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챕터22. 숨고르다 (6)
오늘도 여전히 번잡스런 호주를 지나 관아에 도착.
쉴 틈도 없이 곧장 회의실로 안내됐고,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허조, 조윤, 최운, 이담을 비롯해서, 그간 먼터무도 알음알음 안면을 익힌 노장들이 그를 반겼다.
허나 먼터무는 마냥 환하게 웃을 수가 없다.
이 낯선 회의실과 낯선 형태의 중앙탁자엔, 딱 봐도 뭔가 특별하고 정밀한 지도가 놓여 있었으니까.
압록강 북부를 둘러싼 천산, 용강산맥의 지형과 무수한 여진부락의 위치가 작은 나뭇조각으로 변해 박혀 있었다.
“이... 이건?”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먼터무는 더듬거리며 말문을 열었고, 그를 보며 최운이 히죽 웃으며 답을 했다.
“파저강을 비롯한 건주위 일대의 지도일세. 꽤 잘 만들어졌지?”
“언제 이걸 다 만드셨습니까?”
이런 정밀한 지도는 생전 처음 보는 물건 아닌가.
지금껏 나름 조정을 드나들었던 먼터무조차, 이런 물건은 본적이 없다.
말은 파저강 일대라고 하는데, 실상 봉주와 해서위 일대까지 전부 표시되어 있지 않나.
“특전 1대대장. 윤평이라 합니다.”
“아...! 착호군.”
먼터무도 자세히는 모르나, 착호군 체계가 워낙 특이한 탓에 유심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간 새로 조사한 정보입니다. 그리 어렵지 않더군요.”
윤평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는 자랑하듯 히죽 웃었고, 먼터무는 할 말이 없어서 그저 혀만 내둘렀다.
원정군은 떠나기 전에 특전대 3개 중대를 놓고 갔고, 이들은 지리감 소속 관원과 승려를 이끌고, 열심히 요동과 산맥 일대를 누비고 다녔다.
여진부락 영토를 돌아다니는 거지만, 사실 어려울 것도 없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상. 완전무장한 중기병 무리를 건드릴 여진족은 없었고, 이들이 싸우러 다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소금과 절인생선, 면포, 차, 자기를 싣고 돌아다녔으니... 여진부락은 귀찮게 호주나 요동까지 갈 필요 없이, 알아서 찾아오는 방문판매상을 떨떠름하게 혹은 반갑게 맞이했지.
이게 뭘 의미하는지 먼터무는 재깍 알아차렸고, 혹시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헌데...?”
‘이걸 왜 나에게 보여 주냐?’라는 속내를 담고 입을 열자.
“조선을 배신한 놈들을 징치할 때가 되지 않았나?”
“...!”
먼터무는 뭐라 더 할 말을 잃고 눈을 크게 떴다.
“북정원정군이 회군하면. 어허출의 후계자인 이만주 뿐만 아니라, 올량합 부족과 그에 동조하는 부족을 쓸어버릴 걸세.”
“...”
‘아...!’
먼터무는 혹시나 했던 상상이 현실이 된 걸 느끼곤, 말을 잇지 못했다.
조선군이 괜히 신무장을 갖추고, 천산산맥을 쏘다니며 훈련하는 게 아니었다.
“그대는 이만주와 악연이 있지?”
“...”
피비린내를 기대하는 맹수처럼,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는 최운을 보며... 먼터무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북쪽에서 새로운 전운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원정군이 거용관을 무너뜨리고 회군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음에도, 승리를 만끽할 겨를도 없이 한성의 조정은 여전히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도 정신없는 곳이었지만, 원정군이 출정한 후론...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피곤에 쪄들어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한 관원들이, 비 맞은 개처럼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니기 일 수.
이 꼴이 하루이틀이 아닌 터라... 대신들이나, 꼬치꼬치 따지고 들 사헌부 관리조차 아무 말도 못했다.
이들 또한 처지는 마찬가지니까.
조선이 꿈꾸던 적은 관리와 작은 정부는 이미 떠내려 간지 오래.
세종이 진행하고 있는 양전사업, 착호군의 개척사업, 기업의 공인에 따른 통제,감시작업, 원정군 지원과 조선군 개선작업. 의주와 호주의 개발.
이 모든 건 관리들을 일거리 지옥으로 떠밀었고, ver4.0계열의 고지식한 근본유학자들조차 생각을 고쳐먹을 정도에 이르렀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과로로 죽게 생겼으니까.
예전처럼 밑에서 알아서 하게 놔둔다? 꿈도 꿀 수 없는 소리.
이 온갖 사업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얽혀 있어서, 뭔가 하나라도 엇나가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터진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나라 바꾸려다가 나라가 망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이상, 지금 발을 빼면 마찬가지로 나라가 망할 지도 모르니... 호랑이 등에 올라탄 심정으로 끝까지 갈 수밖에.
이 난장판의 핵심은 여전히 집현전.
낯빛이 해쓱한 청년관리들은 천천히 발을 놀려, 지옥의 아귀마냥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새로운 관청으로 들어갔다.
