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챕터22. 숨고르다 (2)
상념에 빠진 둘을 태운 마차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새로 지어지는 마을을 지나치자, 콩과 조, 밀과 보리를 심기 위해 개간한 땅이 이어지고, 여길 지나가자 또 새로운 마을이 등장하길 반복.
계속 나아가다보니, 저 편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뭉쳐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여진족들이 단체로 모여 있었는데,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송계천(중랑천)에 만들었던 거대한 수차는 당연히 압록강변을 따라 만들어졌고, 자갈도로를 위한 자갈을 계속해서 파쇄 중이었다.
쿵쾅쿵쾅. 굉음을 내며 빙글빙글 돌아가는 수차가 꽤나 신기한 걸까?
일평생 이런 거대한 건축물을 본적이 없는 여진족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물끄러미 구경하기 일수였고, 두 사람이 순시를 나올 때마다 매번 볼 수 있던 광경이다.
“또 다른 부락인 모양이구려.”
“아마도... 자잘한 여진부락이 꽤나 많이 귀부해서, 이젠 구분하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수차를 처음 보는 것 같으니 이번에 귀부한 모양인데... 송화강 유역에서 살던 이들 아니겠습니까?”
“그렇겠지요.”
둘 다 비슷한 보고를 받았기에, 대충 입을 맞추고 넘어갔다.
쟤들이 구경한다고 수차가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본다고 기술이 유출될 일도 없지 않나.
오히려 우월한 기술력과 문명을 뽐내, 여진인들을 기죽이고 조선을 경외하게 만들면 그만 아닌가.
호위기병과 함께 움직이는 둘을 보며 여진인들이 엉거주춤 인사하자, 가볍게 받아주고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거의 반의 반나절 동안 이동하자 드디어 자갈도로의 끝이 보이고, 온 사방에서 소음과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목적지인 조선군 숙영지다.
이곳은 의주와 강계 사이의 벽동군을 마주하고 있는 곳으로, 이전까진 조선이 순찰만 하며 지나다니던 곳이었다.
먼 훗날 만들어질 수풍댐과 수풍호는 존재하지도 않은 탓에, 이곳은 압록강으로 흘러드는 온갖 지류가 어지럽게 얽혀 있었지.
의주에서 출발한 보급선단은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 이곳까지 왔고, 조선군 숙영지는 한바탕 거대한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옛 로마군의 양식이 섞여 있는 착호군 숙영지는 기존 조선군 숙영지와 비교할 수 없고,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작은 마을과 다름없지 않나.
이들이 숙영지를 짓고, 주변의 맹수4종세트를 소탕하고, 인근 여진족을 몰아내거나 귀부시켜 안정화시키면, 이주민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수천명이 머물 수 있는 숙영지 터는 곧 마을 터와 일맥상통하니, 제대로 된 건물만 쭉쭉 올리면 곧장 마을이 완성되니까.
숙영지 근처에 잠시 머물고 있자, 순찰을 돌던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왔다.
이곳에 있는 이들은 토관과 갑사가 전부인데, 어째 이들 또한 착호군이 사용하는 검은 깃발을 날리고 있었다.
“착호군기가 확실히 퍼진 모양입니다.”
“효과가 있기도 하거니와, 온갖 소속이 다 섞인 이들을 하나로 뭉치려면 착호군 체제가 편한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집체훈련을 할 때 편한 부분도 있지요.”
“흐음...”
조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허조는 속마음 한편에서 껄끄러움이 느껴졌다.
이건 꼭 착호군 체제가 기존 조선군 체제 위에 올라선 모양새 같아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기존의 계급과 체제로 교통정리를 하다간 끝도 없으니, 아예 새로운 체제를 뒤집어씌우는 게 더 편하지. 이 또한 임시로 편성된 부대니까.
“대감! 절제사 영감!”
“도총제都摠制, 영천군寧川君.”
