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챕터21. 불태우다 (6)
“음...”
“부족할지도 모르나, 어찌됐건 거용관을 무너뜨릴 수 있지 않소? 또한 지휘관급 포로는 전부 그대가 데려갈 수 있으니, 그리 나쁜 조건이 아닐 듯 하오만.”
“끄응...”
고준은 김을화를 비롯해, 조선군 장군들의 눈빛을 받으며 신음을 흘려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껴진다.
‘너희는 와서 한 것도 없으면서, 뭘 그렇게 많이 받아가려고 하는 거냐?’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다.
“전리품은 그간 나름 챙겼을 테고, 그대들에게 더 중요한 건 명분일거라 생각되네만... 상도의 소식은 들었지 않소?”
“예...”
고준은 괜히 찔리는 것 같아 말을 흐렸다.
요양파 요동군은 북원의 임시수도였던 상도를 공략했고 성공했다. 하지만 초원중부 북원잔당의 맹렬한 반격에 휘말렸지.
이유는 별거 없었다. 그냥 욕심을 부려서다.
상도를 기습한 후에 적당히 털어먹고 후퇴했으면 문제없었겠지만, 너무 오래 눌러 앉자 북원 만호장들도 생각을 달리 먹고 요동군을 적극적으로 상대하기 시작.
그래서 지금. 일진일퇴의 공방을 이어가며, 요양파 요동군은 요동으로 조심스럽게 후퇴하는 중이었다.
상황이 이러니, 고준에게는 “너도 욕심 부리다가 요양파 꼴이 날 수 있다.”라고 들릴 수밖에.
“상도와 이곳은 지척일세. 요양파가 후퇴한 이상, 초원중부의 만호장이 이곳에 관심을 가질지도 모르지. 우린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대들은 엮이고 싶은가?”
“음...”
지금 만호장들도 살짝 걱정되는데, 그들보다 더 거대한 부락이 상도에 진출한 김에 이곳을 보고 입맛을 다신다면?
안 그래도 포로들을 조선으로 옮기기도 바쁜 조선군 입장에선, 초원중부의 만호장들과 부딪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요양파가 병력을 상실한 이상, 그대들 병력이라도 보존하는 게 더 이득이지 않나?”
고준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고, 조선군은 다시금 축제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옆에 있던 요동군도 마찬가지다.
지휘부야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겠지만, 일반 병사들이야 빨리 전쟁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최고니까.
조선,요동군이 오늘만큼은 불을 환하게 밝히고 술을 퍼먹고 있는 동안, 반대로 거용관은 충격에 휩싸였다.
항복사절로 무려 보권성주와 북평부 지원군 장군이 왔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여기서 굳건히 지키고만 있으면 반드시 지원군이 온다!” 이 믿음 하나로 수성하는 건데... 이게 깨졌으니, 안 그래도 떨어지던 사기는 땅을 뚫고 들어갈 정도로 가라앉았지.
거용관 수비병들은 조선군의 제안에 혹하기 시작했고, 결국엔 거용관 사령관인 진자춘 도지휘사에게 압박이 들어갔다.
부하들이 그의 목을 쓱싹해서 가져다 받치진 않겠지만, 그래도 밤잠을 설칠 정도는 된 거지.
이틀 후.
사기가 오른 조선군은 더욱 강력한 포격을 감행했고, 결국 거용관 성벽 한 귀퉁이가 완전히 무너졌다.
동시에 남쪽 성문과 성벽 또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거용관은 북쪽은 외성벽, 내성벽, 그 안의 또 내성벽으로 철저히 방비되지만, 남쪽은 외성벽만 넘으면 바로 내성으로 이어졌다.
연오랑이 이끄는 오천기병이 남쪽 외성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순간, 순식간에 내성까지 함락될 테니 황급히 항복할 수밖에.
결국 흰 깃발이 솟았고... 잘 차려입은 이들이 거용관 관주의 인印을 비단에 품고, 울분을 참으며 밖으로 나와 엎드렸다.
