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챕터23. 정리하다 (5)
설명을 들으며 세종은 양들과 새로 만든 물레와 베틀을 살펴봤고, 드디어 공주에게 눈을 맞췄다.
“여기서 무엇하고 있던 게냐.”
“...”
눈치백단인 정선공주 아니냐.
그녀는 세종이 화가 난 게 아닌 걸 알고서, 슬쩍 눈치를 주며 옆에 있는 책임자를 툭툭 건드렸다.
괜히 중간에 낀 연구원은 난감한 기색을 애써 숨기다가, 결국 쿡쿡 찌르는 공주의 손길을 버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여기... 공주님께서 보완하신 건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라, 연구원은 기하학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문서를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
‘음... 이쪽에 재능이 있는 건가.’
세종은 “나 잘했지?”라고 자랑하듯 히죽 웃고 있는 정선공주와 낯선 그림이 그려진 문서를 번갈아 살펴봤다.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설계도 비슷한 무언가였고, 특히나 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톱니바퀴는 방금 선보였던 기물의 부품과 닮아 있었다.
‘배봉마을에 자주 들린다곤 들었다만...’
세종도 바쁘니까. 공주가 뭐하고 다니는지 어렴풋이 보고만 들었지, 모든 걸 세세하게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신문물에 관심이 지대하다는 건 들었지만, 이렇게 도움을 줄 정도로 박식한 줄은 몰랐다.
“어디서 배웠느냐?”
“배봉마을의 장서각에 가니, 참고할만한 서적이 있었습니다. 견본품도 많이 있고...”
“음...”
톱니바퀴를 이용한 동력분배장치. 원시적인 형태의 기어는 이미 쓰이고 있는 물건 아니냐. 수차에도 들어가고, 이젠 공사현장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거중기와 녹로에도 들어간다.
원래 역사에서도 이런 지식기술은 존재했으나, 중시하지 않아 학자들의 유희나 실무특기로 삼았을 따름.
허나 지금 역사에선 이 또한 들불처럼 타오르는 전문화와 특성화에 맞물려 명확한 실체가 만들어졌다.
다만 세종조차도 벌써 이러한 기술,지식이 무려 서책으로 만들어져서, 장서각에 구비되어 있는 줄은 몰랐지.
“...”
세종은 “왜 난 그걸 몰랐지?”라고 묻듯. 연구원들을 쓱 훑어봤고, 다들 괜히 제발이 저려서 몸을 움츠렸다. 그러면서도 힐끔힐끔 공주와 세종을 곁눈질 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지고 있다.
“...”
말하지 않아도, 세종의 귀에 이들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 했다.
분명 ‘아니. 왕이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고 그러냐. 다 밑의 실무자들이 알아서 하는 일이니, 일이 잘 돌아가는지 확인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다.
“수고했네. 계속 정진하게.”
“감사합니다!” “전하!”
가시방석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오자. 연구원들은 냉큼 인사를 하고선, 비 맞은 개미떼마냥 후다닥 몸을 날렸다.
반대로 공주는 올게 왔다는 심정으로, 더욱 조신한척 연기하며 세종의 기색을 계속 살펴댔다.
“잠시 걷자구나.”
“예.”
둘은 호종인원을 모두 떼어놓고, 작지만 넓게 퍼져 있는 초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흡사 변명하듯 공주가 먼저 선공을 날렸다.
“공야사攻冶司의 장인을 함부로 부리진 않았습니다.”
“안다.”
공야사는 각종 수공업 제품을 관장하는 부서로, 배봉연구소 및 우후죽순 생겨나는 기업과 맞물려 미친 듯이 바쁜 곳이다.
공조의 속아문 소속 잡직관인을 부렸으면, 세종에게 당연히 보고가 들어갔을 터...
“허면, 배봉연구원들이 만든 것이냐?”
“그건 아니고... 사실 궁녀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허...”
세종은 기가 차서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어려서부터 눈칫밥을 엄청 먹은 공주는 결코 어리석지 않았고, 자신의 애매모호한 처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조정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면서,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놀려면...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그냥 자기 궁에서 처리하면 되는 일.
궁녀들 사이에서 소문이야 조금 퍼지겠지만, 이게 뭐 잘못된 것도 아니지 않나.
나아가 오랜 세월 왕따 아닌 왕따를 당하면서, 궁녀들도 정선공주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해서 공주의 혼자놀기에 맞춰서, 공주에게 딸린 궁녀들도 온갖 잡기술을 익히게 됐고 그 중에는 목공을 배운 이가 당연히 있었다.
“혹여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음... 그건 아니다.”
