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챕터23. 정리하다 (4)
그 시절 태종은 부마를 선택함에 있어 고심 중이었다.
왕권을 다지기 위해 외척들을 사정없이 썰어대고 있을 때니, 어떤 집안이 왕실과 혼인하고 싶겠나.
반대로 태종 또한 왕권에 영향을 줄만한 권세 높은 집안과 혼인으로 엮일 생각이 없었다.
헌데, 그런 태종의 입맛에 딱 맞는 인물이 있었다.
조선팔도의 그 어떤 집안보다 명문가인데, 조정에 영향력은커녕 일가친척하나 없는 인물.
바로 연씨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인 연오랑이지.
허나 주요관심대상인 연오랑이라서 문제가 생겼다.
그 시절엔 연오랑이 하동에 머물며, 기업을 만드는 등의 온갖 요상한 짓을 하고 있을 때 아닌가.
태종은 조선을 바꿀지도 모르는 연오랑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녀석을 부마로 만들어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게, 이득인지 실책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결론은 일단 지켜보는 것.
그래서 정선공주의 혼사는 유야무야 되어 미뤄지고 말았다.
태종 입장에선 공주의 혼사보다, 연오랑이 하동에서 벌이는 짓이 더 중요했으니까. 더불어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니, 공주를 다른 사람과 혼인시키는 건 왠지 아까웠고.
그래도 무려 공주의 혼사인데 이렇게 쉽게 식을까 싶지만... 연오랑이 활개 치기 전에도 그 시절 조정은 난장판이었잖아?
양녕대군은 시도 때도 없이 사고치고 있고, 은근슬쩍 세종이 물망에 오르내리고, 태종은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을 위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고, 운석핵꿀밤 이후로 조정은 단 한번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던 조정대신들 입장에선, 혼사문제는 굳이 건드려봐야 피곤해질 사안이었던 거지.
그렇게 정선공주는 모두의 관심에서 멀어져 조용히 지내게 됐고, 이윽고 혼기를 놓쳐버리자 더욱더 관심이 줄었다.
냉정한 말이지만, 태종의 자식은 어차피 많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대마도정벌 이후 연오랑이 수면 위로 올라오고, 착호군에 속해 태종과 함께 돌아다니자 어째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태종의 서자인 공녕군 이인이 괜히 연오랑과 형님아우님하면서, 허물없이 지내는 게 아니었던 거지.
여기까진 태종과 조정대신들의 입장이고, 정선공주 입장에선 어떨까?
어릴 때는 넘어가고, 어느 정도 사리분별할 나이가 됐을 때.
솔직히 말해서 왕실 집안 꼴이 개판이었다.
부모님은 시도 때도 없이 부부싸움을 하기일수고, 의지할 언니들은 진작 혼인해서 궁을 떠났다.
큰오빠 양녕은 그 시절 세자인 동시에 개망나니라서 친해지기도 힘들고, 둘째오빠인 효령은 사람은 좋은데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같이 놀 시간도 없다.
셋째오빠인 세종이 그나마 놀아줬는데... 세종이 혼인하고 사가로 나가게 되자 그것도 쉽지 않았고, 세자가 되면서 얼굴보기가 더 힘들어졌지.
배다른 형제자매가 있긴 하지만, 원경왕후의 눈치를 봐야하는데 친해질 수나 있을까.
자의반타의반으로, 눈치만 잔뜩 늘은 정선공주는 혼자놀기의 달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시간은 흘러갔고, 이내 공주도 홀로 설만한 나이가 되자... 이때부터 혼자놀기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
이 시절이 딱. 세종이 칼질을 익히고 궁궐에 부인운동법을 비롯한 운동법이 유행하던 시절이니... 정선공주도 보다 활동적인 사람으로 변해갔다.
승마도 이때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이내 푹 빠져버렸고.
더불어 배봉마을이 자리 잡고, 한성에 그간 없던 여러 요망한 기물,서적,기술,문화등을 은근슬쩍 전파하던 시절이라서... 어차피 할 것도 없는 공주는 신문물에 재깍 관심을 가지고 빠져들었다.
이런저런 옛 생각을 하는 동안 이내 북청별궁에 도착했으나, 공주는 여기에 없었다.
말을 타러 배봉목장으로 갔다고 하니, 세종 다시 말머리를 돌려 목장으로 향했는데...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광경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
‘이 모든 게 아바마마와 나의 잘못 아닌가.’
저편에 배봉연구원과 함께 있는 정선공주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왕실의 예법과 규칙을 뜯어 고치는 중이고, 복제服制 또한 마찬가지라서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지만... 저건 조금 너무 나간 것 아닌가.
공주는 말군襪裙과 치마 대신 신군복과 비슷한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올라오는 기병군화를 신고 있었다.
물론 왕실에서 만든 물건이니, 군용품과 달리 색과 모양이 화려하긴 하다만... 저걸 왜 신고 있나.
