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챕터22. 숨고르다 (4)
갑사와 토관들의 무장이 착호군 방식으로 바뀌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새롭게 변화하고 있다.
갑옷과 무기는 당연한 거고, 과무장을 장착할 수 있는 신형 마구, 이젠 다들 기병군화라 불리는 새신발, 방탄조끼를 닮은 내흉갑內胸甲, 소수지만 몇몇이 착용하기 시작한 강철장갑.
현대의 개량한복마냥 품과 폼이 좁고, 엉덩이와 무릎, 팔꿈치에 가죽을 덧대고 주머니를 여기저기 기운 상하의 군복. 하다못해 머리에 뒤집어쓰는 마상건까지.
모든 게 교체되고 있고, 이는 자연스레 의주기업집안이 성장하고 자리 잡게 도와줬다.
단순히 의주뿐일까.
신형 두정갑을 만들기 위해선 가죽,면포,비단,철편의 기본재료에 염료를 비롯한 자잘한 부수재료가 필요하고, 기존에 없던 신무기, 군수품 제작을 위해서도 온갖 재료가 필요하다.
지금 조선은 이걸 노역과 공물로 해결하지 않고, 최대한 각 지방에서 크기 시작하는 기업을 통해 사들이거나 공물대체품으로 받는 상황.
이 모든 재료가 행상과 조운을 통해 의주로 몰려와 조립된다.
반대로 회수한 기존 군수품은 재활용되어 조선내지로 흘러가거나, 중국상인에게 넘어가 그 대가로 받은 중국상품이 조선내지로 퍼지지.
흡사 심장에서 뿜어 나온 피가 발끝까지 돌 듯.
조선 끝자락에 있는 의주를 통해서, 조정이 주도하는 큰 줄기 말고도 자잘한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정갑손이 속해 있는 산업통상당産業通商堂은 무구교체를 통해 이뤄지는 이 순환경제와 성장동력을, 전리품으로 넘어오는 온갖 중고군수품 때문에 멈추기 싫다는 거지.
차라리 그걸 다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내실을 키우자는 거다.
“강남 상인에게 파는 게, 손해가 나거나 위험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
“예. 전운을 늦게 읽고, 산동상인에게 선수를 빼앗긴 이들입니다. 안 그래도 산동상인이 요동과의 무역을 독점하는 걸 탐탁지 않아하는 이들이니, 저희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할 겁니다.”
“더불어 강남에 파는 게 가장 이득을 보는 길이니, 다른 곳에 팔진 않을 겁니다.”
강남상인들은 전부터 동북방 무역에 끼어들길 원했고, 겁도 없이 여진족과 직접 거래하다가 조선과의 거래가 한동안 끊어지지 않았나.
겨우 동아줄을 다시 붙잡은 이들은, 손해를 보더라도 조선과의 거래선을 확장하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또한 의주에 와 있는 강남상인은 조선군이 연전연승하고, 끝내 거용관마저 박살내고 회군하는 걸 알고 있다.
이게 뭘 말하겠는가.
안 그래도 조선은 여진과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는데, 앞으로도 그게 깨질 일은 없다는 뜻.
옛 시절의 속국 이미지는 와장창 박살났고, 만만한 나라가 아니라는 걸 몸으로 보여줬으니... 강남상인은 알아서 기어야지.
“나아가 전운까진 아니더라도, 강남에선 크고 작은 분란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치들은 당장 써먹을 수만 있으면, 몽골식이든 조선식이든 따지지 않고 군수품을 사갈 겁니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저희에게 요청이 왔습니다. 용연군 대감께서 넘긴 몽골갑옷이 꽤나 잘 팔린 모양입니다.”
중국이 개판된 건 의주와 호주 관리들이 누구보다 잘 알았고, 강남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복마전이다.
중국 강남이 강북보다 잘 사는 건 누구나 알고 있고, 부자 동네인 만큼 작은 구역, 지역만으로도 나름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이는 곧 온갖 군소세력의 난립으로 이어지니, 북쪽처럼 몇만명씩 싸우는 대전쟁 대신에 천여명 정도가 싸우는 소규모 분쟁은 끊이질 않고 있었다.
당연히 군수품은 언제나 환영받은 물건이다.
“허면 강남의 작황은 괜찮은 편인가? 우린 대부분의 대금을 쌀로 받는데...”
“예. 알아보니 딱히 문제는 없어 보이더군요. 산동조차도 버티고 있는데, 물산이 풍부한 강남이 문제가 있겠습니까. 작년에도 풍작이었으니, 올해도 딱히 달라지진 않을 겁니다.”
강남 세력이 서로 싸우긴 하지만, 결국은 땅따먹기 싸움이자 흡수와 병합 싸움 아닌가.
북쪽처럼 사생결단의 각오로 서로 말려 죽이려는 싸움은 하지 않으니, 어지간하면 서로의 농경지를 건드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아가 큰돈을 버는 건 대부분 무역 및 상행과 관계된 일이고, 괜히 푼돈 벌자고 농지를 건드렸다가는 폭동과 반란으로 이어진 경험이 적지 않았지.