“소문이 사실이오?”
숙영지를 서성이는 둘을 향해 누군가 재빨리 다가와, 앞뒤 다 자르고 곧장 질문을 던졌다.
물어볼 건 뻔하지 않나.
허조는 머뭇거림 없이 답을 던졌다.
“예. 원정군이 거용관을 무너뜨렸습니다.”
“허허! 지난날 삼한 역사를 통틀어 중국 본토를 공격한 장수가 누가 있을까. 정말 대단하오. 대단해!”
“오...!”
둘은 호탕하게 웃으며 목청을 높였고, 주변을 떠돌던 군졸 모두가 소문이 사실인 걸 알고 환호소리가 퍼져나갔다.
“하하!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참으로 아쉽구려.”
“그렇군요...”
‘하긴 사서에 남을 대업이 맞긴 하지.’
칼질하고는 거리가 먼 허조지만, 이들의 마음을 어림짐작하고선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조선 역사에 있어서, 두 번 다시 있을지 모를 대사건이 맞긴 맞으니까.
이곳에 모인 조선군 사령관인 삼군도총제 최운과 영천군 이담은 허조를 이끌며 나아갔고, 어린아이마냥 입을 놀리며 캐묻길 주저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퍼질 이야기인데 숨길 필요가 있을까.
허조는 장계의 내용을 떠올리며 조목조목 읊어갔고, 둘은 계속해서 호탕하게 웃어대며 맞장구쳤다.
그렇게 숙영지를 돌면서 이야기를 이어갔고, 그 때마다 마주치는 군졸들은 하나같이 착호군식 군례를 하며 스쳐지나갔다.
“다들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아. 경례 말이오? 편하긴 편하더구려.”
“예...”
허조의 물음에 이담은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했고, 자기가 생각해도 멋쩍은지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영천군 이담은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인 이화의 아들로, 태종이 즉위할 때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는 대가로 조정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 후로 태종을 보필하며 승승장구해왔고, 지금은 이곳에서 판군사대장을 임시로 역임하고 있었다.
착호군 체제를 적용하려면 당연히 신군율에 정통한 판군사대가 주축이 되어야 했고, 태종의 사촌인 이담은 그 자리에 딱 맞는 인물이지.
“경례에도 익숙해진 걸 보면, 착호군 체제도 익숙해진 모양입니다?”
“따지고 보면 별거 없지 않소? 솔직히 예전보다 편한 건 사실이니...”
“그렇습니다.”
“음...”
‘역시 그런가...’
조윤이 얼른 말을 덧붙이자, 허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엔 하번 중인 갑사와, 함길도의 국경을 방비할 토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토관이 모여 있었다.
그 수가 물경 팔천에 다다를 정도.
원정군과 마찬가지로 소속도, 신분도 제각각이니 당연히 미묘한 신경전과 어색함이 감돌았고, 착호군 체제와 경례는 이 미묘함을 녹여주는 윤활제 역할을 했다.
하급이라지만 이들은 모두는 관리이니 서로가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고, 생경한 경례가 오히려 서로를 대하는 예법의 기준이 된 판국이지.
판군사대장인 이담은 이걸 누구보다 잘 알았고, 분란거리가 줄어들어서 나름 만족하는 중이었다.
“훈련 상황은 어떻습니까?”
“더 말할 필요가 있겠소이까. 훈련대장이 너무 어려서 걱정이었는데, 기우도 그런 기우가 없었지요. 용연군 대감과 함께 컸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외다.”
“그렇습니까?”
“물론이외다. 그 맹랑한 녀석들이 왜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착호군으로 갔는지 아까울 지경이외다.”
환한 미소를 숨기지 않는 최운은 자신만만하게 답을 늘어놨다.
이곳에서 무기술 집체교육을 맡은 이들은, 연오랑 밑에서 어려서부터 굴렀던 하동의 기업가 청년들이다.