공성을 시작한지 23일째.
드디어 거용관을 함락시켰다.
“빨리 옮겨!”
“여기다! 여기라고!”
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이건만, 거용관은 낮처럼 밝고 낮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거용관 수비병은 자신들이 포로인 것도 잊을 정도로 정신없이 움직였고, 자신의 손떼가 묻은 모든 걸 자신의 손으로 해체해야 했다.
조선군은 보권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수비병이 상상도 하지 못할 작업에 돌입.
거용관 성벽의 축대를 모조리 뽑아내고, 성벽 밑으로 땅을 파들어 가서, 화약을 심고 성벽을 폭파시켰다.
거용관 수비병들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저 입만 쩍 벌렸지.
물론 조선군은 포로들이 노는 꼴을 봐주지 않았다.
포로들은 무너진 돌무더기를 옮겨 거용관 후방에 얕게 흐르는 내천에 전부 처박았고, 내천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돌무더기가 수북하게 쌓여갔다.
또한 북쪽에 거미줄처럼 파놓은 참호에도 성벽 파편을 파묻어, 어지럽게 파여 있던 대로를 평평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산처럼 쌓여 있던 보급품은 미리 만들어 놓은 수백대의 수레와 마차에 실려 거용관 밖으로 줄줄이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반항이 적군요.”
“죽고 싶지 않은데, 누가 개기겠어.”
“예...”
황보인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기와 갑옷을 전부 압수당했는데, 까불어봐야 얼마나 까불 수 있을까.
더군다나 남구와 보권성, 북평의 지원군이 개박살났다는 소문이 퍼진 터라, 거용관 포로들은 완전히 겁먹고 있었다.
거짓말도 아닌 게, 후방에서 나타난 조선기병은 북평군 포로 삼천명을 끌고 등장했으니까.
“어때? 수지타산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연오랑은 황보인이 “돈돈돈! 돈이 너무 많이 들어!”라며, 항상 우는 소리하는 걸 듣지 않았나.
히죽 웃으며 묻자, 황보인은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가 너무 많아서, 보권성과 거용관에 비축했던 군량은 회군하는 길에 상당부분 소모될 겁니다. 그래도 남긴 남겠지요.”
“그렇겠지.”
확인하니 거용관엔 무려 주둔군 2만명이 1년을 버틸 군량을 비축해 놨었다.
조선으로 가는 데만 한달 넘게 걸리니, 꽤 많은 양이 소모되겠지만... 그래도 남는 게 어디냐.
“화약과 화포는?”
“화포는 164문. 화약은 여기저기 쓰다보면, 거의 안남을 것 같습니다.”
“흐음...”
‘이건 살짝 아쉽네.’
이번 원정에 무려 조선군 전체의 일년치 화약을 쏟아 부었다.
산동에서 초석을 받아오지 않았으면, 기둥뿌리 하나가 뽑혔겠지.
다만... 아쉽게도 이건 보충이 안 될 것 같다. 거용관 성벽을 다 폭파시키려면, 거용관이 비축한 화약을 대부분 소모해야할 테니까.
‘실력 좋은 화약장인들을 챙긴 것만으로도 이득이니까... 욕심내지 말자.’
연오랑은 아까운 마음을 애써 눌렀다.
“그 외에 다른 건?”
“음...”
황보인은 신이난 목소리로 열심히 품목을 읊어댔고, 연오랑은 대충 맞장구를 치며 분위기를 맞춰줬다.
이리저리 주판을 튕겨보니... 원정 준비에 소모된 재원을 충당하진 못하더라도, 원정 기간 동안 소모된 재원은 채우고도 남는다.
여기에 육만이 넘는 포로를 조선으로 끌고 가니, 충분히 남는 장사가 아닐까?
“그리고 생각보다 조선으로 간다고 하는 거용관 백성이 많습니다. 대다수가 간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살기가 힘들었어?”
