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29화 (129/538)

129. 챕터22. 숨고르다 (5)

원나라 시절. 목축문화를 가진 몽골인들에게 최고의 식재료는 양고기였고, 가장 밑에 깔린 식재료가 돼지고기였다. 초원에선 돼지를 안 키우니까.

반대로 하층민인 한족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돼지고기라서, 중국에서 돼지고기가 인기를 끌게 됐지.

이러한 식문화는 명에 이르러서도 살짝 유지되면서, 돼지고기의 위상이 점점 높아지는 상황이었다.

소고기는 언제나 든든한 국밥 같은 존재고, 비싸서 자주 못 먹으니까.

여진인도 처지는 비슷했다.

그들 입장에선 가장 만만한 게 돼지라서, 돼지를 많이 키웠고 많이 먹었지.

조선과 다른 점이라면, 조선돼지는 조금 과장해서 사냥개 크기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중국과 만주돼지는 멧돼지에 비견될 정도로 몇배는 크다는 점?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 나서도 눈독을 안들이면 바보다.

“산동상인 뿐만 아니라, 강남상인도 소식을 들었는지 돼지를 대량으로 가져와 팔더군요.”

“생물을 바다건너와 파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중국은 돼지가 그리 비싸지 않으니, 오다가 몇 마리 죽어도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음...”

‘돼지를 수입한다... 확실히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허조는 문뜩 이런 생각이 들어, 왠지 모를 회환에 잠겼다.

목축에 집중하는 조선이라?

수십년전. 청운의 부푼 꿈을 품고 있던 시절의 그가, 꿈꾸고 바라왔던 조선의 모습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조선의 체질변화가 진행되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일전의 조선은 목축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나, 운석핵꿀밤 이후 여진과의 무역이 시작되면서 말에는 크게 관심을 보였다. 군사력과 직결되는 문제니까.

허나 처음이 어렵지, 나중에는 익숙해질 정도로 쉬운 법.

시간이 흐르며 추정할 수 없을 정도의 온갖 가축이 야금야금 조선으로 흘러들어왔고, 기업의 공인이 이뤄진 후엔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세를 기록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다른 기업은 나름의 낯선 기술과 복잡한 경영노하우가 있어야 하는 반면에, 축산기업은 그나마 익숙한 형태이기 때문.

당연히 조선이 잘 기르지 않던, 양과 돼지 또한 엄청나게 불어났지.

“헌데... 덩치 큰 돼지가 들어오는 건 나쁘지 않으나, 그걸 감당할 수 있나?”

“글쎄요...”

이견기는 그건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이, 살포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간 조선에서 돼지를 많이 못 키웠던 건, 잡식성인 돼지가 사람 먹는 걸 같이 먹기 때문.

웃긴 말일 수도 있는데, 돼지 키우려다가 사람이 굶어죽는 상황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는 걸까?

“저희보다 한빈한 여진인도 돼지를 잘만 키우는데, 저희라고 못할게 있겠습니까.”

“그건 그러합니다만...”

“그보다. 행상이 주도하고 있다고?”

“예.”

허조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견기의 첨언을 종용했다.

행상이 가축을 미친듯이 수입하는 건 하루이틀이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다만 말과 소에 편중되어 있었는데, 이젠 양과 돼지까지 손을 뻗었다.

그 엄청난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벌써 다른 사업으로 확장할 정도의 수익을 거뒀을까?

‘그건 아닐 텐데...’

“사정은 알아봤나?”

허조의 날카로운 물음에, 이견기는 괜히 모두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착호군 활동과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아...”

“그렇군.”

모두는 착호군이라는 말에, 입은 꾹 다물고 머리만 맹렬하게 돌렸다.

더 말할 필요 있나.

행상의 움직임에 태종과 연오랑의 뜻이 담겨 있는 거니, 뭔가 계획이 진행되고 있을 게 뻔한 일.

