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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소드 마스터-134화 (134/538)

134. 챕터23. 정리하다 (2)

지금 역사에선. 원래 역사에서 최만리 등이 주장한 반대논리는 하나도 통하지 않았고, 애초에 주장하는 이도 없었다.

원래 역사보다 수십년은 빠르게 한글문제가 논의된 것도 있지만, 기본전제가 달라지지 않았나.

명이 망하고 천명은 실종됐고, 사대주의,중화사상은 쪼개졌고, 반대급부로 자주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새나라를 만들려면 새문자가 필요하지 않나?”라는 의견이 튀어나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다만 정인지의 주장은 유학에 기초한 반대명분보다, 오히려 더 극복하기 힘든 현실적인 반대이유에 부딪쳤다.

“조선문자? 좋지. 그런데 지금 보면 몰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얼마나 많은 관리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를 일에 붙잡혀 있자고? 그냥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그 때하면 안될까?” 라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그래서 정인지와 대소신료들은 쳇바퀴가 돌 듯,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반복해 왔던 거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반드시 해야 될 사정이 생겼고, 관리 충원문제도 해결할 수 있으니까.

“이토록 지속적으로 주장해왔으니, 준비는 되어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세종의 물음에, 정인지는 허풍이 아니라 진심을 담아 소리쳤다.

연오랑이 지난 세월동안 박박 긁어모은 어문학, 음운학音韻學계열의 고서가 몇점 인가.

배봉마을의 장서각엔 고려는 물론 삼국시대의 고서와 명나라 시절에 저술된 서책, 원나라 시절에 어디서 흘러온 지도 모를 서역 고서조차 있다.

여기에 추가로, 연오랑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현대 한글의 문법과 한글 형태 그 자체에 대한 힌트를 열심히 남겨 놨지.

앞으로 만들어질 조선문자가 훈민정음일지, 현대한글이 될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밑그림은 이미 그려놨으니 인원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조선문자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늦으면 늦을수록 앞으로 더욱 힘들어진다...”

세종은 손가락으로 작게 탁자를 두들기며 생각에 잠겼고, 모든 신료들은 그의 입에 집중했다.

“맞는 말이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세종은, 쾅. 탁자를 거칠게 내리치며 목청을 높였다.

“들어라. 과인은 여진인을 복속시키는 걸 넘어서 완전한 조선인으로 만들 것이고, 북방의 고토를 반드시 되찾을 것이다. 이는 과인과 상왕전하의 평생염원이니, 대소신료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위엄찬 목소리에, 모두는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저 북방의 고토가 어디까지일지 모르겠다만, 적진 않을 것 아닌가. 신료들의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더불어 “완전한 조선인”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순 없지만, 적어도 지금과는 뭔가 다를 거라는 것도 느꼈다.

그간 없던 조선문자와 이를 익힌 조선인.

이는 이미 멀어진 중국에게서, 더욱더 떨어지겠다는 선언처럼 들렸으니까.

“이에 반대하는 의견과 이를 방해하는 의견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

“그러니 똑같은 논의는 이제 그만하고 결정내리겠다. 개선식에 맞춰 치러질 소과,잡과별시에, 조선문자를 만들 어문학 관리도 함께 뽑는다. 수는... 오십 정도면 되겠지. 이조와 예조는 그에 맞춰 준비하도록.”

“받들겠습니다.”

“알겠사옵니다.”

이조판서 허지가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대소신료들 모두 냉큼 고개를 숙였다.

다들 머릿속이 복잡한 모습이 표정으로 드러났지만, 애써 고개를 숙여 숨겼다. 분명... 일거리가 더 늘었다고 푸념하는 이들이 한 가득이니까.

회의가 파하자 대소신료들이 모두 회의장을 떠났지만, 어째 세종과 맹사성만 자리에 남아 의자를 덥히고 있었다.

맹사성이 세종을 따로 청했기 때문.

“...?”

‘무슨 일로 따로 불렀냐?’라고 묻듯 바라보자, 맹사성은 귀퉁이에 서 있는 사관을 힐끔 살피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험이 모두 마무리 되었고, 이제 접종만 남았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시겠습니까?”

“드디어...!”

그의 말에 세종은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심장이 빨리 뛰었고, 흡사 빼앗듯이 맹사성이 내민 보고서를 낚아챘다.

무미건조한 보고서는 표와 약간의 글자와 숫자 밖에 없었지만, 세종은 이제 익숙해진 아라비아 숫자를 주저 없이 살폈다.

배봉마을에서 쓰기 시작한 아라비아 숫자는 이미 조정에 흘러들어온 지 오래. 지금 조선은 원래 역사의 조선처럼 깐깐하게 원류를 따지는 나라가 아니지 않나.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보다 효율적인 숫자체계를 거부할 리가 없지.

