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의 소드 마스터-133화 (133/538)

133. 챕터23. 정리하다 (1)

“1차 지역으론 김제, 나주, 아산이 낙점되었고, 대략 1만명씩 나눠서 보낼 예정입니다.”

“...”

“고려인이 추수를 돕는 한편, 추수가 끝나면 양민들도 농지정리작업에 함께할 수 있으니, 올해가 지나기 전에 1차 지정지역은 모두 정리가 될 걸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건설기구 및 공구의 수급은 어찌할 것이며, 그들이 농지정리에 쉽게 익숙해지겠나?”

“이미 호주에서 개척작업을 하고 있고, 전라도로 들어오면 영택별감 왜인의 지도하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나쁘지 않군.”

“영택별감이라.”

“그들이라면 뭐...”

대신들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영택별감을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대하는 게 퍽 어색하지만, 어쨌든 이제 능력은 충분히 갖춘 이들이니까.

연오랑이 대마도에서 끌고 온 왜인포로는 지금껏 꽤나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연오랑과 그의 언질을 받은 1세대 기업은, 조정이 나서기 전에 먼저 왜인포로의 4분의 1가량을 흡수해 가져갔다.

나머지 인원 중 4분의 2는 한성으로, 나머지 4분의 1은 착호군으로 흘러갔다.

세종은 과전정리사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왜인포로를 함부로 욕심내고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영택별감이라는 임시 부서를 만들어 배속시켰다.

관노는 아닌데, 일종의 관노처럼 만든 거지.

또한 여진인조차 길들이려고 귀화교육당과 직업교육당을 만들었는데, 수가 더 많은 왜인이 예외가 될 수 없는 법.

말이 통하지 않는 왜인을 관리해야하니, 지금껏 조선에 귀화한 항왜가 죄다 소집되어 임시관리로 변해 함께했다.

이들은 매일같이 수로를 파고, 보와 둑, 다리를 만들고, 농지를 정리하고, 이따금씩 도로를 까는 일을 해왔는데... 그 세월이 벌써 2년.

이 과정 속에서 적응을 빨리 마친 이들은 가족단위로 찢어져 정착했고, 영택별감에 남은 인원이 대략 6천명 정도.

연오랑이 바라던 대로, 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목건설의 전문가이자 진짜 조선인으로 변해갔지.

그리고 지금. 경기도의 과전 정리가 끝났으니, 이제 남부로 내려갈 시간이 됐다.

“보급과 거주문제는?”

“그 또한 준비를 해뒀는데...”

허지는 세종의 물음에 열심히 답을 했고, 이따금씩 다른 대신들이 질문과 답변을 하며 논의를 이어갔다.

조선의 내륙교통망이 빈약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반대로 바닷길을 이용한 조운로 뿐만 아니라, 내륙의 강을 이용한 수로는 예상외로 발달해 있었다.

길이 개판이고, 마차도 잘 안 쓰니, 세곡稅穀과 같은 무거운 짐을 많이 옮기려면 수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으니까.

착호군조차 주둔지를 건설할 때.

무조건 강을 끼고, 수로를 통해서 수산기업의 절인생선과 의주에서 보내는 쌀, 기타 잡다한 보급품을 받았는데... 고려인 이주민이라고 상황이 다를까.

전라도에 파견나간 관리들은 양전사업의 밑그림을 그리며, 당연히 수로로 보급을 편히 받을 수 있는 지방을 1차 지역으로 선정해 놨다.

나아가 이렇게 강과 끼고 있어야 수로정리와 보의 건설이 편했고, 입지가 정해져 있는 터라, 다음 계획을 짜는 것도 편했지.

“좋다. 허면 착호군은 어떻게 되는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인수부윤 성억은, 자신을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입을 열었다.

“지금 원주 인근에 머물고 있는 착호군은 강원도 산간에 축산기업, 제재기업, 면직기업, 양잠기업에 집중. 그 외에 염료,약초,양봉,제지기업 등을 설립 중입니다.”

“...”

“고려인들은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기초 작업이 끝나면 착호군은 산맥을 따라 남하. 고려인과 영택별감은 경상도 북부에서부터 농지정리사업을 진행할 거라 하셨습니다.”

“면직과 양잠...! 드디어 결실을 보는 군.”

“예!”

“경하 드립니다!”

간만에 세종이 웃음을 보이자, 대신들 모두 함박웃음이 물들었다.

이 시기 조선에도 비단과 목화가 분명히 있지만, 마구 쓸 정도로 충분한 양을 뽑아내진 못했다.

당연히 직물은 비싼 물건이었고, 일반 백성들 중에서 옷을 철마다 바꿔 입을 만한 사람은 많이 없었지.

오죽했으면 면포를 화폐대용으로 써먹었겠나.

태종대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천운이 도왔다. 중국이 개박살이 나면서 중앙의 통제력을 잃어버렸다.

