 양측면을 평평하게 깎아 방어진지를 만들었고, 첫 번째 성벽이 부서져도 측면에서 포격과 사격을 이어나갈 수 있지.
그게 끝이 아니다.
첫 번째 성벽을 넘어가면, 그 뒤에 첫 번째 성벽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두 번째 내성벽이 존재하는데... 이걸 뚫으려면 또 포격전을 해야 한다.
여기선 참호를 파고 흙방벽을 만드는 것도 쉽지 않으니, 조선 포병의 피해가 발생할 게 분명.
이건 사람을 밀어 넣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터라, 고준이나 김을화나 자신만만하게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음... 여기까지 왔는데도 답답하네.”
“과연 천하제일웅관이라 이거죠.”
“그 말이 맞다.”
최해산, 박강, 황보인은 이제 거용관 성벽이 눈으로 보이는 코앞에 서서, 물끄러미 피 흘리는 거용관을 바라봤다.
지난 수백년동안 북방을 막아온 거성답게, 결코 쉽게 속살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성벽을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고서야, 시야도 포각도 나오지 않겠지?”
“예. 성벽 위에 올리는 게 최선이겠지만, 저 무거운 녀석을 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고... 적이 그걸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박강의 말에 황보인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구겨졌다.
공성포가 거용관 성벽에 올라가기만 하면, 내성벽이든 양측면의 포대든 뭔 상관이냐.
죄다 박살낼 수 있을 텐데, 올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
이들의 착잡한 마음을 대변하듯, 저쪽 먼 하늘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들리던데, 못 들어 보셨나요?”
“...?”
박강의 말에 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용관 포대는 이미 후퇴해서 요 며칠간 우리만 쏴댔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우리도 안 쏘고 있는데... 어디서 굉음이 들리는 것 같아서 말이죠.”
“...?”
“메아리를 잘 못 들은 거 아닌가?”
“그런가... 다른 화포병들도 들었다고 했는데.”
박강이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황보인은 착호군에 있으면서 녀석을 오래 봐오지 않았나.
실없는 소리를 할 녀석이 아닌 터라,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애매했다.
적도 안 쏘고, 자신들도 안 쏘는데, 대체 누가 화포를 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고민은 한방에 해소됐다.
“와아아!!”
“오!”
저 먼 곳에서부터 함성소리가 퍼지기 시작했고, 영문을 몰라 하는 셋에게 정찰기병이 재깍 달려왔으니까.
“장군! 별동대가 대승을 거뒀습니다. 사령관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
셋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재깍 발을 놀려 후방으로 달려갔다.
연오랑이 이끄는 별동대가 대승을 거뒀다? 더 말할 필요가 있나. 분명 박강이 들었던 괴상한 소리와 관련이 있을 거다.
황보인이 사령관 막사에 다가가자, 이미 거용관을 함락시킨 분위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 뿐일까? 막사 옆 한쪽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이들, 혹은 잔뜩 구겨져 얼굴을 들지 못하는 이들이 주저앉아 있었다.
비갑을 낀 찰갑을 입고 있는 걸로 보아, 딱 봐도 북평부 포로인 것 같은데... 대체 누굴까?
황보인은 황급히 눈을 돌려 하급지휘관들을 찾았지만, 그들은 그저 눈짓으로 얼른 안으로 들어가보라고 말할 따름.
“왔나!”
황보인이 들어서기 무섭게 환호성이 터졌고, 이곳에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인물.
별동대에 속해있었던 4연대장 조비형이 재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모두는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듣지만 다시금 흥분해서 목청을 높였고, 황보인의 두 눈은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허면...! 지금 반대편에서 군수사령관님께서 포격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렇네. 남구는 물론이고 보권성 마저 쑥대밭으로 만들었지. 자네가 성벽이 무너지는 걸 봤어야 했는데...!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하하!”
“아...!”
황보인은 그간 품어왔던 요상한 의문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갔다.
남구와 이곳은 거리가 꽤 떨어져 있어서, 화마에 휩싸인 걸 알지 못했다.
그저 하늘이 유난히 검게 보인다 했지만, 포격으로 인해 난장판이 돼서 그런 줄 알았지.
하지만 별동대는 화약을 이용해 보권성의 성벽을 폭파시키고, 그 거대했던 보급도시를 깡그리 불태워버렸다.
또한 북평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겨뒀던 관도와 전답, 초지를 다시 한 번 싹 불태웠다.
그리곤 조비형을 통해 그간 사로잡은 북평부 장군 및 장군수급을 보내고, 별동대는 보권성 화포병을 회유해서 거용관 반대편 성문을 공격했다.
박강이 들었던 정체 모를 소음은 다름 아닌 화포 소리였던 거지.
“허면...?”
“거용관은 이제 사면초가지요.”
“오호라!”
“그럼. 그럼.”
보권성과 이어지는 거용관 후방은 당연히 방어가 취약했다. 수비병도 거의 없고, 포대도 없고, 성벽자체도 낮고 약했지.
보권성에서 끌고 온 중국화포가 50문이 넘어가는데, 그걸 얻어맞고서 과연 얼마나 버티겠는가.
“그래서 적장을 이렇게 데려왔습니다. 사령관님께선 적들에게 항복을 권하라 하셨습니다.”
“조건은?”
“여기 있습니다.”
조비형은 재깍 둘둘만 서류뭉치를 내밀었고, 모두는 빠르게 읽어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심지어 옆에 엉거주춤하게 껴 있던 고준조차도 읽을 기회를 얻었다.
“지휘부만 항복하면 병사들을 전부 풀어준다. 나아가 거용관에 사는 백성들에겐 선택의 기회를 준다?”
거용관에는 주둔군들 말고도, 주둔군을 보조하는 일반 백성들이 대략 삼천명 정도 살고 있었다.
반평생을 갇혀 살아야하는 이들 처지도 좋은 건 아니니, 조선군의 제안에 흔들리지 않을까?
“예. 조선으로 갈 사람은 따라가고, 남을 사람은 남겨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대신 거용관의 보급품은 건드릴 수 없지요.”
“흐흐.”
“하하!”
황보인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거용관에는 보권성보다 더 많은 보급물자가 쌓여 있지 않나. 그걸 다 털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어깨춤이 절로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