나아가 유학과 원류 따윈 신경도 안 쓰는 민간에선, 이미 저잣거리의 아이들조차 아라비아 숫자에 익숙해졌다.

누가 봐도 한자에 비해서 익히기 쉬웠으니까. 놀이삼아 끄적거리면서 놀기에도 좋고.

“여기. 용연군 대감의 실험관찰서입니다. 비교해 보시지요.”

“...”

세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얇지만 그 내용만큼은 천금보다 무거운 보고서를 세심하게 읽어 내려갔다.

연오랑이 종두법에 대해 알린 게 벌써 몇해전이다.

허나 아무리 기상천외한 일을 마구 벌인 연오랑이라 한들, 세종과 태종의 그의 말을 덥석 물고 바로 시행할 리가 있나.

세종은 그 똑똑한 머리를 이용해 면밀히 분석하면서, 이 일의 책임자로 맹사성을 임명했다.

무려 마마를 예방하는 일인데, 이게 소문이라도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누구도 건들기 힘든 인사가, 남몰래 조용히 진행하는 게 당연한 일. 의정부가 찬밥이 되고 난 후, 할 일이 없어진 맹사성이 제격이지.

하지만 연오랑이 나름 준비를 해놨어도, 현실의 문제에 발목이 잡혔다.

사형수에게 종두법을 시행하는 것 까진 좋은데, 효과가 있는지 실제로 확인하는 일이 쉽지 않았던 것.

마마라는 전염병이 맹사성이 원한다고 바로 발생하는 게 아니잖나. 실험하겠다고 일부러 전파시키는 건 미친 짓이고.

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마마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리면, 재깍 접종한 사형수를 데리고 이동. 전염병 환자 곁에 사형수를 던져놓고 징후를 열심히 파악했다.

10할의 확신을 얻을 때까지 이 과정을 연거푸 반복하다보니, 어느덧 2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지.

“이걸로... 마마를 예방할 수 있는 게 정녕 확실한 건가.”

“예. 적어도 전의감典醫監, 제생원濟生院, 혜민국惠民局의 의원들은 그리 판단하고 있습니다. 의원들조차 모두 접종받고 역병에 걸린 마을에 체류했으나, 마마에 걸린 이는 없었습니다.”

“장하도다. 내 반드시 상을 내리겠다.”

“꺽...”

너무 놀란 이야기를 들어서 일까?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고 있던 사관이 세필을 떨어뜨리며 딸꾹질을 해댔다.

“죄... 죄송합니다.”

사관은 냉큼 세필을 주워들었지만, 이미 눈동자는 동요를 감추지 못하고 연신 춤을 췄다.

불치병이나 다름없는 마마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이 흘러나왔는데, 평정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지.

“사관은 이 일을 불문에 붙이도록. 까닭은 잘 알터, 소문이 퍼지면 대업을 망칠 수 있다.”

“예...”

“때가 아니면... 경사라고 널리 알리는 것이, 항상 좋은 게 아님을 명심하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사관은 고개를 마구 끄덕이며 목청을 떨었고, 날카롭게 노려보며 경고를 날려준 세종은 다시 맹사성에게 집중했다.

“허면, 그대가 보기엔 어디가 좋을 것 같나?”

“아무래도 강화도가 좋지 않겠습니까?”

“강화라...”

세종은 보고서에 나온 후보지를 살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대규모 접종 아닌가.

소식이 전파되지 않을뿐더러, 외부와 한동안 통교하지 못할 지역이 낙점되기 마련. 더불어 그 고립된 지역에 인원이 충분해야 했다.

이런저런 조건을 따져봤을 때, 강화도가 제격이다.

“우두에 걸린 소는 충분하고?”

“예. 그간 꾸준히 늘려왔으니, 문제없습니다.”

“음...”

이 일을 위해서 왕실전용목장에서 일부러 우두를 전염시키지 않았나.

뭣도 모르는 신료들은, 맹사성이 왜 목장일을 감독하는지 의아해 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실 숨기는 것 자체가 고생이었지.

“하지만 이 예방법은 전례가 없는 일이니,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일지 의문이다.”

우두의 고름을 약재로 쓰는 일이니, 이걸 보고 누가 쉽게 맞으려 하겠나. 세종조차 처방을 모두 아는데도, 솔직히 “이게 맞나?”싶었으니까.

하지만 맹사성과 의원들은 나름 해답을 찾아냈다.

어찌 보면 정답이고 어찌 보면 꼼수다.

“저희도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는데...”

“...?”

“굳이 상세히 알려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저 왕실비방이라 하면, 그 누가 의심하고 거부하겠습니까.”

“...”