연오랑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의주의 중국상인을 통해 더 많은 목화씨와 살아 있는 누에를 구하려했고.

돈에 눈이 돌아간 중국상인들 덕택에, 돈과 시간을 들이면 흡족한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물건을 조정에선 애지중지하며 번식시키고 재배하여 품종을 개량했고, 후에 배봉마을과 협업하자 성과는 몇 배로 뛰어올랐다.

문제는... 이걸 키우고 심을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

고생고생해서 이걸 대규모로 키울 바에, 그냥 농지로 쓰는 게 이득이었다.

해서 농지로 쓰지 못하는 자투리 토지에 야금야금 키워서, 자급자족하는 형태로밖에 진행되지 못했는데...

기업의 공인과 착호군이 활동하자 사정이 급변했다.

강원도 산간지역의 기후가 혹독한 건, 이 시대도 마찬가지 아니냐.

감자, 고구마, 옥수수도 없는 시대니, 산간지역에서 키울 수 있는 작물이라고는 약간의 겨울밀과 귀리, 콩이 전부다.

착호군이 열심히 개간해 놔도 농지로 써먹을 수 없다. 운송교통망이 미흡하니 미래의 고랭지채소 같은 상품작물은, 키워봐야 내다가 파는 게 오히려 손해.

그럼 해답은 보관기간이 오래가는 상품작물 혹은 수공품, 가축을 키우는 수밖에 없지 않나.

괜히 강원도로 수만마리의 양,소,말등의 가축이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지.

더불어 농사에 집중하지 않아도 되는 기업이 등장하자, 이 개척지는 죄다 뽕나무밭과 목화밭, 닥나무밭으로 변하고 있었다.

“헌데 목화는 지력을 많이 소모하고 물이 많이 필요한 걸로 아는데, 강원도에서 가능한가?”

“반듯한 전답과 배가 드나들 조운로를 만드는 게 아니니, 산간에서도 충분히 보와 수로가 가능한 걸로 파악됐습니다. 작긴 하지만 이미 만든 보가 여럿 있습니다.”

성억은 자신의 눈으로 봤기에, 자신있게 답을 던졌다.

어찌 보면 산간지역이 더 편할 수도 있는 게...

평지에선 물이 세지 않는 땅을 찾아서 깊게 파야 보를 만들 수 있는 방면, 산에선 계곡을 찾아서 작고 원시적인 댐과 닮은 보를 만들 수 있기 때문.

“음.”

“또한 지력의 소모에 대비하여 인분거름을 생산할 채비를 이미 갖췄고, 면직기업은 축산기업과 연계하여 휴경지를 만들 예정입니다.”

“좋구나!”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에 쏙들 정도로, 적어도 계획은 나무랄 곳이 없었으니까.

착호군은 거의 움직이는 도시나 마찬가지인데, 거기서 쏟아지는 인분이 얼마나 많겠나. 당연히 오물수거기업이 등장해, 인분거름을 미친 듯이 만들었지.

더해서. 몇해간 운영한 목화밭을 휴경지처럼 만들어 초지를 형성, 축산기업의 초지와 번갈아가며 사용하면 지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

“허면 예상 수확량이 얼마나 되는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기업을 생각하면...”

이조판서 허지는 모두의 기대감이 서린 시선을 참지 못하고, 꼴깍. 침을 한번 삼키고선 말을 이어갔다.

“못해도... 내년에는 올해보다 3배의 수확량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개척지에 기업은 계속 생겨날 테니, 더욱 불어날 거라 보고 있습니다.”

“3배!”

“오...!”

“과연!”

아니나 다를까. 허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회의장은 곧장 도때기시장마냥 웅성거렸다.

지금껏 고생해온 보람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앞으로 조선을 바꿀, 작지만 아주 큰 발걸음이니까.

“좋다! 원정군이 회군해 북방의 일을 마무리 지으면, 계획대로 고려인을 내지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하도록.”

“알겠습니다.”

이조판서 허지는 꼬투리 잡히지 않고 술술 넘어가자,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 냉큼 고개를 숙였다.

개선식 문제, 북방에 나가 있는 승려들 문제, 여진인 귀화문제, 북방경락에 대한 문제, 등등을 논의했고, 슬슬 마무리 시간이 다가오자...

회의실 저편에 앉아 있던 인물이 성큼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집현전 교리校理로 승진한 정인지가 다가오자... 대소신료들은 “또 너냐?” “또 시작이냐?”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인지는 집현전에서 나름 유명한 인물이고, 신료들의 평은 좋게 말하면 창의적이고 상상력이 뛰어난 인재. 나쁘게 말하면 요망한 괴짜 녀석이었다.

다만 쉽게 무시할 수 없던 이유는. 녀석이 똑똑한 걸 떠나서, 그 유명한 연오랑과 밀접한 관계에 세종과도 나름 친분이 깊기 때문.