여기에 제동을 걸며 괜히 끼어드는 것보단, 일단 지켜보면서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조정에 상신하지.”

“예.”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단호한 표현에, 모두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개간 작업은 어떻게 되고 있지?”

“한성의 예를 본받아 오물수거기업이...”

허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은 또다시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

“음... 여긴 올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군.”

“예. 아버님.”

“회령도 이렇게 커질 날이 오겠지?”

“그렇지 않겠습니까.”

조선관복을 입고 있지만, 누가 봐도 여진인처럼 보이는 무리.

몇몇은 어설프게 상투를 틀었고, 그것도 아닌 이들은 빡빡 깎은 머리가 조금 자라서 애매한 밤송이 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호주의 어렴풋한 윤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몇 개월만에 무섭도록 빠르게 완성된 거대한 도시.

이들의 고향이나 저 먼 변방에선 감히 볼 수도 없는 대도시가, 개미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손에 콩나물 자라듯 쑥쑥 커지고 있다.

‘음...’

투레질 하는 말을 다독이며 아래를 바라보자, 곱게 갈린 자갈이 깔린 도로가 눈에 들어왔고... 중년인은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슬쩍 돌려 압록강변을 바라보자... 산세를 가로막을 정도로 거대한 수차가 눈에 들어오고, 쿵쾅쿵쾅 굉음을 토해내는 게 아스라이 들려왔다.

‘자갈도로라... 조선이 이런 걸 만들 정도였나?’

대지를 가르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회색선을 보며, 중년인은 머리가 뜨거워졌다.

기나긴 여진의 역사歷史에선, 존재하도 않던 자갈도로 아닌가.

호주에 처음 온 여진인들은 이 웅장하고 거대한 역사役事에, 두려움과 경외감이 절로 밀려왔다.

그뿐일까. 오히려 중년인처럼 오래전에 조선에 복속한 여진인들은 충격이 더 컸다.

그들이 알던 조선은 어느새 사라지고, 요몇년 사이에 뭔가 알 수 없는 새로운 조선이 등장했으니까.

“그런데 조선군이 왜 이곳에 집결한 걸까요? 함길도의 토관들도 모두 모였다고 하던데...”

“글쎄다. 말로는 호주를 지키기 위함이라지만...”

중년인은 더 말을 하지 않고 삼갔다.

상상만 해도 두려운 상황이 떠올랐으니까.

호주를 지키기 위해서 끌어모은 것치고는 너무 많이 모으지 않았나. 나아가 호주에 머물지 않고 압록강을 따라 개척을 이어가고, 훈련하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일대의 산짐승 씨를 말리겠다는 듯이, 미친 듯이 사냥하고 있었으니까.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중년인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읊어봤지만... 그럴 가능성이 적다는 걸 스스로도 느껴져 답답해졌다.

한참을 조용히 걷다보니 어느새 호주 인근에 다다랐고, 저쪽에 자갈도로가 산기슭으로 이어지는 게 보였다.

그 분기점에는 큼지막한 석비가 박혀 있었고, 개덕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비를 지나 조금 나아가자, 저 옆에 양지바른 산중턱에 자리 잡은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여진인, 중국인, 조선인, 고려인 모두가 뒤섞여 공사일을 하는 동시에, 이미 완성된 대웅전 근처에선 몇몇이 벌써부터 불공을 드리는 게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복색으로 보아 고려인뿐만 아니라 여진인도 적지 않게 있는데, 그 수가 아무리 못해도 반수가 넘어 보인다.

“여기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군요. 벌써 만들어진 모양입니다.”

“그렇구나.”

아들의 부러움 섞인 말투에,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저 정도라...’

“여진인이 많구나.”

“건주위 출신일 겁니다. 조선군이 요동을 쏘다니며 상행하면서 승려를 동행했으니... 다들 관심을 가졌겠지요. 저희도 그랬지 않습니까.”

“음...”

중년인은 아들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대의 조선 불교는 굉장히 수준 높았고, 나름 고등종교 아닌가.

