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27화 (127/538)

127. 챕터22. 숨고르다 (3)

호주 관리들은 글을 조금 아는, 고려인 행정보조 수백명을 부리고 있었다.

원정을 떠난 착호군은 군역일수를 차감 받았지만, 조선 내지에 남은 이들은 그런 것도 없지 않나.

이들은 어떻게든 군역일수를 줄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을 세우려다보니 고려인에게도 손을 뻗었다.

조정관리라면 상상도 못할 짓이긴 한데,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국이라서 묵인했으나... 이젠 그조차도 한계에 다다랐다.

허조가 답변 대신 잠시 침묵을 지키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보자.

‘일단 다 듣고 결정을 내리자.’라는 뜻을 알아차리고선, 옆에 앉아 있던 관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관리가 더 필요합니다.”

“끄응...”

똑같은 말이 나오자, 허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신음이 터트렸다.

“고려인과 여진인의 호적을 정리하고, 직업과 특기를 알아내 적재적소에 쓰는 게 효과적인 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려인을 받아들인 의주기업집안이 그걸 증명하지요.”

“지금은 우리가 고려인들을 임시로 고용하고 있지만, 이 또한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순 없습니다. 관리가 아닌데 관리처럼 행동할 수 없고, 같은 고려인끼리 분란만 야기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세부조사는 고려인을 통해 한다 한들, 결국엔 그걸 종합하고 분류할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주민의 정착 및 분류작업을 담당하고 있는 이명덕의 말에, 다른 관리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귀화교육당이 생길 땐, “뭐 이렇게 따져가면서 해야 돼? 그냥 예전처럼 귀화시키면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쏙 들어갔지.

그간 조선의 골머리를 앓게 한 화척이, 착호군이 활동한지 고작 일이년만에 왜 싹 사라졌는가.

물론 착호군이 위협적으로 다가온 것도 있지만. 걔들이 잘하지도 못하는 농사 말고, 축산기업을 만들어 목축과 수렵에 종사케 하자 앞다퉈 제 발로 관아를 찾아왔다.

그간 귀화한 여진인, 몽골인, 요동인은 어떤가.

예전이었으면 어딘가에서 분명 말썽을 부렸어도 부족한 이들이, 지금은 얌전한 고양이마냥 현청의 말을 잘 듣고 있다.

전과 달라진 점은 하나뿐.

기업의 공인도 있거니와. 천민으로 부리지 않고, 그들이 잘하고 익숙한 일에 종사케 하는 게 주효했던 거지.

더불어 이걸 통해서, 조정은 생각지도 않던 쏠쏠한 세수와 공물을 거둘 수 있었고.

“동녕위에 살던 고려인은 둔병 출신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게나 분류하는 데 어렵단 말인가?”

“명이 망한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요동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그들은 뭐든지 해야 했지요.”

“음...”

허조는 일전에 읽었던 보고서를 떠올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명은 요동을 차지하고 나서, 북원과 여진,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요동 전체를 거대한 군사지역으로 만들었고.

부족한 물자는 산동을 중심으로, 중국본토에서 지원하는 방식을 취했다.

허나 당연히 턱도 없었고, 십수만의 명군은 전부 둔병이 되어 요동일대를 개간해 반농반병 생활을 했다.

물론 지금의 요동 땅은 개똥같은 땅이라서, 생각만큼 소출을 기대하긴 어려웠지.

그런데 명이 망하고 지원이 끊기자, 어떻게 됐겠는가.

둔병의 태반은 진짜 농사꾼이 되었고, 산동의 지원이 없으면 목숨을 유지하는 것조차 간당간당했다.

이 판국에 요동이 껄끄러운 고려인을 신경이나 썼을까.

예전 명나라처럼 압박과 구속이 심하지 않으니, 고려인들은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고, 사냥도 하고, 여진과 거래도 하고 등등, 먹고 살려고 온갖 직종에 뛰어들었다.

“허면 비율이 얼마나 되오?”

“못해도 3할 이상이 농사가 아닌 다른 일을 하는 걸로 파악되었습니다. 아직 전부 확인된 게 아니니, 더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겠지요.”

“3할이라...”

‘생각보다 훨씬 많구나.’

지금 조선은 중국제 상품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기업과 장인을 키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으니 나쁜 건 아니지만... 당장 처리하기에는 많아도 너무 많다.

“송환된 고려인만 오만이 넘어가고, 원정군이 보내는 포로 또한 물경 육만에 가깝습니다. 이들을 아무런 조치도 없이 조선내지에 풀거나 관노로 삼았다가는, 분명 걷잡을 수 없는 문제가 터질 겁니다.”

“맞습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음...”

눈 밑이 시커메진 관리들의 동조에, 허조는 쓴웃음을 삼키곤 다음 관리를 바라봤다.