“그건 아니지만... 이 뒷수습을 누가 하겠습니까.”
황보인은 슬쩍 손을 뻗어 거용관 성내를 가리켰고,
“하긴...”
연오랑은 화롯불을 사방에 피어놓은 성내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북평군이 오기 전에 거용관을 무너뜨려야하니, 오밤중이지만 뻥뻥! 굉음이 터지며 성벽이 부서지고 있었다.
북평부는 이 요충지를 버릴 수 없으니, 다시 재건할 게 분명.
그 작업을 할 사람들은 다름 아닌 거용관에 살던 백성들이니... 보나마나 기나긴 노역이 기다리고 있겠지.
어쩌면 죽을 때까지. 삽질만 하다가 일생을 끝마쳐야 할지도 모르는데, 여기에 누가 남고 싶겠는가.
“장인은 많이 있지?”
“예. 대다수가 군수품을 조달하거나 수리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거용관 주둔군을 보조하던 이들이니 다들 각자 직업을 가지고 있고, 하다못해 대량취사라도 할 줄 아는 이들.
조선으로 데려가면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다.
‘남구의 장인들도 그렇겠지.’
연오랑은 계획대로 잘 된 것 같아서, 속으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중국 장인의 실력은 평균적으로 조선보다 나았으니, 시간을 들여 키워야할 숙련된 장인 수천, 수만명이 공짜로 생긴 것 아닌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헌데, 거용관이 항복할 줄 알고 계셨습니까?”
“안 건 아니고, 흔들어보려고 했지. 자기 목숨은 귀한 법이니까.”
“음...”
조선군이 회군하더라도, 보권성, 남구, 거용관. 이 핵심지역이 개박살이 났다.
누가 책임질까? 당연히 거용관주, 보권성주를 비롯한 지휘관들은 죄다 죽은 목숨인 거지. 이건 아무리 대단한 배경이 있어도, 감히 빠져나갈 수 없는 엄청난 대죄니까.
“그리고 북평부가 나름 위세를 뽐낸다곤 하나, 왕조도 아닌 그냥 군벌인데... 뭐 얼마나 대단한 충성심이 있겠어? 걔들도 속으로는 파벌이 갈리고 있을 걸?”
“그건 그렇습니다.”
중국엔 아직도 누구 하나 왕을 자청하는 이가 없고, 북평부도 마찬가지다.
연왕부의 배신자들이 하나로 뭉쳐 있지만, 그럼에도 파벌은 갈리고 있다. 얘들은 출신 자체가 문관이 아니라 무관이라서 더욱 그런 편이고.
“그런데... 약조대로 요동이 항복한 장군들의 목숨을 보존해 줄까요?”
“알아서 하겠지.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
연오랑은 누가 들었으면 기겁했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요동은 북평부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 북평부 장군들을 끌고 가자마자 목을 썰어버릴 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요양파와 심양파가 기싸움을 하는 중이니, 그 사이에 껴서 목숨을 구할 지도 모르지.
‘조선은 나중에 그걸 꼬투리 삼아서 써먹을 수도 있고.’
연오랑은 속마음을 숨기며, 먼 미래를 그려봤다.
“...”
“...”
잠시간의 침묵이 머물고... 연오랑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지막 말을 털어냈다.
“시간을 많이 벌긴 했지만,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보름 안에 북평의 지원군이 도착할 거다. 그 전에 최대한 부수고 가져간다. 밥그릇 하나까지 싹싹 털어내고, 남은 건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옙!”
황보인은 주먹을 불끈 쥐며 목청을 높였다.
*****
“음...”
살짝 밀치면 부서질 것처럼 깡마른 노인.
그는 장계를 읽으며 연신 신음을 흘려댔고, 괜히 장계를 전달한 관리만 안절부절 못하고 몸을 비틀어댔다.