이들은 태종이 이끄는 착호군, 원정군, 그리고 호주에 나누어 머물면서 집체교육을 진행했고, 다들 매끄럽게 이어나갔다.
어려울 게 뭐 있겠나.
자신이 연오랑에게 배웠던 걸 그대로 알려주면 되는 데 말이다.
물론 나름 칼질을 좀 한다는 갑사와 토관들이 쉽게 허리를 굽히진 않았지만, 다들 한 대씩 얻어맞고선 냉큼 고개를 숙였지.
나아가 손에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무기를 쥐게 됐으니,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열심히 땀을 흘릴 수밖에.
일행은 순시 아닌 순시를 하며 계속 숙영지를 돌아다녔고, 이윽고 압록강변에 다다라 강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기 무섭게 꽤나 큼지막한 부두가 눈에 들어온다.
딱 봐도 새로 만든 것처럼 포석을 깔고 생나무를 엮어 만든 부두에는, 자그마한 맹선들을 타고 온 이들이 부산스럽게 내리는 게 보였다.
부두 옆엔 흡사 좌판처럼 천막이 널려 있었는데, 모여 있는 갑사와 토관 주위에는 사람들이 달라붙어 줄자를 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주변에 거무튀튀한 갑옷이 쌓여 있는 걸로 보아, 치수를 재는 모양이다.
“저치들. 일은 잘 합니까?”
“물론이지요. 땅에 금덩이가 널려 있는 꼴인데, 그걸 빼앗기고 싶겠소? 고려인 출신들을 대거 데려갔는데, 나름 잘 대해주는 모양이오.”
“다행이군요.”
‘하긴 당연한 걸 수도...’
허조는 의주의 피혁기업에서 나온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여진과의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당연히 온갖 가죽이 밀려들었고, 의주상인은 중국상인에게 보다 비싸게 팔아먹기 위해서 머리를 굴려댔다.
그 결과 생가죽 그대로 파는 것보단, 뭐라도 만들어서 파는 게 더 이득라고 판단.
나름 자체적으로 가죽장인을 구해 야금야금 완성품을 만들었고, 기업의 공인이 이뤄지자 무섭도록 확장을 거듭했다.
이후 일손이 부족해진 이들은 고려인 출신 가죽장인들에게 접근했고, 호주관리들은 망설임 없이 허락했다.
기업은 이주민을 봉급 주는 사원으로 고용해야되니, 달리 말하면 조정을 대신해서 이주민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뜻.
만약 기업집안이 실수하면 기업집안을 털어서 손해를 벌충할 수 있으니, 호주관리들 입장에선 손해 볼 게 전혀 없었지.
하지만 피혁기업이 마냥 손해만 본 게 아니다. 곧이어 금동아줄을 잡게 됐으니까.
갑사와 토관이 몰려오자, 이들 무구를 표준규격화 된 신무구로 교체하고, 제각각 난잡하게 입고 온 갑옷도 전부 검은 두정갑으로 교체 중이다.
오히려 문제라면 생돈을 날리게 된 갑사와 토관들이다.
“녹봉 대신 현물로 지급하는데... 다들 불만은 없는지요?”
“뭐... 어차피 갑사라면 갖춰야할 무구들 아니오? 무기나 갑옷도 그렇고 군마도 그렇고, 어디 한두푼 하는 물건이오? 차라리 이곳에서 싸게 구입하는 게 이득인 셈이지요.”
“...”
‘다행이군. 다행이야...’
허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정신없는데, 갑사들마저 불만을 품고 있으면 정말 골치 아파지니까.
지금 역사에선, 원래 역사보다 갑사의 수가 몇 배는 늘어난 상황이었다.
운석핵꿀밤 이후, 태종은 자주화라는 이름을 내건 반란을 몇 번 겪었다.
당연히 중앙군을 강화하기 위해 갑사를 대거 모집했는데, 이는 지방세력을 약화하는 한편 문호를 열어주는 유화책의 일환이었지.