“허면 지금 그들을 어떻게 부리고 있지?”

“직업을 가진 장인들은 의주기업집안에 의탁해 자리 잡았고, 그 수가 대략 1할 정도 됩니다. 그 외에 조선 내지에서 올라온 기업집안들이 하나둘씩 장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평양에서 올라온 집안들은 새롭게 기업을 설립하고자 저희에게 문의한 상황입니다.”

“음...”

‘평양이라....’

“평양이 움직였으면, 개경도 움직였겠군?”

“예. 아직 정식으로 문의하지 않았지만, 개경출신들이 올라오긴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건가...?’

허조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양과 개경은 조선 제2의 도시를 두고, 엎치락뒤치락 하는 거대 도시 아닌가.

특히나 고조선의 후예를 자청하는 조선은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을 나름 대우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와 달리. 평안도와 함길도가 정치적으로 차별 받진 않았지만, 유학적 기풍이 적은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닌가.

기업의 공인 이후로 활발하게 움직일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게 막 우후죽순 생겨나진 않았다.

개경은 전조인 고려의 수도라서, 평양은 정치적 영향력이 적은 대신 인구와 물산이 많아, 한성에서 예의주시하며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어느 정도 눈치를 봤다고 생각하는지, 이번 기회를 통해서 크려는 모양새다.

나름 조정의 부담을 덜어주는 셈이니, 흔쾌히 허락할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나머지 인원은?”

“직업교육당에서 순번을 나눠 교육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습니다.”

“음.”

직업교육당은 귀화교육당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달랐는데, 후자가 조선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알려주는 곳이라면, 전자는 직접적으로 먹고살 방법을 가르쳐 주는 곳이었다.

이전 조선처럼, “자. 여기가 네 땅이다. 알아서 잘 먹고 잘 살고, 세금 꼬박꼬박 내라.” 이러면 얼마나 적응할 수 있을까.

뭐라도 가진 게 있는 이는 어찌저찌 살 수 있겠지만... 역사에 남지도 않을 평범한 귀화인들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빌빌거리다가, 결국 다 말아먹고 화척, 도적, 빈민,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물론 조선도 농사하는 법을 가르쳐주긴 했지만, 직업교육당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가르쳐 주는 건 아니었지.

이렇듯 처음에는 여진, 몽골인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일에 집중했었는데, 호주 건설이 시작되고 착호보조군이 진출하자 온갖 장인교육까지 함께 시작됐다.

도제 방식으로 일대일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흡사 학당마냥 왕창 모아놓고 이것저것 가르친 다음. 곧장 호주 개발에 투입해 실전경험을 쌓아가는 거지.

이는 분명 조선에 없던 방식이었지만, 어째 생각 외로 굉장한 반향을 일으키며 정착되고 있었다.

어쩌면... 당장 앞길을 걱정해야 하는 이주민들의, 절박한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고.

“6할은 건설작업에, 3할은 개간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 호주 일대의 개간지엔 시기에 맞춰 씨를 뿌렸으니, 적게나마 수확을 기대할 수 있겠지요.”

“건설작업을 하는 인원이 많긴 하지만, 어찌됐건 도시와 마을을 건설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뭐가 됐든 건설, 건축일을 배워두는 건 도움이 될 테니까요.”

“또한 고려인에 대해서 조정에서 따로 쓰임을 정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밑 작업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익은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있던 세 사람.

최만리, 변효문, 변효경 형제가 줄줄이 보고를 늘어놨다.

나름 꼬장꼬장 했던 최만리가 예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늘어져 있는 걸 보면... 요 몇 년간의 생활이 진짜 힘들었던 모양이다.

농사직설이 완성되자 농사직설을 집필했던 관리들은 전국으로 퍼져, 이걸 보급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특히나 기후가 서늘한 북방에선 이앙법의 가능여부를 실험 및 시험하면서, 추위와 외풍으로부터 씨앗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이랑고랑법을 전파했고 나름 효과를 거두고 있었지.

“그리고...”

최만리는 “끄응.”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켜선, 흐느적거리며 걸어가 허조에게 두툼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이주민과 함께 오늘 도착한 서신과 보고서입니다. 용연군 대감께서 보냈습니다. 아마 파림좌기에 있을 때에 보내신 모양입니다.”

“...”

연오랑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허조는 재빨리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간단했다.

“요동과 몽골의 모든 것을 담아 보낸다. 조선에 담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도록.”

이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은데...

쌀쌀할 정도로 무미건조하게 나열되어 있는 단어의 바다를 살펴보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양이 너무 많아서, 지금 다 읽기엔 벅찰 정도다.

“읽어봤나?”