“추려놓고 준비를 끝내놓게. 조정의 허락이 떨어지면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 외에 무역에 있어서 특이사항이 있습니까?”
“전과 달리 딱히 달라진 건 없고, 여진과의 무역은 주시하면서 경과를 봐야할 듯합니다.”
허조의 눈길을 받은 안순이 가볍게 이야기를 풀었다.
여진과의 무역은 꾸준히 흑자를 거듭하고 있었는데, 요몇년사이에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성과가 너무 커서, 오히려 조정 및 의주관리들이 더 긴장할 정도.
까닭은 역시나 소금과 절인생선이다.
몽골인들과 마찬가지로, 내륙에 사는 여진인 또한 소금과 절인생선에 끔뻑 넘어갔고, 무수한 부락이 호주까지 와서 거래를 청했다.
문제라면 이게 규모가 너무 커지는 바람에, 전에는 요동과 거래하던 해서위 지역의 여진부락도 이따금씩 방문한다는 점.
해서위 지역 바로 서쪽에는 삼만위와 개원이 있었고, 이곳은 명나라 시절부터 요동-우량카이3위-북원-여진이 모두 모여 거래하던 장소다.
명이 망한 후에는 오히려 더욱 성세를 이뤘고.
그런데 바로 코앞의 개원으로 가지 않고, 먼 호주까지 왔다는 건... 시사 하는바가 의미심장하지.
“요동이 불만을 표시할 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요... 또한 옛 명의 건주위 일대의 여진 또한 호주에 집중하고 있는 바, 동북면의 여진인들도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선 조정에서 처분을 내릴 걸세. 일단은 기존대로 거래를 계속하도록 하지. 다만 전처럼 금수품이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지.”
허조는 모든 관리들을 슬쩍 바라보며 눈치를 줬고, 다시 안순에게 눈을 돌렸다.
“또 다른 특이사항이라면... 강남 상인들이 말 값을 꽤나 세게 부르더구려. 아무래도 섬서의 영향이 큰 듯하오. 한동안은 이 상태가 지속될 듯싶소.”
“음...”
“말이라...”
“그럴 법도 하군.”
나름 군수물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그런지, 그간 잠자코 듣기만 하던 최운과 이담조차 입을 열었다.
둘은 어찌 보면 갑작스럽게 호주로 와서 조선군을 조련하는 중이고, 당연히 소문만 무성한 호주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와서 처음 겪은 날은 충격의 연속이었고, 벌써 이곳에 머문 지 두 달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이따금씩 놀라기 일 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의를 듣기만 했는데도, 살짝 머리가 아팠다.
그런 그들조차도 이번만큼은 안순의 말에 집중했다.
“그 정도로 말 수급이 심각한 상황입니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돌아가는 정황을 봐선 그렇다고 판단되오. 서안(장안)이 함락되진 않았지만, 이미 섬서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한 걸로 보이오. 그게 아니라면 산동과 강남상인이 신나서 새로운 소식을 물어다 줬겠지요.”
“음...”
“하긴.”
허풍 좋아하는 중국인이라면 약간의 승리도 대승으로 둔갑시켜 입방아를 찧어댔을 거다.
어느새 부쩍 커버린 조선의 연전연승에 배가 아팠을 테니까.
‘말이라...’
허조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며, 중국 상황을 그려봤다.
초지와 농지는 공존할 수 없다.
농사가 이득인 지역에선 농지로, 농사가 힘든 지역에선 초지를 일궜다.
기병을 키우는 게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건 둘째 치고. 중국 남부는 농사짓는 게 훨씬 이득이니 당연히 농지로 활용했지.
지금 조선이 정주민족 국가 치고는 비정상적으로 기병이 많은 거지, 원래 저러는 게 일반적이다.
아무튼... 옛 명나라 시절에는 어떻게든 북방으로부터 말을 수입했지만, 지금은 어떻게 됐는가.
섬서가 몽골과 오이라트의 영향권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거래선이 끊겼고, 섬서지방에 몽골군벌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 이 상태가 지속될 거다.
산서는 명이 망한 후로 꾸준히 북원잔당의 공격을 받아서, 다른 지방으로 말을 팔 정도의 여유가 없다.
연오랑 때문에 앞으로는 더 힘들어지겠지.
북직례는 요동과 원수사이가 되면서 거래가 끊겼고, 애들은 온 사방을 잡아먹으려는 음흉한 속내를 품고 있어서 말을 팔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이들도 앞으로 골치 아파진 건 마찬가지.
연오랑 때문에 북원잔당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됐으니, 앞으로도 말 수출은 꿈도 못 꿀 거다.
물론 땅 넓은 중국이니 여기저기서 말을 키우긴 하겠지만... 병종의 비율로 봤을 때, 기병의 비율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거지.
해결책은 역시나 요동과 조선, 여진을 이용하는 것.