허나 빈약한 조선의 재정으로 이걸 감당할 수 없었고, 수십년 후에나 벌어져야할 갑사의 체아직 전환이 벌써 이뤄졌다.
상하번을 나눠서 근무하고, 근무일수에 맞춰 녹봉을 지급하는 형태를 택하게 된 거지.
문제는 이곳엔 하번 중인 갑사들도 소집됐고, 당연히 얘들 녹봉을 줘야할 것 아닌가.
돈 나갈 곳이 너무 많은 조정은, 녹봉 대신 무구와 원정을 통해 얻은 군마를 주는 걸로 대체했는데... 다행이 별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
“말 가격이 떨어져서 걱정했는데... 괜찮은 모양이군요.”
“아무리 떨어져도 여전히 말은 비싸지 않소. 더군다나 몽골인들이 타고 다니던 말이라 하니, 전마훈련이 오래 걸리지도 않을 테고.”
“예.”
이 일에 전문가인 최운이 그렇다고 하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화기대 1개포대가 포술연습을 하면서 동시에 전마가 폭음에 익숙해지는 걸 살펴보고,
산기슭 한자리에 모여 집체훈련을 하는 걸 살펴보고,
소대, 중대별로 찢어지고 뭉치는 전술훈련까지 살펴본 후.
허조와 조윤, 최운과 이담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 호주로 되돌아갔다.
호주에 돌아와서도 쉴 틈이 없다.
관청에 도착하기 무섭게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엔 거대한 사각탁자가 중앙에 위치했고, 육조체제와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각 부서의 담당관들이 줄줄이 앉아 있었다.
호주의 임시행정조직은 착호군을 본 떠 만들었으니, 연오랑의 색채가 듬뿍 묻어 있지 않나.
이 회의장도, 짤막하게 적혀 있는 수북한 보고서도, 모두 어색할 따름.
허나 나름 잘 굴러가고 있는데, 입맛에 맞게 바꾸자니... 아무리 그가 삼정승이라도 후환이 부담된다.
좋든 싫든 적응할 수밖에 없는 게, 허조와 의정부 관원들이었지.
허조 일행이 자기 자리를 찾아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보고가 밀려들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연건 귀화교육당을 담당하는 원민생과 이예.
원민생은 이른바 중국통, 이예는 일본통이라 할 수 있는 역관이자 외교관이었다.
하지만 명은 예전에 날아갔고, 일본은 대마도정벌 이후 교류가 끊어지지 않았나.
사역원司譯院은 잠정휴업상태가 되어, 그저 의주를 통해 구해온 중국서적을 번역하는 일만 하고 있었다.
오히려 그간 뒤로 미뤘던 여진학이 주류가 되어 연구를 진행해왔었지.
하지만 몇해전에 의주에서 귀화교육당이 신설되자, 이들은 정신없이 바빠졌다. 조선문화와 조선말, 조선법을 귀화하는 외국인들에게 가르치는 건, 사역원 역사상 처음 하는 작업이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업무량은 하늘을 뚫고 치솟아, 다들 과로사하기 직전이었다.
“관리가 더 필요합니다. 여진인 교육은 그간 해온 게 있고, 동북면의 여진출신 임시관리로 충당하고 있지만 이것도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고려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고려인이 우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지만, 언제까지 고려인에게 일당을 주며 부릴 순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들을 정식으로 임용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도가 필요할 듯합니다.”
“특히나 이제부턴 중국인, 몽골인 포로가 몰려들 텐데, 고려인 통역이 없으면 업무가 진행되지 않을 겁니다. 그간 귀화한 요동인만으로는 감당치 못할 겁니다.”
“음...”
허조는 찻잔을 입에 대기 무섭게 내려놨고,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임시관리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예.”
예의가 없을 정도로 칼 같은 대답에, 허조는 자기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