“예. 용연군 대감께선 요동과 몽골을 조선에 옮겨오고 싶은 모양입니다.”

“허허...”

“흐흐...”

“어째서...”

허조의 헛기침에 맞춰서, 실성이라도 한 것 마냥 몇몇 관리들이 괴상한 신음을 흘려댔다.

또 다시 일거리 폭탄이 떨어졌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조선에 없던 혹은 다른 품종의 온갖 작물 씨앗, 꽃, 채소, 묘목, 짐승과 가축, 약초 등등. 혹시나 가다가 말라 죽을까봐, 항아리와 나무상자에 흙을 채워 심어서 보냈다.

여기에 서적, 그림, 건축자재, 주춧돌 등, 하여간 잡동사니로 보이는 것들을 잔뜩 보냈지.

이걸 가져온 몽골인들이 뭔 생각을 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오늘 온 게, 끝이 아니겠군?”

“예... 보고서가 맞다면, 매일 같이 올 것 같습니다.”

“허허...”

기겁할 소리에 모두는 다들 헛기침을 날려댔다.

“그리고... 뒷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요,금나라 시절의 유물도 함께 보내셨습니다. 석상과 불상, 범종은 뭐 그렇다 쳐도... 대체 불전에서 뜯어낸 벽화와 벽조각상, 분해한 석탑과 목탑의 잔해는 왜 보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과 달리. 불교에 대해서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허조지만, 이건 조금 당황스럽다.

‘이걸 뭐, 조선 땅에서 다시 조립해서 만들라는 건가? 이걸 왜 보냈지?’

가장 먼저 이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연오랑이 괴짜인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다.

누가 보면 원정을 떠난 게 아니라, 꼭 약탈과 수집, 탐사를 하러 간 것 같다.

“일단은... 분류해서 잘 모아두게. 용연군 대감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예.”

“가져온 작물은 다른 부서와 협력해서, 일단은 그대들이 잘 키워보게. 아마... 이 문제는 조정에서도 도움을 줄 걸세.”

“...”

안 그래도 죽기 직전인데, 또 일거리가 밀려들었지 않나.

낯빛이 시커메진 최만리는 건방지게 대답도 없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자리로 되돌아갔다.

나름의 불만 표시인 모양이다.

“식량과 무역은 어떻소? 역시 관리가 부족하오?”

“식량은 문제없지만... 관리는 부족하오.”

재정을 담당하는 안순의 대답 또한 마찬가지라서, 허조는 자기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다.

안순은 고려 때부터 활동한 노신으로, 온갖 관직을 다 역임하고 일처리가 매끄러워 조정 내에서도 재정의 달인이라 불리던 인물.

그는 호주 개척 전부터 의주의 동향을 파악하며, 경제라는 것을 어렴풋이 익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저서를 집필 중일 정도로 정통했다.

호주가 건설되면서 신입관리인 정갑손과 이견기가 합류.

하나같이 성격이 강직한 이들 아닌가.

의주, 중국상인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재정과 무역 분야는 치밀해지고 건전해졌다.

이 깐깐한 녀석들에게 잘못 걸리면,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다 작살났으니까.

원래 역사에서도 한가락 했던 인물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유학과 관계없는 새로운 분야에서도 나름 그림을 그려나가는 중이지만...

이들도 과로에 죽기 직전인 건 마찬가지다.

“원정군이 산동상인에게 포로를 넘겼고, 그 대금으로 받은 쌀이 의주에 속속 도착하고 있소. 거기에 그간 받은 쌀이 적지 않으니, 이주민이 늘어도 당분간 문제없을 거요.”

“또한 용연군 대감의 예를 비춰, 불순한 고려인을 넘기고 쌀을 받아오는 게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강남 상인이 소문을 듣고 의주로 몰려 왔으니 어렵지 않을 겁니다.”

“음...”

아무리 조선과 연이 있는 고려인이라 한들, 오만명이나 있는 데 불만 없는 이가 있을까.

‘이 말썽쟁이 녀석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단순무식한 해결책이 있었다.

‘몽골과 중국인이라면 더욱 그러할 터, 안 그래도 많으니 쭉정이를 털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허조는 내심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인종과 문화의 용광로 같은 호주에서도 적응이 힘들면, 조선내지에선 더 힘들 것 아닌가.

후환을 정리하는 게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다.

“또한 몽골과 요동갑옷, 자잘한 무구가 수천인데, 이것도 강남 상인을 통해 처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피갑皮甲이 나쁜 건 아니지만, 지금은 신형 무기와 마구. 신형 두정갑으로 전부 교체중인데... 저희에겐 굳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음...”

허조는 정갑손을 힐끔 살피고선, 그 속내를 읽어 내려갔다.

단순히 갑옷과 무기를 파는 걸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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