대다수의 여진족은 원시적인 토템이즘이나 샤머니즘, 애니미즘, 잡스런 미신을 믿었고, 조선,요동과 깊게 연이 있는 부족만 불교, 도교를 조금씩 믿는 상황이었다.

이런 원시종교와 고등종교가 부딪치면, 당연히 뚜렷한 교조敎條, 문자로 정리된 교전敎典, 조직체계와 종교논리, 우아한 전도방식을 가진 고등종교가 집어 삼키기 마련.

나아가 이 작업을 조선조정이 나서서 도와주고 있으니, 여진족을 불교로 개종하는 작업은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조정이 나서서 사찰을 짓다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

누군가의 말에 모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삼갔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불교계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조정 아닌가.

있던 사찰도 죄다 박살내고 통폐합시켰는데, 이젠 갑자기 조정이 직접 사찰을 짓고 있다. 대체 무슨 변화가 생긴 건지, 짐작도 안된다.

“개덕사라.”

“아무튼. 조정이 나서서 지은 첫 번째 사찰이자, 조선 외방에 지은 첫 번째 사찰 아닙니까? 이제부터 여긴 확실히 조선땅이 되는 거겠지요?”

“그럴 거다.”

“...”

조선의 강역이 완전히 압록강 너머로 확장됐다고 도장을 찍는 격이니, 아마도 요동, 산동, 여진 모두 나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을까?

‘그만큼 중요한 곳이니...’

“주지승이 아무나 오진 않았을 터, 누가 온다고 하더냐?”

“가화대사가 왔다고 합니다.”

“가화대사가?”

중년인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짓자, 뒤따르던 이들 모두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가화는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대표적인 제자 중 한명이고, 그만큼 명성 높은 고승 아닌가. 나아가 중년인과도 나름 안면이 있었다.

“용연현에서의 회의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가화가 왔다?”

“완전히 온 건 아니고... 마무리 작업을 하러 온 거라서, 다시 돌아갈 거라고 합니다.”

“음.”

“보고 가시겠습니까?”

“아니다. 일이 바쁘니 다음에 보자꾸나.”

“예.”

중년인의 아들은 중년인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더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전과 다른 강경한 대여진정책, 착호군이라는 괴상한 군대, 압록강 너머로 진출한 조선.

무려 군사원정을 떠나 북원잔당과 거용관을 무너뜨린 조선군, 무역에 더욱 힘쓰며 여진족을 휘어잡으려는 조선.

이 모든 움직임은 여진족을 뒤흔들고 있었고, 조선과 한 몸이나 마찬가지인 두만강변의 동북면 여진족에게도 동요를 일으켰다.

지금도 그 일을 처리하러 가는 길이니, 한가롭게 옛 회포를 풀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어디서부터 일까...?’

이 급격한 변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됐나를 떠올려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주상께서 등극하고 나서부터인가?”

“예...?”

“이 모든 변화의 시작 말이다.”

“음... 그보단 대마도정벌 이후가 아닐까요?”

“백호장군...!”

대마도라는 말이 나오자, 호종하던 장년인들이 놀라서 말을 흐렸다.

‘백호장군이라... 용연군 연오랑.’

중년인 또한 살짝 놀란 가슴을 다독였다.

이미 익숙하게 들어본 이름이건만... 그럼에도 입에 올리는 게 껄끄러울 정도로 부담스럽다.

연오랑을 본적도 없는 여진족이지만, 워낙 살벌한 일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지 않나.

그의 미친 짓은 대마도정벌에 종군한 여진족을 통해 널리 퍼졌고, 매일 백호피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터라 이젠 백호장군이라고 소문났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것 때문에 그를 경계했다. 그는 연씨니까.

“연... 연씨집안이 부활한 걸까요?”

“그건 아닐 거다. 가병은 흩어진지 오래고, 세상에 남은 연씨는 용연군 한명 뿐이니까.”

“음...”