생김새만큼이나 성격이 워낙 꼬장꼬장해서, 별명이 송골매 재상 아닌가. 그와 일하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지.
“전령은 한성으로 떠났나?”
“예.”
“장계는 보았을 터, 전부 사실인가?”
“용연군 대감이 허튼소리를 할 인물은 아닌 걸로 사료됩니다.”
“그건 그렇지...”
“...”
연오랑이 파격 그 자체지만 실없는 인물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알이 너무 꽉 차서, 어딘가로 튀면 거길 다 박살내서 문제다.
“허허...”
허조는 보고도 믿기지가 않아 그저 상념에 빠져들었고, 관리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아 함께 침묵을 지켰다.
‘거용관이 무너졌다. 거용관이 무너졌어...’
노신은 괜히 머리가 어지러워, 쓰러지듯 의자에 눌러 붙었다.
허조는 태조 시절에 공자에 대한 제례인 석전제례를 개정하고, 그 후에도 학당을 세워 유학을 보급하고, 불교식 제례대신 유교식 제례를 민간에 보급하려 했던 골수 유학자였다.
허나 운석핵꿀밤은 그의 가치관과 인생을 박살냈다.
평생을 유학적 원리원칙을 강조해 왔는데, 이젠 그 원리원칙의 기준이 사라졌으니... 자신의 일생이 부정당한 느낌이었지.
허조를 비롯한 ver4.0계열의 근본성리학자들은 번민과 혼란을 겪었고, 변화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하나둘씩 조정에서 입지를 잃어갔다.
낙향한다고 뭐 달라질 게 있을까.
조정에 입조했던 이들보다 더욱 보수적이었던 사학계열은, 뿌리가 드러나 허옇게 말라가고 있으니... 조정에서 밀려나는 순간, 이들은 비빌 언덕조차 찾지 못했지.
하지만 허조는 살아남았다.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서, 무책임하게 떠넘기고 갈 정도로 무던한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태조시절부터 꿈꿔 온 유학적 이상향이 허상으로 변해버렸으니... 어떻게든 자신의 과오 혹은 실책을 수습해, 새나라 조선을 일궈야하지 않겠는가.
해서 답도 안 나오는 이상논쟁에서 벗어나 현실에서 아득바득 헤엄쳤고, 그 세월이 벌써 스무해 가까이 됐다.
이젠 그 자신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보기엔 이미 충분히 개혁적인 유학자로 보였지.
그런 그에게도 거용관이 무너진 건 충격이다.
이건 그의 사상과 관계없이, 속내 깊숙이 품고 있던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다시금 깨진 거니까.
거대한 제국이었던 명나라.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 조선을 쥐고 흔들려 했던 명나라.
그 명나라의 지붕이었던 거용관이 무너졌고, 지붕을 무너뜨린 장본인이 조선이라니?
승전보가 한성에 도착하면, 환호와 함께 탄식과 충격이 한성을 가득 채우지 않을까? 허조와 비슷한 연배의 노신들은 세상이 변했다는 걸, 다시 한 번 제대로 실감하게 될 테니까.
‘우리가 만든 조선이 이제 우리 손을 떠나 완전히 홀로 서는 걸 보게 될 터... 어디로 갈지, 어디까지 갈지, 정말 모르겠구나.’
허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하지만... 먼 미래를 꿈꾸기엔 당장의 현실이 너무 바쁘다.
한가롭게 공상만 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고, 하루라도 지체했다가는 쌓이고 쌓여 일거리 지옥에 파묻힐 테니까.
“자네... 이제 적응은 다 했나?”
“...?”
“...”
관리는 무슨 뜻인지 몰라 조심스럽게 허조를 바라봤고, 허조는 말없이 대답을 종용했다.
“예... 한성과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국가대사가 저희 손에 달려 있는데, 어찌 허투루 임할 수 있겠습니까.”
“음...”
나름 모범답안을 내놓은 탓일까? 허조는 창밖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