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25화 (125/538)

125. 챕터22. 숨고르다 (1)

조선의 정치체제는 크게 육조직계제와 의정부서사제로 구분됐다.

원래 역사에선 고려 때의 조직을 변형해서 운용하면서 왔다갔다 했고, 왕권강화를 꾀한 태종은 육조직계제를 고수했지.

세종이 등극한 후엔 유학적 정치원리에 맞춰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꾀하는 의정부서사제가 운용되지만... 지금 역사에선 아니다.

지금의 세종은 궁궐에서 칼질에 매진할 정도로, 정통 유학자에서 멀어지지 않았나.

태종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 부국강병을 꾀하고 있는데, 의사결정과정에 있어서 중간단계인 의정부를 끼워 넣을 리가 없지.

더군다나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나면서, 신참인 세종을 보좌하기 위해 중신들을 삼정승으로 만들어 조언을 듣게 하려했는데...

놀고먹었어야 할 태종이 착호군을 운용하면서, 왕일 때보다 더욱 정력적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나.

세종에게 삼정승의 조언 따위가 들어 먹힐 리가 없고, 당연한 수순으로 의정부는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단맛쓴맛 다 보면서, 정승까지 올라온 대신들을 그냥 놀릴 수야 있나.

이들은 각자 개별 임무를 부여 받아 움직였다.

원래 역사보다 빠르게 삼정승에 오른 세사람.

성격이 완만해 분쟁 조정 능력이 뛰어난 맹사성은 한성에서, 임기응변이 뛰어난 황희는 착호군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허조는 호주의 이주,개발작업을 총괄하게 됐다.

원정이 시작되자 일이 너무 커져서, 의주목사와 호주절제사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얼핏 보면 허조와 의정부 관원들이 좌천된 걸로 보일지도 모르나... 호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고려 때를 통틀어도 처음 있는 국가대사 아닌가.

성공하기만 하면 승차는 따 놓은 당상이니, 좌천이 아니라 일생일대의 기회나 마찬가지.

다들 코피를 쏟아내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대감! 호주절제사가 도착했습니다.”

“알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허조는 상념을 애써 지우고, 옷매무새를 정리하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밖으로 향했다.

호주의 개발이 시작된 지 이제 고작 4개월 차지만, 하루가 다르게 커지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없던 건물이 매일같이 들어서고 있었고, 관청은 이미 완성되고도 남아서 그거로도 모자라 계속 증축되고 있었지.

“대감.”

“부원군.”

“타시지요.”

“고맙소.”

호주절제사 조윤은 허조를 이끌었고, 허조는 낯설지만 이젠 나름 익숙해진 마차에 올라탔다.

지붕과 벽이 없이 확 트여서, 푹신한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이두마차.

한성에선 보기도 힘든 마차건만, 호주에선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애용되고 있었다.

파림좌기를 점령한 원정군은, 질 좋은 목재를 이용해서 엄청난 수의 마차와 수레를 찍어내어 조선으로 보냈다.

찍어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이주해 오는 몽골인, 중국인들은 각 가호마다 마차 한 두개씩은 끌고 왔으니까.

이 마차들은 차곡차곡 쌓여 호주에서 사용되거나 의주대로를 타고 조선내지로 들어갔고, 온갖 종류의 마차들 중에서 입맛에 맞는 마차를 쓱쓱 챙겨서 관리들이 써먹고 있었지.

여긴 아직 개간되지 않은 맨땅이 많아서, 조선내지와 달리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크게 어렵지 않았으니까.

더불어 마차를 제대로 써먹기 위해선, 당연히 도로정비가 필요한 바.

원하든 원치 않든 자갈도로는 만들어지고 있었고, 호주에서부터 압록강을 따라 조선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의주대로의 북쪽 일부도 정리되고 있었고.

그렇게 정비한 자갈도로를 따라, 무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는 앞으로 나아갔다.

“소식은 들으셨소?”

“원정군 말씀이십니까?”

“그렇소이다.”

“거용관이 무너졌다고 하더군요. 허허. 거용관이라.”

조윤 또한 명나라를 기억하는 노신 아닌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호주에서 착호군을 직접 봤고, ‘설마? 정말로 성공할지도?’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거용관은 거용관 아니냐.

아무리 연오랑과 원정군이 정예라 한들, 그저 북평부의 간담을 서늘하게만 만들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북직례 북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릴 줄이야.

짐작했음에도 놀랄 일이지.

“사람이 안 그래도 많은데, 앞으로 더욱더 많아지겠구려.”

“예. 포로가 더 늘어났다고 하던데... 여진인들까지 다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큰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둘은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며, 스스로 각오를 다졌다.

파림좌기에서 출발한 이주민이 도착한 게, 벌써 일주일 전.

매일매일 천명에 가까운 몽골인, 중국인이 계속해서 밀려드는 중이고, 앞으로 한두달은 계속해서 이 상태가 지속될 거다.

또한 고려인 송환은 모두 끝난 상태지만, 몽골인과 함께 요동에 살던 남은 고려인들도 찔끔찔끔 섞여서 오고 있었지.