여러 내외적인 가시적인 성과로, 왕실에 대한 충성과 믿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진 상황 아닌가.

백성들을 위해서 마마의 예방책을 알아냈다고 하면, 모두가 주상의 은혜에 감격해 노래를 부를 거다.

“나중에는 알려지게 되겠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접종을 끝마치고 효과가 나올 텐데, 소의 고름이든 말의 고름이든 누가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종두 말고도 기상천외한 약재가 많지 않습니까.”

“허나... 그리 쉽게 되진 않을 터다. 용연군도 이에 대해서 말하더군. 분명히 박수무당들이 백성을 선동하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음...”

맹사성은 연오랑의 이름이 나오자, 쉽게 넘기지 못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오랑이 미친놈에 가까운 괴짜지만, 똑똑한 괴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나.

분명 뭔가 걸리는 게 있으니, 무려 세종에게 직접 이야기를 꺼냈을 거다.

‘틀린 말이 아니긴 한데...’

마마는 불치병이나 마찬가지고, 한번 터졌다고 하면 난리가 나는 역병 아닌가.

무려 왕실조차도 궁궐에 마마에 걸린 환자가 나타나면, 격리시키고 박수무당을 불러 굿을 하곤 했다. 기도 말곤 답이 없으니까.

민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니, 어찌 보면 이번 일이 박수무당의 주요 밥줄을 끊는 대사건이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맹사성은 세종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일전의 예가 있는데, 감히 그런 감언이설을 늘어놓는 박수무당이 있겠습니까?”

“...”

세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쓴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낼 만큼 좋은 예가 아니었으니까.

운석핵꿀밤으로 중국이 박살나자, 조선은 자주화를 외치며 일어섰다.

“망한 중국을 우리가 왜 따르냐?”라며 상국이자, 천조질서, 중국의 천하관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천하관을 만들겠다는 거지. 고려 때도 이와 유사한 다원적 천하관을 따르곤 했으니까.

문제는... 지방에서도 같은 논리를 내세워,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조정을 왜 따르냐? 내가 천명을 받은 천하의 주인일지도 모르잖아?”라며 반란을 일으킨 이들이 있었다는 거다.

이 중에는 양반사대부도, 지방호족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근본도 없는 사교집단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물론 불교계는 계속 두들겨 맞고 있어서, 요승妖僧이 아닌 박수무당이 주동자였지.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반란이 크게 호응을 얻었을 리가 있나.

몇개의 현조차도 넘어서지 못하고 태종에게 다 작살났다.

곁다리지만... 태종은 이 반란사건들 이후로, 지방호족 뿐만 아니라 양반사대부조차 찍어 누를 마음을 품었지.

어쨌든. 안 그래도 유학을 국학으로 삼은 조선이 등장한 후로 박수부당은 홀대 받아왔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싸잡아서 한바탕 푸닥거리를 당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민간에서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지.

“시간이 꽤 흘러, 그 때의 일을 잊어버린 이들이 적지 않더군. 얼마 전에도 용연군이 비슷한 일을 당하지 않았나.”

“...”

쓴웃음을 짓는 세종을 보며, 맹사성은 ‘그건 좋은 예시가 아닌데...’라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때 연오랑이 한 짓 때문에, 조정에서 잠깐 난리가 났으니까.

까닭인 즉. 착호군이 산을 휩쓸고 다닐 때.

박수무당들 중에서 “여긴 산신이 머무는 곳이다!” “여긴 영산인데 어찌 잡인이 함부로 넘보는가!” 등의 헛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을 연오랑이 어떻게 했겠는가.

“잡신이 들린 몸에는 칼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 궁금했었다!”라며, 사정없이 몸에 숨구멍을 내줬지.

그 정신 나간 짓에, 태종마저도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을 정도였다.

“그러니 용연군은 이번 기회에 박수무당도 정리하자고 하더군.”

“...!”

‘설마 또?’

맹사성은 머릿속에 떠오른 끔찍한 생각에, 자기도 모르게 눈이 번쩍 뜨였다.

연오랑 성격이라면, 분명히 또 칼을 앞세워 쓸어버릴 것 아닌가.

“그간 숫하게 제사를 지내면서 보았으나, 솔직히 박수무당이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고, 재량할 수도 없다. 안 그런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접신을 말하고 있는데, 맹사성이라고 이에 대해서 알 리가 있나.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

“지금 조선에는 온갖 학문이 피어나고 있는데, 박수무당이라고 다를 게 있는가? 각 지방에는 토속적인 세습박수무당이 적지 않으니, 그들을 체계화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지 않나? 더불어 지방호족이나 사대부집안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도 적지 않지.”

“...”

‘이건...!’

맹사성은 점입가경으로 나아가는 세종의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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