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챕터22. 숨고르다 (7)
건국된 지 이제 막 한세대가 지난 신생아 조선은, 생각보다 지배층의 수가 많지 않았다.
착호군이 5,6년만 유지되어도, 더 이상 끌고 갈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 자제가 남아나지 않을 터.
그 때가 되면 착호군이 해체되든지, 아니면 일반 양민을 모집해야 할 텐데... 글을 능숙하게 읽고 쓰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지금처럼 행정병 임시관리로 부려먹을 공짜 노예들은 더 이상 없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길 거고, 서얼에게 문호를 열어둔다고 한들 과거를 보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나?”
“...” “...”
“그럼. 모두 찬성한 걸로 알지.”
“예.”
“뜻대로 하시지요.”
모두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떨떠름하긴 해도 알게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어찌됐건 관리가 충원되는 건 모두가 바라던 일이니까.
“그럼 과거를 어찌 볼 것인가의 문제와 잡과의 확대 문제인데...”
변계량의 말을 꺼내기 무섭게 또 다시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고, 세종은 앞에 놓인 수북한 보고서를 읽으며 대신들과 문답을 이어갔다.
“허면 대제학이 판단하기에 지금 필요한 관리의 수가 몇인가?”
“아무리 못해도 천명은 되어야 할 겁니다. 여유가 있다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천명! 그게 무슨...!”
“아무리 그래도...”
“허헉!”
변계량의 말에 모두는 기겁해서 입을 쩍 벌렸고, 호조판서 정역은 뒷목을 잡고 신음을 흘려댔다.
과거시험은 더럽게 어렵지 않나.
대과에 뽑히는 이는 서른명 정도고, 소과조차 이백명밖에 안 뽑는다. 그런데 그 5배의 관리가 필요하단 말에, 다들 기겁할 수밖에.
“모두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과거의 시제試題 또한 바뀐 지 오래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요즘 떠오르고 있는 잡학의 전문화와 특성화와 맞물려 있으니,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음...”
“끄응...”
다들 익히 겪어본 문제인 터라, 쉽게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론 왠지 모를 껄끄러움이 밀려왔다.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과거시험 또한 변화하기 마련.
어쩌면 가장 중요했을 지도 모를, 유학경전의 해석을 논하는 의疑,의義 같은 경우. 오히려 평가 요소가 되지 못했다.
이건 잘게 쪼개져버린 사상계를 그대로 대표하고 있어서, 별의 별 괴상한 주장이 다 튀어나왔기 때문.
특히 운석핵꿀밤 이후 공부를 시작한 젊은 세대는 ver4.9에 가까운 경우가 많았고, 노신들이 보기엔 “이건 뭔 개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유학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주장이 많았다.
고시古詩와 문체를 짓는 시詩,부賦는 예전과 비슷했지만, 이 또한 “망한 중국의 예를 따라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약간의 파동을 겪었고.
병려문騈儷文 문체로 글을 짓는 표表는 의미가 없어졌다.
명이 망하고 나서 사대하거나 공식조서를 쓰는 일이 없어졌고, 조선말과 중국말이 엄연히 다른 이상, 일상에서 쓰이지도 않는 표가 굳이 중요해질 이유가 없었다.
가장 중요해진 건 책策.
왕의 시무, 경의, 역사와 관련하여 제시한 문제에 대해 그 해결 방책을 진술하는 제술문인데, 이거야말로 자주화로 꿈틀거리는 조선에 가장 필요한 것 아닌가.
지금 과거 시험의 당락은 이 책에서 결정 났다.
문제라면 책 또한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바탕을 두고 실시되는데, 정작 사서오경에 대해 잘못된 점을 찾으려고 난리치는 판국 아닌가.
책에 적용되던 깐깐한 규범은 대다수가 사라졌고, 나름 굉장히 자유분방하고 현실적인 질문과 답안이 튀어나오곤 했다.
“다들 책문이 핵심인 건 아실 테고, 이걸 통해 꽤나 괜찮은 인재를 얻지 않았습니까? 지금껏 채택된 답안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현실의 경험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경우가 주를 이뤘습니다.”
“...”
“허나 현실의 경험은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바. 이를 비춰보면 모든 면에서 출중한 인재를 뽑는 건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조정이 이들을 엮어 보다 나은 방책을 구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음...”
“그건 그렇긴 한데...”
모두는 동의하면서도 낯설어, 선뜻 의견을 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바뀐 만큼, 유학적 지식만으로 관리가 되는 건 힘들어지지 않았나.
기존에는 유학이론을 익혀 과거에 합격하고, 관리가 되어 실무를 경험해서 이론과 실체를 조합하며 이른바 위정이 뭔지 알아갔지.
문제라면 이건 너무 큰 이상을 보고 만들어진 제도라는 거다.