풀 죽은 척 연기하는 정선공주를 보며, 세종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속이 훤히 보여서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 시절엔 아직 고려의 유산이 남아 있어서, 여성의 권위가 조선중후기만큼 땅으로 떨어진 시절이 아니었다.
더불어 운석핵꿀밤으로 인해 성리학적인 계급,사회논리와 가부장적인 권위질서의 확산과 전파가 멈춰버린 지금.
여성의 권위는 원래 역사보다도 높았다.
아직은 고려 때의 귀족주의 풍속이 남아 있는 시대 아니냐.
조선중후기처럼 시집가면, 친정과 완전히 연을 끊어버리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시집을 가더라도 딸은 여전히 친정집안의 사람에 속했기에, 남편집안에서도 며느리를 함부로 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태조, 태종시절에 상속문제를 가지고, 괜히 나라 전체가 시끌시끌했던 게 아니다.
며느리의 권위가 높으니 친가와 외가가 다 섞여서, 집안싸움을 넘어서 가문과 가문 싸움으로 번진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반대로 데릴사위나 처가살이를 하는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
또한 원래 역사의 조선중후기에도 칠거지약, 삼종지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는데, 몇백년 이른 지금 역사에서 먹힐 리가 있나.
이쪽은 아예 “공자가 말한 칠거지약, 삼종지도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 아니냐?”라며 싸워대는 판국이다.
여성에 대한 규제가 이렇게 크지 않으니... 여성들이 밖을 나갈 때. 장옷 같은 걸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는 일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가 아니면 옷을 어떻게 입든 상관도 안했다.
물론 이 시대에도 얼굴을 가려주는 망사모자인 너울이 있지만, 이건 누가 강제하는 게 아니라 패션용품 비슷한 취급을 받았지.
공주가 괴상한 옷차림에 편한 복장을 할 수 있던 건, 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
세종은 공주가 여자라서가 아니라, 왕족으로서의 품위를 깎아먹는 것 같아서 혀를 찼던 거다.
더불어 가부장적인 권위질서가 널리 퍼지지 않은 것도, 지금 역사에선 굉장히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가부장적인 권위질서라는 건, 그냥 “남편 말을 잘 들어라.”라는 수준이 아니다.
이건 신분질서의 축소판이나 다름없으니까.
유학이 통치학문으로 활용되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분지배논리로 변질되어 갔다.
왕은 왕으로서, 사대부는 사대부로서, 양민은 양민으로서 할 일이 있으니, “위를 올려다보지 말고, 다들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일해라.”라는 거지.
이게 집안으로까지 전파되자, 가주는 왕으로, 장자나 장손은 세자로, 다른 혈족과 친족은 사대부나 양민쯤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선중후기쯤 가면. 직계혈족과 방계혈족을 꼼꼼히 따져서 서열을 정하고.
머리가 하얗게 선 노인이 아직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촌수가 높다는 이유로 “어르신. 어르신.”이러면서 꼼짝 못했던 거다.
허나 지금 역사에선 이러한 논리가 개별집안으로 퍼지질 못했으니... 집안의 no.1이 가주라 치면, no.2는 장자나 장손이 아니라 가주의 부인에 더 가까웠다.
이렇다보니 어지간히 먹고 살만한 집안에선, 신부수업 및 기초소양을 닦을 겸해서 딸에게 공부를 시키는 게 당연한 일.
다만 죽자고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어차피 관직에 오르지도 못하니 체면치례 겸 기본만 배우고 넘어가곤 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공주가 공부하는 것에 대해, 태종과 세종은 장려할망정 통제하진 않았었는데... 이 정도로 신문물과 신학문에 관심이 큰 줄은 미처 몰랐다.
‘내가 무심했구나.’
세종은 물끄러미 하늘을 보며, 괜히 자책했다.
냉정하게 말해서 정선공주를 챙길만한 사람은 그 자신밖에 없는데, 그간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뒷전으로 미뤘던 것 같으니까.
잠깐 반성의 시간을 갖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허나...’
하지만 정선공주가 신경 써야할 건, 다른 신료들의 시선이 아니라 연오랑 아닌가.
‘녀석이라면...?’
“과연 연오랑이 정선공주의 이러한 행각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을 떠올리자, 세종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세종조차도 연오랑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겠으니까.
“일전에 용연군과 만나봤을 터, 따로 전한 말이 있더냐?”
“예?”
뜬금없는 물음에 정선공주는 토끼마냥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행간을 읽고 베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괜히 부끄러운지,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답을 풀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놀라고 했습니다. 다만...”
“다만?”