집현전이 점점 커지고 더 이상 버티지 못하자, 육조거리 옆 민가를 허물어 버리고 거대한 건물이 들어섰다.
일하는 사람은 많은데, 부지를 넓힐 수 없으면 위로 올리는 수밖에.
그 결과. 석재와 목재, 벽돌이 온통 뒤섞여서 만들어진 3층 건물이 만들어졌다.
지금 조선에 2층 건물이 드문 건 아니다.
다만 3층까지 올리지 않은 혹은 못한 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고, 난방문제와 하중을 지탱할 재료와 기술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
하지만 북방가옥과 성채와 다름없는 석재장서각, 조선판 원룸인 관리숙소를 만든 배봉마을의 건설연구소가 있지 않은가.
기술력은 건설연구소와 조정의 선공감繕工監이 제공하고, 자재는 착호군이 한성과 경기도 일대를 박살내면서 생긴 수많은 목재, 석재가 있었고, 인력은 성저십리 외각에 생겨난 건설기업이 해결해줬다.
한성에는 아직도 빈민이나 허드렛일하는 백성이 많았고, 이들을 한성 외각에 하나둘씩 생겨난 기업이 빨아들였으니까.
ㄷ자 형태의 건물 1층은 석재로 마감되어 우중충한 회색빛 벽으로 점칠 되어 있었고, 2층은 벽돌과 나무기둥이 반씩 섞여 애매모호한 황토빛을, 3층은 목재로 만들어져 짙은 고동빛을 띄고 있었다.
근처의 육조건물과 비교하면 굉장히 어색하지만, 한편으론 홀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또 신기하고 멋있었지.
오죽했으면 한성 백성들이 이 건물을 구경하는 게, 하루 일과 일까.
아무튼. 비록 난방이 힘들어서 3층에서 거주하는 건 힘들지만, 어차피 관청이고 서적만 보관하는 곳 아닌가.
나름 굉장히 실용적이고 효율적으로 쓰이고 있었다.
그리고... 팔팔하고 호기심 많은 세종은 새로운 시대를 증명하는 것 같은 이 새로운 건물을 굉장히 좋아했고, 이따금씩 이곳에서 업무를 보기도 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대전을 본떠서 만든 회의실은 주변보다 살짝 솟아있는 단 위에 고풍스러운 책상이 위치했고, 단상 밑에는 길고 큰 탁자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기존의 예법에는 있지도 않는 방식이지만, 세종이 이게 좋고 편하다는 데 뭐라고 할까.
나아가 기존처럼 대전에 모여서 입으로 사안을 논의하기에는, 지금 사정이 너무 바쁘고 일이 많다.
꼼꼼하게 살피는 걸 좋아하는 세종이 만족하려면 그만큼 많은 보고서가 필요했고, 보고서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문답을 하려면 신료들 또한 같은 보고서와 편한 자리가 필요했지.
벌 서는 것도 아니고, 몇시진 동안 계속 서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없는 노릇.
그 결과 착호군 방식을 본받아 집현전에는 이런 해괴한 회의실이 만들어졌고, 못마땅해 하던 노신들도 이젠 나름 익숙해져서 잘 만 쓰고 있었다.
다만 분위기는 편하지 않고 활화산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언제는 안 그랬겠냐만, 오늘은 더 이상 끌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어야할 시간이 왔기 때문.
“관리를 충원하는 일에는 모두 동의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
집현전 대제학 변계량이 말문을 열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본래 대제학 자리는 겸직이었지만, 지금 조선에서 겸직하라는 말은 일하다가 죽으라는 말과 동일하지 않나.
변계량은 비대해진 집현전만 총괄하고 있었다.
“...”
그는 힐끔 단상 위에 앉아 있는 세종을 살피곤, 탁자 양 옆으로 줄줄이 앉아 있는 대신들을 빠르게 훑어 눈을 맞췄다.
이 자리엔 홀로 남은 맹사성과 의정부 사인舍人, 6조의 판서와 종5품 이상의 관원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부처장을 제외한 나머지 관원은 회의실 양쪽 벽에 붙어 있는 탁자와 의자에 앉아서 대기하고 있었지.
이런 형태의 회의가 낯선 건 당연하지만, 이 또한 익숙해지면 그만.
대신들은 말빨 좋은 세종을 이겨내지 못했고, 착호군에 파견 나가서 경험했던 이들도 있던 터라 유야무야 넘어가고 말았다.
“쟁점은 서얼금고령의 폐지와 잡과의 확대 문제입니다.”
“그건...!”
“저희는...!”
변계량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판서들이 목청을 높였고, 그간 지겹게 해왔던 회의가 다시금 반복되기 시작했다.
찬성측과 반대측은 마지막 변론을 하듯 열성적으로 목청을 높였고, 세종은 살짝 눈을 찡그리곤 잠자코 경청했다.