그러니 저 맹랑한 녀석이 엉뚱한 소리를 해도, 대신들은 별말 안하는 편이었지.

“집현전 교리 정인지입니다.”

정인지는 세종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대신들에게도 꾸벅 인사를 하고선 입을 열었다.

더불어 대신들이 지겹게 봐왔던 보고서를 또다시 쓱쓱 나눠줬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입니다.”

“무얼 말인가.”

“조선문자를 만드는 일 말입니다!”

대신 중 한명이. 다 아는 데도 모르는 척 되묻자, 정인지는 주먹을 불끈 쥐며 목청을 높였다.

연오랑은 오래전부터 한글을 만들 준비를 해왔고, 정인지는 연오랑의 수족과 같은 인물 아닌가.

집현전에 자리잡기 무섭게, 정인지는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주장해 왔었다.

대소신료들이 떫은 표정을 지은 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똑같은 이야기를 지겹도록 들었기 때문.

“일전에 영택별감이 만들어질 때부터 말씀드렸지만, 한자로는 조선말을 쉽게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왜어는 문자체계가 달라 그나마 쉽게 가르쳤는데, 여진인은 그게 아님을 귀화교육당의 보고를 들어 다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흠.”

“그건 그렇다만...”

“북정원정군의 전투보고서를 보셨겠지만, 중국인, 몽골인 포로가 무려 6만 가까이 조선으로 오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귀화하는 여진인은 다 셀 수도 없습니다. 그들을 지금처럼 교육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

다들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을 했기에,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게, 동아시아는 죄다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지 않나.

쓰는 글자는 같거나 비슷한 한자인데, 이걸 읽는 방법은 제각각이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한자와 조선판 한자인 이두와 향찰을 쓰고 조선말로 읽었고, 일본의 경우에도 한자와 일본판 한자인 초기형 가타카나를 쓰면서 일본말로 읽었다.

몽골과 여진은 고유문자가 있는데도 쓰는 사람이 거의 없고, 오히려 한자를 쓰고 자기들 말로 읽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듣고, 말하기는 어떻게든 손발을 써가며 가르칠 순 있어도,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웠다.

교보재가 없으니 알아서 공부할 수 없고, 항상 선생 비슷한 사람이 붙어서 가르쳐야 하는데... 이 많은 인원을 어떻게 다 감당한단 말인가.

귀화교육당에서 괜히 항왜 출신과 동북면 여진출신을 끌어오는 게 아니고, 괜히 중국어를 하는 고려인을 밑에 두고 부리는 게 아니다.

“그렇게 큰 사업을 하는데 허투루 할 수 없는 일. 허나 지금 사정이 여의치 않나.”

“이렇게 큰 사업인데, 지금 준비하지 않으면 대체 언제 할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미룰 생각이십니까. 이번에만 귀화하고, 앞으로는 귀화인들이 줄어들 거라 보십니까? 상왕전하와 전하의 뜻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정인지가 건방지게 태종과 세종을 걸고넘어지자, 대신들은 눈을 살벌하게 부라렸지만...

세종이 잠자코 있는 터라, 눈으로만 욕을 날려댔다.

“또한 전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조선의 제자백가시대라 할 만큼 여러 학문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

“사대부나 호족이 아닌, 민간의 백성들이 품고 있을 기술과 지식이 얼마나 되는지 측량조차 불가능한데... 어쩌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지도 모를 지식을 모두 포기하자는 말씀입니까.”

“그건 맞는 말이군.”

정인지가 또 다시 세종을 걸고 넘어졌지만, 오히려 세종이 동조를 표하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이건 이미 배봉마을과 협업하면서 뼈저리게 경험했으니까.

조선 백성들 중에선 까막눈도 적지 않겠지만, 어렴풋이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다만 모든 글자를 완벽히 알지 못해서, 몇몇 단어를 가지고 문맥을 유추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지.

문제는 독해보다 쓰기가 몇 배는 어려운 법.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순 있어도,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백성은 극소수라는 점이다.

이래서야 지식과 기술의 전승이 쉽게 될 리가 있나. 괜히 도제제도가 생긴 게 아니지.

“그리고 의주와 호주에서 귀화하는 여진인이 의문을 품고 있는 걸 알고 계십니까?”

“...?”

“그들이 목청을 높여 말하진 않지만, “여긴 조선인데, 왜 중국문자를 쓰지? 아직도 중국의 속국인가? 명나라는 망했잖아?”라는 소문이 적잖게 흘러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게 정녕 옳은 일입니까!”

정인지가 뼈를 후벼파자 대신들은 물론이거니와, 세종도 살짝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어딜 건방지게 여진인이 망한 명나라를 들먹여? 하지만 현실은 현실 아니냐. 다들 할 말이 없어 얼굴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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