“괜히 조정을 시끄럽게 해서 귀찮은 일을 만들지 말라곤 했지요.”
“허...”
과연 연오랑다운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어, 세종은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이 터졌다.
이 자식은 정말 뭔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착호군으로 활동하면서 태종과 연오랑은 이따금씩 한성에 들렸다갔고, 착호군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고 자리잡자 태종은 은근슬쩍 자신의 딸들을 연오랑에게 소개시켜줬다.
뭐. 당장 혼인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보험 삼아 밑밥을 깔아둔 거랄까?
연오랑은 태종의 많고 많은 여식들을 가볍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고, 당연히 정선공주와도 만남을 가졌다.
헌데 특이하게도 연오랑은 오히려, 버린 패로 생각했던 정선공주에게 그나마 관심을 갖는 게 아닌가.
태종은 표현하진 않았지만, 내심 속으로 박수를 쳤지.
하지만... 연오랑 입장에서 보라.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여자애들하고 혼인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건 결혼이 아니라, 딸내미 하나를 키우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
정선공주에게 관심을 가졌던 건, 그나마 정선공주가 제일 나이가 많아서였다.
그 후로 이따금씩 한성에 들릴 때마다 가벼운 만남을 가졌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공주 입장에선 퍽이나 만족스러운 만남이었다.
적어도 연오랑은 공주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려하는 편에 속했으니까.
“녀석 성격상, 그게 끝이 아닐 텐데...?”
세종이 슬쩍 미소를 품고 넌지시 찔러보자, 정선공주는 “이걸 말해도 되나 말아야 하나.”하는 표정을 짓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자긴 무식한 사람은 싫다고 하더군요. 새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꽉 막힌 유학자도 별로고...”
“...”
세종은 장난삼아 ‘설마 그게 날 말하는 거냐?’라는 표정을 지었고, 공주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몸으로 말했다.
“민가의 백성들마저도 먹고 살기 위해 배움을 구걸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데,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이들이 배움을 멀리하는 건,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말도 했습니다.”
“음...”
세종은 왠지 그럴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연오랑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저 뒤에는 “왕족이라면 더욱 모범을 보여야지.”라고 생각했을 거다.
녀석은 착호군, 원정군을 굴리면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지식과 기술을 뽑아내고, 반대로 주입시키는 걸 즐겨하지 않나.
태종에게 듣기론 착호군 초창기에, 말을 안 듣는 공녕군 이인을 비롯한 방계왕족과 명문가 자제들의 머리통마저 깨부셨다고 했다.
남들이 천시하는 육체노동과 잡학기술을 두들겨 패면서 억지로 배우게 시켰다고 했으니... 공주가 알아서 신학문에 관심을 가지면 연오랑은 좋아했겠지.
‘하긴... 생각해 보면, 퍽 잘 어울리는 한쌍 아닌가.’
세종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어, 슬쩍 거리를 벌려서 정선공주를 조심스럽게 위아래로 살폈다.
“...”
“...?”
공주는 “왜 그렇게 보냐?”라는 눈빛을 애써 감췄고, 세종은 티내지 않고 계속 생각을 이어갔다.
공주가 유독 키가 큰 게 흠이긴 하지만, 연오랑이 워낙 크니 티도 안날 거다.
연오랑이 열아홉, 정선공주가 열일곱.
비록 둘 다 혼기를 놓치긴 했지만 많이 늦은 것도 아니고, 나이차이도 얼마나지 않는다.
‘성격은...’
눈치백단인 정선공주라면 누굴 만나도 잘 적응할 테니, 연오랑이 문제인데... 이 녀석은 조금 괴짜긴 하지만 크게 문제없지 않나.
‘음... 생각해보니, 녀석에 대한 온갖 소문이 들리긴 했으나, 추문이나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는 없군.’
세종은 문뜩 이런 생각이 떠올라 살짝 당황했다.
똑똑한 미친놈. 괴짜라는 건 공론이긴 한데, 어째... 곰곰이 생각해보니 욕먹을 짓을 한 적이 없다.
녀석을 꺼려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녀석이 벌이는 괴상한 사건 때문에 그런 거지, 개인품성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술과 여자를 즐긴다는 이야기도 못 들어봤고, 딱히 축재를 한다거나 권력욕을 보이지도 않고, 당파黨派를 만들려는 움직임조차 없지 않나.
물론 용연현에서 자신의 기업을 열심히 키우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일에 있어서 조정에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도 없었고.
‘흠.’
당황스럽게도, 세종은 “이제 보니 꽤 괜찮은 신랑감이잖아?”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