“그래도 그 연씨인데...”

“북정원정군을 이끄는 건 사실상 용연군 아닙니까. 조선으로 되돌아오면, 그 다음은...?”

다들 부인해보지만, 안도할 수 없어 말을 흐렸다.

지금껏 원과 고려에 몸담으며 연씨집안이 썰어버린 몽골인, 중국인, 여진인, 왜구가 몇인가.

다 합치면 이 거대한 압록강을 붉게 만들 거다.

무려 태조와 함께 했던 중년인과 또래의 여진인들에게, 연씨의 무서움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았지.

이제, 그가 돌아와 칼끝을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정황상 여진을 향할 가능성이 높으니 걱정스러울 수밖에.

“이제부터 알아봐야겠지.”

“예...”

“...”

고민에 빠진 이들은 개덕사를 지나 계속 앞으로 나아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중 나온 군사들을 마주했다.

“저게 새로운 조선군이군요.”

“그렇구나.”

“저렇게 무거워서 달릴 수야 있겠습니까?”

말은 건방지게 해보지만, 온갖 무구로 도배하고 있는 중기병은 그냥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린다.

전마의 엉덩이 쪽에 불쑥 솟아 있는 기창 때문에, 멀리서 보면 검은 괴물의 뿔처럼 보일 지경.

저들이 수백, 수천씩 몰려오면, 그 앞에 제대로 서 있을 이가 몇이나 될까.

“저게 바로 그 유명한 호피갑옷이군요.”

늠름하게 다가오는 조선기병들을 보며 다들 입방아를 찧어댔다.

이들은 북변의 토관을 지겹도록 봐왔고 비슷한 무장을 갖췄지만, 지금 앞에 나타난 이들은 예전과 전혀 달랐다.

더구나 호피갑옷이라니? 아는 만큼 보인다고. 호랑이의 무서움은 여진족이 더 잘 알았고, 그 호랑이를 잡아 갑옷으로 만든 정신 나간 짓에 기겁할 수밖에.

“상호군. 길은 편하셨는지요?”

“그러네.”

“가시지요. 지금 회의가 진행 중이니, 바로 뵐 수 있을 겁니다.”

“앞장서게.”

“옙!”

상호군이라 불린 이태모. 여진말로는 먼터무라 불리는 이는 조선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호주로 달려갔다.

운석핵꿀밤으로 많은 운명이 바뀌었지만, 가장 극적으로 바뀐 이들 중 한명이 바로 먼터무다.

원래 역사에서 먼터무는 태조 이성계에게 복속되어 있다가, 명이 요동으로 진출하자 조선과 명 사이를 고민하다가 결국 명으로 넘어가게 된다.

태종은 배신한 먼터무를 징치하려 했고, 위협을 느낀 먼터무는 회령을 떠나 봉주로 이주. 그 후 여진과 몽골의 위협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조선에 복속하겠다고 되돌아 왔다.

이후. 명과 조선을 계속 간보며 살다가, 올적합의 양목답올을 주축으로 한 7성야인반란이 일어나자 이 싸움에서 사망하고 만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완전히 비틀렸다.

명은 사라졌고, 태조와 태종이 화해하면서 동북면 여진족의 영향력을 보존했고, 태종은 보다 적극적인 유화책을 통해 이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먼터무는 명에게 받은 동맹가첩목아라는 이름 대신에, 아예 이씨 성을 하사받아 조선식 이름인 이태모로 바뀐 지 오래.

원래 역사에서 세종이 개척한 두만강일대의 6진 지역은, 지금 역사에선 거의 조선의 강역이나 마찬가지였고.

본래는 오음회라 불렸던 지역은 이미 회령이라 불렸고, 다른 6진 지역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이렇듯 먼터무는 계속 회령에서 살았고 지금은 여진인보다는 조선인에 더 가까워져서, 조선조정의 관리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지.

그랬던 그가 부름을 받고, 다른 여진족 부족장들과 함께 호주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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