이내 목청이 조금 잦아들자, 세종은 손을 들어 판서의 말을 막고서 인수부윤仁壽府尹 성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 인수부는 상왕부로 운영되면서 태종과 세종의 연락책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착호군이 창설됨에 따라 엄청나게 바빠진 곳이다.
이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조선팔도를 쏘다니며 착호군과 조정을 오가야 했으니까.
세종의 몸짓을 읽은 모두는 성억을 바라봤고,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왕전하께선 전하 뜻대로 하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끝인가?”
“덧붙이시길 그때와 지금이 다르고, 지금 조선이 일전의 조선과 다르니, 과거의 예를 굳이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필요하다면 뭐든 고치라 하셨습니다.”
“아...!”
“음...”
이 쟁점에서 가장 중요했던 게 바로 태종의 의지 아닌가.
자기가 만든 서얼금고령을 자기가 없애겠다고 하니, 다들 할 말이 없어 신음만 흘려댔다.
“허나. 이는 종사와 관련된 일인데, 그리 쉽게...”
“그만.”
사헌부 대사헌 신상이 입을 열기 무섭게, 세종이 다시금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서얼금고령의 바탕에는 태종의 즉위명분도 껴 있는데, 사헌부가 그걸 건드리면 되나.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세종은 신상을 매섭게 노려봤다.
사헌부가 떠들면, 시끄럽기만 하고 뭐 되는 일이 없으니까.
“이 자리에서 또 간쟁을 하고 싶은 건가? 당장 처리해야할 일이 산더미인데, 조정을 멈추게 하고 싶은가? 뒷감당이 되나보지?”
“...”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에, 몇해간 칼질을 꾸준히 익힌 세종 아닌가.
그가 머리 좋은 건 여전했고, 이젠 거기에 무인의 기상까지 겸해졌으니... 가히 패도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세종의 위엄차고 냉랭한 목소리에, 대신들 모두는 신상을 살짝 아니꼬운 눈으로 바라봤고...
이런 경험이 적지 않은지, 신상은 그저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었다.
사헌부는 언론 및 관리의 감사와 탄핵을 담당하던 곳으로.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가 조선의 이상향이었던 만큼, 그 권한이 막강했었다.
허나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운석핵꿀밤으로 인해서 이들의 유학적 논리와 사상, 법률의 기본이자 기준이 흔들리는데, 무얼 기준으로 탄핵과 간쟁을 할까.
뭔 말만 꺼내면 “그거 잘못된 거 아니냐?” “그게 맞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 “왜 망한 명나라 법을 들먹이냐?” 등등.
사상계의 분열과 맞물려 계열간의 싸움으로 번지기 일 수였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사헌부의 간쟁과 탄핵은 힘을 받지 못했지.
당연히 세종과 태종도 이들을 못 마땅해 했다.
본래 역사보다 더욱더 왕권강화를 추구하는 둘에게는 눈엣가시나 다름없고.
그걸 떠나서 이들이 말만 꺼내면 조정이 한바탕 난리가 나서, 답도 안 나오는 말싸움만 주구장창 했으니까.
하라는 일은 안하고 조정이 올스탑되는 거지.
모두의 푸대접에 더럽고 치사해서 못살겠던 사헌부는 지금. 오히려 예조나 형조보다도 경제육전을 대체할 조선법 재정에 몰두하고 있었다.
“착호군 행정병이 되어 착호군, 원정군, 의주와 호주에 퍼져있는 서얼이 물경 천명이 넘는다. 조정과 함께 일을 한 배봉마을의 서얼 또한 천명이 넘는다. 이들은 이미 조정관리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차별을 둘 이유가 무엇인가. 능력이 부족하지 않음은 이미 증명되지 않았나?”
“...”
“서얼금고령이 제정된 지 몇 해 되지도 않았으니,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지금 폐지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세종의 말에 모두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본래 서얼금고령은 지배층인 양반관료로 올라가는 문호를 줄이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지만... 세종,태종,연오랑은 양반관료제가 양반신분제로 변하는 걸 막기 위해서, 아예 양반관료제를 야금야금 무너뜨릴 생각 아닌가.
문호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확장해서, 양반관료라고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다니지 못하게 하향평준화를 시킬 작정이었다.
서얼에게 관직을 열어주는 건, 앞으로의 물꼬를 트는 꽤나 괜찮은 패지.
“허나 군역을 대체하는 착호군과 과거를 통해 임용되는 조정관리는 상황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허면 무보수로 5년간 충실히 경험을 축적한 이들을 그저 내치는 게 조정에 이득인가? 지금 당면한 상황만 지나면, 앞으로는 관리가 더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
이조판서 허지는 세종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아닌가.
지금 추세로 봤을 땐... 앞으로는 지금보다 관리가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반대하는 건 자가당착이다.
“착호군 2기가 활동하고 있고, 앞으로도 몇 기가 더 창설될지 모르나... 과연 착호군이 얼마나 갈 것 같나? 조선팔도에 착호군에 입대할 양반사대부, 지방호족이 몇이나 되겠나?”
“...”
이어지는 세종의 물음에 모두는 머리를 맹렬히 굴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