더 큰 문제라면... 이 이주행렬을 보고서, 또 뭔가 요상한 기류가 흐르는 걸 느낀 요동지역의 여진족들이 야금야금 조선에 귀부해 온다는 점이다.

수백호의 큰 부락은 아니지만, 수십호 정도 되는 작은 부락은 꾸준히 조선에 의탁해 왔다.

헌데 이제 거용관이 무너졌다는 소문이 여진족 사이에 쫙 퍼지면 어떻게 될까? 지레 겁먹은 여진부락이 더 많이 귀부한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골치 아프겠지.

본래 계획보다 이주민이 불어난 상태라서, 둘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후속처리에 매진하고 있었다.

“오는 길에 큰 문제는 없습니까? 재물에 혹한 여진족이 있을 법도 한데...”

“토관들이 연산관까지 순찰을 돌고 있는 터라 문제는 없습니다. 아무리 욕심에 눈이 멀었어도, 압록강변에 조선군이 우글거리는 걸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

병력을 총괄하는 조윤은 히죽 웃으며 답을 했고, 허조는 옆에서 호종하는 무관들을 슬쩍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조가 한성에서 매일같이 보던 숙위군이 아니라, 뭔가 통일된 정예병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실력은 모르겠다만, 확실히 겉으로 보기엔 기존 조선군보다 나아보였다.

“오히려 문제라면 요동인데... 특별한 일은 없지요?”

“그렇소이다. 그치들이야 아니꼽긴 하겠지만, 서로 이득이 되고 있으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이까.”

“암요. 그렇지요.”

허조의 심드렁한 발언에, 조윤은 다시금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들이 요동땅을 가로지르면서 끝도 없이 밀려드는데, 이걸 요동이 좋아할 리가 있나.

허나 그들이 뿌리는 돈이 한두푼이 아니고, 호송작업을 맡은 요동상인이 뿌리는 돈도 한두푼이 아니다. 이 행렬에 끼어들어 요동, 산동상인들 또한 곁다리로 호주로 와서 상행하고 있고.

더 나아가 원정군 본대가 회군하고 있다.

무려 거용관마저 무너뜨린 조선군인데, 그보다 못한 요양성이 감당할 수 있나.

조선군이 요동을 칠 일은 없겠지만, 눈치를 안볼 수도 없는 노릇.

해서 요동은 “불안하게 걸리적거리지 말고, 빨리 우리 땅에서 떠나라!”라고 외치듯, 오히려 호송작업을 적극 도와주고 있었다.

둘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마차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이윽고 호주를 벗어나 압록강을 따라 동북쪽으로 향했다.

지금 호주에 머무는 인원은 물경 6만에 가까웠고, 이들은 거의 노숙하다시피 호주 인근에 마구 퍼져 있는 상태였다.

뭐 가진 것도 없이 가재도구와 약간의 가축만 가지고 온 고려인들이니, 당연히 몸으로 때워서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전에는 건설기업, 지금은 착호보조군이 된 기술자와 장인들의 지도와 관리를 받으면서, 모두가 삽과 곡괭이를 쥐고 개간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 집을 만드는 건 물론이고, 동시에 압록강 인근을 개간해서 전답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지.

둘의 눈에 조선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 연이어 펼쳐진다.

이제 막 지어진 듯 생생한 빛을 뿜어내며, 도로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

한성에서도 보기 힘든 생경한 형태의 가옥이다.

중국의 사합원처럼 담벼락은 높지만, 정작 가옥은 한옥보다 높이가 낮고, 반대로 지붕은 묘하게 높고 경사지게 만들어져 있었다.

황토만큼이나 통나무가 많이 사용됐는데, 창호를 바른 문의 개수는 줄이고, 반대로 건물벽을 따라 벽돌로 만들어진 또 하나의 얇은 벽이 맞닿아 있었다.

“볼 때마다 생경하긴 한데... 요새 저런 형태가 유행한다고 하지요?”

“예. 벽을 2중으로 하는 게 외풍을 막는데 효과적이랍니다. 지붕이 높아서 눈에 쌓일 일도 드물다고 하더군요.”

“호오...”

“용연군 대감이 손을 썼다는 소문이 돌던데... 배봉마을에서 만들기 시작했으니, 아마 맞지 않겠습니까?”

“음.”

‘허허.’

또 연오랑이 튀어나오자, 허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조선에 뭔가 특이한 게 튀어나오면 보통 연오랑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나.

이젠 세종,태종 뿐만 아니라, 사정물정 아는 대신들은 연오랑이 똑똑한 괴짜라는 걸 잘 알게 됐지.

연오랑이 실험삼아 만들었던 북방식 가옥은 태종과 세종의 눈에 예전부터 들어왔고, 태종의 권유에 의해 의주를 비롯한 평안도, 함길도 지역에서 야금야금 지어지고 있었다.

호주가 개발되자,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

어차피 건물을 올릴 거면 처음부터 제대로 만들어야 나중이 편하지 않겠는가.