상의는 그나마 평범한데, 머리칼은 대충 하나로 묶어서 꽁지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차림새만 봐선, 누가 공주라고 생각할까. 설화에서나 나올 법한 여장군이 따로 없다.
‘하긴 겉보기엔 틀리지 않군.’
세종은 이걸 좋게 생각해야 할지, 나쁘게 봐야할지 몰라서 애써 속으로 삼켰다.
풍채 좋은 태조의 피를 이어받았고, 조혼으로 일찍 애를 낳지도 않았고, 왕실에서 자라서 이것저것 잘 먹었고, 어려서부터 운동까지 열심히 했다.
모든 조건을 다 갖췄으니 쑥쑥 자랄 수밖에.
여자치고는 꽤 큰 키를 자랑하는 터라, 옆에 있는 연구원들과 엇비슷해 보였다.
기병군화에 굽이 달려 있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어쨌든 또래보다 큰 건 분명하지.
세종은 ‘쟤들 저기서 뭐하냐?’ 싶어서, 모두를 놔두고 홀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래서? 이게 이번에 새로 만들고 있는 물건이란 말이지?”
“예. 공주님. 완성만 된다면, 앞으로 직조과정이 한층 더 빨라질 겁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이런 걸 가지고. 하하하!”
조신함 따위는 진작 내다 버렸는지, 호탕하게 웃는 공주의 목소리가 세종의 귓가를 때렸다.
그들 앞에는 배를 까놓고 털이 밀리고 있는 양들이 몇몇 있었고, 그 옆에는 물레와 베틀 비슷하게 생긴 기구가 놓여 있었다.
연구원들이 열심히 손잡이를 돌리자 물레에 달려 있는 톱니바퀴와 축이 빠르게 돌기 시작했고, 한올한올 낱개로 풀려 있던 얇은 실이 하나로 뭉쳐서 길게 엮이는 게 보였다.
“오호라. 이게 이번에 만들고 있다는 물건인가?”
이야기 삼매경에 빠져 있던 이들은 세종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고, 난데없이 터진 물음에 다들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공주도 마찬가지.
뜬금없이 평복으로 나타난 세종을 보며 찔리는 게 있는지, 냉큼 고개를 숙이며 괜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게 아닌가.
허나 세종은 호기심을 참지 못한 탓일까? 공주에게 잔소리 하는 것도 잊고, 이 생경한 기물에 빠져들었다.
“말해보라. 이게 이번에 만들고 있는 물건인가? 털실을 보다 빠르게 짤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라고 보고는 받았다.”
“예. 그게...”
연구원들은 서로 옆구리를 찔러가며 떠밀었고,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인이 공주의 눈치를 슬쩍 살피고선 설명을 이어갔다.
조선에도 모직물은 존재했고, 이미 고려 때부터 나름 널리 퍼졌었다.
천과 실을 짜는 방법과 거칠고 부드러운 정도를 나눠서, 갈褐,계罽,융絨,구유氍毹,탑등毾㲪,담毯. 등으로 분류해서 구분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지.
다만 의복으로서 널리 퍼진 것 보다 관모, 깔개, 담요, 벽걸이 등으로 자주 애용됐다. 조선의 처지로는 대량 생산이 힘들고, 양과 가축을 많이 키우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역사에선 달라지지 않았나.
경기도 동부와 강원도에 양떼목장이 미친 듯이 생겨나고 있는데, 설마 양고기나 먹으려고 양을 그렇게 수입했을까.
연오랑은 조선이 미비했던 모직산업을 키우려고 작정하고 있었고, 이곳 연구소에서는 기존의 물레나 베틀과 같은 방적기, 직조기를 개량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세종과 태종은 안 그래도 비단,면,모시와 같은 면직물 사업을 키우는 게 조선의 과업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기에 모직물이 추가되는 걸 마다할 리가 있나.
당연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나름 응원하고 있었지.
‘흠... 용연군의 말이 틀린 건 아니군. 확실히 모직이 면직보다 나은 면도 있어.’
세종은 설명을 들으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려 비교를 이어갔다.
정치적인 문제는 제쳐두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지금 조선이 열심히 체질개선을 하려는 까닭이 무엇인가.
중국에 손을 벌리지 않아도, 내수시장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산업생태계를 구축하려는 것.
보다 나은 품질의 중국산 물품에 대항해, 경쟁력을 갖춘 조선산 물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게 바로 기업을 만들면서, 조선을 뒤집어엎을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이유이자 목표다.
명이 망하면서 공무역의 시대가 종말을 맞이하고 사무역의 시대가 열렸으니, 어찌됐건 품질과 가격으로 승부를 봐야하니까. 뒤쳐지면 중국산 물품에 잠식당한다.
그런 측면에서, 모직산업은 나름 경쟁력과 성장가능성이 보였다. 지금 당장의 조선은 모직산업의 불모지와 크게 다를 게 없으니까.
물론 원래 역사에서 그 대단했던 대영제국의 모직물조차, 중국의 면직물 시장을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막대한 손실만 봤지만... 그건 몇백년 후의 이야기 아니냐.