어디에 박아놔도 능력을 뽐낼 이들을 적게 뽑아서, 열심히 굴려서 돌려막는 방식이랄까?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인재가, 미래의 재상입니까?”
“...” “...”
“지금 우리가 벌이는 사업 중에서, 사서오경과 고서의 예를 본받아 적용할 수 있는 일이 몇이나 됩니까?”
변계량의 따끔한 일침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에 관한 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찬성파나 반대파나 각자의 논리가 간파된 지 오래니까.
허나 찬성파에는 요새 새로운 패가 생겼다.
“근래에 하급관원들 사이에서 도는 이야기를 다들 들어봤을 거다.”
“...”
세종이 입을 열자, 모두는 그를 집중했다.
“배봉마을의 청년들이 몇몇 하급관원들보다 능력이 출중한 이가 적지 않다지? 그로 인해 회의감이 생긴 이들도 있고.”
“그건...”
흡사 힐난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판서들은 재깍 반문하려 했으나... 세종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물론 과거에 합격한 이의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지 않는다. 다만 고민해 볼 문제더군. 지금은 예전에 없던 새로운 사상과 학문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인 걸 모두가 알 터, 조선의 제자백가시대라 할 수 있다. 좋은 현상이지.”
“...”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만, 세종은 좋게 보고 있는 모양이다.
“용연군이 집필한 무예도감이나, 의주의 관리들이 집필하고 있는 재정학, 배봉마을의 청년들과 집현전 관리들이 함께 집필한 농업학.”
“...!”
“이 모든 건 그간 없던 학문, 아니군. 학문으로 체계화 되지 못했던 무언가겠지. 전문화와 특성화라는 걸 무시할 수 없음을, 그대들 모두가 느끼고 있지 않나?”
대신들 또한 느끼는 게 많은 터라, 딱히 반문을 던지지 못했다.
농사직설은 원래 역사보다 훨씬 두툼해져서, 아예 자기들끼리 농업학으로 명명 지을 만큼 거창해졌다.
향약집성방 또한 약학에 국한된 범위를 넘어서서 의학의 총서로 거듭났고, 새로운 의과술이 생겨나며 기존의 의학서를 뛰어넘었다.
건설연구소와 선공감 관원들은 온갖 건물을 건설하면서 건축학이라 불릴 지식을 집대성했다.
의주에선 원시적인 경제학이 태동해 재정학이라는 이름을 쓰고 튀어나왔고, 몸을 써서 무기를 사용하는 모든 방법이 담겨 있는 무예도감은 더 말할 필요도 없지.
이렇듯 전에는 개인의 머릿속에만 들어 있어서 흩어져 있던 지식들이, 하나로 뭉쳐지며 학문이라는 형태로 변해갔다.
그간 조선이 규정했던 잡학의 범위가 끝도 없이 확장됐고, 금세 민간으로 퍼져서 과거를 준비하는 유학자들조차도 이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범재 열명이 모이면 수재 한명을 뛰어넘을 수 있고, 범재 백명이 모이면 천재 한명을 뛰어넘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평범한 범재들이다.”
“음...”
“하긴...”
조정이 바보도 아니고, 배봉마을이 어째서 압도적인 성장세와 학문의 집대성을 이뤄냈는지 모를 리가 있나.
까닭은 그저 수십, 수백의 전문가들을 한곳에 모아두고. 열심히 먹이를 주며 굴려댄 결과다.
이걸 본받아 집현전 또한 미친 듯이 확장해서, 지금은 집현전 소속 관원만 거의 오백에 가까울 정도로 불어나지 않았나.
달리 말하면, 모든 걸 다 잘하는 이를 뽑는 것보다, 뭐라도 하나 잘하는 이들을 많이 뽑아서 굴리는 게... 지금 사정상 더 낫다는 뜻.
“그러니 관리는 대제학의 의견대로 뽑는다. 각 부서는 속아문과 상의해서 각자의 분야에 정통한 이들을 뽑을 수 있도록 시제를 준비하도록. 다른 분야는 몰라도 무관하나, 적어도 뭐하나 자신 있는 분야는 있어야겠지.”
“예.”
아예 전문가의 싹이 보이는 이들을 개별시험에서 뽑는 건, 그간 조선의 방식과 정반대였지만... 처지가 처지인 만큼, 다들 반문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모두가 동의하고 고개를 끄덕일 때, 공조판서 이지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거와 관련된 걸 수도 있는데... 잡직에 대한 처우를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
세종이 설명해 보라는 듯 바라보자, 이지실은 세종 앞에 놓인 수많은 보고서 중에서 하나를 골라냈다.
보고서는 착호군 방식을 따라 가로쓰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생경한 문서가 그리 낯설지 않은지 세종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한눈에 들어오는 표와 도식, 그래프가 보고서에 적용된 이상. 가로쓰기는 필연이었고, 지금 조정에선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니까.