삼남지방의 가옥으론 북방의 외풍을 견딜 수가 없으니, 신식가옥은 모두의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모든 집이 기와집이라...”

“한성보다 나아보이지요?”

자랑하듯 묻는 조윤을 보며, 허조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추운 동네에서 초가집으로 버틸 수가 있나.

당연히 기와와 판나무로 지붕을 만들어야 했고, 기존 조선의 기와가 아닌 바닥에 깔법한 큼지막한 상판기와를 만들어 끼웠다.

어차피 보급형인데, 굳이 멋들어진 문양과 유려한 곡선미를 뽐낼 필요는 없잖아?

담벼락 너머로 삐죽 튀어나온 지붕은 투박하게 죄다 똑같은 모습이었지만... 그게 또 한편으론 통일미와 절제미를 뽐내고 있었다.

“자기장인이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소이다.”

“의주와 의주 인근에 세워진 자기기업과 제재製材기업이 무려 열세곳이랍니다.”

“음...”

“물론 망한 집안도 세곳이나 되지만, 나머지는 번성하고 있지요.”

“기업이라...”

‘또 용연군 대감이군.’

정승인 허조가 기업에 대해 모를 리가 있나. 이 문제를 가지고 조정이 시끌시끌했는데 말이다.

그는 찬성도 반대도 아닌 입장을 취했지만... 시간이 흘러 조선팔도 전체에서 성과가 나오고, 호주가 급격하게 발전하는 걸 보며 찬성하는 쪽으로 마음이 많이 기운 상태였다.

다만 그럼에도 우려를 놓지 못한 건, 조윤이 말했던 것처럼 호기롭게 기업에 도전했다가 망한 집안이 적지 않다는 점.

아무리 무역에 눈을 뜨고, 그간 지주로서 농토를 관리해 왔어도, 기업을 운용하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 아닌가.

안일하게 생각하고, 그저 탐욕에 눈이 멀어 돈을 긁어모으려고 도전한 이들은 매서운 쓴맛을 봐야했지.

‘기업내규와 자본유학...’

허조는 또 다시 쓴웃음을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새 시대에 걸 맞는 새로운 학문이자 바람이고, 기업에 대해 미숙한 조정을 대신해서 강력한 구속력을 발휘하며 기업을 영도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흐름이 조정에도 영향을 줘서, 지금껏 좌충우돌하며 길을 찾던 조정도 새로운 길을 찾아 올라타게 됐지.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이상 조선은 멈추지 못하고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으니, 정통 유학자였던 그가 꿈꾸던 세상과 얼마나 다를지... 감히 예측조차 못하겠다.

“... 사실 어쩌면 우린 쉬운 길을 찾지 못하고, 제자리만 빙빙 돌았던 걸지도 모르지요. 따지고 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윤에겐 단점보다 이점이 더 눈에 들어온 모양이다.

살짝 후회와 안타까움이 섞인 그의 말에, 허조는 비수가 가슴에 박힌 듯 아려와 말을 잇지 못했다.

변방 중에 변방인 호주에 기와집이 가득하고, 반대로 조선의 수도인 한성에 초가집이 즐비한 이유가 뭔가.

간단하다. 기와가 비싸기 때문.

원재료의 한계는 둘째 치고, 장인에 대한 취급이 개차반이니 당연히 공급자가 줄어 가격이 오를 수밖에.

허나 여긴 자기기업이 넘쳐나고, 자기장인에 대한 취급 또한 월등히 나아졌다.

오죽하면 흙덩이를 만져본 적도 없는 귀화한 여진족조차 자기기업에서 일하기를 바랄까.

이주민들의 빠른 적응을 위해 특혜를 배푼 것도 있고, 일거리가 넘쳐나는 기업은 굳이 이주민을 천민취급하며 박하게 굴 필요가 없다. 그렇게 박하게 굴다가 망한 집안이 있으니, 반면교사로 삼았고.

또한 통나무를 가공해 다양한 곳에 쓸 수 있는 재목材木을 만드는 집안이 생길 줄,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농본주의를 주장하던 허조에겐 통렬한 비판이나 마찬가지.

장인을 대량으로 교육시켜 키워서, 집단으로 구성하여 물량을 찍어내고, 그걸 보다 싸게 사들여 사용한다.

나랏돈을 쓰지 않고 노역과 신량역천인, 노비를 부려먹는 것보다, 차라리 돈을 쓰고 부려먹는 게 더 효율적이고 이득이라는 사실은... 조윤과 허조 뿐만 아니라, 조정관료들의 고정관념을 박살내줬지.

삐걱거리긴 하지만 어찌됐건 알아서 굴러가는 호주를 보고 있으면, 그간 아득바득 조정이 해온 일이 모래성처럼 느껴질 수밖에.

'물론 그렇다고 허무한 일은 아니었지만...'

허조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조정이 고삐를 잡아서 그나마 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나.

고삐를 풀어버렸으면, 기업과 자주화라는 이름으로 제멋대로 날뛰는 집안이 분명 튀어나왔을 테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해야겠지.'

그는 말없이 미래를 읽으며, 상념을 이어갔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