아직 조선 내지에 시장이 형성되지도 않았는데, 중국에 진출하려는 건 시기상조지.
일단 일반 백성도 양털로 만든 옷을 쉽게 입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내지에 모직산업을 뿌리 내리는 게 급선무였다.
더불어 모직산업에 집중하려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대들이 보기에 어떤가. 확실히 북방에서 쓰임이 많을 것 같은가? 기존의 면포와 비교하면?”
“음... 이런저런 수고로움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보온과 편의의 측면에 있어서는 모직이 낫습니다. 문제라면 가격인데...”
“역시.”
이미 이 내용에 관해 조정대신들과 논의한 바가 있었는데...
결론은 요동과 여진족에게 영향력을 투사함에 있어서, 모직물이 나름 효과가 있을 거라는 추측했다.
추운 곳에선 면직물보단 모직물이 낫고, 솜옷이 따뜻하긴 하지만 가격과 무게가 만만치 않으니까.
빈한한 여진족을 꼬드기려면, 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신문물이 제격이지.
헌데. 실무자들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로 봐선, 확실히 효과는 있을 것 같다.
가격 문제는 양떼목장이 계속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고.
‘만약 면직과 모직이 계속 이렇게 성장하면...! 생각할 문제가 많아지겠군.’
세종은 조선이 부강해지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가... 불연 듯 이런 생각이 들어, 흠칫.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치솟는 걸 느꼈다.
지금 조선에서 면포가 화폐대용으로 쓰이는 건, 그 희소성과 범용성 때문 아닌가.
만약 이대로 쭉 생산량이 미친 듯이 치솟기 시작하면, 그 특성이 모두 사라지게 될 터... 훗날에는 화폐의 역할을 못할 때가 찾아올 거다.
그럼 남은 건 쌀인데...
‘허나 양전사업과 농지정리사업이 마무리 되면, 지금의 몇배는 되는 소출을 거둘 수 있지 않은가.’
세종은 아찔한 상상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계획대로만 된다면, 조선 내지에 쌀이 넘쳐나는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르는데... 그럼 정말로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다.
어쩌면. 그간 고려와 조선에서 꾸준히 시도했다가 실패만 거듭했던, 화폐개혁이 진짜로 필요해질지도 모르니까.
머릿속이 복잡해져서 세종이 침묵에 잠겨 있자, 오히려 정선공주가 안절부절 못해서 몸을 비틀어댔다.
‘왜 잔소리를 안 하지?’
공주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살포시 미간을 찌푸렸다.
세종은 안쓰러운 마음에, 어릴 적부터 정선공주를 나름 귀여워하지 않았나.
반대로 정선공주 또한 나름 세종을 편하게 대하는 편이었고, 그건 세종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예법과 예식을 지키는 건 당연한 거고, 마음이 그렇다는 거지.
아무튼. 친한 만큼, 다른 누구보다도 세종은 정선공주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마다하지 않았지.
그런 경험으로 비춰보아 지금은 잔소리를 할 순간인데... 입을 다물고 있으니, 괜히 더 불안할 수밖에.
“...”
잠깐의 침묵이 자리 잡고, 모두가 불편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자... 세종은 굳었던 표정을 풀며 다시 물음을 이어갔다.
“보아하니 양들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차이가 있나?”
“예! 예! 그건...”
오히려 말을 걸어줘서 감사하다는 듯, 책임자는 냉큼 입을 놀렸다.
“여기 있는 건 요동에서 온 양이고, 이건 여진이, 이건 중국강북, 그리고 이건 북원 너머의 서역에서 온 양입니다.”
“오호. 서역에서?”
세종도 보고만 들었지,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 아닌가. 다시금 호기심이 동해, 서역에서 왔다는 양을 유심히 살폈다.
크기는 엇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르고, 털색과 생김새도 약간씩 차이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역시 양털을 뽑아내기 위해서 개량한 서역품종이, 보다 복슬복슬하고 튼실한 털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특징이 많이 다른가?”
“음... 크게 다른 건 없고, 그나마 서역품종이 양털이 빠르고 길게 자라는 편입니다. 북원품종은 보다 튼튼한 편이고, 중국품종은 더위에 더 잘 적응하는 듯 보이는데... 다들 금방 비슷해질 겁니다.”
“하긴.”
세종도 배봉연구소가 여기서 뭘 하는지 익히 아는 터라,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은 우마의 품종을 개량해 왔는데, 지금 역사라고 다를까.
시대가 시대인터라 품종개량이라고 해봐야, 보다 덩치 크고 튼튼한 녀석의 씨를 받아 새끼를 불리는 방식 아닌가.
이건 모든 가축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이었고, 배봉연구소의 목장에선 온갖 가축을 다 개량하고 있었다.
이 양들도 마찬가지. 품종을 마구 뒤섞어 교배를 시키면, 출신이 어디든 다들 비슷하게 변해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