허나 여진은 조선에 꽉 잡혀 있고, 요동은 앞으로도 자기 먹고 살 길이 바빠 보이니, 강남상인이 눈을 돌릴 곳은 조선 뿐.
해서 조선 내지에선 말 값이 떨어지고 있는데, 중국에선 반대로 폭등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충분히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구려. 조정에 상신하지요.”
“그게 좋을 듯 하오.”
“또 있소?”
허조의 물음에 안순은 힐끔 옆을 바라봤고, 이견기가 대신 눈빛을 받고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강남상인이 차와 다기를 구입하길 원했습니다. 그것도 대량으로.”
“흐음?”
“차와 다기를 구입한다라...”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 아닌가.
다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려댔다.
조정의 도움 없이. 조정이 예측했던 결과를 무참히 박살내며 무섭도록 성장한 분야가 있다면, 바로 차기업과 자기기업이다.
이는 연오랑이 손을 쓴 것도 있지만. 애초에 차시장은 망할 상황이 돼서 망한 게 아니라,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지로 두들겨 패서 망하게 만들었기 때문.
그 고난의 세월을 보상받듯, 하동,보성,곡성을 필두로 예전부터 차를 키웠던 지역에선 차기업이 계속 설립되어 성장해갔다.
이들은 서로 견제조차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술교류를 하며 품질과 생산량을 높여갔는데... 까닭은 별거 없다.
조선팔도 전체가 블루오션이고, 위로는 차에 맛을 들이기 시작한 여진, 차 없으면 못사는 요동, 은근히 차를 좋아하는 몽골이 있다.
어떻게든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팔아먹는 게 더 이득인데, 서로 견제를 왜 하겠는가.
이렇게 차기업이 성장하자, 자기기업의 성장도 살짝 엮여 들어갔다.
자기기업은 단순히 도자기만 만드는 게 아니다.
지금껏 공물과 공역으로 만든 고급품을 조정이 사용했다면, 자기기업이 등장하면서 가마에서 찍어낸 물건이 민간에 풀리기 시작.
최고급 품질의 도자기와 찻잔은 역으로 외국에 수출됐지만,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하급품 자기그릇, 기와, 판석, 전돌, 옹기, 벽돌 등등.
가마에서 싸게 구워서 만드는 물건들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백성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의주에 자기기업이 왕창 생겨났음에도, 망하지 않고 성장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중국상인. 특히나 강남상인은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젠 관심이 생겼다...?
‘뭔가 상황이 변했군.’
“어디에서 온 상인이지?”
“절강과 복건에서 온 이들이었습니다.”
“음...”
“옛 명나라 관요가 있던 곳이군.”
“강서의 경덕진에도 문제가 생긴 걸지도 모르겠군요.”
관리들은 이런저런 의견을 서슴없이 던졌고, 다들 이런 토의가 이젠 익숙해진 터라 품계를 막론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눴다.
당나라 때부터 꽃피기 시작한 중국 자기산업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져 왔고, 특히나 절강과 복건에는 유명한 가마터가 즐비했다.
여진, 몽골인들이라고 뭐. 자기보다 목기木器를 좋아했겠나.
나라가 망하는 혼란이 이어졌어도 자기산업은 살아남았고, 작금에 이르러선 관요지역을 장악한 이가 강력한 세력을 이루곤 했다.
차산업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은 차 없이는 못사는 나라 아닌가. 엄청나게 유명한 차 말고도, 온갖 곳에서 온갖 차를 다 생산했다.
‘차와 자기시장을 두고 한바탕 싸우는 걸지도 모르겠군.’
강남지방은 군소상인들이 조합 비슷한 걸 만들어서 세력화 된 곳이 다반사이니, 차상인과 자기상인이 한바탕 싸우는 걸지도?
“요동과 여진에 영향을 주겠나?”
“그건 아닙니다. 정황은 알 수 없으나 어찌됐건 수요가 부족해서 우리에게 손을 뻗은 거니, 요동과 여진 수출에 영향을 주진 않을 겁니다.”
“그럼 일단은 보류하고 전처럼 진행하지. 이 문제도 조정에 상신하겠네. 대신 계속 상인들을 살펴 연유를 알아보게나.”
“알겠습니다.”
“또...?”
허조가 ‘이제 그만 문제가 생겼으면 좋겠다.’라는 표정을 보이며 바라보자, 이견기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것도 특이한 건지 모르겠지만... 행상을 통해 양과 돼지의 수입이 요 몇 달 사이에 몇배나 상승했습니다. 전쟁 중인 와중에도, 올량합 3위의 상인들이 양떼를 몰고 드나들 정도니까요.”
“행상?”
“올량합 3위로부터 가축을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또 늘었단 말인가?”
“북원잔당을 털어서 얻은 전리품 아니겠습니까?”
“흠. 양이야 그렇다 쳐도, 돼지라...”
“중국과 만주돼지가 조선돼지에 비해 크긴 크지 않습니까?”
“하긴 여진인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긴 하지요.”
이견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조를 대신해 다른 관리들이 대꾸를 하고선 의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