조선에는 문무반 말고도 잡직이 따로 있었다.
이는 양반, 양민이 아닌 천민출신을 조정에 끌어들이고, 전문기술자를 조정에서 통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들은 사옹원, 상의원, 사복시, 군기감, 선공감, 교서관, 도화서 등의 속아문에 속해 있었는데... 딱 봐도 뭔가 기술직과 비슷해 보이지 않나.
거기에 지금 시대정황상 원래 역사보다 양민,천민,양반의 기준이 확고하지 않은 터라, 더욱 애매모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기업의 공인이 있고나서, 이들의 이탈이 적지 않습니다. 한성에서도 이럴 지인데, 지방에서는 어떨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음...”
“허어...”
대신들은 이지실을 보면서도, 힐끔힐끔 세종을 곁눈질하느라 바빴다. 이게 다 태종과 세종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조선은 적은 관리로 돌아가는 작은 정부를 추구했지만, 조정이 돌아가기 위해선 어찌됐건 조정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받아야 하는 바.
크게는 소금채집, 광물채광 등, 작게는 관아의 가구나 기구, 하다못해 문방사우까지.
이런 필수 용품을 공물 및 잡직, 각 관아에 퍼져 있는 관노, 신량역천인을 통해 조달받았다.
신량역천인이라는 말이 나온 것도 바로 이 때문.
농업 말고는 천시하는 풍조 탓에, 보수도 적게 주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고자 하는 양민이 누가 있을까.
허나 이 3D업무를 누군가는 해야 나라가 돌아갈 것 아닌가.
해서 거주이전, 직업선택의 자유를 빼앗고 대를 물려 직업을 이어받게 하다 보니... 양민임에도 천민취급을 당하는 신량역천인이 생겨나게 됐지.
헌데 이 기조는 기업이 등장하면서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다.
기업은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땅에서 벗어나 뭔가를 키우거나 재작해서 팔아야 하는 바.
지금 조선에 이 일을 담당하는 장인들의 대다수가 신량역천인 혹은 관노 아닌가.
기업의 성장에 따라 신량역천인과 속량된 관노가 늘어나면서, 신분계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거지.
또한 아무리 상공업을 등한시한 조선이라 한들, 돈냄새를 맡을 줄 아는 사람이 없을까.
당연히 기업이 꿀단지인 걸 알고 도전하는 이들이 부지기수고, 그들은 손쉽게 찾을 수 있고, 실력이 증명된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연오랑이 예전에 자기장인을 빼돌리며 했던 짓을, 후발 기업들이 똑같이 하고 있던 거지.
“해서, 조정의 잡직관원들이 기업으로 넘어갔다는 말인가?”
“예. 속량법이 간소해진 후로, 수많은 노비들이 양민이 되지 않았습니까. 기업집안이 대납한 후에, 봉급에서 차감하는 방식으로 사원으로 만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음...”
“끄응.”
대신들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 다시금 세종을 곁눈질로 살폈다. 뭐라 말은 하고 싶은 데, 꾹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 또한 태종과 세종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
운석핵꿀밤 이후 여러 번 반란을 겪은 태종은, 원래 역사보다 더욱 철저하게 사병을 타파하고 사노비 소유를 억제했다.
반대로 온갖 고려의 잔재를 때려 부수면서, 관노비의 수는 불려나갔지.
원래 역사에서도 이 혼란한 시대상에 맞춰 노비쟁송사건이 무수히 발생했고, 16세기는 되어서야 혼란이 일단락되고 양반 가문간의 노비쟁송이 주를 이루게 된다.
허나 지금 역사에서의 태종은 양반사대부, 지방호족을 견제하려했으니, 어지간한 노비쟁송사건은 죄다 노비의 승소로 판결나서 양민으로 풀려났다.
나아가 원래 역사에선 이 시기엔 노비의 속량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지만, 지금 역사에선 큰 공을 세우지 않아도 대가만 지불하면 가벼운 절차를 통해 속량될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양민을 어떻게든 늘려보려는 태종의 의지였고, 세종은 그 의지를 더욱 굳건히 이어받았다.
그 결과. 노비속량은 무분별하다고 할 정도로 쉽게 이어지고 있었다.
반대로 사노비의 소유는 극도로 복잡하게 만들어서, 어떻게든 말을 안 듣는 양반사대부와 지방호족을 때려잡으려고 호시탐탐 눈을 부리고 있었지.
대신들이 세종을 힐끔거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하지만 세종과 태종이 모르고 그랬을 리가 있나.
이미 오래전에 연오랑과 머리를 맞대고, 조선을 개조시키기 위해 뿌려놓은 씨앗 중 하나가 제대로 꽃을 피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